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7일 금요일

소프라노 임선혜 인터뷰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렸던 인터뷰입니다.


Q.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전에 공연하셨던 것을 빼면, 지난 2015년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오르페오'를 주제로 공연한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 통영 공연입니다. 2015년 당시 통영국제음악당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벌써 2년 전의 일이지만 저와 당시 함께 했던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동료들에게도 아직 선명하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뛰어난 음향을 가진 아름다운 공연장과, 바다가 보이는 대기실은 정말 잊지 못한다며 지난주 함께 베를린 무직페스트에서 연주한 그 동료들이 다시 떠올리더군요. 아마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와 더불어 세상에서 제일 그림같이 멋진 대기실이라고요. 역시 저에게도 그렇답니다. 더불어 엄청나게 맛있게 먹은 음악당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기억에 남네요.

Q.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 여러 음반을 녹음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시히스발트 카위컨 지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있는데요, 한 성부에 한 명으로 합창과 독창을 겸하게 한 편성이 독특합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이 녹음을 하기 몇 년 전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카위컨과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적어도 한 성부에 두 명씩이었어요. 프로젝트 플랜에 합창단 언급이 없어서 이번에도 그런 방식일까 했는데, 첫 연습에 도착하니 정말 소프라노라고 나와있는 부분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한다는 말에 속된 말로 ‘멘붕’이 강림했죠. 다행히 그간 연주하며 들은 풍월 덕에 하루 만에 익혀서 차질은 없게 했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노래를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아리아와 듀엣 몇 곡 부르던 때와 달리 정말 '예수 탄생 이야기’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동료들과 가사를 맞추고, 또 바흐 특유의 수학문제 풀이 같은 각 성부 진행을 함께 노래하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한겨울 벨기에의 한 교회에서 녹음을 했는데, 공사 중이던 옆 건물의 소음 때문에 저녁에 시작해서 자정 넘어까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목도리를 온몸에 칭칭 감고 노래했던 기억도 이제 추억으로 남았네요.

Q.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처음 공연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첫 공연은 아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즈음이었을까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존 노이마이어의 연출, 안무로 함부르크 발레단과 한 공연이 기억에 아주 많이 남았어요. 베를린 도이체오퍼에서 오페라로 연출된 ‹마태오 수난곡› 프로덕션에 잠깐 참여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있었죠. 소설을 읽으며 내 머리로만 상상하던 것이 영화로 구체화되어 나왔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원래 연출되도록 만들어진 곡들이 아니고, 게다가 교회음악이기에 그 접근이 터부처럼 느껴졌던 것이 일반적 정서라, 뭔가 금지되었던 것의 안을 들여다보는 아찔함이 있었죠. 노이마이어의 발레에서 발레리노 예수가 나중에 십자가 지고 가는 장면들이 자유로의 춤으로 연출될 때 연주되는 바흐의 음악 역시 그를 따라 극장 전체를 일렁이며 춤추고 있었어요. 오페라를 넘은 종합예술의 어떤 완성점을 처음 맛보았다고 할까요? 십여 년 전에 비해 지금은 이런 시도들이 훨씬 많아졌어요.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년에 ‹요한 수난곡›을 스테이지 프로젝트로 만들기도 했고, 지난봄에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무대연출해서 엘프필하모니에 올린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지요.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새로운 시도에 많은 연출가들이 호기심을 쏟고 있답니다.

Q. 소프라노 성부를 맡은 솔리스트의 역할과 관련해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독특한 점이 있을까요? 바흐 칸타타와 비교했을 때, 바흐 수난곡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를지 가수로서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제에 따른 마음의 접근이겠지요? 한 곡은 수난을 노래하니 그 의미와 구원의 역사를, 다른 한 곡은 그 계획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바흐 오라토리오에서 솔리스트는 잘 차려진 음식 위에 올려지는 고명과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극의 줄거리 설명은 복음사가(Evagelist)가 하고 극은 합창이 이끌어갑니다. 그 줄거리 설명과 드라마 사이사이에 솔리스트들은 격양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읊지요. 이 부분들이 잘 읊어지고 진정성을 낳으면 관객들은 다음의 줄거리와 극들을 더 기대하며 공연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됩니다. 모든 바흐의 오라토리오들이 그런 역할을 솔리스트들에게 요구하고 제안하고 있지요. 다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하루에 모든 곡이 연주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약간은 다른 성격이 있어요. 원래는 "크리스마스 기간” 각각 다른 날들에 연주하도록 작곡된 것이라 큰 줄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지만, 6칸타타들을 하나로 만드는 큰 유기적인 결합은 덜합니다. 따라서 수난곡에서는 각 성부 아리아들의 위치와 배정을 어느 정도 계획했다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그런 큰 그림이 꼭 보이지는 않지요. 1번부터 6번까지를 하루 저녁에 연주하기도 하지만 어떤 공연들은 1, 4, 5, 6만 한다던가, 첫날은 1-3번, 두 번째날은 3-6번 이렇게 정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에 따라 공연에서 부르는 아리아가 거의 없을 때도 있지요. 그날의 무대 위에서 정자세로 더 많이 앉아있는 '감상의 날’이죠.

이 곡에서 또 주목할만 것은, 바흐가 자신이 세속칸타타에서 썼던 아리아들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인데, 마침 그 세속 칸타타들을 연주해본 경험이 있어서 제게도 흥미로웠던 부분입니다. 바흐가 자신이 이미 썼던 곡에 가사를 바꾸고 악기에 변화를 주어서 180도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는 곡으로 둔갑시키는데 아주 큰 능력이 있는 작곡가임을 후대에 음악가들이 감탄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즐기라고 유혹하는 ‘쾌락’(Wohllust)의 소프라노 아리아 (BWV213)가 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는 아기 예수에게 잘 자라는, 한없이 순수한 자장가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알토의 아리아로 바뀝니다. 성부가 가사를 조금 바꿈으로써 '아주 관능적인 아리아'에서 '아주 순결한 아리아'로 바뀌는 마술이 일어난 거죠! 바흐는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매력이 드러나는 작곡가입니다. 바흐 사후 바흐를 세상에 다시 소개해 그의 작품들이 만개하게 한 멘델스존이 문득문득 참 고맙답니다.

Q. 뤼벡 합창 아카데미(Chorakademie Lübeck)는 2014년에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카르미나 부라나' 공연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합창단입니다. 뤼벡 합창 아카데미와 전에 협연하신 일이 있나요?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함께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다만 지휘자 롤프 베크 선생님은 십여 년 전, 독일의 대표적 여름 페스티벌인 슐레스비히-홀스타인 페스티벌 디렉터로 계실 때 그 페스티벌 합창단과 함께 바흐의 ‹B단조 미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독일에서 합창 음악에 대가로 알려지셨기에 그분이 가는 곳이면 합창이 늘 특별하고 좋았지요. 오랜만에 뵙게 될 텐데 다시 바흐 음악으로 함께하게 되어 기대됩니다.

Q. 지난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페이스북으로 소프라노 황수미 · 박혜상 · 바리톤 유한승 씨를 극찬하면서 응원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신인 가수가 있나요?

둘러볼 기회가 없어서 다 응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실력 좋은 한국인 신인 가수들이 많습니다. 도밍코 콩쿠르에서 우승한 테너 김건욱도 그 중 하나인데, 지난해에는 부산에서 ‹사랑의 묘약›을 같이 공연할 기회가 있었지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음성과 음악을 대하는 겸손함 그리고 무대에서의 적극성이 앞으로 더 좋은 무대들을 열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친분이 있는,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감독인 마에스트로 만프레드 호넥씨가 찾고 있는 테너 음성인 것 같아서 적극 추천을 했는데 잘 성사되어 서로 기뻐하는 모습에 저도 괜히 뿌듯했답니다.

Q. 가수로서 느끼는 유럽 고음악계 및 오페라 극장의 최신 경향이나 판도를 국내 애호가 및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 소개하자면?

근 20년 전 저의 데뷔 초기에 유럽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가수들이 열 분도 채 안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한국 출신 성악가들을 유럽의 어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출신 음악가들이 많은 국제 콩쿠르 입상으로 극장 무대에 진출한 덕이기도 하고 더 넓게는 유럽이 자신들의 음악시장을 점차 개방해서 모든 민족들과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경쟁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어느 나라 가수는, 음악가는 대략 이렇더라 하는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테크닉뿐만 아니라 감성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만큼 열려있고 문화 공부도 많이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피부 색깔 등 많은 편견들과 선입견이 사라진 이상 아티스트, 연주자 개개인의 남다른 개성, 그리고 그 개성의 뚜렷함이 호감을 얻게 되면 많은 주목을 얻게 되는 것이죠. 동양인이 수석으로 앉아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동양인이 음악사 최초 서양 오페라에서 주인공이어도 거부감이 없는, 오히려 어떤 다른 색깔을 내어줄까 하는 기대를 사게 만들 수도 있는 시대. 더 이상 동양인이라 절대 안 된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는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음악을 맘껏 펼쳐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 같습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지구의 많은 나라들이 서로 가깝게 느껴지는 덕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열정과 인내로 국제무대를 지켜내시고 좋은 이미지들을 남겨주신 여러 음악가 선배님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있었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과정이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더 나은 발성법을 고민 중인 성악도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합니다.

미렐라 프레니를 좋아하던 시절, 성악에 입문하고 대학 입시를 치를 때까지는 아주 고음은 잘 안 나지만 제법 굵고 큰 소리가 나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상상이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제게 지금의 목소리를 갖도록 길을 닦아주신 분이 서울대 박노경 교수님이셨어요. 자기 몸에 어울리는 소리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국제 무대에 서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볍고 날씬해서 고음이 잘 나는 음성이 실제 이 아이의 몸에 맞지 않을까 하고 많이 연구하셨다고 해요. 저는 그 깊은 뜻은 감히 헤아리지 못했고 그저 선생님의 음악성에 늘 감탄하던지라 선생님을 무척 따랐지요. 그래서 2-3학년 때는 하이 C 가 겨우 나던 것이 4학년 때는 콩쿠르에서 Eb 이 나는 ‹청교도› 의 아리아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 들로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 데뷔 후 주로 고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된 통에 벨칸토 레퍼토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었지만,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가수로, 또 각 장르에 유연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선생님께서 제 몸에 무리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찾아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소리와 노래를 가장 오랫동안 들으셔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한국에 가면 레슨을 받고 조언을 구합니다.

또 성악가들은 노래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기가 힘들기에 연습이든 공연이든 되도록 녹음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요.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때로 민망하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게 할 때도 있지만, 내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으며 지향점과 지양점을 스스로 깨닫고 생각하는 꼭 지나야 하는 깜깜한 터널 같은 작업이지요. 덕분에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하고요. 때로는 다른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참고할 때도 있는데, 때마다 다르지요. 지금 당장 어떤 부분이 부족하거나 넘친다는 생각이 들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소프라노들을 듣기도 합니다. 캐슬린 배틀이 될 때도 있고, 엘리 아멜링이나 알린 오거(Arleen Auger) 가 될 때도. 최근에는 마리아 바요의 이태리 레치타티보 리듬에 반해서 많이 참고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성악도들이 유학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어린 나이에 무겁게 노래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래 건강하게 그리고 듣기 좋게 노래하기 위한 기본이 되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선생님의 좋은 귀가 한 성악가의 커리어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대해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해봐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몇몇 새 음반이 곧 출반됩니다.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와 비엔나 공연 실황 녹음을 한 헨델의 오페라 ‹실라›, 그리고 B-Five라는 리코더(Blockfloete) 그룹과 지난해 녹음한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의 Songs. 요절한 유태인 작곡가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 의 가곡 전집을 남독일방송국과 함께 녹음 중인데, 가곡 작곡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곡가의 다양한 면모를 세계초연 레코딩으로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올해 모차르트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로 내한해서 세미 스테이지 버전 모차르트 오페라의 진수를 보였던 르네 야콥스와 ‘프라이부르크 바로크오케스트라’가 다시 내년에는 ‘피가로의 결혼’으로 내한합니다. 영악하고 요염한 하녀에서 사랑스럽고 재치 있는 새신부, 수잔나로 함께 공연하게 되어 벌써부터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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