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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9일 일요일

하이든 현악사중주 29번 Op. 33-5 Hob. III:41, 보로딘 현악사중주 2번, 차이콥스키: 현악사중주 1번

하이든: 현악사중주 29번 G장조 Op. 33-5 Hob. III:41

하이든은 1781년에 작곡한 현악사중주 6곡을 작품번호 33번으로 묶어 파벨 페트로비치 러시아 대공에게 헌정했다. 이에 따라 흔히 '러시아 사중주'라 불리는 Op. 33 연작 가운데 G장조로 된 제5번 사중주는 'How Do You Do'(반갑습니다) 사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별명은 1악장 시작 부분이 마치 당시 귀족들이 한쪽 발을 내밀고 다른 쪽 발을 뒤로하여 무릎을 굽히는 정중한 인사법을 연상시키는 것에서 유래했다. 음악적으로 이 음형은 곡을 끝맺을 때나 나올 법한 것이라는 점에서 18세기식 유머라 할 수 있는데, 현대 한국인이 약 250년 전 서양 유머에 굳이 웃을 필요는 없으며 그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같은 낡은 유머와 통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제1주제와 제2주제의 구분이 명확하고 발전부에서 주제가 확장된다. 다만, 재현부에서 제시부를 단순 반복하기보다 추가적인 '발전'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2악장은 느리고 우울한 단조 선율이 음악을 이끌어가며 마치 오페라 아리아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 등은 글루크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아리아를 인용 또는 표절한 것으로 본다. 3악장은 흔히 미뉴엣이 올 자리에 스케르초를 쓴 선구적인 사례라 할 수 있고, 4악장은 복잡하지 않은 변주곡 짜임새로 시칠리아풍 선율이 음악을 이끌어간다.

보로딘: 현악사중주 2번 D장조

보로딘이 아내에게 헌정한 곡으로, 일설에 따르면 아내와 만난 지 2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며 아내와의 추억을 음악에 담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영향이 뚜렷한 현악사중주 1번과 달리 이 작품은 1악장부터 매우 서정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발전부가 제시부의 반복에 가깝고, 그 대신 제2주제가 세 도막으로 확장된 것이 독특하다. 조성구조상 제2주제의 시작에 해당하는 선율은 제1주제와 그다지 뚜렷한 대조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제2주제 둘째 도막이 '진짜 제2주제'처럼 들린다.

2악장은 간소화된 소나타 형식으로, 발전부는 1악장과 마찬가지로 제시부의 반복에 가깝다. 가장 유명한 3악장은 달콤한 선율이 변주되던 끝에 '사랑의 2중창'을 연상시키는 돌림노래로 변하는 대목이 백미라 할 수 있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4악장은 바이올린이 묻고 비올라와 첼로가 답하는 듯한 짧은 도입부에 이어 빠른 음형으로 신나게 달리며 흥분을 더해 나가는 짜임새이다.

차이콥스키: 현악사중주 1번 D장조

차이콥스키는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탁월한 멜로디 메이커로 손꼽힌다. 문제는 이전 시대의 거인이었던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이 차이콥스키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은 음악적 씨앗으로 논리를 구축하고 발전시켰던 베토벤과 달리, 차이콥스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의 말을 빌리자면) '구조'가 아니라 '드라마투르기'다. 그래서 베토벤을 잣대로 비판받을 때면 차이콥스키는 심하게 자학하기도 했다.

현악사중주 1번은 차이콥스키를 비판한 사람마저도 인정했을 만큼 뛰어난 형식 논리를 보여주는 예외적인 작품으로, 특히 유려한 선율 뒤에서 현란하게 변화하는 박절 구조는 규칙적인 네 박자의 단조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 작품은 젊은 차이콥스키에게 출세의 발판이 되어 주었는데, 다만 후기 걸작들과 견주면 단점이 사라진 만큼 장점이 함께 억눌려 있다고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 곡에도 차이콥스키의 탁월한 선율이 위력을 보이는 대목이 제법 있으며, 특히 2악장은 초연 당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 선율은 우크라이나 민요를 인용한 것이라고 전해지며 중간 부분의 선율은 차이콥스키가 새로 작곡한 것이다. 2악장뿐 아니라 다른 악장 또한 그냥 선율을 귀로 듣고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1악장과 4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세도막 형식, 3악장은 스케르초와 트리오 형식이다.

2018년 9월 11일 화요일

하이든: 현악사중주 f단조 Op. 20-5 / 베토벤: 현악사중주 5번 A장조 Op. 18-5 / 슈만: 피아노 오중주 E♭장조 Op. 44

하이든: 현악사중주 f단조 Op. 20-5

하이든의 Op. 20은 현악사중주 6곡을 모아 출판한 작품집으로, 현악사중주라는 장르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772년에 작곡한 것이다. 6곡 모두 작곡 연도를 믿기 어려울 만큼 혁신적인 어법으로 가득하고, 그 가운데 f단조 현악사중주는 하이든 자신의 작품목록상으로는 Op. 20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1악장은 한 프레이즈의 끝을 다음 프레이즈의 시작으로 삼거나 주제를 반복할 때 박절 구조에 변형을 주는 등 4마디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순함을 피해 가는 기법이 시대를 크게 앞서가고 있다. 미뉴에트와 트리오 형식으로 된 2악장에서도 때때로 박절 구조가 규칙성을 벗어나면서 '미뉴에트'라는 춤곡 이름이 무색해지곤 한다. 3악장은 4개 악장 중 유일하게 장조로 되어 있으며, 시칠리아노 춤곡 리듬으로 된 주제 선율이 규칙적인 리듬 구조에 따라 변주되는 짜임새로 되어 있다.

4악장은 느린 주제와 빠른 주제가 병진행하는 이중푸가이다. 하이든은 자신의 작품목록을 기준으로 Op. 20의 첫 세 곡 모두 마지막 악장에서 푸가를 사용했는데, 아마추어 음악인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성격이 짙었던 초기 현악사중주에 푸가를 사용한 일은 그 자체로 혁신이었다. 현악사중주 역사상 처음으로 첼로가 제대로 된 '선율'을 연주하는 등 4개 악기의 독립적 성격이 특히 4악장에서 극대화되고 있으며, 또한 고전주의 시대에 새롭게 음악적 표현 요소로 떠오른 '셈여림'을 푸가 기법에 녹여냄으로써 바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푸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작곡가가 다름 아닌 하이든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으로 증명된다.

베토벤: 현악사중주 5번 A장조 Op. 18-5

베토벤은 1798년에서 1800년까지 작곡한 현악사중주 6곡을 Op. 18로 묶어 1801년에 발표했다. 6곡 모두 베토벤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A장조 현악사중주는 작곡 시기가 1799년으로 추정되는데,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다른 작품과 견주어도 베토벤답지 않은 단순한 짜임새로 되어 있다. 베토벤이 불과 몇 년 뒤에 템페스트 소나타(1801~2년)와 교향곡 3번(1802~4년)을 작곡한 사실을 헤아리면 그 양식 변화가 놀랍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고, 발전부와 재현부를 묶어 되풀이하는 짜임새가 특이하다. 2악장은 미뉴에트와 트리오 짜임새이며 음악에 맞춰 실제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프레이즈 구조가 규칙적이다. 3악장은 주제와 변주 형식,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곡에서 그나마 가장 베토벤다운 과감함이 느껴지는 곳은 4악장 발전부로, 본디 A장조였던 조성이 발전부에서 f♯단조로 변하고, 4마디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프레이즈가 3마디 단위로 변했다가 돌아오며, 또한 발전부의 전체적인 규모가 크다.

슈만: 피아노 오중주 E♭장조 Op. 44

슈만은 현악사중주 편성에 피아노를 더한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피아노 오중주'라는 '장르'를 정착시켰다. 이후 브람스, 드보르자크, 포레, 쇼스타코비치 등이 피아노 오중주곡을 남겼고, 슈만에 앞서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스에 피아노를 더한 편성으로 슈베르트가 작곡한 '송어' 오중주는 결과적으로 편성이 특이한 작품이 되었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c단조 장송행진곡 주제와 서정적인 C장조 주제가 교차하는 짜임새, 3악장은 트리오가 두 번 나오는 스케르초이다. 2악장을 제외한 3개 악장이 모두 E♭장조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고, 2악장에 c단조 장송행진곡이 나오는 것까지 함께 생각하면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영웅'을 의식한 구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4악장은 자유분방한 소나타 형식이다. 슈만답게 과감한 화성 진행과 더불어 코다에 푸가토와 이중푸가토를 사용하며 악곡을 장대하게 부풀려 나가는 점이 참신하며, 그 와중에도 4마디씩 규칙적으로 나뉘는 프레이즈를 일관되게 되풀이하는 점이 특이하다.

2010년 3월 28일 일요일

R.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하이든 첼로 협주곡 D 장조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 주연선 / 스테판 애즈버리 / 서울시향

2010년 2월 25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Stefan Asbury
협연 : 주연선

R. Strauss, 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Haydn, Cello Concerto No. 2 in D
Shostakovich, Symphony No. 7 "Leningrad"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글쓴이는 스테판 애즈버리 팬이다.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라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을 뿐, 글쓴이는 그를 얀손스같은 스타 지휘자와 동급이라 여긴다면 믿으시겠는가? 이번 연주회에서 애즈버리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첫 곡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에서부터 드러났다. 이 곡은 어지간한 유럽 지방 악단도 실황 음원을 들어보면 때때로 앙상블이 흐트러지기 일쑤일 만큼 연주하기 까다로운데, 이날 서울시향은 같은 기준으로도 썩 잘했다. 서울시향 솜씨가 그만큼 늘었기도 하겠으나, 이제껏 서울시향을 지휘한 사람 가운데 첫 곡에서 이토록 놀라운 소리를 뽑아낸 지휘자가 또 누가 있던가? 정명훈뿐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까다로운 곡이니만큼 앙상블이 살짝 흔들리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애즈버리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답게 음악 흐름에 가장 알맞은 음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다스리는 남다른 솜씨를 보여주었다. 템포는 느린 편이었으며 3악장과 4악장 느린 대목에서는 템포를 몹시 느리게 잡아서 애달픈 느낌을 더했다. 그러나 빠른 곳에서는 악보에 있는 메트로놈 지시보다 오히려 빨라지기도 해서 굼뜬 느낌은 없었다.

가장 멋졌던 곳은 1악장 행진곡 리듬이 나오는 이른바 '침공(invasion)' 주제였다. 이 대목은 선율이 몹시 단순하고 유치해서 버르토크《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서 패러디하며 잔뜩 비꼬기도 했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수룩한 선율이 아니라 작은북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차가운 음색이다. 이때 작은북은 마치 바이올린과 목관악기 따위가 행진곡 리듬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끔 그 소리를 감싸 안아야 하는데, 애즈버리는 오케스트라 한가운데 바이올린과 비올라 사이에 작은북 한 대를 두어 자연스러운 음향을 이끌어 내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가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긴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크레셴도에 마치 나치 시대 독일군이 멀리서부터 쳐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해 소름이 돋았다. 마디 365에서 심벌즈가 처음 나올 때 무대 뒤 작은북 두 대가 리듬을 이어받았으며, 에드워드 최는 이때 재빨리 무대 뒤로 가 셋이 함께 격렬한 총주와 어우러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곳을 말하자면, 이를테면 3악장 처음은 오르간 느낌이 나는 곳이나 이날 목관악기 소리가 조금 작아서 음향이 살아나지 못했다. 4악장에서 마지막 폭발을 앞두고 긴장감을 쌓아가다가 마디 566에 이르면 호른 독주가 나오는데, 이때 호른에 붙은 셈여림표는 포르테(f)이나 모든 현과 목관악기가 ff로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날 목관 악기 소리가 작아서 안타까웠다. 2악장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이 선율을 이끌어가는 대목(마디 251)에서는 한 호흡에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지 않고 조각조각 끊어 연주했고 소리도 작았다. 이 대목은 악보를 보면 도대체 숨을 쉴 만한 곳이 없는데다가 이른바 '순환호흡'을 하더라도 음 하나하나가 길어서 매끄럽게 연주하기 어려워 보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잘 연주하면 매우 멋진 곳이라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아쉬웠던 곳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체력이 모자란 탓이 아닐까 싶다. 금관악기는 그다지 큰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곡이 트럼펫과 트롬본이 6대씩, 그리고 호른은 8대 또는 더블링(doubling)까지 생각하면 9대 이상 쓰이는 거대편성인 덕분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목관은 3관 편성이라 연주자들이 많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올해 서울시향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겠다니 이참에 체력을 쌓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편성 곡을 연주하기에는 단원 수가 모자라 객원 연주자로 채워야 할 터이니 문제다.

시향 단원 가운데 이날 남달리 눈에 띈 연주자도 있었으니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임상우 부수석이다. 보통 '클라리넷' 하면 B♭ 또는 A조 클라리넷을 말하는데, 이날 클라리넷치고는 매우 높은 소리를 내던 악기가 바로 E♭ 클라리넷이며, 《틸 오일렌슈피겔》 악보에는 D조 클라리넷으로 나와있으나 요즘은 거의 사라진 악기라 보통 E♭ 클라리넷으로 연주한다. 이 곡에서는 B♭ 클라리넷보다 E♭ 클라리넷이 더 돋보이므로 채재일 수석이 아닌 임상우 부수석이 E♭ 클라리넷을 연주한 일이 이상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곡에 쓰인 무시무시한 고음은 플루트나 피콜로처럼 반짝여서도 안 되고, 오보에처럼 아련한 느낌이 들어서도 안 되며, 단단하면서도 날 선 송곳처럼 날카롭고 거침없어야 한다. 부드럽고 여린 소리를 누구보다 잘 내는 채재일이 이런 소리를 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곧고 빈틈없는 소리를 내는 임상우야말로 이 악기에 알맞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에서도 임상우가 E♭ 클라리넷을 멋지게 연주했다.

하이든 작품은 딱히 독창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서 연주자 기량이 민얼굴처럼 드러나므로 연주자에게는 오히려 가장 어렵다. 하이든 D 장조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주연선 또한 몇 군데 작은 실수를 해서 누리꾼 사이에서 혹평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곡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 터이므로 시향 수석 단원 솜씨를 뽐내려는 기획이라면 그다지 실속 없는 선곡이라 본다. 주연선이 연주하는 첼로는 비단결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소리가 참으로 멋진데, 이것을 뽐내려면 19세기 곡 또는 애즈버리가 옌스 페터 마인츠와 협연해 음반을 남긴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2009.10.10. 코다이 《갈란타 춤곡》 /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 베토벤 교향곡 7번 ― 호칸 하르덴베리에르 / 디에고 마테우스 / 서울시향

디에고 마테우스는 '대타' 지휘자였다. 본디 미코 프랑크가 지휘를 맡기로 했다가 갑자기 아파서 지휘자가 바뀌었단다. 그런데 '대타'치고는 솜씨가 너무 뛰어난데다가 개성이 매우 뚜렷했다. 코다이 《갈란타 춤곡》에서는 악보에서 지시한 메트로놈 값에 견주어 터무니없이 느린 템포로 한 걸음씩 차분히 걷는 듯했으며, 이를테면 마디 180에서 트라이앵글과 글록켄슈필 소리가 아기자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또 느린 템포를 업고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이 루바토로 잔뜩 멋을 낸 독주를 뽐내기도 했다.

저런 템포로 나중에 가서 어쩌려나 걱정이 들었으나 웬걸, 제대로 빨라지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만한 곳, 이를테면 마디 209나 마디 236 등에서는 템포가 악보 지시에 맞게끔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바뀌었다가 다시 마디 336에서 도로 크게 느려졌다. 그러면서 곳곳에 나오는 리타르단도, 아첼레란도, 악센트 따위를 맛깔스럽게 살리는 솜씨가 매우 인상 깊었다. 번스타인이 울고 갈 '고무줄 템포'라 하겠는데, 그래서 작품에 나타나는 처절한 파토스가 빛이 바랜 대신에 블랙 코미디 같은 익살이 살아났다. 글쓴이는 이날 첫 곡만 듣고도 디에고 마테우스를 미코 프랑크보다 윗줄에 놓기로 마음먹었다. 미코 프랑크는 배 좀 아플 테다.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을 협연한 호칸 하르덴베리에르는 거친 트럼펫 소리를 부드럽게 다듬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짧은 프레이즈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줏빛으로 그윽하게 울리는 소리 빛깔은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트럼펫다운' 소리와는 조금 달라서 트럼펫이 아니라 오보에나 클라리넷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악장 처음에 마치 오블리가토 악기처럼 주선율을 거든 대목이 색달랐고, 2악장에서는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는지 티 나지 않게 짧은 긴장을 만들어 오케스트라 템포를 끌고 가는 솜씨가 인상 깊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피아졸라 《Oblivion》에서는 하몬 뮤트(harmon mute)를 써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닮은 소리를 뽐내기도 했다.

이날 연주회 주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트럼펫'이라 할 수 있겠는데, 베토벤 교향곡 7번에서 트럼펫이 돋보이는 곳은 4악장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트럼펫 솔로 악구는 없고 A, E, F♯ 음이 대부분으로, 베토벤 시대 트럼펫은 구조적으로 낼 수 없는 음이 많았다. 그런데도 트럼펫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곡에서 트럼펫은 선율이 아니라 리듬을 이끌어가며, 그 때문에 관악기보다 타악기에 가깝다. 4악장 내내 되풀이해 나오는 '♬♪' 리듬과 여린박에 붙은 스포르찬도를 곡이 끝날 때까지 깔끔하게 살리는 일은 일류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쉽지 않다. 명반으로 소문난 클라이버―빈필 음반은 알고 보면 트럼펫 리듬을 숨긴 '편법'에 빚지고 있다.

이날 트럼펫을 연주한 단원은 Jeffrey Holbrook과 Niels E. Heidoe였는데, 모든 곳에서 고른 소리를 내지는 못했으나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지휘자가 4악장 템포를 몹시 빨리 잡고 신나게 달려대는데도 '♬♪' 리듬을 깔끔하게 다스렸으며 스포르찬도 리듬 또한 매우 훌륭했다. 다만, 도돌이표가 있는 마디 12에서는 '♬♪' 리듬을 또렷하게 살리지 않고 전략적으로 팀파니 뒤로 숨는 듯해서 조금 아쉬웠고, 스포르찬도 음형에서는 이따금 센박이 너무 세서 스포르찬도한테 덤비기도 했다.

Jeffrey Holbrook은 빠른 음형을 깔끔하게 연주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난 연주자인데, 그러나 매우 큰 소리는 잘 내지 못하는 듯해 아쉽다. 이를테면 마디 219에서는 호른과 팀파니 소리에 밀려 빛을 잃었고, 마디 341에서는 '♬♪' 리듬도 팀파니와 목관 등에 기댔다. 마디 402에서는 모든 악기가 크레셴도를 하는 동안 트럼펫이 결정적인 '한 방'을 터트리지 못했고, 셈여림표가 마침내 'fff'에 이르렀을 때에는 'ff'에서 한 계단 더 올라서지 못했다.

지휘자 디에고 마테우스는 《갈란타 춤곡》에서 보여준 과장벽을 베토벤 교향곡에서는 함부로 내보이지 못하다가 4악장에서야 참았던 '끼'를 터트렸다. 템포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오케스트라가 티 나지 않게 버벅거렸으나 끝까지 큰 실수 없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잘했으며, 단원들 얼굴에는 쫓기는 표정이 아니라 신나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앙상블만을 말하자면 3악장이 가장 훌륭했으나 '감동'을 말하자면 4악장이 앞선 악장을 압도했다.

고백하건대 글쓴이는 이날 지휘자가 바뀌었음은 알았으나 바뀐 지휘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연주를 들으면서 언뜻 번스타인과 두다멜을 떠올렸는데, 디에고 마테우스가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 악장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깜짝 놀랐다. 이날 연주회에 숨은 주제를 하나 더 말하자면 '춤곡'이라 하겠는데, 베토벤 교향곡 7번이나 코다이 《갈란타 춤곡》은 알고 보면 라틴 댄스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이 앙코르로 즐겨 연주하던 곡을 떠올려야 한다. 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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