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한 해를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공연을 되새겨 봅니다. 저는 자칭 타칭 바그네리안, 즉 바그너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었던 ‘발퀴레’ 1막이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제게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지휘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와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의 탁월한 음향이 만나 압도적인 ‘바그너 사운드’를 들려준 공연이었지요. ’지크문트’ 역 테너 김석철, ‘지클린데’ 역 소프라노 서선영, ‘훈딩’ 역 베이스 전승현 선생의 노래 또한 대단했습니다.
통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9월 마르쿠스 슈텐츠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파르지팔’ 모음곡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을 발췌 연주하면 보통 관현악곡이 되거나 또는 ’구르네만츠’ 역 베이스 정도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날 공연에서는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선생의 카리스마가 돋보이기도 했지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미하엘 잔덜링이 지휘한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5월 17일 부산에서 최수열이 지휘한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 ’화염 속의 천사’와 ’에필로그’를 연주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통영 공연에서는 작은 소리까지 알알이 살아 움직이는 ’음향복합체’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면, 부산 공연에서는 소리를 섬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공연장 음향에 맞서 무시무시한 온도로 타오르던 음향적 ’화염’이 훌륭했습니다.
또 최수열-부산시향 공연에서는 ’에필로그’에서 서양음악 전문 소프라노 대신에 국악 전문 가수를 기용한 아이디어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음악학자 이경분 선생은 ’에필로그’를 두고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곡소리의 ‘윤이상적 버전’”이라 평한 바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 겉소리와 속소리를 오가는 박민희 선생의 창법이 ’곡소리’를 더욱 뚜렷이 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박민희 선생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 음악극 ’귀향’에서 여창가곡을 불렀던 바로 그분이지요.
지난 10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티에리 피셔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날 불레즈 ‘노타시옹’을 실연으로 들어본 것이 가장 좋았고, 같은 곡을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이브 티보데가 협연한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도 훌륭했고, 생상스 교향곡 3번에서는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압권이었습니다. 제가 롯데콘서트홀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바로 파이프오르간이에요. 윤이상 곡 가운데 파이프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1971년 작품 ’차원’(Dimensionen)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올해 통영에서 있었던 공연 가운데 가장 열광적인 관심을 받았던 것은 ‘조성진과 친구들’ 시리즈였을 겁니다. 저는 맡은 일 때문에 벨체아 콰르텟,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협연 공연과 조성진 독주회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성진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라 지휘와 협연을 한꺼번에 하는 공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공연만큼은 운 좋게 제대로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본 공연뿐 아니라 리허설까지 챙겨볼 수 있었지요.
조성진이 오케스트라 소리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통영에서 있었던 첫 리허설 때에는 조성진의 지휘 테크닉이 생각 이상으로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면, 다음날부터는 세부를 집요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 감탄했습니다. ‘지휘자 조성진’은 모차르트는 물론이고 쇼팽 협주곡에서도 생각 이상으로 ’폴리포닉한’ 소리를 이끌어 내더군요. 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이렇게 입체적인 소리를 뽑아냈으면 ‘연주자가 지휘도 하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야 할 듯”하다고요.
그밖에 필리프 헤레베허가 지휘한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몬테베르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와 야나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보았던 파리 오케스트라의 말러 ’대지의 노래’도 생각납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줄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