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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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앙집권 국가인 프랑스나 영국보다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쪽이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뿌리내리기에 더욱 좋은 곳이었다. 이 사실은 서양음악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옮겨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고전주의 성립에 이바지함으로써 18세기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도시는 어디일까?
▶ 만하임
만하임이 초기 고전주의 중심으로 떠오른 바탕에는 프리메이슨이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싶으나 증거가 없고, 카를 필리프(Karl III Philipp) 선제후(통치기간: 1716-1742)와 그 뒤를 이은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선제후(통치기간: 1742-1778)가 이바지한 바가 가장 크다. 선제후(選帝侯, 라틴어: Princeps Elector; 독일어: Kurfürst)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뽑는 선거인단이란다. (음... 선거인단이라니 쌀국의 '고전적인' 선거제도가 바로 신성로마제국 시스템었구나.)
카를 필리프 선제후는 만하임에 정치·외교·경제적 주춧돌을 쌓은 사람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이른바 '만하임 악파 (Mannheim School)'를 꽃피운 사람이 바로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다.
1742년 칼 필립의 사망 후 젊은 칼 테오도르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처음에는 개혁과 긴축정책을 편다. 그의 긴축정책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성대한 결혼식과, 칼 필립의 장례식 그리고 집권하는 과정에서의 많은 경비 지출과 새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하는 등의 지출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의 긴축정책 중에는 음악가 수의 감축도 포함되었다. 짧은 긴축정책 이후 칼 테오도르는 상공업을 다시 육성하고, 예술과 학문등을 지원하여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 칼 테오도르는 만하임 궁정의 음악관련 분야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만하임 오케스트라를 당대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하게 하였으며,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음악가들이 모여, 만하임은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음악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름철에는 만하임의 근교에 있는 슈베칭엔(Schwetzingen)의 여름궁전에 머물렀다. 이곳으로 수 많은 예술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들이 찾아왔다. (330쪽)
- 이성률, "만하임 칼 테오도르(Karl Theodor) 선제후의 예술지원사업."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7), 제13권, pp.325-343.
해마다 여름이면 여기서 '슈베칭엔 페스티벌'이 열린다.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www.swr.de/swr2/schwetzinger-festspiele/
만하임은 음악가들에게 봉급을 매우 넉넉하게 주기로 이름이 높아서 1777년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모차르트가 만하임에 가보고는 그리로 일터를 옮기도록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설득하려고도 했단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자신의 아들 폴프강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 만하임 기법사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당시 볼프강은 만하임에서 새로운 직장을 얻기를 원한 반면 레오폴트는 볼프강이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 오페라로 큰 명성을 얻기를 원하였다. 결국 파리에서 마리아 안나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볼프강은 다시 살츠부르크로 되돌아 간다. (이성률, 338쪽)
만하임 악파는 셈여림을 음악에 효과적으로 쓰고('만하임 크레셴도') 교향곡 3악장에 미뉴에트를 두어 4악장 얼개를 굳히는 등 고전주의 양식이 싹트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포니아 "La melodía germánica" 3번 1악장
그밖에 이름난 만하임 음악가는 다음과 같다.
알레산드로 토에스키(Alessandro Toeschi, ca. 1700-1758)
카를 그루아(Carl Grua, ca. 1700-1773)
크리스티안 카나비히(Christian Cannabich, 1731-1798)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1711-1783)
프란츠 자버 리히터(Franz Xaver Richter, 1709-1789)
카를 슈타미츠(Carl Stamitz, 1745-1801)
안톤 슈타미츠(Anton Stamitz, 1750-?1796)
프란츠 이그나츠 베크(Franz Ignaz Beck, 1734-1809)
만하임의 영광은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에게 '변고(?)'가 생기면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다.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가 바이에른 주를 상속받아 뮌헨으로 궁정을 옮겨버린 까닭이다.
▶ 슈투트가르트
18세기 중엽 샤를르 유진(Charles Eugene, 1793년 사망) 공작이 통치했던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공국은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중요성이 없는 작은 궁정이었지만 특히 1753년에서 1769년까지 음악적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다. 공국의 수도였던 슈투트가르트와 루드비히스부르크(Ludwigsburg)의 궁정 극장에서 오페라가 집중적으로 공연되었다. 유진 공작은 1744년에 완전히 권력을 잡으면서 화려한 궁정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145-6쪽)
- 이경희, "근대 유럽 궁정의 음악 양상과 역할."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6), 제10권, pp.139-165.
이른바 '듣보잡' 공국이 낭비를 한 덕분에 음악이 꽃핀 사례다. 만하임과 가까워서 '뽐뿌'를 많이 받았나 보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 못 가고 1764년 즈음부터 시들어 갔단다.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가 카펠마이스터(궁정악장)로 있었다.
그런데 그로브 사전(NGD2)이나 위키피디아에는 Karl Eugen이라고 나온다. 샤를르 유진이 아니라 카를 오이겐 아닌가?
※ 음악가 연봉 비교
홀츠바우어(만하임) : 1500 굴덴 (1759년)
욤멜리(슈투트가르트) : 4000 굴덴
모차르트(잘츠부르크) : 450 굴덴 (1779년)
레오폴트 모차르트 (잘츠부르크) : 350 굴덴 (1779년)
- 이성률, 338-9쪽
▶ 드레스덴
한편, 18세기 전반 가장 화려한 음악적 위용을 자랑했던 곳은 작센 공국의 드레스덴 궁정이었다. 음악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1773-63 재위)의 주된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부인인 조세파(Maria Josepha)도 마찬가지여서 사적 연주회를 자신의 거처에서 거의 매일 저녁 열었다. 1747년 작센과 바이에른 공국 간의 겹혼사가 결정되었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요세프 선제후와 작센의 공주 마리아 안나, 그리고 바이에른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와 작센의 왕세자 프레데릭 크리스찬과의 결혼식이 드레스덴 궁정에서 열렸다. 축제는 거의 한달이 지속되었다. 궁정극장에서 하쎄의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다른 극장에서도 드레스덴 시민들을 위한 공연이 벌어졌다. 여러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파스토랄이 지역 축제의 일환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경희, 143쪽)
드레스덴 음악은 175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쳐들어오면서 시들어 갔다.
▶ 베를린
이제 다시 프리메이슨 얘기를 해보자.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음악이 돌아가게 하려고 그 중간 단계로 군소 귀족을 중심에 세우려면 먼저 전제군주 곁에 있는 솜씨 좋은 음악가들을 군소 귀족 곁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전제군주를 움직이려고 프리메이슨이 몰래 간직한 지식(머리글 참고)을 내놓기에는 너무 위험했으리라. 그렇다면 전제군주를 낚을 떡밥으로 무엇이 좋을까? 바로 계몽주의의 '전제군주 판본'인 '계몽절대주의'다.
계몽절대주의(Enlightened absolutism)는 18세기의 절대주의로, 특히 동유럽의 절대주의는 계몽적 전제정치로서 특징지어진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프레더리크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사)와 요제프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그 전형이라 하며, 그들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개명적(開明的)인 사회 개혁을 실시하고 정치·경제의 근대화를 수행하여 강력한 근대 국가 건설을 기도했다.
그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봉건적 여러 관계가 강하게 남아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미숙한 동유럽 여러 나라가 서유럽의 선진국에 대항할 필요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 귀족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의 증대를 꾀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며, 개혁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 본질적으로는 절대주의임에 변함이 없었다.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의 황폐 속에서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확대를 개시하였고, 18세기에는 계몽적 전제정치 아래 강화된 양국이 독일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융커의 나라인 프로이센은 그 성격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 통치시대에 두 번이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강국의 지위를 확립했다. 18세기 후반 3회에 걸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더욱더 강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국내에 많은 이민족(異民族)이 있어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에 의한 개혁도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하여, 차차 독일 통일을 지도하는 입장을 잃기 시작했다. 본 문서에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이에 준하는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위키피디아
18세기 오스트리아·독일 문화권에서의 궁정문화가 지니는 또 다른 특징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제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중 식의 궁정문화가 아니라 다수의 귀족들 소유의 크고 작은 궁정으로 분산·이전, 즉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개별 형태로서 행하여지는 특이한 양상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제왕이 주도하던 중앙 궁정들이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 아래 실리 추구와 긴축 재정을 위해 문화적 주도 역할을 '포기' 내지는 '축소'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18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황실, 독일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85쪽)
- 연상춘, "18세기의 음악후원문화 : 고전시기 비엔나 귀족들의 음악후원문화 연구."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7), 제13권, pp.283-302.
(그런데 계몽절대주의와 긴축정책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원철도 저 두 글을 나란히 보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검색해 봐도 잘 안 나오던데 뭘 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만하임에 있던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 같은 사람도 때로는 계몽전제군주로 분류하는 모양이고, 위에 인용한 글에 있다시피 실제로 즉위하고 나서 얼마까지는 긴축정책을 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제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견주면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는 그냥 음악 애호가였을 뿐이라 하겠다.
그런데 전제군주 곁에 있는 음악가가 줄었다면 남은 사람은 그만큼 솜씨가 좋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음악가들이 이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다만,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전제군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곁에 있는 다른 음악가보다 푸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제 곁에 있었던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랬다.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1740년부터 1768년까지 약 28년간 쳄발리스트의 직무를 수행한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는 당대의 "대(大) 바흐"로서 서양음악의 역사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의 '구세계'로부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신세계'로 움직여나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곡가였다. 물론 여러 문헌들에서 거듭 확인해주는 바와 같이, 또 부드럽고 겸손한 표현을 빌려 자인하는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 궁정의 '일개(一介) 쳄발리스트'였던 그가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개 쳄발리스트'는 당시 이미 고유의 '전고전주의적' 음악양식의 틀을 구축, 발전시켰으며, 궁정 밖에서는 '질풍노도'(Sturm un Drang)와 '천재미학'을 출발시킨 미래지향적 예술가 그룹의 일원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힌 터였다. (125-6쪽)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9), 제20권, pp.125-147.
나중에 붙임: C. P. E. 바흐 동생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공인된 프리메이슨이었다. 아마도 형인 C. P. E. 바흐도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 빈(Wien)
위에서 쓴 바와 같이 빈에도 계몽전제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여제다. 공식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프란츠 1세의 황후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권을 거머쥐고 있어서 보통 '여제'라고 부른다. 신성로마제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여왕,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이기도 했으며, 1740년부터 오스트리아 여대공이 되면서 줄줄이 감투를 따냈단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통적으로 음악가들을 넉넉히 지원해 왔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마찬가지로 긴축정책을 펼치며 궁정악단을 줄인다. 그리고 그 음악가들을 빈에 가득 모여 있던 수많은 귀족과 부르주아가 빨아들인다.
당시 비엔나에 왜 그렇게 많은 귀족들이 모여 살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황제가 거주하는 도시라는 자체만으로도 그중 한 이유는 충분히 명명될 수 있다. 확실히 비엔나는 타 지역의 귀족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 주변에 거주지를 갖고 머무른다는 사실은 물론 자신의 영향력 확보에 있어서도 중요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령이서의 보직 분배 시에도 전제되는 사항이었다. 아울러서 경제적 이점 또한 당연히 있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고위 공무원 내지는 군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은 17-19세기가 가지는 특징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거주지를 가지며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은 비단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 자손 세대를 위해서도 일종의 보장책이나 마찬가지였다.
- Volkmar Brunbehrens, 재인용: 연상춘, 292쪽.
바로 이 분위기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 양식을 꽃피운다. 이 사람들 얘기는 나중에 더 알아보기로 하고, 그보다 눈여겨볼 곳은 이때 화성법을 바탕으로 하는 '쉬운' 작품이 쏟아지면서 프리메이슨이 바라던 '떡밥'이 얼추 완성되어 갔다는 대목이다.
디터스도르프는 그로스바르다인 궁정악장 시절에 그가 섬기던 주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회를 위하여, 다시 말해 하루 밤을 위한 연주회를 위하여 (!) 대규모 합창을 포함하는 칸타타, 솔로 칸타타, 대규모 교향곡 2곡, 중간규모 교향곡 1곡,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였던 적도 있었다.
- 에두아르드 한슬리크, 재인용: 연상춘. 295쪽.
마찬가지로 이와 병행해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가던 오케스트라 문화 역시 아직까지는 시민계급 출신의 직업음악가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전공자 내지는 음악애호가들을 공동 구성원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었으며, 이때 이들 비전공 오케스트라 구성원들 대부분은 귀족계층이 주를 이루는 추세였다.
- 카를 달하우스, 재인용: 연상춘, 284쪽.
당시의 귀족들은 자신의 의뢰로 생겨난 작품들에 대한 독점적 소유 욕구, 즉 외부로의 공개를 거부하고 자신만 소유하려는 경향 역시 빈번하였다. 예를 들어 가스만(Florian Gaßmann, 1729-1774)의 음악게 깊이 감동하였던 디트리히슈타인 백작(Johann Baptist Dietrichstein, 1728-1808)은 교향곡들과 현악4중주곡들 작곡을 의뢰하였고 이에 대한 사례를 충분히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충분한 사례의 조건으로 어느 곡도 외부로 공개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음악을 접해보고 싶은 황제 요제프 2세의 반복된 요청마저도 가스만은 따를 수가 없었다. 급기야 그의 사망 이후 이 작품들을 인쇄하자는 황제의 제의마저도 디트리히슈타인 백작은 거절할 정도였다.
- 에두아르드 한슬리크, 재인용: 연상춘. 296쪽.
이제 마지막 안배가 남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음 시간에 알아보기로 하자.
붙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이거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쓰려니까 헷갈리네요. 인용문에서 '칼 필립 엠마누엘'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일일이 고치려니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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