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8일 목요일

소설 『트러스트』 -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숭고함과 장엄함

에르난 디아스 소설 『트러스트』는 남성 작가가 여성 등장인물의 시선에 무게를 두고 서술한 점이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남자들은 되먹지 못한 인간이거나, 진실을 적극적으로 왜곡하려 들거나, 최소한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는 가부장적 인간이다. 그에 반해 여성들은 지성과 양심을 가진 인물이며, 남자들이 왜곡한 진실을 폭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라 삶과 죽음, 지성과 양심, 그리고 학문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을 이루는 네 가지 이야기 중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러 진실이 폭로되기 시작할 때, 독자로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는 과연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다. 그러나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단정짓는 역자 후기를 읽고 있자니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시발점이 바로 이 짜증이었는데, 남자인 내가 이런 정도면 여성 독자는 모멸감을 느낄 법도 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라쇼몽›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지만,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의 진실성 때문에 라쇼몽과는 다르기도 하다.

역자는 네 번째 이야기가 일기의 형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뒤로 갈수록 일기의 형식을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일기의 마지막 대목을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지만, 그것이 딱히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자의 단정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 가능성 있는 의견일 뿐이다.

일기를 보고 일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일기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남자들이 보이는 '여자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식의 고정관념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역자는 네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여성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지성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이것은 역자의 허술한 주장에 대한 나의 허술한 반응이다.)

세 번째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 나는 그간 폭로된 진실과 결정적인 복선을 바탕으로 추론한 끝에 네 번째 이야기에서 폭로될 가장 중요한 진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의 가장 중요한 반전이라 할 수 있는 설정을 미리 눈치챘음에도 네 번째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장엄함, 역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숭엄함'이 네 번째 이야기의 백미인 까닭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이며, 이것을 일기가 아니라 말하는 것은 이 숭엄함에 대한 모독이다.

네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선물(先物)'이다. 남에게 선물할 때 말하는 선물(膳物)이 아니라,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고위험 파생상품을 뜻하는 말이다. 선물은 어떤 상품을 특정 가격에 사거나 팔 권리를 증권화한 금융상품으로, 영어로는 'Futures'라고 한다. 선물은 특정 상품의 미래 가격이 폭등 또는 폭락할 것에 대비하는 보험 성격이 있는 상품인 동시에 투기적 관점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바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이기도 하다. 

금융상품을 뜻하기도 하고 '미래'를 뜻하기도 하는 영어 'Futures'가 네 번째 이야기의 제목인 점은 이야기의 숭엄함에 힘을 더한다. 작품 전체의 제목인 '트러스트'(Trust)가 가지는 다층적 의미는 '선물'(Futures)에 이르러 숭엄한 완결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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