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5일 일요일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1)

바이로이트 축전극장, 2006년 8월 27일. (c) 김원철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크리스티안 틸레만.

확대 사진. (c) 김원철

2006년에 바이로이트에 갔던 얘기를 바빠서(귀찮아서) 미루다 이제야 씁니다. ;;

볼로냐에서 학회가 있어서 겸사겸사 독일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마음이 콩밭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드레스덴 젬퍼오퍼 '반지' 시리즈가 일정에 꼭 맞더군요.

사실은 하루 여유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짧게 바이로이트를 관광하려고 생각했다가 끝내 "Suche Karte"(표 구합니다) 신공(?)을 써서 <신들의 황혼>을 보았습니다.

그 모험 일지(?)를 써봅니다. ^^




▶ 상황 1.

볼로냐에서 있었던 국제음악지각인지학회(ICMPC)가 끝나고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 하루를 묵었다.
피곤했었는지 조금 늦게 일어나 서둘러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지하철 역 표 파는 기계 앞에서 난감해하다가
아무나 붙잡고 "중앙역 Hauptbahnhof"이라고 한 다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개찰구도 없고 지하철 안에도 표 검사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렇다고 무임승차하는 사람은 없기를. 갑자기 검사할지도 몰라.

▶ 상황 2.

"Hauptbahnhof"라고 쓰여있는 곳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어째 갈수록 '시골스러운' 풍경이 되어간다. 서너 정거장 거리랬는데...
그러다가 나오는 역 이름이 웬 다름슈타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반대쪽이란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 10 정거장!
갈아타려는데 왜 이리 안 와. OTL

▶ 상황 3.

중앙역. 표 파는 데서 언제 출발할 거냐고 묻기에 '되도록 빨리' 가겠다고
"as early as possible" 했더니 7시인가 9시인가가 가장 빠른 거란다.
그때 시각이 오전 11시가 넘었으니 그럼 저녁까지 기다리란 얘기잖아?
아놔, 바이로이트 관광은 물 건너갔군.
그런데 드레스덴 가는 표를 사려니 매표소는 여기가 아니고 저쪽으로 가란다.
매표소에서 마찬가지로 "as early as possible" 했더니 당장 출발할 거냔다.
그렇다고 하니 15분 뒤에 출발한다네? 아하, 좀전에 들은 건 내일 아침이구나!
(독일은 24시간제를 쓴다. 아, 헷갈려. 나 군대 갔다 온 거 맞아?)
생각해 보니 그 "early"가 그 "early"였어. "soon"이라 해야 할 것을! OTL
끝내 바이로이트를 거쳐 드레스덴으로 가는 기차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지뢰밭 하나 통과.

▶ 상황 4.

기차 타는 곳이 어디야! 헤매다 보니 5분밖에 안 남았다.
겨우 찾아갔는데 기차가 왜 안 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니 10분쯤 연착된단다. 15분 넘게 연착되었던 것 같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바이로이트 역 도착 시각이 오후 3시 53분이었기 때문이다.
4시에 공연 시작한단 말이다!
나는 표도 없어서 극장 옆 택시 서는 곳에서 '주헤 카르테' 신공을 펼쳐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

여기서 잠깐! 바이로이트 축전 표 구하는 법 소개:
http://wagnerian.textcube.com/entry/Suche-Karte

▶ 상황 5.

바이로이트 가는 기차로 갈아타려고 먼저 뉘른베르크 가는 기차를 탔다.
"실례합니다. 제 좌석이 어딜까요?"
"일등석인가요 이등석인가요?"
"이등석인데요."
"여기는 일등석 칸이에요. 이등석은 저쪽으로 가세요."
아놔, 어쩐지 시설이 좋더라.
자리를 잡은 다음 마침 배가 고파서 식당칸에 갔더니 하나 빼고 다 그릇에 담긴 것들.
자리에 두고 온 짐도 걱정되고 해서 초코바 비슷한 것과 물(Mineralwasser)을 샀다.
원래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커피, 콜라 등 향정신성 식품은 안 먹지만 어쩌랴.
그런데... 자리에 와서 포장을 뜯어보니 초코바가 아니라 아이스바다. 아놔...
그래 뭐, 오늘 점심은 초코 아이스바다.

(c) 롯데삼강 http://www.lottesamkang.co.kr


▶ 상황 6.


마침내 바이로이트 가는 기차를 탔다. 드디어, 드디어...
바이로이트행 표지판 사진도 함 찍고...


역에 도착하면 재빨리 택시를 잡고 극장으로 가는 거야.
걸어서 15분이랬으니까 차로 5분 안쪽, 2분 안에 "Suche Karte" 신공으로 입성한다.
이거 완전 미션 임파서블이군. 그래도 리브리에를 들고 있으면 주목받을 거야.

소니 이북리더 리브리에(Librié)


▶ 상황 7.


맞다, 여기 승객들한테도 주헤 카르테 신공을 펼쳐보자!
음... 이것 참 창피한걸?
모르는 사람은 기차표 구하는 줄 알까 봐 "페스트슈피엘?"이라고 말하면서
리브리에를 들고 기차를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이 웃다가 쓰러진다.
끝내 헛수고.
자리에 돌아오니 옆에 있던 독일 할머니들이 묻는다. "그래서 표 구했어?"

▶ 상황 8.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동생이 바이로이트 산다면서
표를 구하는 법을 알아봐 주겠단다.
고맙기는 하지만 별로 기대는 안 되는...
앗, 동생이 차로 극장까지 태워줄 거라고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약 100미터 앞에 두고 바리케이트가 처져 있다.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택시만 통과할 수 있다는 듯하다.
아무나 극장 앞에 차 세울 수 없다는 얘기겠지.
배낭을 메고, 뛰어, 뛰어! 2분 전!

죠낸 뛰는 거다!
(사진은 디씨클갤에서 돌아다니던 짤방)

아놔, 오르막길... 푸른 언덕(Der Grüne Hügel)이라 이거지? 1분 전!
헉헉헉... 상황 종료. OTL

▶ 상황 9.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1막 끝나고 표를 팔아버리려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라.
일단 극장 앞에서 사진 한 판 박고,
한 손에는 여전히 'Suche Karte'라고 또렷이 나오는 내 사랑 리브리에를 들고서
매표소 앞을 한 판 더... 어어, 앗!
리브리에를 떨어트려 버렸다!
바닥에는 빗물도 약간 있었는데...ㅠ.ㅠ
건전지는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뭐... 리브리에는 전자잉크를 쓰기 때문에
전원이 갑자기 꺼져도 마지막 화면이 남아있으니
일단 주헤 카르테 신공 펼치기에는 문제가 없다.



▶ 상황 10.

택시가 서는 곳으로 갔더니 젊은 남녀가 '주헤 카르테' 종이를 들고 있다.
저렇게 펜으로 쓴 걸로는 약해.
"당신들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요?"
"2시간이요."
헉... 갑자기 지각한 게 하나도 속상하지 않다.
아니다, 어쩌면 경쟁자를 물리치려고 거짓말했을지도 몰라.
(속고만 살았냐!)

※ 여기서 보충 설명: 2006년 바이로이트 축전에는 <니벨룽의 반지> 새 프로덕션이 올라왔고, 적어도 독일에서는 명성이 카라얀 못지않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한 해였습니다. 그야말로 표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돈키호테 짓'을 했습니다. 미치면 무슨 짓을 못해요. ^^;

여기가 바이로이트 축전극장! 이 건물 왼쪽에 택시가 선다.


▶ 상황 11.

<신들의 황혼> 서막과 1막, 그리고 막간 휴식시간까지 2시간 넘게 걸리겠지?
시간이 있으니 숙소부터 잡자. 숙소가 있기는 할까?
시 안내소가 도대체 어디야? 역에서 지도 하나 얻어서... 물어... 물어...
안내소에 가니 사람은 없고 소책자들만 있다.
종류별로 하나씩 집은 뒤 살펴보니 숙소 연락처를 모아놓은 게 있다.
공중전화로, '방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 아놔. OTL
끝내 이웃마을에 있는 팬션을 하나 찾았다.
창문이 어쩌고 하면서 방에 하자가 있다는 듯이 말했지만 무조건 '괜찮아요!' 했다.
시간이 없으니 택시를 타고 가서 방 열쇠를 받은 다음(밤늦게는 체크인이 안 된단다.)
다시 주헤 카르테 모드.


... 그곳에서 귀인을 만나리니, 순수한 바보여! (다음 편에 계속)


다음 글 읽기: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2)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3)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4)
☞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바이로이트 여행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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