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1일 화요일

바다와 하늘과 별과 노래:
경계인 윤이상의 뿌리가 자라난 곳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 2015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예정에 없던 글을 급하게 쓰는 바람에 짜임새가 좀 이상합니다만, 인용문을 좀 줄인 판본을 이곳에 올려 둡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앨런 길버트가 어느 날 뉴욕필 관객과 대화하는 자리에 나갔습니다. 질문할 기회를 잡은 한 흑인이 물었습니다. '단원 구성에 나타나는 인종 간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뉴욕필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앨런 길버트는 이미 단원 가운데 상당수가 유색인종이라고 답하며, 무엇보다 자신이 아시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앨런 길버트의 어머니가 일본인으로 현재 뉴욕필 단원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저는 앨런 길버트가 자신은 백인이 아니라고 말한 일이 영 이상합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동양인 모습이 섞여 있음을 그제야 깨닫기도 했고요. 한국계 어머니를 두었다는 배우 다니엘 헤니 생각도 납니다.

아마도 서양 사람 눈에는 앨런 길버트나 다니엘 헤니가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워하고 서양 사람이 동양 사람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윤이상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핏 들으면 그냥 서양 현대음악인데, 서양 사람이 들으면 또 매우 동양적으로 들린다고 하지요. 이와 관련해 미학자 이진 선생은 윤이상 음악 미학의 사상적 뿌리를 말하는 유럽의 시각을 비판하며, 이들이 "근대 이전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지형을 상당 부분 단순화해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한국 · 중국 · 일본, 그리고 넓게는 베트남과 그 이외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교 · 불교 · 도교 사상이 저마다 차이가 있는데, 서양 사람이 이것을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윤이상 음악에 관해 이것을 뭉뚱그려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한국 문화'라는 배타적인 시각으로 윤이상 음악을 이해하려는 태도도 잘못일 겁니다. 한국음악뿐 아니라 일본 음악과 중국 음악도 윤이상 음악에 녹아 있거든요.

음악학자이자 국제윤이상협회 회장인 볼프강 슈파러는 도교의 음양 사상과 서양의 변증법이 윤이상 음악 속에 융화되어 있다며, "음양의 변증으로서의 도교주의"로 윤이상 음악 어법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당대의 첨단 작곡기법인 '클러스터'(Cluster) 기법이 부닥친 문제에 대해 윤이상 음악의 이른바 '주요음향'(Hauptklang) 기법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돌파구를 제시하기도 했지요.

음악학자 신인선 선생은 윤이상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에서 클러스터 기법이 변화 · 발전해온 주류 음악사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동아시아 음악의 특수성을 이유로 윤이상 음악을 따로 떼어 설명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음악학자 윤신향 선생은 "음양의 변증은 동서융화가 아니라, 한정된 음향재료와 작곡자의 내부표상이 대립함으로써 생성되는 동서의 긴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반론합니다. "단일의 정체로 화(化)하는 융화와는 달리, 이질적인 요소의 갈등과 상생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친다"라고요.

윤신향 선생은 또한 윤이상 작품에는 작곡가가 서양에서 활동하며 서양 문화에 '융화'가 아닌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 나타난다고 분석하며, 그것은 동서양의 경계에 있었던 작곡가 윤이상에게 동서양 문화가 대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라고요.

"음악이란 일단 써지고 나면 그것의 발생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하찮은 것들이 제 음악에서는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밤이면 저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들의 노랫소리를 듣곤 했지요. 어부들은 고기들이 튀어오르는 걸 보면 더 목청을 돋우어 노래 부르고 리듬은 더 빨라집니다. 이러한 기억은 제가 합창곡을 쓸 때 떠오릅니다...이러한 것들, 시각적으로 보기에 하찮은 것들은 이내 제 음악적 안테나에 수신되어 음향적인 것으로 변형됩니다. 혹은 예전에 제가 절간에서 사람들이 뜨거운 여름날 분향하는 것을 본 기억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향내는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 향기는 음향을 생겨나게 할 정도로 기분 좋게 작용합니다. 물론 이 경우 큰 범종들이 내는 소리와 같은 본래의 음향요소도 들어갑니다." ― 홍은미 외, 『윤이상의 음악세계』, 219쪽.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라이너 자흐트레벤이 윤이상에게 '악보의 무엇이 풍부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내느냐'라고 질문했더니 윤이상 선생이 저렇게 답했다네요. 이에 대해 윤신향 선생은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위와 같은 대답은 참으로 의외인 듯하다. 하지만 이 대답은 미적 규범보다 미적 계기를 중시하는 작곡가의 사고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음정구도의 진행방식이나 관현악법, 또는 다이내믹의 처리방식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과거로 회귀하여 그때 받은 미적 인상 또는 감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부들의 노랫소리이자 단순히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절간의 향내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순음악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작곡가의 내적 표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 윤신향,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178쪽.

그러니까 윤신향 선생이 말한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이란, 윤이상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러나 유럽에 간 뒤로는 기억으로만 존재했던 고향 통영일 겁니다. 작곡가의 기억 속 통영의 모습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 있지요. 몇 군데만 추려 볼까 합니다.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노랫소리는 배에서 배로 이어져 갔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밤에 혼자 낚시를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갔습니다. 몰래 말이죠. 좋은 곳으로 가려면 5킬로미터나 걸어야 했습니다. 그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데 바다에서 15미터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운동은 잘하지 못했지만 한 손으로 낚싯대를 들고 등에는 어롱을 짊어지고 이 위험한 벼랑을 대담하게 기어 내려갔습니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말입니다. 여름에는 하늘에서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졌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세계가 나에게는 신비한 매력이었습니다. ― 윤이상 ‧ 루이제 린저, 『상처 입은 용』, 25쪽.

"1917년부터 1930년 사이에 나의 고향 통영에 명창 이화중선이 온 일이 있다. 소식을 들은 인근의 주민들은 이 절세의 명창을 듣기 위해 설레었고 마을은 미리부터 큰 축제의 분위기였다. 당일을 앞두고 멀리에 흩어져있는 섬사람들은 제각기 돛배를 타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 이때 청중들의 노래에 따라 움직이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일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마디마디 미묘한 선율이 굽이쳐 넘어갈 적마다 수천의 청중들이 일제히 좋다 하며 한숨 섞인 탄식을 했던 것이다. 그 좋다 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멍석 위에 깨알처럼 앉아 있던 백의의 청중들은 노래의 억양에 따라 일제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며 상체를 가볍게 움직였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보리밭에 녹색의 보리들이 엷은 바람 따라 온통 물결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명창과 무수한 청중이 완전히 한마음이 되어 그칠 줄을 모르는 절창에 밤은 깊어만 갔다." ― 윤이상이 『한양』에 기고한 글.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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