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9일 월요일

윤이상: 첼로를 위한 ‹활주› (1970)

이 작품의 원어 제목인 'Glissées'(글리세)는 '미끄러지다' 또는 음악 용어 '글리산도'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동사 원형은 'glisser'이다. 그러나 윤이상의 '글리세'는 서양음악의 단순한 글리산도가 아닌 동아시아 음악의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첼로 소리는 때로 거문고, 가야금, 또는 해금처럼 들린다.

동아시아 음악에서 개별음은 생명력을 품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윤이상은 그것을 서양 기보법으로 옮기면서 장식음, 글리산도, 그 밖에 여러 특수한 연주법 따위를 사용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음악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가 한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윤이상의 기보법과 음향적 상상력에 따라 고유한 변화와 개성, 특징적 억양을 갖게 된다."

첼로를 위한 ‹활주›는 윤이상이 ‹예악›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 쓴 작품이다. ‹예악›에서 음을 덩어리로 쌓아 음향복합체를 만들되 그것을 이루는 개별음에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악기로 표현했다면, ‹활주›에서는 첼로라는 악기 하나에 집중하면서 개별음이 생동하며 만들어내는 소우주를 탐구한다.

한편, 한국 전통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정악(正樂)은 비트(beat)가 아닌 호흡으로 음악이 분절된다는 점에서 서양음악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윤이상의 ‹활주› 또한 마찬가지로, 이 곡의 악보에는 심지어 마디줄이나 박자표도 없다. 그래서 연주자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중요한 것은 음 하나가 생장하며 쉬는 '숨'을 따라 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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