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 싸움났다.

아, 북한 시키들 얘기 말고. ㅡ,.ㅡ

이택광이 ☞ 〈정신분석학과 문화비평〉이라는 글을 올렸더니 ☞김우재가 트위터로 시비 걸고, 이택광이 비아냥거리다가 빌미 제공. 그런데 알고 봤더니 김우재가 옛날부터 꾸준히 시비를 걸었다고. 그 뒤 서로 원색적으로 비난.

여기에 낚인 분들이 내놓은 반응 가운데, 예상 가능한 피곤하고 찌질한 것들은 무시하고, 관심 둘 만한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아 보니 대충 이렇더라.

― aleph_k, 〈정신분석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
http://aleph-k.blogspot.com/2010/11/blog-post_26.html

― 아이추판다, 〈유령 학문〉
http://nullmodel.egloos.com/3508192

― (나중에 보탬) 김우재, 〈인문좌파를 위한 논증 가이드〉
http://heterosis.tistory.com/251

― (또 보탬) 저련, 〈통약불가능하다는 것〉 
http://blog.naver.com/non_organ/70098266319
↑ 이 떡밥이 왜 과학자 vs 인문학자 떡밥인지 이해 안 되는 사람은 이 글 필독

― (또 보탬) 한윤형, 〈라캉 정신분석과 비평의 문제?〉
http://yhhan.tistory.com/1286

― (또 보탬) 루시엘, 〈보다보다 못해서 개입.〉
http://freecracy.egloos.com/5405185
↑ 본문보다 댓글이 더 흥미진진한 글. ^^

― (또 보탬) 김원철,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
http://wagnerianwk.blogspot.com/2010/12/vs.html

여기에 더해 김우재 ☞블로그에서 '이택광'으로 검색했더니, 겉으로 라캉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을 공격하는 모양새이지만, 자세히 보면 과학자가 인문학자에게 보이는 반감이 '라캉'을 빌미로 드러나기도 하더라.

두 바닥이 서로 다른 프레임으로 따지다 보니 결정적인 대목에서 논지를 오해하거나 또는 (어쩌면) 알면서도 말 돌리기를 시도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는 얘기. 그래서 나도 내 편견과 깜냥에 바탕을 두고 썰을 풀어 보겠다.

▶ 과학자들이 화를 내는 까닭

과학자들이 정신분석학 또는 인문학을 공격하는 까닭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데이터 쌓느라고 이렇게 개고생 하는데, 저 시키들은 입으로만 나불거리잖아!"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정신분석학자, 또는 인문학자들은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 썰을 풀 때 그 결함을 지적하는 과학적 증거를 만나면 그것을 개무시한다!'

이 전제는 사실인가? 위에서 소개한 글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때때로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아닌 경우도 관찰된다.

포르트 다 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발달론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을 분석가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분석가들이 포르트 다 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사례를 하나의 전범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우선은 그것이 프로이트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론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아이추판다님 글에서 Quid라는 사람이 단 댓글 가운데 일부다. 아이추판다님이 소개한 '포르트 다' 사례가 헛소리임이 밝혀졌을지라도 프로이트가 이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참고할 만하다는 얘기다. 어떤 과학 논문에 결함이 발견되어 결론이 폐기되더라도, 실험에 쓰인 그럴싸한 기법이 있다면 다음 실험에 써먹을 수는 있다는 얘기와 비슷해 보인다.

문제는 결함이 밝혀졌을 때 정신분석학자나 인문학자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느냐다. 인문학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몇몇 인문학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우기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옳을 때가 잦은 듯하다.

과학이 인문학을 점령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우재가 바로 이렇게 주장하는 듯한데, 내가 이해한 바로 이것은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인문학자가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자는 쓸모없으며, 따라서 그 자리를 과학자가 빼앗아 인문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문학자는 과학을 배울 능력이 없으니 인문학 또한 과학자가 해야 옳다는 뜻이다.

▶ '데이터'는 어디까지 인정되는가

과학자는 증거도 없는 주장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과학에서도 증거를 어느 수준까지 인정하느냐 하는 기준이 분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주장으로 이런 게 있더라:

저는 인문학에는 깡통이고 통계와 관련된 공부를 한 케이스인데요, 여러 사회학에서 적용되는 통계를 볼 때 루시앨님의 첫번째 논지인 통계에 대한 다른 해석이 경험에 대한 다른 해석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제 관찰로는 대부분은 경험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1. 해당 학문의 수학적 모델 수립에 대한 성숙도
  2. 해당 학문의 연구자들의 수학 실력

이 두가지 팩터가 결정합니다. 수리통계적 근거가 약해도 accept 되는 분야는 수리적 support가 약하다고 해석하는 것이지, 경험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왜곡이라고 봅니다.

aleph_k님 글에 달린 댓글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 뇌를 연구한다고 생각해 보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특정 뇌 부위에 전극을 꽂아 놓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머리에 전극을 막 꽂을 수는 없다. (731부대는 했을지도…) 그래서 다양한 뇌 영상 기법이나 특정 뇌 부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기법 따위가 개발되었다.

그 가운데 fMRI를 따져 보자. fMRI 데이터 분석 과정에는 어지간한 통계학 전공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가볍게 넘어서는 고급 수학 기법이 잔뜩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수학 실력 운운하기는 어렵다. 연구자가 수학적 원리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 대개 이렇더라 ― 계산은 컴퓨터가 하고 그 과정은 표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fMRI는 수많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라도 무너지면 fMRI 연구들을 모두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뇌를 지나가는 혈류가 띠는 자기공명 특성은 정해진 회귀모형을 언제나 만족하는가, 뇌영상을 바탕으로 통계 처리하기에 앞서 해주는 수학적 변형 절차들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지 않는가, fMRI 분석 결과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뇌 좌표는 인종·성별·나이 등을 초월해 호환 가능한가, 등등.

이렇게 바탕이 허술한 연구 방법이 인정받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없지는 않은데, 그 방법은 연구자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쓸 수 있거나 돈 문제 등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정도 허술함은 치명적이지 않다고 그 분야 학자들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합의하지 않는 학자도 더러 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도 싸움나더라.)

좀 더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해서 신경생리학적으로 의미 있는 어떤 결론을 냈다. 이 연구를 다음과 같이 공격할 수 있다.

Q: 쥐를 가지고 실험했다고 말해 봐야 쥐도 수많은 종류가 있고 유전자를 따지면 천차만별인데 그거 어떻게 믿냐?
A: 유전자 통제했다능.
Q: 그럼 특정 유전자를 가진 쥐에 한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일 뿐이잖아?
A: 다른 종으로 또 실험하겠다능.
Q: 세상 모든 쥐를 다 실험할 테야? 유전자 레벨로 내려가면 가능한 경우의 수가 얼마인지는 알아?
A: …

그러면 이 실험은 그냥 폐기해야 할까? 이런 식이라면 신경생리학, 생물학, 심리학 따위가 존재 기반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어느 수준에서는 모자라나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때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 뒤집을 수 없는 결론이 나왔다고 우기지 말기. 그래서 결론은 이런 식이 된다. "A라는 실험 결과는 B를 시사한다."

실험 디자인에 제약이 많을수록 결론은 조심스러워지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고자 실험 디자인에 수많은 잔머리를 동원하거나 정교한 통계 기법에 기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 학술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지면 분야마다 기준은 달라진다. 물리학보다 생물학이, 생물학보다 심리학이, 심리학보다 경제학이 대체로 더 많은 '노이즈'를 떠안고 가야 하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동원하는 듯하다. 이때 더 복잡한 통계 기법을 썼다는 사실이 반드시 더 설득력 있는 결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특정 분야 학자가 다른 분야 학자들에게 '너네는 과학이 아니라능!' 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더라. 그리고 인문학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먹이가 된다.

▶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인문학자가 하는 말에는 '아님 말고'라는 말이 숨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인문학자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니와 그것을 대놓고 말하기에는 모양새가 나지 않으니 그냥 생략하고 내부 논리가 탄탄한지만을 따지는 듯하다. 과학자에게 학문이란 '의심하고 증명하는 것'이지만, 인문학자에게 학문이란 '논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보기에 이게 날로 먹는 듯싶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역사 변동을 수식으로 모델링할 수 있는가? 그 모델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가? 아시모프가 쓴 SF 소설 『파운데이션』을 보니 어느 수학자가 그런 일을 한다. 나는 처음에 코웃음 쳤지만, 참고 읽다 보니 어쩌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그런데 그런 일이 당장 가능한가? 수학자들이 역사학 좀 공부하면 할 수 있을까?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노력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그 까닭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면 역사 연구는 하지 말아야 할까? 김우재는 과학자들이 역사 연구도 해야 한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말로 역사 연구를 하시려고?

이를테면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두고 ☞ "어떤 이론을 촛불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 과연 우리는 촛불이라는 사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충분한 분석"이란 정량화된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분석을 일컫는 듯하다. 문제 제기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은 실제 그러한 비평활동을 행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그것을 다시한번 주장한다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통계 수치 하나 제시하지 않았다. 못했겠지.

( ※ 이희경, "비평이 있는 비평을 위하여." 『낭만음악』 (서울: 낭만음악사, 1993 겨울), 제6권 제1호 (통권 21호). pp. 233-278. )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논하려면 '아님 말고' 식으로 주장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주장에 설득될지 말지는 읽는 이 마음일지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부 논리가 탄탄한가 아닌가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유하는 훈련은 인문학자가 과학자보다 더 많이 했다.

▶ 아쉬운 쪽은 인문학자다

인문학자가 과학적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문학자가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설득할 책임은 결국 인문학자에게 있다. 이것은 논리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문제다. 과학자들은 '증거'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 무기를 가지고 인문학자를 몰아세우면서 입으로만 나불대지 말고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 사회적 권력도 과학자가 더 세다. 과학자는 실용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돈'으로 연결할 수 있으나 인문학자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김우재 같은 급진적인 과학자를 설득하려면 과학자가 쓰는 언어, 그 가운데 무엇보다 데이터로 '증거'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통계학에서 가설 검정을 왜 하는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통계학자가 도움말을 줄 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능력쯤은 있어야 한다. 이걸 못하겠으면 설득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그런데 인문학자들이 논하는 학문 영역은 날이 갈수록 과학에 침식당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사 변동을 수학으로 모델링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어떡할지를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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