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9일 월요일

낙동강의 시(詩)

한산신문 및 『Grand Wing』에 실린 칼럼입니다. 한산신문 판본에서 일부 내용이 수정됐습니다.


지난해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윤이상 선생이 영화 ‹낙동강›의 음악을 맡았던 모양이니 조사하라는 지시를, 아마도 저희 대표님한테 받았습니다. ‹낙동강›은 1952년 작품으로 영화 자체는 현재 유실되어 스틸 사진 등 일부 자료만 남아있는 모양이더군요. 공교롭게도 현 통영시장님과 이름이 같은 김동진이라는 분이 전반적인 음악 작업을 한 듯했고, 윤이상 선생은 테마 음악을 작곡한 듯한 정황을 알아냈지요.

다시 한 달쯤 지나, 대표님께서 이번에는 빛바랜 악보 하나를 주시며 인쇄용 악보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표지에는 ‹Orchestral Suite "Poems of the Nak-tong River"›(관현악 모음곡 "낙동강의 시"), 그 아래에 'Composed by Yoon Ie Sang'(윤이상 작곡)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제목부터 모든 것이 손글씨더군요. 윤이상 선생의 자필 악보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었지요. 가슴이 떨려 왔습니다.

순간 저는 이 악보를 이렇게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충렬초등학교에서 발견된 윤이상 작곡 교가 악보 원본을 지난 2014년에 기증받았을 때, 그 악보를 전문가에게 맡겨 조심스럽게 사본을 만드느라 예산이 얼마나 들었고 또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이때, 자필 악보 보존에 최선을 다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손에 남은 물기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 악보를 펼쳐 과감하게 복사기에 넣고 한 장씩 복사했습니다. 모든 음표와 작은 지시어 하나까지 잘려나간 곳이나 흐리게 복사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연필로 썼다 지운 흔적과 새로 쓴 자국이 겹친 곳,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곳 등은 음악적인 맥락을 따져 판단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복사한 악보를 디지털 스캔해서 따로 보관하고, 종이로 된 사본은 컴퓨터 사보 작업을 맡길 전문가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2018년 4월 5일, 수십 년간 잊혔던 이 작품이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에서 연주됩니다. 한스-크리스티안 오일러(Hans-Christian Euler)가 지휘하는 하노버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습니다. 이날 윤이상 선생의 1989년 작품인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Den Opfern der Freiheit)이 베토벤 삼중협주곡과 함께 연주될 예정이기도 하지요.

‹낙동강의 시(詩)› 자필 악보 목차를 보면 6개 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 영남의 옛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께 각별하게 느껴질 듯한 소제목이지요. 그런데 윤이상은 작곡 도중에 간추린 구성으로 바꾼 듯합니다. 1악장 프롤로그,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요. 어쩌면 곡 길이가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한 탓일까요?

이 작품의 작곡 시기로 추정되는 1952년경은 전쟁이 한창일 때였지요. 이 무렵에 윤이상 선생은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약 3년간 생활하게 됩니다.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작곡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에 힘입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윤이상 공식 작품목록 중 첫 번째 작품은 1958년 베를린에서 작곡해 네덜란드 빌토번에서 초연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입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작곡가 스스로 목록에서 삭제했지요. 그런 만큼 윤이상 선생이 한국에서 쓴 작품들은 유학 이후에 작곡한 본격 현대음악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낙동강의 시(詩)›가 듣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낙동강에는 '녹조라떼'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다닙니다. 환경정책의 대실패를 입증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잊힌 지 수십 년만에 사실상 세계초연되는 ‹낙동강의 시(詩)›가 어쩌면 사람들에게 그 옛날 맑은 낙동강을 추억하게 하지는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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