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블로그에서 내 댓글에 반박이 달려서 또 댓글 달았는데, 링크 때문인지 스팸으로 분류됨. -_-; 그래서 트랙백 날림.
그러니까 이 글은 아래 링크한 원문과 댓글을 읽고 나서 읽으시라:
☞ 이택광,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아열대님 댓글은 제 댓글을 그냥 쉽게 쓰라는 무책임한 요구로 뭉뚱그려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옛날에 쓴 글 트랙백 날릴 테니 읽어보시면 오해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 글 쉽게 쓰기
제가 쉽게 쓰라고 한 곳은 어휘 및 통사구조 수준인데, 만약 그마저도 못하겠다고 하신다면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 운운은 그저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계몽의 변증법』 서문은 오히려 제가 인용해야 할 말이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려는 마음가짐 참 좋지요. 그러나 마음가짐만으로 되나요? 이미 인지체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데? 신문에 한자가 넘쳐나던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을 그런 식으로 확대 적용한다면 한자가 넘쳐나더라도 조금도 문제 되지 않을 테지요. 한자사전 찾아보면 다 나오니까요. 신문에서 한자를 가장 먼저 털어버린 곳은 한겨레입니다. 가장 늦게, 그것도 마지못해 털어버린 신문은 조선일보입니다. 그러면 한겨레 신문이야말로 "주체의 미메시스적 능력"을 망쳐놓은 주범이요, 조선일보야말로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 '정론지'일까요?
언어 문제는 권력 문제입니다. 한겨레가 한자를 털어버릴 때에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겠지요. 하버마스는 '언론이 공공재이며 민주주의 필수조건이므로 올바른 언론 공급 및 소비가 사회적 과제'라 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이 대중의 이해수준을 뛰어넘는 언어체계로 장벽을 쌓는다면? 스스로 권력주체가 되어 대중 위에 군림할 뿐이죠. 요즘 같은 인터넷 환경이라면 대중은 그 권력주체에 냉소를 퍼부으면서 반지성주의라는 또 다른 장벽을 쌓겠고요.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어떤 학생이 논문을 쓰는데, 지도교수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끔 쉽게 써라.' 했답니다. 이 말은 논문을 난도질해 초등학생 수준에 맞는 '동화'를 쓰라는 요구일까요? 언어 문제를 권력 문제로 돌이켜보아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매직 넘버 세븐'(magic number 7)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람의 단기 기억 폭(Short-term memory span)이 전화번호 7자리 숫자 따위를 외울 만큼이라는 얘기입니다. 사실은 하버드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라서 실제 평균은 5 안팎이라고도 하지요. 단기 기억 폭만이 아니라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주의자원(attention resource)은 터무니없이 작습니다. 이 주의자원을 과제에 맞게 효율적으로 다루려면 훈련이 필요하고요. 훈련이 안 된 사람과 소통을 잘하려면 쓸데없는 '메모리' 낭비를 줄여야 합니다. 버려야 할 '메모리'는 무엇일까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