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6일 금요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성주의로: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에 대하여

소노리테 목관5중주단 테마음악회 “프랑스의 목관음악 - 프랑스 6인조 ”

2009년 10월 14일(수) 오후 8시 00분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

Flute 장선우, Oboe 조경은, Clarinet 김종철, Bassoon 이지현, Horn 김호동

E. Satie(1866~1925) - Te Veux (나는 너를 원해) for Flute and Piano
G. Auric(1899~1983) - Trio for Oboe, Clarinet and Bassoon
D. Milhaud(1892~1983) - La Chimineé du roi René (The Chimney of King René) Suite for Woodwind Quintet
김시형(1972~) 세계초연 - Hope of September 09 for Woodwind Quintet
F. Poulenc(1899~1963) - Sextour pour piano, flute, hautbois, clarinett, bassoon et cor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 단원은 부천·인천·원주시향 단원이기도 하다. 저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이 사실에서 드러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실내악 앙상블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미 한두 번 맞춰보고는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올랐음을 이날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다. 유럽 일류 악단에 비할 바는 아니나 국내급 연주자들이 길지 않은 시간에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실력이었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보도자료에는 단원 개개인 소개만 있을 뿐 오중주단 소개가 없다. 홈페이지도 없는 듯하다. 이 악단이 만들어진 지 그다지 오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라 하겠는데, 실내악으로 돈벌이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 일류 악단에는 있으나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에는 없는 것은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악단만의 색깔이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실내악이 활성화되면 오케스트라 수준까지 함께 올라가는 이중 효과가 있다. 또 단원들이 시향 단원 간판을 밑천으로 사교육 돈벌이에 나설 시간을 아껴서 실내악 앙상블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실내악을 향한 열정과 목표의식이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 총평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프랑스 6인조 음악이 '일상'을 예술적으로 변용시켰다 하여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이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양식은 낭만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등을 반대하고 대안을 찾는 가운데 에릭 사티와 장 콕토를 모범 삼아 나타났으며, 사상적으로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와도 조금씩 닿아 있다.

음악 밖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상대적 안정기이자 영화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타나고 대중문화가 싹트던 "황금의 20년대"를 배경으로 하며,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도 힌데미트, 바일, 아이슬러, 크셰넥 등이 낭만주의와 표현주의 등을 반대하며 '실용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음악학자 다누저(H. Danuser)는 이 시기 음악이 미학적으로 고급 예술관과 저급 예술관 사이, 양식적으로 진보적 성향과 복고적 성향 사이에 있다고 보고 "중간음악 mittlere Musik"이라 이름 붙였다.

즉 젊은 작곡가들의 사고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 나타났다. 그들은 한편 절대 예술음악의 사상을 부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주장되는 "예술의 부정" 또한 부정했다. 이들은 예술작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한 치도 버린 것이 아니다. 전통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전향은 서로 서로 모순이 되는 음악적 사고들의 병행 또는 공존을 가능케 했고, 이렇게 나타난 작품은 ― 미학적 가치적도로 판단되지 않고 ― 그때 그때마다 요구된 기능의 충족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400쪽.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는 얼핏 들으면 프랑스 6인조 사이에 한 자리 꿰차도 될 만큼 미학적·양식적으로 '라이프스타일 모더니즘' 또는 '프랑스풍 중간음악'과 닮은꼴이었다. 티 나지 않게 미니멀리즘 기법을 쓴 대목이 참신하다 할 수 있겠으나, 정통적인 미니멀리즘 기법이 아니라 모티프를 변화·발전시키는 '전통적' 기법에 미니멀리즘을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하고 있었다. (다만, 악보를 보지 못하고 내 청각 경험만으로 판단하는 까닭에 객관적인 판단이라 자신하기 어렵다. 작곡가와 연락해 악보 파일을 받기로 했는데, 이메일을 보냈다고 하나 내가 받은 것은 없다. 자꾸 보채기 뭣해서 그냥 청각 경험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김시형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 20세기 초 양식을 되살린 까닭은 무엇일까. '중간음악'은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신음악과 담론 투쟁 끝에 패배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미니멀리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음악 양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김시형의 《Hope of September 09》가 '포스트모던'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성향을 전통적 음악 양식 속에 꼭꼭 숨긴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 기법을 부분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서 곧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음악으로 분류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김시형은 아마도 현대음악이 청중과 동떨어진 현실을 고민했을 터이다. 전문가 집단이 고립되어 가는 경향은 바로 1920년대 즈음부터 나타났다 할 수 있으므로 김시형이 이 시기 음악에 주목한 일은 자연스럽다.

시민적 문화의 소멸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음악에서 나타난다. 많은 테크닉적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허하게 나아간다. 왜냐하면 현대 음악은 사상이 없고 공동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동체를 잃어버린 예술은 그 자신을 잃게 된다.

―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 Musik und Politik Schrifen 1924~1948, G. Mayer(ed.), Leipzig 1973, 32쪽. 재인용: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97쪽.

그러나 김시형이 백화점 진열장에서 상품 끄집어내듯 '중간음악'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끄집어 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현실은 1920년대와는 또 다르며, 김시형 작품은 바로 오늘날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Hope of September 09》는 차라리 반지성주의와 닿아 있다 하겠다. 그리고 어쩌면 반지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개념 중에 ‘반지성주의’라는 것이 있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한국사회와 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 같다. 물론 anti-intellectualism으로 표기하는 영어를 한국어로 ‘반지식인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라고 옮기는 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합적인 의미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황우석 사태나 〈디 워〉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한국사회의 특성에 들어맞는 의미는 두 번째 항목일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관련성을 갖고 있다. 첫 번째에서 언급된 그 ‘철학적 태도’가 자의반 타의반 두 번째에 제시된 ‘지식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을 합리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우려와 경고로서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라는 큼직한 책을 썼다. 요즘은 누구도 이 책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각론의 차원은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제기된 문제는 큰 틀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다.

(…)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향락”의 문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향락의 지속을 방해하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이다. 문제는 이런 분노가 오해와 달리 ‘보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 이택광, 〈반지성주의에 대해〉 http://wallflower.egloos.com/1650995 (2009년 11월 6일 읽음.)

예술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화두로 돌아가 보자. 《Hope of September 09》는 전통적 기능화성에 기대지는 않으나 무조음악도 아니어서 대중이 귀로 듣고 그 흐름을 인지하는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적'인가? 대중음악이 주류로 뿌리내리고 더 나아가 예술음악이 설 자리를 위협하는 오늘날 김시형의 시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최우정처럼 대중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클래식 음악 속에 녹여내며 예술음악이 나아갈 바를 찾아야 옳지 않을까? 음악학자 오희숙은 "'중간'이라는 위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보이는 가치 절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음악적 위기에 대한 신세대의 해결 모색으로 본다면 그 의미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변명은 김시형에게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창작곡을 수용하는 주체는 청중만이 아니며, 그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 또한 중요한 작품 수용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작곡은 대중에게 이해받기에 앞서 연주자에게 이해받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아방가르드 음악에 느끼는 거부감은 대중과 그다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Hope of September 09》라면 연주자들의 평가가 대중과 다를 수도 있다. 수동적으로 감상하지 않고 연주를 하는 처지라면 《Hope of September 09》가 제법 흥미로운 작품일 수 있으며, 짐작건대 소노리테 목관오중주단은 이 작품을 연주하면서 즐거웠으리라. 《Hope of September 09》는 대중이 아닌 연주자로 하여금 현대음악을 수용하도록 도와주는 '당의정'으로 가치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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