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0일 화요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나의 삶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Grand Wing』에 실린 글입니다. 인터뷰 대신으로 이런 글을 받았는데, 더 긴 글을 요약한 듯한 느낌이네요.


"음악은 사람의 감정 표현이다. 그 감정은 사실 매우 단순한 기쁨과 슬픔과 격정이며, 그 안에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 그것이 모두를 포괄한다. 일본인도, 에스키모도, 미국인도, 러시아인도. 이것이 음악의 커다란 장점이다."

모든 공연은 나에게 삶의 하이라이트다. 모든 공연이.

내 음악은 아직도 내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유는 몰라도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처음부터, 내가 의붓어머니 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던 그때부터 음악은 나에게 탐험이었다.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탐험이었다. 오늘날까지 변함없다. 음악은 나를 표현하려는 불타는 갈망이다.

왜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해가면서까지 지휘를 자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여행이 참 성가신 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공연을 해야 한다. 내 몸짓으로, 내 연주자들로 음악을 말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없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아버지 없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오랜 죄책감에 시달려온 내 인생의 영원한 의문이 되었다.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 음대 교수였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시골로 강제이주했다가 전쟁터로 끌려가셨다. 그리고 수형자 부대에서 작전 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1945년 1월 23일 공습을 피해 피난을 가야 했다. 할머니는 1년간의 피난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열두 달이 지난 1946년 1월 31일, 나의 변함없는 동반자인 질병과 죽음으로 얼룩진 나를 생후 5년간의 암울한 유년기로부터 구한 사람은 어머니의 사촌이었으며 훗날 내 양어머니가 되어주신 발리도레 에셴바흐였다. 내가 겪은 참혹한 일들로 나는 실어증에 빠졌고, 약 1년간의 치료 기간에 생전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피아니스트이자 가수, 음악 교사였던 발리도레 에셴바흐는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바흐를 밤늦게까지 연주했다. 직접 연주해 보겠느냐는 말에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나는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오케스트라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11살 때로, 푸르크벵글러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오늘날까지 나는 그들이 연주했던 거의 모든 음을 떠올릴 수 있고, 저 엄청난 마법사 푸르트벵글러의 멋들어진 모습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를 불타오르게 해서 엑스터시 상태로 보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치른 유일한 '오디션'은 196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앞에서였다. 흔치 않게도 카라얀은 내 연주를 한 시간이나 들어 줬다. 이후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진행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에 나를 섭외했다. 그렇게 해서 대단한 친분이 생겼고, 나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준 배움의 과정이 시작됐다.

나에게 도움을 준 또 다른 위대한 마에스트로는 조지 셸이다. 그는 악보 분석에 관한 획기적이며 또한 상호보완적인 통찰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내 미국 데뷔를 주선하여 1969년 그가 지휘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도록 해줬고, 나는 그와 함께 매우 열심히 연습할 필요가 있었다. 피아노 리허설이 업무상 신뢰 관계로 발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는 모든 도시, 모든 오케스트라 리허설, 리허설에 이은 모든 토론에 그가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에게 딕션을 배웠고, 프레이징, 명료함, 투명함을 배웠다. 카라얀에게는 색채, 뉘앙스, 분위기 전환을 배웠다. 셸이 그렸다면 카라얀은 칠했다. 안타깝게도 셸은 너무나 이른 1970년에 타계했다.

나는 지휘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1964년에 치른 시험 이후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생각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도전하려는 열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몸동작이 지휘에 적절한가? 내가 오케스트라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가?

내 50번째 생일이 계시였다. 또 다른 내 위대한 멘토 레너드 번스타인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현자가 말하기를 모든 생애 주기는 숫자 7에 기초하며, 7년이 7번 지나면 안식 기간을 가지면서 삶을 돌아보고 열린 생각과 변화를 받아들일 자유를 찾아야 한다 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삶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찾고, 마지막 남은 공포와 집착과 걱정을 없애 나갔다. 내 인생의 지평선이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페스티벌 국제 청소년 오케스트라 및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를 창립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더 최근에는 마이클 틸슨 토머스와 함께 삿포로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 및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동 예술감독이 되었다.

젊은 음악가를 모아 오케스트라를 만들거나 솔로 연주자로서 국제적인 경력을 쌓게끔 하는 일은 모두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모아서 느리게 변하는 세상에 맞서게끔 돕는 일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지루함과 싸울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청춘의 심장에 있는 의기와 결의가 불가능을 이겨낼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엔진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여기 내가 있다! 나는 내가 10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지휘를 하고 있기를 바란다. 내가 99살일 때에도 여전히 새로운 발견에 열려 있을 것이며,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욱 그러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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