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 글이 보고서에 인용되어 이름을 세 번 쓰려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분께 올라갔다고 합니다. 글을 읽기에 앞서 임산부와 노약자, 심장이나 복장이 약한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기를 권하지 않는다 하지 않을 수 없다기보다는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닌 듯하기도 하다 하기에는 뭣하지는 아니하여 지금 시방 장난치느냐면 바로 그렇습니다.
탄호이저 -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 / 서울시향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 휘 : 오카쓰, 슈야 OKATSU, Shuya
연 출 : 스즈끼, 게이스깨 SUZUKI, Keisuk
무대디자이너 : GRASSI, Italo
의상디자이너 : ALMERIGHI, Steve
조명디자이너 : MUROFUSHI, Ikuo
안 무 : 이시이 준 ISHI, Jun
무 대 감 독 : 오오구리, 대쓰야 OGURI, Tetsuya / 고이스미, 고지 KOIZUMI,Koji
총 감 독 : 다까다, 다다시 TAKADA,Tadashi
이 사 장 : 기까와다, 마고도 KIKAWADA,Makoto
6월 11일(토), 13일(월)
Tannhauser (Ten) 나리따, 가쓰미 Narita, Katsumi
Hermann (Bar) 기가와다, 기요시 KIKAWADA, Kiyoshi
Elisabeth (Sop) 기까하나, 유오꼬 KAKIHANA, Youko
Wolfram (Bar) 하지와라, 히로아끼 HAGIWARA, Hiroaki
Venus (Sop) 고니시,준꼬 KONSHI, Junko
6월 12일(일)
Tannhauser (Ten) 네기, 시게루 NEGI, Shigeru
Hermann (Bar) 기가와다, 마고도 KIKAWADA, Makoto
Elisabeth (Sop) 하다다, 히로미 HATADA, Hiromi
Wolfram (Bar) 후지무라, 마사도 FUJIMURA, Masato
Venus (Sop) 고니시,준꼬 KONSHI, Junko
처음이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전곡을 실연으로 감상한 것도 처음이었고,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가 아닌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페라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세종문화회관에서 3층이 아닌 1층에 앉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11일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학회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12일 공연으로 일찌감치 R석을 예매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12일 출연진이 다른 날과 달랐다. 12일에 출연한 가수들은 베누스 역의 고니시 준꼬를 빼고 다들 바그너 경력이 일천한 2진 가수들이었고, 11일과 13일의 가수들이 진짜였던 것이다. 맙소사! 약이 올라 혼자 앓다가 결국 13일 공연을 3층에서 다시 보고 왔다. 원래는 13일에도 시간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운이 좋아서 여유가 생겼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보다는 가로로 조금 더 넓은 것 같았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이 때문에 오는 9월에 게르기예프가 키로프 오페라를 이끌고 와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음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들섬에 짓는다는 새 오페라하우스가 유일한 희망이란 말인가. 제발 전시용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을 때 음량 면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현일 것이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오케스트레이션할 때 대규모 현악 파트를 염두에 두었으며, 극장의 현악 주자의 수를 정규인원보다 더 많이 둘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향의 현은 부족한 인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음량을 내주었다. 12일 공연에서는 현이 금관과 합창 등에 묻혀 버리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13일에는 훨씬 나았다. 이것이 단순히 연주자들이 13일에 더욱 분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극장 1층과 3층의 음향의 요술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2일 2층에서 들었던 어떤 사람도 "좀 오버하자면 다이나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함의 연속이었"다고 평한 것을 보면 12일보다 13일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소편성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다이내믹의 폭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서곡 마디 32에서부터 비올라-제2 바이올린-첼로-제1 바이올린-콘트라바스로 연이어 점층하는 셋잇단 리듬의 크레셴도는 그 폭이 충분히 크지 못했으며, 마디 37에서 마침내 트롬본이 이른바 ☞ '순례자의 합창' 모티프를 찬가처럼 크게 부풀려 연주할 때 현과 같은 리듬으로 힘을 보태는 호른 등은 바이올린의 음량에 제약을 받아 제 힘을 내지 못했다. 2막 4장의 이른바 '입당행진곡' 부분에서는 무대 위에 배치된 12대의 트럼펫이 들려주는 압도적인 소리가 큰 매력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역시 '절제'를 위해 트럼펫 주자들이 무대 뒤편으로 숨어 버리고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연출을 했다.
2막 4장, 입당행진곡 중 트럼펫 팡파르. 그림을 누르면 미디 음악이 연주됩니다.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탄호이저>는 네 개의 판본이 있는데, 이 가운데 '드레스덴 판'이라 불리는 두 번째 개정판과 '파리 판'이라 불리는 네 번째 개정판이 흔히 사용된다. 팜플렛에 따르면 "간사이 니키카이는 1989년에는 드레스덴 판을 사용하였으나[역대 공연 연보에 따르면 이 오페라단은 이때 처음으로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렸으며 지난 5월 21일과 22일 공연이 두 번째였다. (팜플렛 43쪽.)] 이번에는 양치기 소년이 나오는 일부분만을 파리 판으로 할 뿐 나머지 부분은 전 공연과 같다." (33쪽.) 이 부분에서 드레스덴 판과의 차이는 파리 판에서 양치기가 노래를 하다 중간에("mein Auge begehrte zu schauen." 직후) 세 마디 동안 뿔피리(대본상으로 샬마이, 악보상으로는 잉글리쉬 호른)를 연주한다는 것이다.
지휘자 오카쓰 슈야는 프레이즈 사이사이를 살짝 늘여주는 등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악보의 지시에 충실한 해석을 들려주었다. 특히 서곡 마디 145에서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A# 음을 8분음이 아닌 16분음으로 대충 넘어가듯이 처리하는 녹음이 많아서 평소에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악보대로 연주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이 부분의 리듬과 강약을 정확하게 지켜주어야 특유의 선동적인 느낌이 잘 살아나기 때문이다. 마디 145 첫 박 C# 음의 강세 표시는 세게 연주하라는 뜻이지 결코 길게 늘이라는 뜻이 아니다. 음가는 이미 바그너가 충분히 늘여놓았다.
서곡 마디 142-145. 그림을 누르면 미디 음악이 연주됩니다. © 1997-2002 by Fabrizio Calzaretti.
그러나 피날레의 템포는 지나치게 빨랐다. 서곡과 3막 순례자의 귀향 장면("Beglückt darf nun dich"), 그리고 피날레 합창("Der Gnade Heil")은 모두 ☞ '순례자의 합창' 모티프로 링크되어 있고, 그 템포는 메트로놈 템포 50으로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지휘자는 세 부분 모두에서 바그너가 지시한 것보다 빠른 템포를 선택했다. 앞선 두 곳에서는 그렇다 쳐도 피날레에서만큼은 템포를 정확히 지켜야 제맛이 살아난다. 피날레의 템포 변화를 좀 더 살펴보자. 볼프람이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외치는 부분(리허설 번호 H)의 템포는 50, 탄호이저가 죽은 직후 젊은 순례자들의 합창이 시작되는 부분("Heil! Heil!")의 템포는 88, 마지막으로 다 함께 노래하는 부분("Der Gnade Heil")에서 템포는 다시 50으로 끝난다. 그러나 지휘자가 설정한 템포는 88이 되어야 할 곳에서 120 이상으로 들렸고, 마지막 부분에서도 60 이상으로 들렸다. 갑자기 크게 변한 템포는 단절감을 불러일으켜 피날레의 느낌을 강화시키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빠른 템포는 영적 고양감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 지휘자라서 바그너 식 왕자병 사운드에 닭살이 돋았던 것일까? 이상하다, 자민당과 나치는 통하지 않던가?
이번 공연에서 보여준 서울시향의 연주력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사실 이번 공연을 맡은 오케스트라가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 전속이 아닌 서울시향이라는 사실 때문에 목돈을 투자하기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서울시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버릴 때가 된 것이다. 물론, 대편성일 때에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서울시향은 이를 증명하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하여 입지를 확고히 하라. 마침 브루크너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또는 옛 오명의 핵이 되어 버린 작품인 말러 교향곡 5번은 어떤가?
서곡 리허설 번호 G(마디 309)에서부터 시작하는, 바이올린이 크게 상행 도약 후 반음계적으로 하행하는 16분음 동형진행(이것이 이후 서곡이 끝나기 직전까지 100마디 이상 고집스럽게 지속된다!)은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바그너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부분이며, 실제 연주를 들어보면 여기서 음형과 리듬과 강약이 흐트러지면서 전체 연주가 산만해지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리허설 번호 H(마디 379)에 이를 때까지는 텍스쳐의 전면에 노출되는 까닭에 적당히 뒤에 숨지도 못한다.) 그런데 서울시향은 놀랍게도 이것을 상당히 깔끔하게 연주해냈다. 국내 오케스트라가 이 부분을 이토록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을 듣기는 처음이다. 2막 전주곡 마디 38에서부터 시작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셋잇단음 스타카토 동형진행에서도 자칫 앙상블이 무너지기 쉬운데, 서울시향은 12일 공연에서는 다소 불안함을 보였지만 13일에는 훨씬 안정된 연주를 들려주었다.
작은 실수도 전면에 노출되기 쉬운 트럼펫과 트롬본, 호른 등도 거짓말같이 안정된 소리를 내주었다. 특히 1막 4장 팡파르와 2막 '입당행진곡', 3막 전주곡 등에서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12일에는 입당행진곡에서 호른이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악보대로 내추럴 호른을 썼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모르기는 해도 그냥 밸브 호른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이조 문제가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일까?) 13일에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3막 전주곡의 찬가풍 섹션에서는 트럼펫과 트롬본이 좀 더 크게 부풀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목관의 치밀한 앙상블이 돋보인 3막 엘리자베트의 기도 장면은 특히 13일 공연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만했다. 탄호이저는 뿜빰거리기만 하는 작품이 아니며 이렇게 섬세한 대목도 있는 것이다.
최근 있었던 서울시향 재창단 과정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향의 개혁에 큰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와 시향 단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기도 했고, 모 국회의원은 이 문제를 일반 노동문제로 파악하고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결국 약간의 타협을 거쳐 개혁을 단행했다. 나는 서울시향의 오디션 과정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문화라는 것은 누구 말마따나 건물 짓듯이 밀어붙인다고 육성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향에 대한 서울시의 개혁이 적어도 껍데기뿐인 전시행정만은 아니었음을 서울시향은 연주로 말해주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명박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가 속한 정당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러나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음악애호가로서의 이해관계에 이토록 부합하는 정치인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나는 다음 대선 때 나의 정치적 이상과 음악 애호가로서의 실리를 놓고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물론 나는 이상주의자에 가깝기는 하다.
간사이 니키카이 합창단은 과연 일본이 바그너 강국임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만했다. (일본 바그너협회가 올해로 25주년이란다.) '입당행진곡'과 '순례자의 합창'에서는 전율을 느끼게 하였으며, 2막 노래경연대회 시작부터 탄호이저가 로마행을 외치는 부분까지의 집중력도 대단했다. 1막 3장과 4장에서의 중후한 남성합창도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을 이루었다. 옥에 티 하나를 말하자면, 테너 파트의 누군가는 때때로 독창자 수준의 비브라토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버렸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의 발성이 그에 동화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비브라토는 음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이며, 따라서 합창에서는 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치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비브라토를 억제하는 것이 기본이라 한다.
솔로 가수들에게는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마침 12일 공연 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일본인인 것 같아서 엉터리 영어로 말을 걸었었다. '영어나 한국어 할 줄 아느냐? 일본 가수들이 바그너를 잘하느냐? 바이로이트 무대에 서본 사람은 있나?'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가수들 노래 잘한다. 간사이 니키카이 오페라단 유명하다. 그런데 바이로이트가 뭐냐? 오늘 베누스 역으로 출연한 고니시 준코가 내 동생이다. 너는 음악 하는 사람이냐?' 별로 영양가 있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확인한 가수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매우 높았다.
탄호이저 역의 나리따 가쓰미는 팜플렛에 따르면 탄호이저, 로엔그린, 지크문트, 발터 등 바그너 경력이 화려한 가수이다. 그의 강한 목소리는 과연 바그너 가수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발성에 고음 쪽으로 치우치는 음고 비브라토가 짙게 묻어나오는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비브라토는 음정을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며, 때때로는 정확하지 않은 음정을 지저분하게 가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양계 테너에게 강한 목소리와 폭이 큰 음고 비브라토는 트레이드-오프(trade off) 관계일까? 이와 유사한 발성을 하는 가수로 귀네스 존스가 있다. 3막 '로마 이야기'에서는 의외로 강렬함과 사악함이 부족한 목소리를 내었다. 딕션은 양호한 편이었으며, /n/ 발음과 /m/ 발음 등을 과장하여 부족한 점을 가린 것이 특징적이었다. 12일 공연에서의 네기 시게루는 나리따 가쓰미와 달리 깔끔하고 담백한 발성이 좋았지만, 바그너 가수가 아니라서 그런지 탄호이저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물렀다. 그래도 '로마 이야기'에서 억지로 가장한 사악함은 어색하기는 했어도 나리따 가쓰미보다 차라리 듣기 좋았다. 딕션은 별로였고, 1막에서 베누스를 향해 "Göttin"이라고 외칠 때에는 일본어로 말하는 듯한 발음에 웃음이 나왔다.
헤르만 영주 역의 기카와다 기요시는 당장 바이로이트 무대에 서도 될 것 같은 탁월한 바그너 가수였다. 파프너, 구르네만츠 등의 배역을 맡은 바 있다는데 내가 듣기로 구르네만츠에 딱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어, 그런데 이 사람, 일본 바그너협회 회장이란다! 공연이 끝나고 가수들이 하나씩 무대로 나와 인사할 때 그에게 뭐라고 찬사를 보낼까 생각하다가 '브라보'와 함께 'Gurnemanz, Heil!'이라고 외쳤다. 12일 공연의 기카와다 마코토 역시 훌륭했다. 음색 또한 구르네만츠에 어울렸는데, 이름을 봐도 두 명의 헤르만은 형제 사이가 아닐까 싶다.
베누스 역의 고니시 준코는 바그너 가수가 귀했던 12일 공연에서는 탄호이저를 압도하고 주인공급으로 부각되었으나, 13일에는 다른 쟁쟁한 가수들에 밀려 다소 빛이 바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12일과 13일의 가수들의 수준 차이를 단적으로 느끼게 한 부분이라 하겠다.) 나리타 가쓰미와 유사한 음고 비브라토를 구사했지만 그 폭이 아주 크지는 않아서 양호했다. 고니시 준코는 <라인의 황금>에서 벨군데 역으로 데뷔했고, 쿤드리(팜플렛에는 "<퍼시발>에서 마법의 딸로 출연"했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아 갸우뚱했었다. 정황으로 보아 <파르지팔>의 쿤드리가 맞지 싶다.), <발퀴레> 중 브륀힐데, <살로메> 중 살로메 역을 맡은 바 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 쿤드리 역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드레스덴 판이 아닌 파리 판 <탄호이저>였다면 고니시 준코가 더욱 돋보였을 텐데 아쉽다. (파리 판 <탄호이저>는 1막 베누스의 독창 부분에서 화성적으로나 관현악법으로나 훨씬 두터운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양식이 나타나며, 그래서 파리 판의 베누스는 <파르지팔>의 쿤드리를 예견하게 한다. 그에 비하면 드레스덴 판의 베누스는 평범한 화성과 단출한 반주로 평면적인 성격을 보인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12일 공연에서는 역시 사람들이 1막을 꽤 지루하게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지각한 사람이 많아서였는지(2, 3층 사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1층은 오히려 1막이 끝나고 이른바 '싸장님' '싸모님'들이 꽤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도 아니면 야한 의상 때문에 민망해서 그랬는지, 1막이 끝난 뒤에 객석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는 것이다. 조연이 하나씩 나와서 인사를 하고 난 뒤에 주인공이랍시고 베누스가 나왔는데, 무대의 분위기는 당연히 '브라바'가 나와야 할 것 같았지만 객석이 워낙 '얌전'해서 내가 감히 '브라바'를 외칠 수가 없었다. 대신 13일 공연에서는 1막과 3막이 끝나고 한 번씩 '브라바'를 외쳐주었다.
엘리자베트 역의 가키하나 요코는 맑고 고운 음색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파르지팔>의 꽃처녀(팜플렛에는 '마법의 을녀1'이라고 되어 있다. '갑남을녀' 할 때 을녀?)를 맡은 적이 있단다. 3막 엘리자베트의 기도 장면에서 목관과 너무나 잘 어울렸던 목소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2막에서 성난 기사들 앞을 막아서는 장면에서는 상당히 힘있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객석으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환호를 받은 가수가 아닐까 싶다. 12일 공연의 하타다 히로미도 배역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볼프람 역의 하기와라 히로아키는 경력을 보면 바그너 가수가 아닌 모양이지만, 조금 다듬으면 본격적으로 바그너를 해도 될 것 같다. 힘을 좀 더 키우면 보탄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12일 공연의 후지무라 마사토는 암포르타스 역을 맡은 적이 있단다. 그래도 하기와라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느꼈다.
양치기 소년은 노회한 양치기의 목소리라 영 어색했다. 역시 일본에서도 보이 소프라노가 귀한 모양이다. 오카모토 스미는 팜플렛의 사진을 보면 꽤 귀엽게 생겼지만 목소리는 그다지 맑지 않았고 비브라토는 깊고 둔중했다. 그런데 연기는 또 어린아이 연기를 제대로 하니 민망한 부조화가 느껴졌다. 막이 내리고 인사를 하러 나올 때에도 폴짝 폴짝 뛰어나오는 것이 귀엽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네 명의 시동은 단역임에도 썩 훌륭했다. "Wolfram von Eschenbach, beginne!" 하는 대목이 너무나 맛깔스러워 아직까지도 귀에 맴돈다.
<탄호이저>를 국내 초연한 것은 1979년 국립오페라단이며 고(故) 홍연택 선생이 지휘를 맡았다 한다. 1974년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1976년에는 <로엔그린>을 초연했으며, 세 작품 모두 한글로 번역해 공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로 바그너 오페라 전막을 공연한 것이며, 원어로는 초연인 셈이다. 다음 차례는 오는 9월, <니벨룽의 반지>다. 반지의 권능이 한국을 향했나니!
2005년 6월 14일 씀.
2005년 6월 15일 최종 수정.
김원철. 2005.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