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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0일 일요일

한재민의 윤이상 첼로 협주곡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2022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신동 첼리스트로 유명한 한재민이 크리스티안 바스케스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재민의 첼로 현 하나가 격렬한 연주를 견디지 못하고 경연 도중에 끊어졌습니다. 새로운 현으로 교체할 때까지 경연은 중단되었지요.

끊어진 현이 첼로 현 가운데 가장 굵은 ’C 현’이라는 점이 특이했지만, 현악기가 연주 도중에 끊어지는 일은 가끔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끊어졌던 현이 얼마 안 가서 또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한재민은 처음 현이 끊어졌을 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두 번째로 끊어졌을 때에는 정말로 당황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백스테이지에 있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한재민이 당황한 모습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네요.

저는 당시에 방송 중계차량에서 아주 작은 모니터 화면과 소음 속에서 작게 들리는 소리로 연주를 듣느라 현장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현이 세 번째로 끊어졌을 때에는 긴가민가했다가, 연주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현이 끊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봤더니 현은 정말로 세 번 끊어졌고, 한재민은 연주를 세 번이나 중단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 끊어진 ‘C 현’ 대신 다른 현으로 연주를 이어갔다고 하네요.

나중에 큰 화면으로 실황 영상을 다시 보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재민은 현이 두 번째로 끊어졌을 때에도 남은 현으로 1분 정도 연주를 이어갔더군요.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연주를 중단한 다음 심사위원들을 향해 현을 교체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현이 끊어진 순간은 다시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한 지 1분이나 되었을까 싶었던 때였습니다.

윤이상은 첼로 협주곡 중간 부분에서 기타 피크로 현을 튕기는 연주법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거문고 현을 술대로 뜯는 것을 연상시키지요. 현이 실제로 끊어졌던 순간은 ’거문고 피치카토’를 지나서 현을 활로 켜던 때였지만, 이 작품에서 첼로의 가장 굵은 ’C 현’이 여러모로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재민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C 현’이 끊어진 일도 한 번 있었다고 하더군요.

윤이상 첼로 협주곡에서 첼로는 윤이상 자신을 상징합니다. 윤이상은 이 곡에서 첼로를 독주 악기로만 사용했을 뿐 오케스트라 악기로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첼로가 오케스트라 전체와 홀로 맞서는 식으로 음악이 흐르고, 그 가운데 홀로 고군분투하는 첼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첼로 현이 세 차례 끊어진 해프닝은 의외로 작품과 어울리는 드라마적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윤이상 첼로 협주곡에서는 윤이상이 첼로로 전하는 ’독백’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재민의 ’독백’은 대단했지요. 윤이상의 딸 윤정 선생은 ’영혼이 담긴 연주’라며 한재민을 극찬했습니다. 또 이 작품에는 목탁 소리, 취침나팔 소리, 망자를 태운 배가 저승을 향해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소리 등이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 윤이상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

“감방에서의 지리하고 답답한 긴 하루가 지나가면 취침 나팔 소리가 울린다. 슬픈 멜로디의 나팔 소리, 그리고 깊은 정적이 시작된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먼 산 속 절간에서 울려오는 목탁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느 죄수가 사형될 때 스님이 그 영혼을 인도하기 위하여 염불하며 두드리는 소리라고….”

세 차례 악재에도 불구하고 한재민은 1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에서 윤이상 곡으로 1위 입상자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첫해인 2003년에 고봉인이 윤이상 첼로 협주곡으로 2위에 입상한 일이 있었지만, 보통은 다른 작곡가의 협주곡을 선택한 참가자들이 결선에 오르더군요. 올해는 달랐습니다. 결선 곡으로 윤이상 협주곡을 선택한 참가자가 꽤 많았고, 그 가운데 한재민과 정우찬이 결선에 올라 1위와 2위를 차지했지요. 이런 일이 자주 있기를 바랍니다.

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올해의 라이벌 연주자: 임윤찬 vs. 박경선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2019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1차 본선 경연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던 한 참가자가, 곡이 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는 대목 첫 마디에서 엉뚱한 선율을 연주하고는, 잠시 멈칫했다가 티 나지 않게 상황을 수습하고 부드럽게 연주를 이어갔습니다.

저는 이때 백스테이지에서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따라가며 곡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 실황 중계 자막이 제때 나오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곡 진행 상황에 따라 직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무전으로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른 참가자가 악장 사이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 그리고 하이든 소나타를 끝내고 다른 곡을 연주하기 전에 다시 눈물을 닦는 모습까지 실황 중계 화면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그 참가자가 연주를 마치고 나올 때 격려의 한마디를 해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울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심사 결과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2차 본선 진출자 명단에 그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 참가자의 연주가 실수를 만회할 만큼 훌륭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결과 발표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그 사람에게 제 동료들이 재빨리 연락해서 2차 본선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그 사람은 끝내 결선에 진출했고, 2위에 입상하는 대역전극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참가자의 이름은 박경선입니다.

1위를 차지한 임윤찬은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결선 때에는 박경선과 접전 끝에 우승했을 뿐아니라 젊고 유망한 연주자에게 주는 박성용특별상과 관객 투표로 주는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특별상까지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임윤찬은 만 15세로 중학교에 해당하는 예원학교 3학년이라고 하네요. 역대 최연소 우승자이고,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규정상 나이 제한을 불과 몇 개월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고도 합니다.

임윤찬의 우승을 보면서 저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떠올렸습니다. 조성진이 하마마쓰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을 때 나이가 15살이었지요.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계적인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습니다. 조성진은 파리 음악원에서 미셸 베로프를 사사했고, 그 미셸 베로프가 2019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장이었다는 대목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하마마쓰 콩쿠르에 우승한 15살 조성진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15살 임윤찬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을 보았지요. 두 사람의 연주 스타일은 달랐지만, 15살 나이를 믿기 어려운 대단한 실력을 보여준 점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15살 조성진의 연주를 평가한 제 글을 올해 임윤찬의 연주에 대해서도 그대로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조성진이 천재인 까닭은 자연스러운 프레이징과 루바토, 세련된 셈여림 따위로 음악을 다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 구조와 흐름을 이해하고 음 하나하나가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테크닉만 앞세우면 기계처럼 딱딱해지게 마련이고,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루바토를 써 봐야 유치해질 뿐이다. 그러나 조성진은 음악에 끌려가지 않고 다스릴 줄 아는 경지에 벌써 올랐다.”

그래서 기대됩니다. 10여 년 뒤의 임윤찬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요?

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결선 진출자 전원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 예년과 달랐습니다. 국제 콩쿠르인데도 한국인이 상위권을 ’싹쓸이’해버리니 조금 난처한 것도 솔직한 마음인데요, 이와 관련해 미셸 베로프 심사위원장이 시상식에서 한 말이 멋져서 인용합니다.

“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는 154명이 지원했으며 국적은 다양했습니다. 심사위원 가운데 2명이 한국인이고, 7명이 외국인입니다. 뜻밖의 결과는 오히려 모든 심사위원이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심사했음을, 그리고 그 결과 가장 뛰어난 참가자가 입상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참가자 가운데 심사위원의 제자로 2년 이내에 3개월 이상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해당 심사위원은 해당 참가자를 채점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올해 본선 진출자 가운데 해당자가 2명 있었는데, 둘 다 결선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2018년 11월 12일 월요일

첼리스트 이상은, 올해의 윤이상 연주자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날이었습니다. 윤이상 선생의 기일을 맞이해 많은 사람이 추모지로 모였습니다.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고서 첫 번째로 맞는 기일이었고, 그래서 더욱 뜻깊은 자리였지요. 추모식 분위기는 대체로 밝았습니다.

이날은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이 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콩쿠르 때 개인적으로 응원했던 참가자 2명 가운데 한 명이 결선에 진출한 참이었지요. 결선에 진출하면 윤이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했던 리처드 내러웨이가 본선 2차에서 안타깝게 탈락했지만, 본선에서 가장 인상 깊은 윤이상 연주를 들려주었던 이상은이 결선에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이번 콩쿠르부터는 경연 실황을 인터넷 생중계했습니다. 저는 생중계 방송 자막을 실시간으로 감수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백스테이지 스피커에서 나는 조악한 소리로 연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행사 진행을 위한 다양한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까닭에 그나마 음악 소리가 잘 안 들리기도 했지요. 본선 1차까지는 얼핏 들어도 몇몇 참가자의 연주에서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 어설픈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본선 2차부터는 백스테이지에서 연주의 수준을 판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더군요.

그래서였을 겁니다. 결선 진출자 가운데 두 명은 백스테이지 스피커로만 들었을 때는 어떻게 결선까지 갔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작품 해석이 제 취향에 맞지 않았을 뿐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연주라는 사실을 결선 전날 리허설을 콘서트홀 안에서 듣고서야 이해하게 됐지요. 둘 가운데 한 사람은 3위 및 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특별상을 받은 레프 십코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무려 공동 1위를 했던 이정현이었습니다.

이정현 씨와 함께 공동 1위에 입상한 이상은 씨는 본선 때 백스테이지에서 나는 소리로도 참 대단한 윤이상 연주를 들려주었던 참가자입니다. 본선 2차 때 연주한 ‹공간 I›(Espace I)도 훌륭했지만, 본선 1차 때 연주한 ‹활주›(Glissées)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비브라토를 할 때 진폭이 유연하게 변화하는 것이 서양식 비브라토보다 한국 전통 '농현'에 가깝더라고요. 예전에 거문고나 가야금을 배운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지요!

서양음악에서 개별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지는 반면,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개별음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음악적 소우주를 이루지요. 윤이상 선생이 이 차이를 붓글씨와 펜글씨의 차이에 비유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많이들 아실 겁니다. 윤이상 선생은 동아시아 음악의 '살아있는 음'을 서양음악의 틀 안으로 옮겨 오려고 다양한 장식음과 글리산도 등을 사용했는데, 이때 비브라토마저도 '살아있게' 하는 일은 대개 연주자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서양 연주자들은 이런 감각을 갖고 있지 않지요. 윤이상 선생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던 몇몇 연주자는 조금 다르지만, 한국인인 제가 듣기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또 한국인 연주자라 하더라도 서양악기만을 연주해 온 사람은 대개 서양 연주자와 딱히 다르지 않더군요. 악보에 구체적인 지시가 없는 '살아있는 비브라토'를 표현해 낸 이상은 씨는 이런 점에서 특별합니다. 예전부터 윤이상 해석에 탁월함을 보여 온 첼리스트 고봉인 씨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연주자가 아닐까 해요.

서양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이상은 씨는 훌륭했습니다. 사실 결선 때 자잘한 실수가 좀 있어서 1등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공동 1위를 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물론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던 이정현 씨도 훌륭했지만, 윤이상 곡을 더 훌륭하게 연주한 이상은 씨가 저는 참 마음에 드네요. '올해의 윤이상 연주자'라 부를 만합니다!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올해의 라이벌 연주자: 멍포 리 vs. 엘라 판 파우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리멍포(李孟坡)는 대만 출신 에스파냐 사람입니다. 제1 국적이 에스파냐라서 서양식으로 '멍포 리'(Mon-Puo Lee)라 공식 표기했고, 한글 표기는 국립국어원에서 고시한 표준외래어표기법 용례를 따랐지만, 우리끼리는 문포, 만포 등 한국적인 발음으로 부르곤 했지요.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이맹파'가 되겠네요. '가파른 언덕'이라는 뜻이고, 중국식으로 성조를 보태서 읽으면 '멍↘포―'가 되는 듯합니다. 베를린 예술대학 학생으로, 저 유명한 옌스 페터 마인츠를 사사하고 있습니다.

엘라 판 파우커(Ella van Poucke)는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김새를 보면 이 아가씨야말로 에스파냐 쪽 사람 같아요.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대학원생이고, 프란스 헬메르손을 사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프랑크푸르트 HR방송교향악단,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 비올리스트 노부코 이마이 등과 협연한 일이 있을 만큼 이미 경력이 화려하네요.

이 두 사람이 2015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리멍포가 본선 경연 내내 화제가 되며 우승 후보로 꼽히곤 했고, 엘라 판 파우커는 결승까지 오른 일이 뜻밖이라는 의견이 더러 있을 만큼 실력 차이가 확실해 보였습니다. 저는 2차 본선 때 엘라 판 파우커의 프로코피예프 첼로 소나타를 듣고 절대로 결선에는 못 갈 거라고 예상했다가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요.

엘라 판 파우커의 본선 경연을 들으면서, 저는 사춘기 소녀 감성이 연주에 묻어난다고 느꼈습니다. 풋풋하다기보다는 유치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선 전날 슈만 협주곡 리허설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엘라의 연주는, 말하자면 '슈만스러운' 연주였습니다. 슈만은 제 취향에 안 맞는 편이라 그것이 편견이 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심사위원들은 제가 보지 못한 장점을 훤히 꿰뚫어 봤었나 봅니다.

사춘기에 할 법한 망상과 유치한 행동을 일컫는 속어로 '중2병'이라는 말이 있지요. 엘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제가 떠올린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2병'이 차라리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만한 때가 낭만주의 시대라 할 수 있겠고, 슈만은 그런 시대정신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작곡가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슈만 첼로 협주곡은 엘라와 너무나 잘 어울리더군요.

천운이 따랐던 엘라 판 파우커와 달리, 리멍포는 운이 없었습니다. 본선 2차 경연 중 첼로 활이 부러져서 연주를 중단했다가 손에 익지 않은 활을 가져와 연주를 이어가는 사고도 있었고, 다음날 급히 활을 수리해 와 결선 때 사용했다더군요. 그러나 가장 큰 불행은 결선에서 첫 번째 순서가 된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콩쿠르 때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첫 번째 순서로 무대에 나와 실수를 연발하면서 끝내 입상에 실패한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 제법 있을 겁니다. 콩쿠르에서는 뒷 차례일수록 유리하고, 첫 번째가 되면 심리적 압박감이 엄청나다고 하지요. 리멍포가 결선 무대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첫 공식 행사로 참가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연 순서를 추첨합니다. 결선 때에는 심사위원 판단에 따라 순서를 새로 정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순서를 바꾸지 않기로 결정했다네요. 그래서 리멍포는 결국 2등이 되었지만, 그만하면 잘했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해요.

리멍포가 첫 번째 순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마지막 순서인 김정환이 우승할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두 사람 얘기만 했는데, 사실 김정환 씨도 만만치 않은 우승 후보였지요. 결선 전날 리허설을 지켜본 저는 김정환 씨를 포함해 결선 진출자 세 명 모두 일등을 할 수 있고, 가장 큰 변수는 리멍포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선 때 김정환 씨가 연주한 곡은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이었지요. 저는 사실 이 곡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곡이 얼마나 멋지던지요! 결선 연주를 듣고서 저는 이 사람이 일등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란 점이 걸리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3등이 될 줄은 참말 몰랐지요! 그리고 설마 하던 엘라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심사위원장 라이문트 트렝클러 선생은 결과 발표에 앞서 콩쿠르를 '경쟁'이 아닌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는 일이 중요하다는 요지로 명연설을 했지요. 제 예상을 여러 차례 벗어난 이번 콩쿠르를 지켜보면서 저도 한 수 배운 듯합니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첼로를 위한 노래

『한산신문』에 연재중인 칼럼입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글이 실릴 때면 결선을 앞두고 있겠지요. 글을 다듬고 있는 11월 3일은 윤이상 선생 기일입니다. 지난 1차 본선에서는 참가자들이 윤이상 첼로 에튀드 중 '파를란도'와 '부를레스크'를 비롯해 리게티, 펜데레츠키, 힌데미트, 코다이, 브리튼, 뒤티외 등 현대곡 위주로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2차 본선을 위해 윤이상 작품 가운데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 등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작곡가이자 첼리스트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첼로 부문으로 열리는 올해 콩쿠르가 더욱 뜻깊습니다. 올봄에 있었던 통영국제음악제에서는 2009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첼리스트 크리스틴 라우가 독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날 크리스틴 라우가 연주했던 윤이상 《에스파체 I》이 생각나네요. 공연 직후에 이수자 여사께서 연주자를 끌어안고 극찬을 하던 기억도 나고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이 끝나고 한 주가 지나면, 첼리스트 율리안 슈테켈이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합니다. 율리안 슈테켈은 지난 2010년 뮌헨에서 열린 ARD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여러 상을 휩쓸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연주자이지요. 로저 노링턴,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라르스 포크트, 에벤 콰르텟 등 세계 정상급 음악가들과 협연하며 명성을 쌓고 있기도 합니다.

율리안 슈테켈이 연주할 곡 가운데 이번 콩쿠르 과제 곡이 하나 있습니다. 프로코피예프 첼로 소나타이지요. 마침 공연 안내 책자에 들어갈 작품 해설을 쓰고 있어서 이 곡이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서슬 퍼렇던 스탈린 정권에서 프로코피예프가 '형식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어 시달림을 받던 가운데 쓴 곡입니다.

"인류 – 얼마나 당당하게 들리는 말인가!"

러시아 대문호 막심 고리키가 쓴 희곡 『밑바닥에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고리키는 밑바닥 인생 '사틴'의 입을 빌려 사람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프로코피예프는 첼로 소나타 악보 앞머리에 이 말을 인용했지요. 인간의 존엄성을 음악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윤이상 작품세계와도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면, 통영 전통 예술인 '오광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윤이상 선생이 한 말을 조금 인용할게요. "그런데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통영에는 야외극을 공연하는 곳이 있었고, 오광대 놀이로 유명했습니다. 오광대 놀이는 일종의 음악극인데 극의 내용은 대부분이 계급 대립 그러니까 양반과 하층 계급, 농민, 어민, 상인, 마름, 여기에 순사까지 포함된 대립이었습니다." (윤이상 ‧ 루이제 린저, 『상처 입은 용』. 랜덤하우스코리아.)

11월 8일 일요일 오후 3시에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입상자 연주회가 열립니다. 1위 입상자는 미하엘 잔덜링이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주곡을 연주하고, 2위 입상자는 피아노 반주가 있는 곡, 다른 입상자는 독주곡 등을 연주할 예정이지요. 누가 입상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윤이상 곡이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연주할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11월 26일 목요일에는 최근 유럽에서 이름처럼 '돌풍'(Rafale)을 일으키고 있는 스위스 출신 피아노 트리오인 '라팔 트리오'(Trio Rafale)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드뷔시 피아노 트리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번과 더불어 윤이상의 1972년 작품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3중주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올 11월은 여러모로 윤이상 음악이 통영에 자주 울려 퍼지는 한 달이 되겠네요.

2014년 11월 9일 일요일

올해의 라이벌 연주자: 루크 쉬 & 흐라챠 아바네시안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흐라챠 아바네시안(Hrachya Avanesyan)은 아르메니아 출신 벨기에 사람으로 독일 쾰른 음대를 졸업하고 칼 닐센 콩쿠르, 예후디 메뉴힌 콩쿠르 등 세계 정상급 콩쿠르에서 우승한 떠오르는 스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루크 쉬(Luke Hsu)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이고, 콩쿠르 입상 경력은 흐라챠 아바네시안과 견주면 초라합니다.

이 두 사람이 2014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라이벌로 만났습니다.

저는 콩쿠르 참가자들의 이름과 경력을 얼핏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선 경연을 지켜봤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람'이 줄곧 탁월한 연주를 했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중국 사람'은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과 동시에 번뜩이는 천재성을 내비치면서 감탄할 만한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2차 본선이 끝나고 나서, 이제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 두 사람이 1위와 2위를 놓고 다투게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근소한 차이로 루크 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선에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로 무대에 올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큰 실수를 잇달아 저지르면서 연주가 엉망이 되고 말았지요. 그동안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무너질 줄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뽑히면 압박감이 어마어마해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더니, 그래서였을까요.

두 번째 무대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대단한 명연을 펼쳐 2위를 거머진 한국의 설민경 씨에 이어, 루크 쉬가 아바네시안과 같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습니다. 첫 번째 무대에서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지만, 다시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크 쉬가 들려준 연주가 너무나 엄청났던 것이지요. 연주를 듣는 내내 전율을 느끼던 저는 협주곡이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에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 고동과 함께 루크 쉬의 광기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차분함을 되찾은 지금 돌이켜 보건대, 아바네시안이 실수 없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더라도 우승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어딘가 불안정하다고 느낀 모습의 정체는, 말하자면 천재의 광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을 적나라하게 밝힐 줄 아는 소설가처럼, 멋지게 보일 생각을 버릴 줄 아는 배우처럼,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광인은 탁월한 예술가가 될 자격 하나를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기도 합니다.

루크 쉬가 바로 그런 천재였습니다. 입을 헤 벌린 채로 오케스트라 연주에 바보처럼 몸을 흔드는 모습과, 브람스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격정적인 파토스가 겹치면서 광기와 예술의 접점이 만들어졌고, 그 연주를 듣던 저는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한 발 디뎌 본 듯한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돌이켜 보면 루크 쉬가 본선에서 연주한 윤이상 연주도 탁월했습니다. 특히 2차 본선에서 연주한 《대비》(對比; Kontraste)를 듣고 저는 이 사람이 윤이상 특별상을 받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지요. 어쩌면 이때 천운(天運)이 루크 쉬에게 깃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윤이상 특별상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 우승까지 해왔거든요.

마지막 순서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배원희 씨가 설민경 씨 못지 않은 명연을 펼치면서, 흐라챠 아바네시안은 끝내 4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가 입상자 순위 밖으로 밀려난 것이지요.

음악 '비즈니스'에서는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루크 쉬가 앞으로 얼마나 성공한 음악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루크 쉬보다 먼저 스타가 될 듯한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입상자 출신이라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크 쉬가 이날 보여준 광기 어린 천재성을 앞으로도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결국 음악사에 거장 연주자로 남을 겁니다. 그때 저는 자랑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우승자 출신이라고, 제가 이날 거장 연주자의 젊은 시절을 보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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