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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금요일

애플 뮤직 클래시컬, 클래식 감상의 새 시대 열까?

성남아트센터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아트뷰’에 기고한 글입니다. 바빠서 거절할까 생각했다가, 부탁받은 시기가 마침 설 연휴라서 그냥 연휴 때 시간 내서 써버렸던 글.

발간된 글에는 편집자의 수정이 일부 들어갔지만 이곳에는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원래 제목은 「애플 뮤직 클래시컬과 클래식 음악 스트리밍의 미래」였는데 고친 제목이 낫네요.

원문 링크:

https://www.artview.or.kr/post/february-trend-one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래 소리를 저장하는 매체는 꾸준히 바뀌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클라우드’라 불리는 저장소에 있는 음악을 인터넷으로 전송·재생하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애플은 스포티파이의 경쟁자였던 비츠 뮤직을 인수해 2015년부터 ‘애플 뮤직’을 내놓았다. 2021년에는 클래식 음악 전문 스트리밍 서비스 ’프라임포닉’을 인수해 이듬해 ’애플 뮤직 클래시컬’을 내놓았고, 2024년 1월 24일부터 이것이 한국에도 공식 서비스되고 있다. 애플 뮤직이 한국 서비스를 개시한 것은 2016년으로, 애플 뮤직 클래시컬은 기존의 애플 뮤직과 별개의 서비스가 아니라 같은 백엔드(backend, 즉 ’엔진’)에 별개의 앱을 사용해 사용자경험을 분리해 낸 것이다. 그래서 애플 뮤직 구독자는 애플 뮤직 클래시컬을 추가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애플 뮤직이 클래식 음악을 따로 분리한 것은 클래식 음악의 특수성과 그에 따른 메타데이터(metadata) 때문이다. 즉 연주자와 작곡가가 분리되고, 교향곡·협주곡·소나타 등의 제목으로 여러 작곡가의 다양한 작품이 있으며, 그것이 또 여러 악장으로 나뉘는 등의 특성 때문에 기존 애플 뮤직으로는 원하는 음악을 검색하는 데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애플 뮤직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런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데다가 그나마 애플 뮤직이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와 비교해 단점이 덜하기도 했다.

애플 뮤직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계 1위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에 한정하면 이다지오(IDAGIO)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글쓴이는 애플 뮤직과 특히 애플 뮤직 클래시컬이 시장의 판도를 결정하는 위치를 굳힐 것으로 예상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애플 뮤직이 확보한 음원의 방대함이다. 통계의 함정이 있는 ‘객관적인 수치’를 내세우는 대신,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징후적인 사건들을 거론하겠다. 애플은 2016년에 경쟁 스트리밍 업체인 타이달을 인수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다. 2017년에는 음반사 낙소스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클래식스온라인’ 사업을 중단했다. 공식적인 사업 중단 이유는 기술 제휴사가 영업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2023년에는 애플이 클래식 전문 음반사 BIS를 인수했다.

무엇보다 애플 뮤직 클래시컬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파리 국립 오페라, 카네기 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유명 연주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그들의 공연 실황 음원을 일정 기간 독점 서비스하고 있다.

공룡 기업인 애플은 음반사와 경쟁 스트리밍 업체를 가리지 않고 인수할 수 있는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현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는 기술력과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음악 스트리밍과 관련해 애플의 진짜 경쟁자는 음악 산업에 속한 기업이 아니라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기술 기업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애플만큼 음악 산업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 기업은 없으며, 클래식 음악에 한정하면 더더욱 그렇다.

둘째, 애플 뮤직은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라는 새로운 기술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돌비 애트모스는 내용을 왜곡해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가변 16채널 오디오’다. 모노 녹음과 스테레오 녹음이 전혀 다른 청각 경험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비 애트모스로 녹음된 음악을 올바른 재생 장치로 들으면 기존의 스테레오(즉 2채널) 음원과는 한 차원 다른 청각 경험을 할 수 있다.

멀티채널 오디오 기술이 나온 것은 수십 년 전이며 돌비 애트모스 기술이 나온 것은 2012년이다. 그러나 음반산업은 멀티채널 녹음을 도입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소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2021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애플 뮤직이 돌비 애트모스를 전격 도입한 것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돌비 애트모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는 있었으나 시장에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애플이 나서면서, 음반사들은 앞다투어 돌비 애트모스로 녹음된 음원을 내놓거나 기존 음반을 돌비 애트모스로 리마스터링해서 내놓기 시작했다.

돌비 애트모스 녹음을 재생하려면 멀티채널 오디오와 더불어 이른바 ‘사운드 오브젝트’(Sound Object)를 처리할 수 있는 장치(리시버)가 필요하다. 오늘날 TV에 흔히 연결해 사용하는 사운드바, 또는 스마트폰에 연결된 이어폰·헤드폰 종류로도 제한적으로 돌비 애트모스 재생이 가능하다. (다만, 이어폰·헤드폰으로 재생하는 돌비 애트모스는 공간감을 위해 전체적인 음질을 희생하는 본말전도가 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어폰·헤드폰으로 재생하는 돌비 애트모스는 물리적인 2채널 스피커에 소리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등의 기술로 가상의 멀티채널 오디오를 구현한 것이다. 즉 채널당 정보량을 희생한다.)

셋째, 애플이 구축한 기술 생태계에서 오는 편리함이다. 물론, 애플 뮤직 또는 애플 뮤직 클래시컬을 이용하려면 애플에서 만든 기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애플에서 만든 기기로 애플 뮤직을 이용하는 것과 다른 기기를 이용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애플의 시장지배력이 그다지 크지 않은 국내 상황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일 수 있으므로 개인적인 경험만을 짧게 소개하겠다.

내가 사용하는 전화기, 손목시계, 태블릿 컴퓨터와 데스크톱 컴퓨터, 오디오와 TV 셋톱박스 등은 모두 애플에서 만든 것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아이폰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애플의 오늘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고도 2년이 지난 2013년부터였고, 애플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에 나온 애플 뮤직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기기의 시너지 효과를 경험한 이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국내에도 유의미한 숫자로 존재한다.

글쓴이는 애플 뮤직 외에도 스포티파이, 타이달, 코부스,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 유튜브 뮤직, 클래식 음악 전문 서비스인 이다지오, 그리고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로 베를린필 디지털 콘서트홀과 메디치TV 등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구체적인 비교를 하지는 않겠다. 특정 기업이 구축한 테크놀로지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내리는 평가가 공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 서비스는 일정 기간 무료로 사용해 볼 수 있으므로 직접 경험해 보고 판단하기 바란다.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가상현실 기술이 대중화될 것으로 예측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베를린 필하모닉홀과 무지크페라인잘과 라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하는 공연 실황이 가상현실 형태로 실황 중계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플은 최근 ’비전 프로’라는 고글 형태의 제품을 출시했다. 미래가 멀리 있지 않다.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2019 올해의 공연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2019년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한 해를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공연을 되새겨 봅니다. 저는 자칭 타칭 바그네리안, 즉 바그너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었던 ‘발퀴레’ 1막이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제게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더 리브라이히가 지휘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와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의 탁월한 음향이 만나 압도적인 ‘바그너 사운드’를 들려준 공연이었지요. ’지크문트’ 역 테너 김석철, ‘지클린데’ 역 소프라노 서선영, ‘훈딩’ 역 베이스 전승현 선생의 노래 또한 대단했습니다.

통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9월 마르쿠스 슈텐츠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파르지팔’ 모음곡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을 발췌 연주하면 보통 관현악곡이 되거나 또는 ’구르네만츠’ 역 베이스 정도가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날 공연에서는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선생의 카리스마가 돋보이기도 했지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미하엘 잔덜링이 지휘한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5월 17일 부산에서 최수열이 지휘한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 ’화염 속의 천사’와 ’에필로그’를 연주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통영 공연에서는 작은 소리까지 알알이 살아 움직이는 ’음향복합체’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면, 부산 공연에서는 소리를 섬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공연장 음향에 맞서 무시무시한 온도로 타오르던 음향적 ’화염’이 훌륭했습니다.

또 최수열-부산시향 공연에서는 ’에필로그’에서 서양음악 전문 소프라노 대신에 국악 전문 가수를 기용한 아이디어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음악학자 이경분 선생은 ’에필로그’를 두고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곡소리의 ‘윤이상적 버전’”이라 평한 바 있는데, 이날 공연에서 겉소리와 속소리를 오가는 박민희 선생의 창법이 ’곡소리’를 더욱 뚜렷이 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박민희 선생은 2018 통영국제음악제 음악극 ’귀향’에서 여창가곡을 불렀던 바로 그분이지요.

지난 10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티에리 피셔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날 불레즈 ‘노타시옹’을 실연으로 들어본 것이 가장 좋았고, 같은 곡을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이브 티보데가 협연한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도 훌륭했고, 생상스 교향곡 3번에서는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압권이었습니다. 제가 롯데콘서트홀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바로 파이프오르간이에요. 윤이상 곡 가운데 파이프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1971년 작품 ’차원’(Dimensionen)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올해 통영에서 있었던 공연 가운데 가장 열광적인 관심을 받았던 것은 ‘조성진과 친구들’ 시리즈였을 겁니다. 저는 맡은 일 때문에 벨체아 콰르텟,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 협연 공연과 조성진 독주회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성진이 통영페스티벌오케스라 지휘와 협연을 한꺼번에 하는 공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공연만큼은 운 좋게 제대로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본 공연뿐 아니라 리허설까지 챙겨볼 수 있었지요.

조성진이 오케스트라 소리를 다듬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통영에서 있었던 첫 리허설 때에는 조성진의 지휘 테크닉이 생각 이상으로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면, 다음날부터는 세부를 집요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 감탄했습니다. ‘지휘자 조성진’은 모차르트는 물론이고 쇼팽 협주곡에서도 생각 이상으로 ’폴리포닉한’ 소리를 이끌어 내더군요. 저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이렇게 입체적인 소리를 뽑아냈으면 ‘연주자가 지휘도 하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야 할 듯”하다고요.

그밖에 필리프 헤레베허가 지휘한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몬테베르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와 야나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보았던 파리 오케스트라의 말러 ’대지의 노래’도 생각납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줄일게요.

2018년 9월 7일 금요일

안톤 브루크너, 광막한 우주의 신 앞에 선 단독자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많이들 아실 듯한 이 시는 이육사 선생의 ‹광야›입니다. 시에 담긴 '스케일'이 참 대단하지요. 음악 중에서도 이렇게 거대한 시공간을 담아낸 작품이 더러 있지만,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만큼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세계를 담아낸 작곡가는 없을 듯합니다.

브루크너는 본디 교회 오르간 연주자이자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그래서 브루크너가 쓴 교향곡에서도 오르간 느낌이 물씬 나지요.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느린 악장에서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방식, 그리고 빠른 악장에서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음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등을 오르간의 영향으로 분석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두텁고 대담한 화성 진행과 관현악법 등에서 오는 음향 효과 또한 오르간 느낌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인일 겁니다. 그 대담함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 갔는지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나면 분명해 집니다. 브루크너는 브람스보다 9년 먼저 태어나 1년 먼저 죽었습니다. 브람스의 후대 작곡가가 아니에요!

브루크너의 음악 어법이 너무나 시대를 앞서갔던 까닭에, 그의 제자들은 브루크너 교향곡 악보를 출판하면서 동시대인의 눈높이에 맞게끔 악보의 세부 지시를 고치려고 했습니다. 성격이 똑부러지지 못했던 브루크너는 그걸 허락하고 말았지요. 그 결과로 브루크너 악보는 판본 문제가 매우 복잡합니다.

지휘자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는 1932년에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두 차례 잇따라 연주하는 특이한 공연을 열었습니다. 한 번은 페르디난트 뢰베가 1903년에 출판한 악보를 사용했고, 다른 한 번은 브루크너의 자필 악보에 충실했지요. 이 공연은 음악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때까지 브루크너의 의도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사람들이 똑똑히 알게 됐거든요.

브루크너 악보의 판본 문제에 가장 먼저 관심 가졌던 사람은 음악학자 로베르트 하스(Robert Haas)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스가 수정한 판본마저도 작곡가의 의도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곤 합니다.

"(로베르트 하스는) 소리를 좀 더 명료하게 하고자 의도적으로 브루크너의 아이디어를 바꿔 놓았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당대의 혁신적인 작곡가였고, 나는 브루크너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스가 했던 것과 달리, 악보에는 어떠한 수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가 브루크너 교향곡 9번 판본에 관해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루이지가 말한 '하스 판본'은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가 파란을 일으켰던 그 판본이 1934년에 출판된 것이며, 알프레드 오렐(Alfred Orel) 이 출판을 이끌었다고 해서 '오렐' 판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학자 레오폴트 노박(Leopold Nowak)은 하스-오렐 판본의 오류를 고쳐서 1951년에 새로운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악보를 출판했습니다. 파비오 루이지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녹음한 유명한 음반이 이 판본을 사용했지요. 루이지는 오는 10월 14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노박 판본'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귄터 반트 등 옛 거장 지휘자들이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음반에서 저음을 중첩시켜 압도적인 스케일을 만들었다면, 파비오 루이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이끌며 엄청난 다이내믹 레인지뿐 아니라 고음부의 총천연색을 살리는 일에 상당한 비중을 두어 독특한 음향의 건축물을 만들었습니다.

음악평론가 황진규 씨가 "대다수 지휘자가 3악장에서 시나이 산 꼭대기에 머무는 반면, 루이지는 '약속의 땅'에 과감하게 한 발을 들여놓는다."라고 극찬한 바 있는 파비오 루이지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통영에서 실연으로 들어볼 기회가 기대 됩니다!

2017년 12월 21일 목요일

우리 안의 유토피아를 말하는 세 가지 음악

『클럽 발코니』 2016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2015년은 불행한 일이 많았던 한 해였으니 독자에게 위로가 될 만한 글을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존댓말로 글을 썼지만, 신년 특집으로 여러 사람 글을 묶느라 편집장님께서 반말체로 고치셨습니다. 이곳에 올리는 글은 고치지 않은 원문입니다.


"어리석음과 폭력이 반복되는 잔인한 현실을 함께 바라보면서도 "만인은 만인에 대한 신(神)(homo homini deus)"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스피노자다. 고통받는 이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말라고, 동정이 아닌 사랑을 외친 자가 있으니 니체다. […] 오히려 가장 쓰디쓴 운명까지 모든 수동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운명에 대한 사랑, amor fati)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니체), 갈기갈기 찢겨졌던 신은 죽음을 딛고 부활한다(디오니소스)."

미학자 이진 선생이 「파르지팔: 함께 슬퍼할 것인가 함께 기뻐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쓴 말입니다. "자비심으로 깨달으리라"(durch Mitleid wissend)라는 유명한 대사를 중심으로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 사상을 아우르며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을 고찰한 멋진 글이지요. 자비심(Mitleid)이란 '함께 고통을 겪는 일'(mit-leiden)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이며, 거기서 그치지 말고 '함께 기뻐하는'(Mit-Freude)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의미를 헤아리고 나면, 《파르지팔》에 나오는 어딘가 이상한 마지막 대사 "구세주께 구원을!"(Erlösung dem Erlöser!)이 새롭게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새해부터 《파르지팔》을 듣기에는 음악이 조금 무겁지만, 저 마지막 대사가 나오는 피날레만큼은 매우 평화롭고 듣기 좋으니 꼭 추천하고 싶네요.

앞서 니체를 인용하고 나서 생각난 곡이 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예요. 니체가 말한 정신 발전의 3단계, 즉 권위와 주인에 의존하는 낙타의 단계,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자의 단계, 아이처럼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어린이의 단계가 음악으로 훌륭하게 나타나지요.

사자의 단계에서 어린이의 단계로, 그러니까 '춤의 노래'에서 '몽유병자의 노래'로 나아가면서 이 곡 전체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과 그 뒤에 평화롭고 아늑하게 바뀌는 음악이 아주 멋집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는 죽음에다 대고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체 철학은 결국 개인주의적인 기획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쇼펜하우어가 '본질적'(noumenal) 세계에서는 '현상적'(phenomenal) 세계와 달리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하나이며, 따라서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한 것과 대조적이지요.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 3번에서 니체를 인용하면서도 인식의 지평을 세계 전체로 넓혔습니다. 구자범 지휘자의 해석을 빌리자면 "세계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1악장을 지나, 꽃(2악장), 동물(3악장), 사람(4악장), 천사(5악장), 사랑(6악장)이 바라보는 세계를 차례로 보여주는 짜임새이지요.

4악장 '인류가 내게 말하는 것'에서 말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해 말합니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쾌락은 큰 고통보다 깊은 곳에 있다(Lust—tiefer noch als Herzeleid)라고요. 구자범 지휘자의 해석을 좀 더 빌리자면, 쾌락을 얻으려면 먼저 고통을 이겨야 하고, 고통을 이기고 행복을 얻으려면 '사랑'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6악장 '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에서 말러는 세계 전체를 포용하는 커다란 사랑을 음악으로 그렸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고민 끝에 시 한 편, 지면이 모자라서 일부만 인용할게요.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雨雷)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김종철, 「재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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