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발퀴레'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가운데 2번째 작품입니다. '발퀴레' 하나만으로도 4시간 또는 때로 5시간 이상 걸리기도 하는 대작이고, 4부작을 모두 공연하려면 중간에 쉬어 가는 날까지 반드시 포함해 일주일 정도가 필요합니다. 통영에서 이걸 다 공연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쉽지 않네요.
그래도 2019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으로 '발퀴레' 1막을 하게 됐습니다. 통영국제음악제를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익숙하실 지휘자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5년 만에 통영에 돌아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이지요. 그리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인 가수들이 출연합니다.
'지크문트' 역을 맡은 테너 김석철은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문 강력한 목소리를 가진 테너입니다. 제가 이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지난 2016년에 바그너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바그너 가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강병운, 연광철, 사무엘 윤, 전승현 등 음역이 낮은 분들이 그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여러 차례 출연했지만, 테너로는 국내 최초예요.
'지클린데' 역을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 또한 한국인답지 않게 묵직한 고음을 낼 수 있는 가수라서 역시 바그너를 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해 왔던 분입니다. 지난 2016년 국립오페라단이 '로엔그린'을 공연했을 때 로엔그린 역 김석철의 상대역인 '엘자'로 출연하는 등 바그너 오페라에 도전하고 있지요. 제 생각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발퀴레 중 지클린데 역에도 잘 어울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훈딩' 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여러 차례 하셨던 분입니다. 특히 '신들의 황혼'의 빌런(악당)인 '하겐' 역으로 유명하신 분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독일-오스트리아 가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인 '캄머젱어'(Kammersänger) 칭호를 지난 201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받았던 분이기도 합니다. 이 칭호는 노래 실력뿐 아니라 독일 시(詩)를 올바로 이해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받을 수 있다고 하지요. 말하자면 독일인이 판소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격입니다.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이끌어가곤 합니다. 노래 가사가 사건의 외면을 알려주는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관현악이 알려주는 식이고,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합창이 하는 역할을 바그너 오페라에서는 오케스트라가 하는 셈입니다. 이 말을 달리하면 노래 선율만 따라가서는 바그너 음악의 진수를 맛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발퀴레'의 깊은 내용을 이해하려면 가사와 음악의 상호작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독일어 가사를 따라가면서, 필요하다면 독한대역을 보면서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귀로는 관현악에 집중하는 식으로 주의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해야 하지요. 가사에 숨겨진 진실을 오케스트라가 알려주는 순간 전율을 느끼고 나면,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바그너 음악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진입장벽이 국내에 바그너 애호가가 많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발퀴레'는 바그너 작품치고는 '노래'의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사만 따라가더라도 제법 재미있을 거예요. 다만, '훈딩'이 말할 때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오케스트라, '지클린데'와 '지크문트' 사이에 말로는 전하지 못할 눈빛이 오갈 때마다 애절한 마음을 전하는 오케스트라, 두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을 때 마치 빛이 무대를 압도하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오케스트라 등을 놓치지 않는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퀴레 1막 전주곡에서, 이를테면 선동적인 리듬을 타고 흐르는 저음 현의 '다크 포스'에 집중해 보세요. 그 위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현의 움직임, 포르테(세게)와 피아노(여리게)를 순식간에 오가는 급박한 셈여림 변화, 무시무시하게 암울한 음색, 악마적인 화음 등에도 주의를 기울이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