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라는 글에 이어진다. aleph-k(이하 '알렙')가 쓴 반론을 먼저 읽으시라:
http://aleph-k.blogspot.com/2010/12/1-2-vs.html
▶ '알렙'의 '방언 드립'
'알렙'이 하고자 하는 말은 잘 알겠다. 그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괄호 속에 "jargon"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알 수 있는 얘기다. 내가 그걸 몰라서 얘기한 줄 알았나?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왜 내가 문제 제기한 것들은 자꾸만 피해 가시나?
① '학술 용어' 또는 '전문 용어'라 써도 될 말을 굳이 '방언'이라 쓴 까닭은 무엇인가? '방언'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에 기대어 이택광 등을 헐뜯으려는 뜻이 참말로 없었나? 혹시 '알렙'은 '언어관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싶은가?
② 글 쉽게 쓰라고 징징대는 말에 한윤형이 반론을 했고, 나는 그것을 본문에도 썼으며, 그에 앞서 '알렙'한테 댓글로도 어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제 나는 '알렙'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째로 한다. 한윤형의 '우리 편 전문가' 담론에 대해 '알렙'은 어떤 반론을 할 수 있나?
난 대중이 '쉬운 글'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은 뭔가 전문적이고 어려운 어휘를 마구 섞어쓰는 '우리편 전문가'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미네르바 글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의 비평 자체는 '뺑끼'임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ㅇㅁㅂ ㄳㄲ'라든가 'ㄱㄷㅈ ㄳㄲ'와 같은 감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이 감성을 어떤 전문가가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닌가?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은 무시해도 좋은 얼간이일 뿐이다. 가령 살인적으로 친절한 글쓰기와 무한에 가까운 소통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이 블로그가 한 사례인데, 내가 친절하게 대꾸하면 대꾸할수록 덧글러들은 술취한 한국 남성이 술집 아가씨 대하듯 나를 대할 뿐이다.
③ 비슷한 얘기인데, 내가 이택광 글에서 '팔루스'라는 말뜻을 몰라도 글 내용을 대충은 이해하겠다고 썼더니 '알렙'은 전문 용어로 가득한 글을 인용하면서 ― 한의학과 사주팔자 얘기라더라 ― "이런 말을 들어도 '대충 이해가 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라며 비아냥거린다. 이런 비겁한 말장난을 하면서 '알렙'은 내 주장을 "말장난"일 뿐이라 주장하던데?
나는 이택광 글이 정말로 가독성이 부족했다면 악플도 달리지 않고 까도 창궐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내가 아는, 가독성이 낮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블로그는 대개 덧글없이 휑하다. 이택광의 글에 악플이 달리는 이유는 적어도 그의 글에 어떤 수준의 가독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내가 관심있는 대상을 다루고 있어서 들춰보았고, 8-9할은 알아들을 수 있는데 잘 모르겠는 이론용어 때문에 1-2할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8-9할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쓰다는 건 이택광의 '한국어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 정도 한국어 능력이 없음이 명백해 보이는 분들이 그의 글의 가독성을 문제삼을 때 성질이 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쉬운 글을 읽고 싶다면 여전히 홍세화나 진중권이나 박노자나 김규항의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지만 나같은 사람의 글도 있다. 굳이 문체가 있는 사람의 글을 붙들고 그의 글을 거세하려고 발광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꼴같잖지 않겠나.
― 한윤형, 같은 글.
▶ 논하기―증명하기 또는 비평―분석
내가 쓴 '논증 드립'이라는 말은 주로 김우재를 겨냥해 한 말이었으나 '알렙'이 쓴 글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있기에 '알렙' 얘기도 했다. 그랬더니 '알렙'은 이렇게 썼다. "내 글을 논증 드립이라고 읽는 건, 독해력의 문제다. 나는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 뒤섞인 담론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찾아 보시라."
글쎄, '알렙'이 정신분석학을 공격한 몇몇 글을 내 알량한 독해력으로 읽어 보니, 김우재 또는 아이추판다가 쓴 글과 논점이 아주 똑같아서 하나마나 한 소리더라. 그래서 대충 읽었더니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다시 꼼꼼히 읽어보기는 귀찮으니 이 글에서는 그냥 '말장난 드립' 얘기를 해보겠다.
'알렙'은 내가 '논하기'와 '증명하기'를 단순 이분법으로 몰고 갔다고 이해한 모양인데, 내가 소제목부터 오해할 만하게 썼으니 내 잘못이 작지 않음을 인정한다. 다만, 내 글은 김우재가 '학문'과 학문이 아닌 '잡글'을 나누고 이택광 글이 '학문'이 아니라 못 박은 일을 두고 대응 논리로 세운 것이었음을 밝혀 둔다.
"그렇게 보면, 이게 그렇게 단순한 두 가지 방법의 대립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설사 경험적인 '입증'과 선험적인 '논의'를 일단 대별하고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둘이 쉽게 분리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논의와 증명이 서로 구분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런 말은 오히려 내가 김우재 등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애초에 이택광이 김우재한테 '오지랖' 발언을 하고, 뒤이어 주로 이공계 쪽 전공자들이(?) 공분에 동참하며 '인문학자들의 기득권'(?)을 성토하면서 생긴 일이 아니던가. 내가 앞선 ☞글에서 한윤형이 풀어쓴 맥락을 인용해 놨으니 모르시는 분들은 읽어 보시라.
나는 논하기―증명하기, 또는 학문―비학문 사이 경계가 모호한 예로 강정수님 블로그와 내 ☞석사 학위논문을 예로 들었다. 이참에 내 논문 얘기를 좀 더 해보겠다. 음악학에서는 음악 비평을 하위 분과로 꼽는데, 나는 음악 비평으로 학위 논문을 쓰면서 이게 도대체 음악학이 맞기는 한지를 두고 제법 길게 고찰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이처럼 음악 비평은 다른 음악학 하위 분과와 견주면 학술적인 바탕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음악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놓아야 한다면, 무엇보다 연주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놓아야 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음악 분석은 음악 비평과는 달리 음악학 하위 분과임을 조금도 의심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로브 사전 '분석'(analysis) 항목에서는 분석과 비평 모두 "정도의 차이"(difference of degree)만이 있을 뿐 주관성과 객관성을 모두 띤다고 한다.
[…]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때, '비평'을 '분석'과 구분하면서도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인정하려면 '분석'과 같은 수준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비평'에 요구해서는 곤란하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¹⁾ 그러한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비평'은 이미 '비평'이 아닌 '분석'일 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인정하려면 그 특수성까지도 인정해야 한다. 비평이 분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비평이 분석으로부터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지 비평이 분석과 같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²⁾
[…] 그러나 여기서는 음악 비평을 음악학으로 볼지를 따지고 있으므로, 결국 음악 비평을 음악학으로 용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어느 수준으로 놓을지가 문제 된다.
1) 여기서 '체계'라는 말은 '체계음악학'과는 다른 일반적인 뜻이다.
2) 음악 비평의 객관성과 주관성에 대한 고찰은 다음을 참고하라: 신설령, "음악비평의 역사와 실제." 『음악과 민족』 (부산: 민족음악학회, 1994), 제8호, pp.251-274.
그러니까 "~학으로 용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성과 체계성을 어느 수준으로 놓을지"는 해당 분야 학자들이 합의할 문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그 수준을 만족하는지 어떤지는 정신분석학자가 합의할 문제다. 좀 더 너그럽게 생각하면 심리학자 또는 인지과학자까지도 이와 관련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 이택광도 사실은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므로 심리학자 및 인지과학자와 비슷한 수준에서만 발언할 권리가 있겠다. 그러나 그 분야와 관련 없는 사람, 그러니까 인지과학자가 아닌 생물학자가 정신분석학이 학문이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려고 한다면 괜한 '오지랖'일 수 있다. 이택광은 '아이추판다'가 자신을 비판하는 일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더라. (논점에 따라 괜한 '오지랖'이 아닐 수도 있다. 김우재가 학술지에 무슨 글을 썼다던데 안 읽어 봐서 모르겠다. 이것은 이택광이 대응할 일이다.)
'알렙'에게 묻겠다. 내 논문은 제쳐 두고, 강정수 님 블로그 글 가운데 논문으로 가치 있는 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 없다고 생각하시나?
▶ 하나마나 한 얘기
아무리 주체와 욕망에 대한 철학적 이론으로 변모된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작동 방식'에 대한 가설을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는 한, 이것은 과학적 심리학에 의해서 제한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 주장들을 담고 있게 된다. 아이추판다는 조 모씨의 미국 대학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해서 이택광이 그가 정신분석을 받았다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했다. 이 반사실적 가정문은 특정한 대상 조 모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택광이 생각하는 '미국식 심리 치료'와 라깡식의 정신분석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이므로, 라깡식 정신분석이 다른 임상 치료법에 비해 더 나은 치료 효과를 거둔다는 경험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반박된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이 바로 '입증'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주장의 한 예가 된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 aleph-k
정신분석학자 또는 그 이론을 빌어 글 쓰는 사람이 하는 말은 결국 '아님 말고'다. 그것을 반박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면 '아님 말고'가 아니라 '헛소리'가 된다. 이거 반대하는 사람? 손?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인 과학에서 선험적인 메이트릭스(인문학 이론?)로 이론을 변모시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데 적절한 이론인가에 대해서는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그 타당성과 적절성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아님 말고'에 입증 책임을 묻다니 참 괴상한 사고방식이다. '아님 말고'식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더 나은 설명을 내놓으면 된다.
이를테면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두고 ☞ "어떤 이론을 촛불에 적용시키고자 할 때, 과연 우리는 촛불이라는 사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문제 삼았다. 여기서 "충분한 분석"이란 정량화된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분석을 일컫는 듯하다. 문제 제기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은 실제 그러한 비평활동을 행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그것을 다시한번 주장한다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김우재는 '조정환-이택광 촛불 논쟁'을 구체적으로 논박하는 통계 수치 하나 제시하지 않았다. 못했겠지.
( ※ 이희경, "비평이 있는 비평을 위하여." 『낭만음악』 (서울: 낭만음악사, 1993 겨울), 제6권 제1호 (통권 21호). pp. 233-278. )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논하려면 '아님 말고' 식으로 주장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 주장에 설득될지 말지는 읽는 이 마음일지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부 논리가 탄탄한가 아닌가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유하는 훈련은 인문학자가 과학자보다 더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