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45주년 기념 특별정기연주회Ⅰ
2010년 3월 16일(화) 저녁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지휘: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Piotr Borkowski
• 바이올린: 김소옥
• 색소폰: 그렉 바나스작 Greg Banaszak
• 오보에: 사토 키아오야마 Satoki Aoyama
• 클라리넷: 히데미 미카이 Hidemi Mikai
• 호른: 마코토 가나보시 Makoto Kanaboshi
• 바순: 모토코 가와무라 Motoko Kawamur
• A.Vivaldi - Concerto for 2 violins & 2 cellos in G major F.IV/1
• F.Chopin - Suite Chopiniana (이윤국 편곡) 한국초연
• Pierre Max Dubois - Concerto for Alto Saxophone & Orchestra
• W.A.Mozart - Sinfonia Concertante for Winds in E-flat Major, K.297b
• 류재준 - Violin Concerto No.1 Op.10 한국초연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문화예술위원회 평가 대상 공연에서 연주된 다른 창작곡과 견주어 압도적인 예술성을 자랑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훌륭했으나 악단이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수준에는 조금 못 미쳤으며,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현대음악에 어울리는 음향을 충분히 살려냈다 하기 어려웠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을 보이며, 이러한 대목에서 이날 연주된 곡들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빼면 다른 곡들과 연결고리가 탄탄하다 하기 어려우며, 이날 전체 공연 구성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미화하기에는 난잡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미 낙소스(Naxos)에서 음반으로 발매했을 만큼 뛰어난 곡임이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 곡을 한국 초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그 가치가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작곡가 류재준이 대표이사로 있는 ㈜오푸스에서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류재준 음악을 두고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장르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성과"라 했다는 마리안 보르코프스키(Marian Borkowski) 폴란드 쇼팽 음악원 교수의 평이 눈길을 끈다. 원문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은 류재준을 알리는 데 알맞은 말이라 보기 어려우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첫째, '바로크'(Baroque)라는 말에 '―ism'을 붙이려면 '바로키즘'(Baroquism)이라 해야 옳다. 'Classicism'(고전주의)와 'Romanticism'(낭만주의)를 흉내 내느라 별생각 없이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모양이나, 음운론에 비추어 보면 무지를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둘째,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와는 달리 바로크 양식에는 본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고전주의·낭만주의를 '―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계몽주의 및 시민사회 담론과 얽힌 사회 이념 또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은 예술 양식일 뿐이므로 이념을 뜻하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일 까닭이 없다. 다만, 20세기 예술사를 헤아린다면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을 어떤 예술사조를 뜻하는 말로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셋째,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바로크 양식에서 무엇인가를 되살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음악 작곡가들이 바로크 양식을 끌어다 쓴 일은 드물지 않으며, 그러한 작품을 모두 '네오바로키즘'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뒤따른다.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아마도 류재준 스승인 펜데레츠키 후기 양식을 일컬어 때때로 '신낭만주의'(Neo-Romanticism)라 하는 일과 관련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류재준 음악이 '신낭만주의'와 구분되는 특징을 찾던 마리안 보르코프스키는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보다 바로크 양식과 닮은 곳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리라 짐작된다. 자세한 맥락을 알려면 펜데레츠키 음악 양식 변화를 20세기 음악사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인류가 무한히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바탕에 두었으며, 이것이 모더니즘으로까지 이어졌다. 19세기 기능화성이 12음 기법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았고,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 음악은 그것이 발전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몇몇 작곡가가 일찍이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던지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고 나서야 이것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이 내놓은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은 '구조'와 '발전'을 따지던 패러다임을 비틀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새롭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음악 전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펜데레츠키는 1965/66년 《누가 수난곡》에서부터 20세기 작곡가들이 일부러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적 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른바 '신낭만주의'를 거쳐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으로까지 이어졌다.
펜데레츠키는 1982년 『첼로협주곡 2번』으로 신낭만적 음악경향에서 벗어났다. 낭만적 이상과 연결시킴에 따라 때때로 펜데레츠키는 자신의 초기 양식을 부정했어야만 했다면,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다원주의를 추구함에 따라 즉 "옛" 펜데레츠키를 다시 새롭게 복원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는 펜데레츠키는 양식의 연속성을 확고히 하고(즉 작곡 양식 발전의 단절을 없애고), 또한 양식의 다원주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원주의 Pluralismus〉는 한편으로 순수한 조성을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초기의 소음적 양식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 보다 폭 넓은 차원의 양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14쪽.
음악이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펜데레츠키는 이렇게 무너뜨렸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러한 역사를 잇는 작품이며, 많은 곳에서 펜데레츠키 후기 음악 양식이 엿보인다. 펜데레츠키가 즐겨 썼다는 단2도 음형인 이른바 '탄식' 모티프가 작품에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악보 맨 앞에는 이 곡을 펜데레츠키에게 헌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펜데레츠키가 류재준을 후계자로 선언했다고도 한다.
예술 작품이 다른 사람이 쓴 작품과 비슷하다는 말은 으레 칭찬이 아니다. 그러나 베베른과 베르크를 쇤베르크의 아류라 하지 않듯이,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와 닮았다고 해서 류재준 음악을 낮추어 볼 까닭은 없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는 펜데레츠키 작품에서 곧잘 나타나는 탄식과 절망도 있으나 그 못지않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힘찬 리듬이 얽히는 대위법과 "말러처럼 강렬한 클라이맥스"(exquisitely scored, almost Mahler-like climaxes; 마리안 보르코프스키), 정교한 관현악법 등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펜데레츠키, 루토스와프스키, 구레츠키와 류재준 등을 묶어서 '바르샤바 악파'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바르샤바' 하면 쇼팽이 먼저 생각나니 '신 바르샤바 악파'라 해도 좋겠다. 신빈악파와 닮은 말이라 더욱 좋다. '신 바르샤바 악파'의 음악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양식적 다양성을 보이면서 무엇보다 오래 듣기 부담스러울 만큼 진지하고 엄숙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그저 무난했으며, 다른 작품을 제법 훌륭하게 연주한 일과 견주어 보면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곳곳에서 리듬이 뭉개지거나 현대음악다운 음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대목에 아쉬움이 남았다. 지휘자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는 세계초연 지휘자이자 낙소스(Naxos)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지휘를 맡은 바 있으니, 아무래도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이 연주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 곡에서 가장 멋진 곳이 'Misterioso'(마디 428)부터 끝까지라고 생각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엇갈린 리듬으로 마치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텍스처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글록켄슈필이 두 차례 맑게 울린 다음, 팀파니와 탐탐 따위가 갑자기 '빠바밤 빠바밤' 하고 세게 두드려대면서 음악이 끝난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웅성거리듯 현이 두루뭉술한 리듬을 만들어낸 데다가 글록켄슈필이 이끌어 내는 음색 대비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끝내 타악기가 조금은 뜬금없이 쿵쾅거리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세계초연자이기도 한 김소옥의 협연은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