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8일 수요일

윤이상: 낙동강의 시(詩)

윤이상이 한국에서 쓴 ‹낙동강›이라는 노래는 윤이상동요제 등으로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런데 경남 지역 장년층이 기억하는 윤이상의 또 다른 ‹낙동강›도 있다. 진의장 전 통영시장은 이 노래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고 증언하며, 마산문화원장을 역임한 영화전문가 이승기 선생은 경남 지역 학교에서 조례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고 또한 1952년에 개봉한 영화 ‹낙동강›에 삽입됐다고 증언한다.

두 곡의 ‹낙동강› 및 영화 ‹낙동강›과 교향시 ‹낙동강의 시(詩)› 사이에는 간접적인 관련성 정도가 의심된다. 윤이상이 1956년 11월 30일 아내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윤이상은 한국에서 ‹낙동강의 시›를 작곡하다가 1악장과 2악장을 파리에서 완성했고 그곳에서 3악장을 써서 11월 29일 저녁에 전곡을 완성했다. 윤이상은 같은 해 4월 현악사중주 1번으로 서울시문화상을 받고 6월에 유학길에 올랐으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우면서 유럽 현대음악을 경험하게 되었다.

파리 시절 이수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이상은 때때로 배움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다. ‹낙동강의 시›에 관해서는 "너무 통속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저런 맥락과 함께 이 곡이 전통적인 기능화성에 바탕을 둔 작품임을 헤아리면 ‹낙동강의 시›가 이제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의 시각으로 작품을 대하면 알게 될 것이다. 윤이상은 이미 이때부터 빛났다.

작곡가는 처음에 이 작품을 6악장으로 구상했다가 작곡 도중 3악장 구성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자필악보의 목차를 보면, ‹낙동강의 시›는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黃昏(황혼)이 물들 때, 3악장 嘉俳節(가배절; 한가위), 4악장 갈대밭, 5악장 豐年歌(풍년가), 6악장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3악장 짜임새로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洛東江(낙동강)의 저녁, 3악장 舞曲(춤곡)으로 되어 있다.

남북이 상잔을 일으키고 미중러 등의 열강이 한반도에서 대리전을 벌일 때, 낙동강은 남한이 전세를 뒤집어 북한을 패퇴시킨 격전지였다. 이 무렵 윤이상은 낙동강 유역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부산에서 음악 교사로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가서 약 3년간 생활하며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는 한편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시대적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리고 6악장으로 된 최초 구상이 시사하는 바와 달리, 이 작품의 2악장까지는 어두운 정서로 가득하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드라마투르기'이며, 아치(arch) 형식으로 된 2악장을 빼면 나머지 악장은 전통적 형식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1악장은 웅장한 팡파르로 시작하고, 핵심이 되는 4도 상행 음형이 악곡 전체의 씨앗이 됨으로써 작품을 지탱하는 형식적 일관성을 확보한다. 이 팡파르와 그에 이어지는 선율 사이의 급격한 텍스처 대비는 마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에서 실제 영화로 이어지는 장면전환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이 과연 영화 ‹낙동강›과 무관한지 의심해볼 만한 대목이다.

1악장에서는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고,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한다. 통곡이 잦아들면 마치 심장의 마지막 박동처럼 들리는 불안한 음형이 나타나고, 날카로운 두 차례 비명과 함께 1악장이 끝난다. 2악장은 오보에 선율이 이끌어 가는데, 이 선율은 음울한 뱃노래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상엿소리 같기도 하다. 3악장에서는 흥겨운 리듬이 마치 선언처럼 나타나 비극을 몰아낸다.

3악장 중간에는 뚜렷한 민요풍 선율이 나온다. 이것은 ‹밀양아리랑›의 "동지섣달" 가사에 해당하는 선율과 음정관계가 일치하는데, 세마치장단으로 된 밀양아리랑과 달리 이 음형은 굿거리장단으로 된 ‹태평가›와 리듬이 비슷하다. 그리고 밀양아리랑과 굿거리장단이 결합한 결과는 ‹뱃노래›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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