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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4일 화요일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에 가다 ①

▶ 다름슈타트로 간 까닭

여름휴가 때 유럽에 가려고 연주회 일정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때쯤이면 공연 단체 대부분이 시즌 끝나고 쉽니다. 하긴, 예술가들도 휴가 가야죠. 그런데 휴양지에서 공연이 열리면? 놀러 가서 돈도 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는 휴가철 특수를 노리는 곳이 많습니다. 대관령 국제음악제가 비슷하지요.

바이로이트로 갈까요? 제 휴가 기간이랑 살짝 어긋나네요.
런던으로 갈까요? BBC 프롬스가 열립니다. 로열 알버트 홀 음향 나쁘다던데.
루체른은 8월이나 돼야 개막하는데다, 올해 페스티벌은 뭔가 삐걱거리는 게 영…
잘츠부르크로 갈까요? 일정도 안 맞는데다, 여기에 가느니 바이로이트 갑니다.

고민 끝에 다름슈타트로 결정했습니다. 현대음악이야말로 실연을 들어 봐야 제맛을 알 수 있거든요. 국내에서는 서울시향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로 한 해 두 차례 현대음악을 연주하고, 또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를 지향하는 TIMF 앙상블도 훌륭하지만, 저는 한 번쯤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음악 공연을 직접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앙상블 모데른(Ensemble Modern)이 개막 공연을 맡았습니다.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Internationalen Ferienkurse für Neue Musik Darmstadt)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아방가르드 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행사입니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비꼬아 쓴 말을 빌자면 "특허청으로 달려가는" 온갖 혁신적인 음악들이 초연되며 인정투쟁을 벌여 왔던, 불레즈 · 슈토크하우젠 등 거물 작곡가가 살벌한 의견 대립을 벌여 댔던, 그래서 20세기 음악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행사입니다. 다름슈타트는 그야말로 현대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지요.

▶ 오후 4시 33분에 열린 엽기 개회식

올해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는 존 케이지 특집이었습니다. 탄생 100주년이라고요. 4시 33분이라는 특이한 개회 시각은 《4분 33초》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소개되었다지요? 그런데 《4분 33초》는 드라마 속 '강마에'와 달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휘자 구자범 선생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이번 개회식은 시작 시각만 특이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뻔한 인사말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고요. 홈페이지에는 마틸다 언덕(Mathildenhöhe)이라는 곳에서 공연이 있다는 얘기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데다, 그 '마틸다 언덕'이라는 곳은 알고 보니 무슨 공연장 같은 곳이 아니라 건물 여러 채 있는 개방된 곳이었습니다. 행사와 무관한 전시회 부스를 찾아가 물어보고 그곳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무슨 현수막 하나 없어요.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합니다. 바람이 쌩쌩 붑니다. 행사장 이곳저곳에 빨간 줄 같은 것을 달아 놔서, 그 줄이 바람에 날리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웅성웅성…"
"여기가 거기예요?"
"맞지 싶기는 한데…."
"웅성웅성…"

…아오, 진짜 여기 맞아?

시계를 쳐다봅니다. 4시 33분을 가리키는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어딘가 싶어서 쳐다보니까 시계탑에서 웬 여자가 확성기로 뭐라고 떠듭니다. 랩(rapping)인가?

그리고 오른쪽 난간에서 웬 남자가 타악기를 연주합니다. 좀 있으니 더 오른쪽에서 동양계 여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빨간 끈이 바람에 나부끼며 윙윙 뿌지직(?) 소리를 냅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처음에는 멋졌는데, 조금씩 지루해집니다.

…뭐야? 이게 개회식?

주위를 둘러보니 한구석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습니다. 뭔가 싶어서 가보니 몇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끈 나부끼는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립니다. 또 어딘가에서는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트롬본을 연주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마치 학회 포스터 발표회 같은, 또는 박람회 부스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인공은 바람과 빨간 끈입니다.

…뭐, 존 케이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숙소로 돌아갑니다.

▶ 엽기 개회식에 이은 엽기 전자음악 공연

다음 공연은 다름슈타티움(Darmstadtium)이라는 곳에서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앙상블 모데른' 연주회가 본 공연이고, 그에 앞서 로비에서 "달리는 라디오" 앙상블이 무료 공연을 했습니다. 작품 제목이 《네 곡짜리 라디오-카논, 그리고 메타케이지》(Vier Radio-Kanons und ein metaCage)라고요. 제목은 그럴싸한데…

'치―' 하는 라디오 백색소음이 아주 작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약 3분에 걸쳐 조금씩 커집니다. 사람들 시선이 완전히 몰리는 순간 멈춥니다. 박수. 여기까지는 멋졌어요. 그 뒤로 타악기 소리가 살짝 곁들여진다거나 하는데, 처음이랑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님들아, 그게 전부임? 너네 왜 그러냐능?

본 공연 표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저도 재빨리 표를 샀습니다. 입장권에 좌석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리 찜 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엽기 전자음악을 뒤로하고 공연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앙상블 모데른. 이 공연부터가 진짜였습니다.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2010.01.28 김도윤 《디베르티멘토》 /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 리게티 《라미피카시옹》 ― 이병욱 / TIMF앙상블

TIMF앙상블 ‘사통팔달[四通八達] 시리즈 1’ 《메타모르포젠》

2010년 1월 28일(목) 오후 8시 00분
호암아트홀

이병욱 지휘
TIMF 앙상블

김도윤 Doyun Kim, 《디베르티멘토》 Divertimento for 13 strings
펜데레츠키 K. Penderecki, 《샤콘느》 Chaconne
김정길 Chung-Gil Kim, 현악합주를 위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TIMF앙상블 위촉
- 휴식 -
리게티 G. Ligeti, 《라미피카시옹》 Ramification (version for 12 solo strings)
R. 슈트라우스 R. Strauss,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 for 23 strings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TIMF 앙상블은 다른 악단과 견주어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으며 연주회 프로그램도 매우 훌륭했다. 창작곡 또한 다른 공연에서 연주된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뛰어났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호암아트홀이 현대음악과 어울리는 연주회장인지는 의심스러우나, 이날 프로그램은 호암아트홀 실내음향과 썩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김도윤 작품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처럼 잔향이 좀 더 짧은 곳에서 연주되었다면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창작곡은 전체 공연과 조화를 이루는 본격 현대음악이었다.

공연 시작에 앞서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이 연주회 해설 강연을 열었는데, 내용은 훌륭했으나 사전 공지가 없었고 연주회장 밖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TIMF 앙상블은 본격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로, 그것만으로도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연주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고 창작곡 또한 훌륭하므로 지원 가치는 더욱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작곡가 김정길은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였다가 퇴임했고,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은 현재 같은 과 교수이며, 작곡가 김도윤은 같은 과 학생이다. 김원철은 같은 과 이론 전공 석사이나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며, 이론 전공은 작곡 전공과는 사실상 학과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도윤은 이날 처음 알았고, 최우정은 서로 얼굴 알아보고 인사할 만한 친분은 있으며 서울시향이 최우정에게 위촉한 첼로 협주곡 초연 리뷰를 김원철이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일도 있다. 김정길은 작곡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컸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김원철이 완벽하게 객관적인 평을 하지 못하리라 의심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렵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팸플릿에 있는 작품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음 소재를 조각내고 비틀어 음악을 이끌어 간다는 아이디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는 브람스나 베토벤까지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요즘 작곡가 가운데에는 크리스 폴 하르만(Chris Paul Harman) 같은 사람도 김도윤과 닮은꼴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짜임새로 나타나는가이며, 무엇보다 이론적인 장난질에 그치지 않고 감상자에게 듣는 재미를 주느냐이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듣기 좋은' 작품이었다. 현대음악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음악치고 그다지 어렵지 않고 뭔가 엉뚱한 연주법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어딘가 귀를 즐겁게 하는 곳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진동하는 듯한 화음 또는 음 덩어리(Cluster)가 조성감을 얼핏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긴장감을 이룬 대목이나 콘트라베이스가 피치카토 음형으로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악보를 보면 생각보다 머리를 쥐어뜯게끔 하는) 리듬을 이끌어가며 만들어 내는 박진감 따위가 멋졌다. 무엇보다 작곡가가 '변주곡의 원리'를 말한 만큼 음 소재를 짜임새 있게 이끌어 가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곡가가 1984년생이란다. 이 '어린놈'이 이토록 멋진 곡을 썼다니, 나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외쳐주었다. "브라보!"

고백하건대 나는 김정길 작품을 이날 처음 들었다. 현대음악에 거부감은 없으나 국내 작곡가 작품을 일부러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다 보니 이름은 익히 들어온 작곡가라도 작품은 모르는 일이 더러 있다. 이날 연주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을 들어보니 김정길이 윤이상 제자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윤이상 수제자로 보통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를 꼽는데, 이제 보니 음악 양식만 따지자면 김정길이야말로 윤이상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은 윤이상 음악을 가리켜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적"이라 했다. 그러나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의 융화가 아니라 "이주민 고유의 전통적 특색들이 서구 사회에 동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고 상실되는 원리가 윤이상에게도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윤신향,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융화'가 아니라 '동화'인 까닭은 음악을 이루는 두 세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은 화음과 장식음 따위가 윤이상과 닮은꼴이면서도 음계와 리듬 등에 한국적인 요소가 조금 늘어서 '두 세계' 사이가 좀 더 균형 잡힌 음악이었다. 20세기 서양음악사와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윤이상과는 여러모로 처지가 달랐으리라.

리게티는 《라미피카시옹》(Ramification)에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 첫째 그룹이 표준 조율법보다 4분음 높게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또한 둘이 섞여 있어서 안개처럼 흐릿한 소리가 되게끔 했는데, 리게티는 두 그룹이 따로 연습한 다음 마지막 연습 때에는 무대에서 따로 앉아 연주하고, 실제 공연에서는 섞여 앉도록 제안했다. 그런데 이날 TIMF 앙상블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두 그룹이 나뉘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섞여 앉았다면 연주자끼리 서로 영향을 주면서 오히려 소리가 엉망이 될까 걱정한 탓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거나 '안개' 음향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나서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연주는 매우 훌륭했으며, 딱 한 군데 아쉬웠던 곳을 말하자면 마디 101에서 콘트라베이스가 악보에서 지시한 만큼 '위협적이고 잔인하게'(minaccioso brutale) 연주하지 못한 대목이었다. 이곳에서 콘트라베이스는 활을 지판 쪽에서 매우 여리고 부드럽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매우 세게 ― ffff에서 ffffff로 크레셴도 ― 폭발하듯 박박 긁어대야 한다. 곧이어 활이 줄받침(bridge)과 지판을 오가며 꾸준히 음색을 바꾸면서 길게 연주해야 하는데, 마디 106에서 바이올린 하모닉스 음형이 더해질 때까지 다른 모든 악기는 침묵하면서 이 대목이 자연스럽게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그러나 이날은 콘트라베이스 한 대로 이 대목을 연주하느라 음량이 크게 모자랐고, 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긁어대지도 않았다.

2009년 6월 1일 월요일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베베른 Op.10



음색(音色)이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timbre'라 하고 독일어로는 'Klangfarbe'라 부르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소리의 색깔'처럼 말만 바꾼 수준을 벗어난 뜻풀이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음을 만드는 구성 요소의 차이로 생기는, 소리의 감각적 특색. 소리의 높낮이, 크기가 같더라도 진동체나 발음체, 진동 방법에 따라 음이 갖는 감각적 성질에는 차이가 생긴다. ≒소리맵시ㆍ음빛깔. (표준국어대사전)

- 악기 소리나 목소리가 발성이나 악기에 따라 (음높이 및 세기와 달리) 띄는 특징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 세기(loudness)와 높이(pitch)가 같은 두 소리를 듣는이가 다르다고 느끼게끔 하는 감각 속성 (미국표준협회 ANSI, 1960)

- 음높이, 음량, 음길이와는 다른 기준을 사용하여 두 소리가 다르다고 판단하게끔 하는 청감각 속성 (Pratt & Doak, 1976)

서로 다른 뜻풀이에 한 가지 닮은 곳이 있다. '음색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음색은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며 이른바 부정적 정의(negative definition)를 내린 대목이다.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음색은 배음(harmonics) 스펙트럼, 포만트(formant), 위상(phase), 엔벨로프(envelope), 비브라토 주기 및 진폭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글은 음향학 개론이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소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음색과 엮여 있으며 위에서 음색과 구분한 음높이, 음량, 음길이 또한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20세기 들어 서양음악에서 음색이 선율과 리듬과 화성 못지않게 중요해졌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마저 나타났다. 앞글에서 짧게 소개한 총열주의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논리와 질서를 이루었다면, 그 반발로 나타난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에서는 음들이 모여 이룬 '음향층' 또는 '덩어리 Cluster'가 음악이 된다. 선율과 리듬은 조각조각 나뉘어 카오스 속에서 녹아버리고, 화음은 음 덩어리가 되어 '음'과 '소음' 사이를 넘나든다. 이를테면 피아노 건반을 주먹이나 팔꿈치로 '쿵' 내려쳤을 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된 '덩어리'가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 헝가리계 루마니아 사람으로 성을 앞에 쓴다)는 총열주의 음악을 비판하며 들리지 않는 '구조'가 아니라 들리는 '형상'을 음악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작품 《아트모스페르》(Atmosphères)를 들어보자. 이 작품의 '구조'는 귀로 듣고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악보를 들여다보아도 음표의 카오스 속에서 정신을 잃기 쉽다. 그러나 예쁜 여자를 알아보는데 피부세포를 분석할 필요는 없는 법. 굳이 악보를 분석할 사람은 먼저 돋보기를 준비한 다음 음표가 아무리 많아도 '떡실신'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 그리고 나서 악보를 본다면 작곡가의 위대한 '노동'에 존경을 바치게 되리라.
《아트모스페르》 마디 88-92. © Universal Edition

그러면 이 곡의 '형상'은 무엇인가? 소리 또는 '음향'이 덩어리를 이루어 흘러가는 게 느껴지는가? 이 덩어리는 멈춰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자라거나 줄어들고 뭉치거나 흩어지기도 한다. 이 곡은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기도 했는데(마지막 장면에서는 리게티의 다른 작품과 함께 편집), 소리로 된 '형상'이 화면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여기서 잠깐! 큐브릭은 리게티 허락 없이 멋대로 이 음악을 썼으며, 리게티는 6년 동안 법정싸움을 한 끝에 고작 3,500달러만을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거대자본의 횡포를 잠시 규탄해 주자.)

그런가 하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소리가 흘러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움직인다'라고 할 수 있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음악은 멈춰 있지 않은가? 맞다.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곡은 멈춰 있는 듯 느껴진다. 리게티는 이를 두고 "얼어붙은 시간"이라 했으며, 이것은 리게티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판타지이자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이른바 클러스터(덩어리) 기법을 쓴 작품이 모두 그렇지는 않으며 작곡가에 따라 또 작곡 시기에 따라 모두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는 어찌 들으면 《아트모스페르》와 제법 닮았다.
'노동'을 줄이려고 꾀를 낸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마디 18.
© Schott Music

'아트모스페르'는 대기(大氣)를 뜻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곡 제목은 두 가지 뜻 모두를 아우른다 하겠는데, 음반을 들어보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에 따라, 또 '숲'과 '나뭇잎 위 하루살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살리느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형상'이 차지하는 3차원 공간이 때때로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 또한 놓치지 마시라.

《아트모스페르》는 오디오쟁이에게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 곡을 듣고 바로 느낌이 와야 한다. 오디오를 길들일 때 쓰는 이른바 '오디오 에이징 음악'과 비슷하지 않은가! 당신이 'XLO Burn-in CD'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트모스페르》로 오디오를 길들여 보면 어떨까?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질지도 모른다! 오디오를 길들이는 당신을 가족이 한심해한다면 현대음악이라며 으스댈 수도 있겠다. '에헴! 들어나 봤나 리게티?'

오디오 길들이기가 목적이라면 《아트모스페르》 말고도 좋은 현대음악이 많다. '전자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 대부분이 오디오의 한계를 박박 긁어댄다. 파이프 오르간 음악 또한 마찬가지인데, 따지고 보면 '클러스터 기법'의 유래를 바로크 시대 오르간 음악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왕이면 오르간 음악 또한 바흐보다는 메시앙이나 뒤뤼플레(Duruflé)같은 현대 작곡가를 들어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겠다.

다음 시간에는 클러스터 기법을 '한국적으로' 활용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겠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16일 화요일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베베른 Op.10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동요 선율은 단순하다. 왜 그럴까? 〈학교 종〉을 계명창으로 불러보자. 솔솔라라솔솔미 솔솔미미레 솔솔라라솔솔미 솔미레미도. 선율을 이루는 음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섯 음은 모두 피아노 흰 건반에 들어맞는다. '솔'이 열한 번 나오고 '미'가 여섯 번, '라'가 네 번, '레'가 두 번 나온다. '도'는 딱 한 번 나오지만 맨 마지막에 나와서 곡을 끝맺으므로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하다.

이 곡은 C 장조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C 음, 즉 '도'를 '으뜸음'으로 하는 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로 선율이 이루어져 있다. 이 곡에 가장 자주 나온 '솔'은 C 장조에서 '딸림음'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도미넌트(dominant)이다. 말 그대로 선율을 다스리는 음이다. 으뜸음이 주인공이라면 딸림음은 악당이다. 원래 주인공보다 악당이 더 멋있는 법이지만 끝내는 주인공이 이긴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고 오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만 하고 넘어가자.

이처럼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맺는 관계는 평등하지 않으며, '조성(調性; tonality)'이라 부르는 위계질서를 따른다. 그리고 위계질서가 잘 잡힌 선율일수록 듣기에 편안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단순한 선율은 그만큼 흥미를 잃기 쉬우며 적절한 일탈은 선율을 더욱 넉넉하고 재미있게 만든다. 서양음악에 오늘날과 같은 조성이 생겨난 것은 17세기 즈음인데(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조성'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와서 생겼고 그전에는 C 장조, a 단조 하는 '조(調; key)' 개념이 있었다.) 그 뒤로 점차 '일탈'이 잦아져 조성 구조는 복잡해지고 화음도 그만큼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는 '일탈'이 넘쳐나다 못해 '위계질서' 자체가 무너지고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평등해졌다. 바로 조성이 없는 음악, 무조음악이다. (조성이 생겨나기 전에도 음악이 있었지만 '선법'이라는 비슷한 위계질서가 있었으므로 '무조음악'이라는 용어를 쓸 때 헷갈리지 말자.) 서양음악사에 처음 나타난 무조음악은 1908년 세계초연된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 3, 4악장이며, 4악장에 나오는 '나는 다른 행성의 공기를 느낀다.'라는 의미심장한 노랫말로 이름 높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손쉽게 작곡하려고 1921년에 이른바 '12음 기법'을 만들어냈다. (12음 기법이 나오기 전에도 무조음악이 있었으며, 쇤베르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에 홀린 피에로》는 1912년 작품으로 무조음악이되 12음 기법으로 쓴 작품이 아니다.) 12음 기법은 한 옥타브를 이루는 음 열두 개를 수열처럼 음렬(音列)로 만들어 쓴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며 그 때문에 '음렬주의(Serialism)'라는 말도 생겨났다. 더 나중에는 리듬과 셈여림 따위를 마찬가지로 잘게 나누어 음렬처럼 쓰는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도 나타났는데, 유럽에서는 영미권과는 언어 관습이 달라서 '음렬주의'라 하면 보통 '총열주의'를 가리킨다.

현대음악이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은 현대음악은 곧 12음 음악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12음 음악은 현대음악의 한 갈래일 뿐이며, 어찌 보면 12음 음악이 20세기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12음 음악을 들을 생각은 버려도 좋다. 베베른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Op.10》은 베베른이 1911년부터 1913년에 걸쳐 작곡했으며, 12음 기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그러나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에서 이런 음악을 소개하는 일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익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악보를 보고 직접 분석해 보는 것이다. 5악장 작품인데 4악장은 길이가 고작 여섯 마디밖에 안 될 만큼 작품 길이가 터무니없이 짧으므로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려도 좋다. 짧다는 것은 어쩌면 베베른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선율을 들으려 하지 말고 음색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알고 보면 오디오 테스트용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프와 약음기 낀 트롬본, 하프와 첼레스타, 하프와 플루트가 차례로 한 음씩 연주하며 음악이 시작되는데 이때 음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들어보라. 이때 플루트는 혀나 목젖을 떨어 '아르르' 하는 소리를 내는 이른바 '플러터 텅잉(flutter-tonguing)' 주법을 쓴다. 이처럼 선율이 흐를 때 음색이 계속 바뀌게 하는 작곡 기법을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고 하며, 베베른은 음색과 함께 길이, 셈여림, 그리고 음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까지 12음 기법 속에서 짜임새 있게 사용하여 훗날 총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선율이 흐르면서 음색이 바뀌니 악기 또한 계속 바뀌고 그때마다 소리가 나는 위치도 바뀐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때 음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잘 들어보라. 소리가 나는 곳이 앞뒤, 왼쪽 오른쪽,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며 무대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2채널 스피커로 음상이 아래위로도 맺히게 할 수 있는가? 특수 녹음을 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제껏 들어본 음반 가운데 그런 녹음은 없었으며 연주회장에서 실제 연주를 들어보고서야 나는 이제까지 음반으로 들은 것은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베베른 음반을 내놓은 레코딩 엔지니어들은 반성하시라.

3악장에서는 큰북과 차임벨(Tubular bell)이 낮고 여린 소리로 '우르릉'하는데 오디오 저음 재생 능력을 시험하기에 좋다. 악보에는 '들릴 듯 말 듯하게 kaum hörbar'라고 써놨는데 아예 안 들리면 곤란하다. 글쓴이 오디오는 소리는 다 나는데 음색이 진짜 악기 소리와는 좀 다르다. 그런데 최고급 오디오로 들어보니 진짜 악기 소리가 나더라.

20세기 서양음악의 중요한 특징으로 음색을 꼽는다면, 무조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쇤베르크는 그저 낭만주의자였을 뿐 현대음악 작곡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에서 이처럼 쇤베르크를 헐뜯으며 베베른에게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음악에서 음색은 이토록 중요하다. 다음 시간에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을 소개하겠다.

음반을 살 때 주의할 점.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Op.10이며 다른 하나는 작품 번호가 없다. 둘은 다른 작품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참고할 점. '베베른'은 'Webern'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쓴 것인데 실제 발음은 '베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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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글타래: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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