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② 논하기인가 증명하기인가

▶ 블로그 이사 때문에 글이 제법 늦었다.

구글 이너마들이 텍스트큐브를 없애버리고 블로거닷컴으로 통합해 버렸는데, 옛날 주소를 리디렉트(redirect) 해준다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도 뭣하더라. 생각보다 이사를 깔끔하게 해주기는 했다. 몇몇 버그가 아직 남아 있지만,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글은 아랫글에 이어지는 글이다:

☞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 구경: 인문학에 '아님 말고'를 허하라〉

▶ 통약불가능? 지금 불가능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가?

윗글에서 나는 학문 대상을 ― 그다지 명확하게 쓰지는 않았지만 ― ①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것 ② 얻을 수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③ 지금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것 ④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나눈 다음 ②와 ③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썼다.

'데이터'라는 말은 알고 봤더니 질적인 내용도 포함할 수 있는 말이더라. 그러나 이 글에서는 과학에서 말하는 양적인 데이터만을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③을 ④로 오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듯하다. ☞'저련'이 예로 든 '가바가이 문제'나 이택광이 말한 "오빠들 마음 속의 갈등"이 실제로 그 '오빠들' 마음속에서 일어났는지 아닌지 등은 기술적 제약이 없다고 가정하면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루시앨' 블로그에 썼던 댓글을 인용하겠다.

재현가능성 문제는 기술적 제약이 없다면 대부분 해결 가능합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스타트렉》을 보면 비슷한 사례가 몇 차례 나오죠.

[…] 스타트렉 얘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재구성할 때 필요한 개념인데, 이걸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얘기를 해야 하므로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 반응을 ① 원자 수준에서 ② 나노세컨드(nanosecond) 단위로 ③ 실시간으로 ④ 원격으로 ⑤ 인체에 무해하게 기록·분석하는 장치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가바가이' 문제 등이 한 방에 해결됩니다. 지금도 뇌 지도 그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런 장치가 개발됐을 때쯤이면 '뇌 스캐너'는 실시간 만능 통역기가 됩니다. 아예 외계 지성체를 만나더라도 '뇌 스캐너'가 그 외계인에게도 똑같이 쓸모 있기만 하면 외계 언어를 해독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요. 해독 작업이 끝나면 외계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실시간 만능 통역기가 됩니다.

그런데 '저련'은 이번에는 '초랑색' 어쩌고 하는 패러독스(?)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 예는 개념 정의가 처음부터 논리에 맞지 않으므로 정의 자체를 폐기하는 데서 얘기가 끝나야 하지 않을까. 다시 물었더니 아래와 같이 답하더라. 나는 이것이 내 주장에 타당한 반박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용은 해 둔다.

원철님 논지의 핵심이 <어떤 이론적 차이든 경험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라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인용한 두 사례는, 그것이 불가능한 이론적 개념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입니다.

경험적 증거 수집 능력의 증대는, <이른바 문화적 영역에 대한 해석의 배경 이론으로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문제>의 핵심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원철님에 대한 논박으로 제가 생각한 것입니다.

이택광이 소녀시대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시도하는 것은 소녀시대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을 나름의 합리적 이야기로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인듯 합니다. 즉 역사적 작업이죠. 그런데 이 역사적 작업은 소녀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규제하는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이 개념의 규제가 이뤄지는지, 저 개념의 규제가 이뤄지는지를 조작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이게 문제겠지요. 이건 개념마다 물어봐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경험적 증거만을 주지만 서로 다른 개념이 적용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제가 언급한 두 가지 고전적인 사례입니다.

'저련' 블로그에 내가 댓글로 썼다시피, 내가 알기로 데이터 얻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딱 하나 있다. 전자(electron)가 움직이는 궤적은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이 관찰할 수 없다고 한다. 전자를 관찰하려면 빛 또는 다른 어떤 종류라도 '에너지'를 전자에 쏴서 돌아오는 에너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에너지 자체가 전자가 움직이는 궤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확률적 '분포'밖에는 알 수 없다.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더 자세한 설명은 안 해준다. 궁금하신 분들은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로 검색해 보시라.

▶ 이택광의 '오지랖' 발언: 추상적 진실과 구체적 맥락 사이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좀 더 뒤에 나오지만, 그에 앞서 참고하면 좋을 얘기를 해 둔다. 새로 정리하기는 귀찮으니 한윤형이 쓴 ☞글에서 나랑 한윤형이 댓글로 주고받은 내용을 퍼오겠다.

한윤형

김우재는 트위터에서 오랫동안 이택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해왔습니다. 뭐 그게 이택광이 말한 '맥락'인 셈인데, 이택광 글 맘에 안 든다, 안 좋다, 라고 거듭 언명하는 수준에선 큰 문제도 아니었지요. 싫다는데 어쩔 겁니까. 한국 사회나 진보담론이 과학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투덜거림에선 참 여러가지 얘기거리들이 떠오르지만...

문제가 된 건 김우재가 이택광의 글을 링크를 걸면서 '학자로서의 양심'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 운운한 것인데, 이건 분명 "네 글 싫다." / "저딴 놈 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와는 다른 차원의 발화죠. 이택광이 학문도 아닌 학문을 부여잡고 논문같지도 않은 논문을 써가며 학자로서의 양심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굉장히 학적인 문제고 말을 꺼낸 사람이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김우재는 "지금 선생님 논문을 읽고 있다.", "곧 글을 비평해 드리겠다."라고 했으니 입증은 하기도 전에 단언부터 한 셈입니다. 뭐 트위터에서 한 소리니 좀 뒷담화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옹호할 수도 있긴 한데 발화만 보자면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이택광이 트위터에서 말을 걸었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까드리겠습니다."라는 김우재의 발언에 "초파리 연구자가 문화연구에 왜 간섭하나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이 발언이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김우재의 발언을 이해하려 드는 잣대에서라면 별로 과한 발언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김우재의 반응은 과학자이면서 문화연구가인 어느 학자의 견해를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지요. 해당 발언에서 드러나는 이택광이 '편협'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니체가 박사학위도 없이 교수임용 받은게 어떻게 박사학위 없는 다른 사람이 교수임용 해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별 것도 아닌 제 발화에 대해선 논리성을 검증하겠다고 덤벼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더군요. 이택광이 뭐라고 하든 김우재가 정교한 글로 이택광을 비판한다면 될 일입니다. "과학자를 무시한다."는 주장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지요.

저는 이런 문제를 굳이 기술하여 누가 어느 부분에서 잘못했고 잘했고 하는 얘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생략한 것이지요. 그런데 원철 님도 그렇고 많은 님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대니 이렇게라도 정리를 해두어야 할 것 같네요.

2010/12/12 11:41

김원철

윤형님이 정리해주신 맥락 설명은 매우 타탕합니다. 그러나 제가 쓴 '추상적 진실'이라는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하네요. 김현진 떡밥 때 민노씨가 쓴 말인데요: http://minoci.net/982 그러니까 맥락과 무관하게 열폭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추상적 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김우재는 그 빌미를 가지고 이공계 전공자 전체를 상대로 공분을 호소했고, 실제로 그게 먹혔거든요. 심지어 capcold님 같은 분마저 낚이시던데요. 그런데도 제가 이 사건을 〈과학자 vs 인문학자 싸움〉으로 정의하니 일부로 논점을 흐리네 어쩌네…-_-

2010/12/12 12:05

한윤형

그 '추상적 진실'은 <디 워> 사태 때 "평론가들이 대중에게 선빵을 날렸다."는 김규항의 주장과 같은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추상적 진실'이란게 정말로 진실인지 아닌지 파헤쳐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무슨 우주 공간 설명하기 위해 블랙 메탈을 가정하는 물리학자들도 아니고...물리적 사건이야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무슨 가정이든 동원해야 하지만, 사람이야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왠 말장난이랍니까?

2010/12/12 12:16

김원철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요, 아무리 그러셔 봐야 이미 열폭한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이택광 개객기'에 동참할 테니 저는 차라리 '이택광 잘못했음. 그러나 김우재는 변우재. 끗' 이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윤리적 게으름이랄까요. -_-; 그리고 저는 김현진 떡밥에서는 민노씨가 '추상적 진실'을 앞세워 이택광을 비판한 일은 잘못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왜 왔다갔다 하는지 궁금하시면 맥락을 봐 주세요. -_-;; http://wagnerian.textcube.com/581

2010/12/12 12:45

한윤형

이공계생과 인문대생의 문제는 또 별도로 중요한 논점인 것 같긴 한데...저는 이게 인터넷상에서만 보이는 미시적인 대립인지 아니면 실제로 상호간에 거대한 반감이 형성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죠...-0-;;;

2010/12/12 12:48

▶ 논하기 vs 증명하기

김우재 등이 인문학 전체를 공격했다는 내 주장에 대해 김우재 등이 내놓은 대답은 이렇다: 인문학이 문제라는 뜻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이 '논증'이라는 '기본'이 안 됐기 때문에 문제라는 뜻일 뿐이며, "여기 어디에도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은 없다." 김우재가 블로그에 써놓은 수많은 글을 보면 참말로 그뿐일까 싶기는 하지만, 일단 ☞ 〈논증과 권위〉 같은 글만 보면 그렇단다.

논증이라는 말은 증명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 나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 정신분석학에 제대로 된 논증이 없다는 주장은 타당한 듯하다. 정신분석학자건 아니건 그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을 나는 못 봤다.

그러나 그뿐이다. 정신분석학에 논증이 없으므로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정치·문화 평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둥 하는 호들갑이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한윤형이 쓴 ☞글을 참고하시라.

내가 문제 삼고 싶은 대목은 논증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는 태도이다. 참말로 그런가? 이것은 가치판단 문제이고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므로 사회과학 쪽 예를 들어 조심스럽게 말해 보겠다.

이 글을 관심 있게 읽는 사람이라면 강정수 님을 아시리라 생각한다. ☞블로그에 참 좋은 글을 많이 쓰셔서, 나처럼 언론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른바 '소셜미디어 혁명'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눈치챌 수 있게 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블로그에 올려두고 말기에는 아까운 글이 많아서 몇몇 분이 강정수 님께 논문을 써보라고 권했더니, 강정수 님은 주장만 가득한 글이라 학술지에 싣기에는 곤란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나와 강정수 님이 트위터로 주고받은 대화를 기억에 의존해 되살리면 이렇다.

김원철: 왜요, 우리 지도교수님이 곧잘 하시던 말씀인데, 논문은 '논하는 글'입니다.
강정수: 이 바닥에서는 논문은 곧 '증명'이라고 말합니다.
김원철: 헐, 제가 사정을 몰라 실례했네요. ;;
강정수: 아니요. 학계를 비꼰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강정수 님도 증명이 있어야 학문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강정수 님 ☞블로그를 읽고 각자 판단하시기 바란다.

사회과학과 달리 인문학 논문 가운데는 증명은 거의 없고 주장만 가득한 것들도 더러 있다. 나만 해도 제대로 된 논증이 없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 받았다. 그리고 내 전공은 Musikwissenschaft, 우리말로는 '음악학'이다. 음악 전문 사전을 찾아보면 음악학 하위 분과로 음악 비평을 포함한다. 자세한 내용은 내 논문에서 음악 분석과 음악 비평 사이 경계에 대해 고찰한 〈응용음악학을 위하여〉 단원을 참고하시라.

사정이 이러니 증명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는 태도는 인문학 전체를 공격하는 말일 수도 있다.

▶ 학술 용어와 학술 방언

'논증 드립'은 과학자뿐 아니라 자칭 '철학 덕후'인 'aleph-k'(이후 '알렙') 같은 사람도 하더라. 이 얘기는 위에 했으니 넘어가자. 그런데 '알렙'이 ☞ 〈정직하게, 더 정직하게〉라는 글에서 이택광 등을 헐뜯으며 "씨발 알아먹을 말을 해라"라고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1. 실명 써야 정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는 실명을 좋아해서 실명 씁니다. ^^;

  2. 지젝·네그리·라캉·뭐시기 들먹이지 않고 쉽게 쓰려고 나름 노력하는 한윤형 씨한테 찌질이들이 훈장질하겠다고 뎀비는 일에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윤형 씨가 오늘 쓴 글도 참고하시고요: http://yhhan.tistory.com/1289

  3. 저는 지젝·네그리·라캉·뭐시기 쥐뿔도 모르지만, 이택광 샘 글에서 "네그리가 한 말처럼" 같은 말 대략 무시하고 읽으면 논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던데요. 낯선 학자 이름이 나온다고 글을 이해 못 하리라고 너무 성급하게 단정하지는 않으셨는지요.

  4. 제가 이택광 샘한테 불만일 때는 학자 이름이 아니라 국어사전에 없는 낱말을 일상어처럼 쓰시곤 하는 대목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팔루스'가 뭔지 몰라서 검색하느라 한참 헤매다가 결국 댓글로 질문했는데, 이런 건 원어 표기만 해 줘도 알아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이죠.

2010년 12월 16일 오전 3:32

'실명 드립'은 다른 사람이 쓴 댓글에 '알렙'이 "정직함에 민감하면서 역시 익명이시군요 ㅋㅋㅋㅋㅋㅋ 누가 보면 제 여친이라도 되는 분인 줄 알겠어요."라고 썼기에 한 말인데 이게 중요하지는 않으니 넘어가시라.

그런데 '알렙'은 내 질문에 답하지는 않고 이런 댓글을 달았더라.

aleph_k :

'팔루스'란 개념은 특정한 학파만의 방언(jargon) 아닌가요? ^^; 누군가 라고 말할 때 그걸 듣는 청자는 프로이트가 제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깡의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복잡한 이론의 대강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전제되고' 있는 겁니다. 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매우 싫어요 ^^;

2010년 12월 16일 오후 4:43

'방언'이라는 말 뒤 괄호 속에 "jargon"이라 써놨으니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학술 용어'라 해도 될 말을 굳이 '방언'이라 한 대목은 비겁해 보인다. '방언'이라는 말은 '표준어'와 구분해 쓰는 말이다. 그런데 표준어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정하나? 어떤 것은 '학술 용어'이고 어떤 것은 '학술 방언'인가? 이쯤 되면 '권위'는 누가 앞세우면서 적반하장인지 모르겠다.

내가 예로 든 '팔루스'(phallus)라는 말은 이택광이 쓴 ☞ 〈김연아가 미국보다 더 좋은 까닭〉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팔루스'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아랫글을 대충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미국을 김연아보다 더 사랑하는 건 아니다. 한국인들은 미국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미국의 팔루스가 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팔루스는 타자의 욕망을 나타내는 기표이다. 이 욕망의 기표는 결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미국의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는 건 미국의 결핍을 충족시킴으로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표현은 의미화를 전제한다. '나는 너를 원해'라는 이 발화에서 중요한 건 '너'라는 기표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은 미국의 '너'로 의미화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김연아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들이 바로 미국이 욕망하는 기표이기를 염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 우리 모두 미국인이 되자는 '대만 식 친미주의'와 다른 노선이다. 이미 이런 전조들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 <다이 어나더 데이>가 개봉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이 정확하게 재현되지 않았다고 불매운동을 벌였던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이런 욕망의 구조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징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뜻을 모르는 단어 때문에 찝찝하면 나처럼 물어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윤형은 ☞ 〈글쓰기의 가독성과 글쟁이의 밥그릇〉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난 대중이 '쉬운 글'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은 뭔가 전문적이고 어려운 어휘를 마구 섞어쓰는 '우리편 전문가'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미네르바 글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그의 비평 자체는 '뺑끼'임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우리는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ㅇㅁㅂ ㄳㄲ'라든가 'ㄱㄷㅈ ㄳㄲ'와 같은 감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이 감성을 어떤 전문가가 지지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닌가?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은 무시해도 좋은 얼간이일 뿐이다. 가령 살인적으로 친절한 글쓰기와 무한에 가까운 소통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이 블로그가 한 사례인데, 내가 친절하게 대꾸하면 대꾸할수록 덧글러들은 술취한 한국 남성이 술집 아가씨 대하듯 나를 대할 뿐이다.

[…]

나는 이택광 글이 정말로 가독성이 부족했다면 악플도 달리지 않고 까도 창궐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내가 아는, 가독성이 낮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블로그는 대개 덧글없이 휑하다. 이택광의 글에 악플이 달리는 이유는 적어도 그의 글에 어떤 수준의 가독성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내가 관심있는 대상을 다루고 있어서 들춰보았고, 8-9할은 알아들을 수 있는데 잘 모르겠는 이론용어 때문에 1-2할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신경질이 나는 것이다. 8-9할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을 쓰다는 건 이택광의 '한국어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 정도 한국어 능력이 없음이 명백해 보이는 분들이 그의 글의 가독성을 문제삼을 때 성질이 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쉬운 글을 읽고 싶다면 여전히 홍세화나 진중권이나 박노자나 김규항의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지만 나같은 사람의 글도 있다. 굳이 문체가 있는 사람의 글을 붙들고 그의 글을 거세하려고 발광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 꼴같잖지 않겠나.

내가 이택광 글을 읽으면서 짜증 났던 대목은 '팔루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 말이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데 원어 표기도 없어서 영어 사전을 찾을 수도 없어서였다. 말뜻을 모르면 사전 찾을 수 있게 써주기라도 해야지. 물어본 다음 답글 달릴 때까지 기다리려면 귀찮잖아. 이와 관련한 내 생각은 아랫글을 참고하시라:

☞ 〈글 쉽게 쓰기〉
☞ 〈글 쉽게 쓰기 vs. 알아서 읽으라고 배 째기〉

글 찾기

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