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Schuman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Schumann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9년 8월 21일 수요일

베토벤 현악사중주 Op. 18-3 /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 슈만 현악사중주 3번 Op. 41-3

베토벤: 현악사중주 3번 D장조 Op. 18-3

베토벤이 처음으로 완성한 현악사중주곡이다. 작곡시기는 1798년에서 1800년 사이로, 베토벤 작품세계 중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작곡가는 이미 이때부터 고전주의 음악양식에 상당한 파격을 보여주었는데, 이 작품에서 베토벤다운 대담함은 특히 1악장 짜임새에서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A장조로 제시되는 '제2 주제'는 여전히 제1 주제 영역에 속하면서 제1 주제를 마무리하는 역할에 그치고,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제2 주제가 해야 할 역할은 C장조로 제시되는 제3 주제가 맡는다. 발전부에서는 제1 주제와 경과구 음형만으로 음악을 이끌어 나가며, 제2 주제와 제3 주제는 모두 힘을 잃는다.

2악장은 간소화된 소나타 형식이고, 3악장은 세도막 형식이며 내용적으로 스케르초에 가깝다.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이지만, 꾸준히 되풀이되는 비트(beat)가 주제간 대비를 흐리게 만들며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달리는 짜임새이다.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고통받고 망가져 가는 가엾은 한 여성을 떠올렸습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묘사한 그 사람처럼요."

야나체크는 38살이나 어린 유부녀 카밀라 스퇴슬로바(Kamila Stösslová)와 편지를 700통 넘게 주고받았다. 현악사중주 1번을 작곡하던 시기에 야나체크는 카밀라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몇 해 지나 관계가 조금 진전되던 때에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를 작곡했으나 얼마 못 가서 사망했다.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아내가 어떤 바이올리니스트 남자와 함께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질투에 사로잡힌 끝에 아내를 살해하는 남자를 그린 소설이다. 야나체크는 이 작품을 읽고 영감을 받아 현악사중주 1번을 작곡했다.

야나체크 ‹크로이처 소나타›에는 사회 통념상 인정받기 힘든 사랑에 고통받았던 작곡가의 고뇌가 처절하게 흐른다.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톨스토이의 문제작 못지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충격적인 음향 속에서 헐떡인다. 그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슈만: 현악사중주 3번 A장조 Op. 41-3

슈만 A장조 현악사중주는 낭만주의 시대의 서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변주곡 형식, 3악장은 간소화된 소나타 형식, 4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형식 논리만으로 따진다면 네 박씩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프레이즈와 단순하고 심심한 구조와 같은 단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구조에 집중하기보다 정서의 흐름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 심장을 어루만지는 애수와 눈물이 스며든 한숨, 모습을 바꿔가며 부닥쳐 오는 불행과 그 속에서 소중하게 이어가는 웃음. 마치 이런 것들이 노래의 날갯짓을 타고 환상 속을 너울거리는 듯한 정서의 흐름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2018년 9월 11일 화요일

하이든: 현악사중주 f단조 Op. 20-5 / 베토벤: 현악사중주 5번 A장조 Op. 18-5 / 슈만: 피아노 오중주 E♭장조 Op. 44

하이든: 현악사중주 f단조 Op. 20-5

하이든의 Op. 20은 현악사중주 6곡을 모아 출판한 작품집으로, 현악사중주라는 장르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772년에 작곡한 것이다. 6곡 모두 작곡 연도를 믿기 어려울 만큼 혁신적인 어법으로 가득하고, 그 가운데 f단조 현악사중주는 하이든 자신의 작품목록상으로는 Op. 20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1악장은 한 프레이즈의 끝을 다음 프레이즈의 시작으로 삼거나 주제를 반복할 때 박절 구조에 변형을 주는 등 4마디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단순함을 피해 가는 기법이 시대를 크게 앞서가고 있다. 미뉴에트와 트리오 형식으로 된 2악장에서도 때때로 박절 구조가 규칙성을 벗어나면서 '미뉴에트'라는 춤곡 이름이 무색해지곤 한다. 3악장은 4개 악장 중 유일하게 장조로 되어 있으며, 시칠리아노 춤곡 리듬으로 된 주제 선율이 규칙적인 리듬 구조에 따라 변주되는 짜임새로 되어 있다.

4악장은 느린 주제와 빠른 주제가 병진행하는 이중푸가이다. 하이든은 자신의 작품목록을 기준으로 Op. 20의 첫 세 곡 모두 마지막 악장에서 푸가를 사용했는데, 아마추어 음악인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성격이 짙었던 초기 현악사중주에 푸가를 사용한 일은 그 자체로 혁신이었다. 현악사중주 역사상 처음으로 첼로가 제대로 된 '선율'을 연주하는 등 4개 악기의 독립적 성격이 특히 4악장에서 극대화되고 있으며, 또한 고전주의 시대에 새롭게 음악적 표현 요소로 떠오른 '셈여림'을 푸가 기법에 녹여냄으로써 바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푸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작곡가가 다름 아닌 하이든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으로 증명된다.

베토벤: 현악사중주 5번 A장조 Op. 18-5

베토벤은 1798년에서 1800년까지 작곡한 현악사중주 6곡을 Op. 18로 묶어 1801년에 발표했다. 6곡 모두 베토벤의 초기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A장조 현악사중주는 작곡 시기가 1799년으로 추정되는데,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다른 작품과 견주어도 베토벤답지 않은 단순한 짜임새로 되어 있다. 베토벤이 불과 몇 년 뒤에 템페스트 소나타(1801~2년)와 교향곡 3번(1802~4년)을 작곡한 사실을 헤아리면 그 양식 변화가 놀랍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고, 발전부와 재현부를 묶어 되풀이하는 짜임새가 특이하다. 2악장은 미뉴에트와 트리오 짜임새이며 음악에 맞춰 실제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프레이즈 구조가 규칙적이다. 3악장은 주제와 변주 형식,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곡에서 그나마 가장 베토벤다운 과감함이 느껴지는 곳은 4악장 발전부로, 본디 A장조였던 조성이 발전부에서 f♯단조로 변하고, 4마디 단위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프레이즈가 3마디 단위로 변했다가 돌아오며, 또한 발전부의 전체적인 규모가 크다.

슈만: 피아노 오중주 E♭장조 Op. 44

슈만은 현악사중주 편성에 피아노를 더한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피아노 오중주'라는 '장르'를 정착시켰다. 이후 브람스, 드보르자크, 포레, 쇼스타코비치 등이 피아노 오중주곡을 남겼고, 슈만에 앞서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스에 피아노를 더한 편성으로 슈베르트가 작곡한 '송어' 오중주는 결과적으로 편성이 특이한 작품이 되었다.

1악장은 소나타 형식, 2악장은 c단조 장송행진곡 주제와 서정적인 C장조 주제가 교차하는 짜임새, 3악장은 트리오가 두 번 나오는 스케르초이다. 2악장을 제외한 3개 악장이 모두 E♭장조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고, 2악장에 c단조 장송행진곡이 나오는 것까지 함께 생각하면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영웅'을 의식한 구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4악장은 자유분방한 소나타 형식이다. 슈만답게 과감한 화성 진행과 더불어 코다에 푸가토와 이중푸가토를 사용하며 악곡을 장대하게 부풀려 나가는 점이 참신하며, 그 와중에도 4마디씩 규칙적으로 나뉘는 프레이즈를 일관되게 되풀이하는 점이 특이하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파야 《삼각모자 모음곡 2번》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슈만 교향곡 1번 ― 알반 게르하르트 / 헤수스 로페스-코보스 / 서울시향

2010-09-10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Jesus Lopez-Cobos, conductor
협연 : 알반 게르하르트 (첼로) Alban Gerhardt, cello

파야, 삼각모자 모음곡 2번 Falla, El sombrero de Tres Picos: Suite No. 2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Tchaikovsky, Variations on a Rococo Theme
슈만, 교향곡 1번 "봄“ Schumann, Symphony No. 1 "Spring"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지휘자 헤수스 로페스-코보스는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 음악감독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그 레알, 축구 규칙도 잘 모르는 글쓴이도 익숙한 그 이름 탓일까. 글쓴이는 이날 서울시향 연주를 들으면서 로페스-코보스가 이끌어내는 음악이 어쩌면 축구 평론가들이 말하는 스페인 축구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파야 《삼각 모자 모음곡》 2번을 들을 때만 해도 그저 스페인 지휘자라서 스페인 음악을 잘하나 보다 싶었다. 게다가 지휘자가 쌓아온 경력이 만만치 않은 만큼 이날 연주는 객원 지휘자가 짧은 시간에 만들어낸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으며, 정명훈라벨을 지휘할 때에나 들을 수 있는 정교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앙상블이 돋보였다.

그러나 슈만 교향곡 1번 연주는 그 단점까지도 스페인 축구와 닮아 있었다. 축구 얘기를 조금만 하자. 스페인에는 "멍청한 선수는 열심히 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곳이 스페인이다 보니 열심히 뛰기보다 효율적으로 조금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페인 팀은 곧잘 상대편 체력을 갉아먹으며 경기를 지배하지만, 거꾸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생각이 많아져서 골로 연결하지 못할 때가 잦다고 한다.

이날 슈만 교향곡 1번이 그랬다. 대체로 앙상블이 깔끔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한 방'이 빠져서 밋밋한 느낌. 이름값이 대단한 지휘자가 다스린 소리가 기대에 못 미친 까닭으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서울시향과 상성이 맞지 않았다. 로페스-코보스는 중요한 곳에서 악단을 확 잡아끌기보다는 단원들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게끔 하는 듯했으나, 서울시향은 유럽 일류 악단과는 달리 아직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며 지휘자가 잘 이끌어줄 때에만 유럽 수준에 근접한 연주를 들려준다. 정명훈이 더없이 소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둘째, 슈만 교향곡 1번은 연주할 때 자칫 맨송맨송해지기 쉬우며, 로페스-코보스와 서울시향 조합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를 알아야 한다.

베토벤고전주의를 넘어서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주의적 선율과는 맞지 않는 모티프 변형 기법을 유산으로 남겼다. '베토벤 딜레마'를 어찌할까. 슈베르트베토벤을 닮은 도입부 선율을 발전부에서 앞세워 전개시키며 베토벤을 흉내 냈다. 멘델스존은 달콤한 가락을 대위법으로 겹쳐 베토벤을 이으려 했다. 리스트와 프랑크는 모티프 원형을 중심에 놓고 주변 요소를 네트워크로 묶어 바꿔나가는 기법을 개발했고, 바그너는 리스트를 흉내 냈다.

'모범답안'을 내놓은 사람은 브람스였으나, 슈만 교향곡 1번에는 그에 앞서 온갖 아이디어로 '사투'를 벌인 눈물겨운 흔적이 담겨 있다. 베토벤과 낭만주의가 어우러지게 하는 일에 슈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반복되는 리듬인데, 슈만이 작품 곳곳에 심어 놓은 '아이디어'를 잘 살리지 않으면 이 리듬 때문에 음악이 지루해지기 쉽다. 로페스-코보스와 서울시향은 바로 이 덫에 빠졌다. 지휘자가 '너무 조금 움직인' 탓이다. 금관 등이 몇 차례 실수도 했다.

음악에서 '로코코'라 하면 뜻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지만, 보통 바로크 양식이 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어 가던 18세기 초·중반 양식을 가리킨다. 대위법을 바탕으로 하는 바로크 양식을 벗어나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화성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간결하면서도 밝고 우아한 양식으로 갈랑(galant) 양식이라고도 한다.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로코코 양식을 따르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19세기 양식이며, 이러한 대목은 브람스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닮은꼴이다.

협연자 알반 게르하르트는 '로코코' 양식보다는 낭만주의 느낌을 한껏 살려 연주했으며, 곳곳에서 루바토를 두드러지게 쓰거나 때때로 매우 거친 활놀림을 보이기도 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인지 'A' 현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때때로 삐끗하는 소리를 내기도 한 대목은 옥에 티였다. 앙코르로 연주한 두 곡이 모두 저음이 많아서 'A' 현을 쓰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것을 빼면 연주는 매우 훌륭했다.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 특이했던 곳으로 이를테면 마디 32~33에는 하행 음형을 중심으로 '점점 세게―세게―점점 여리게―매우 여리게' 연주하라는 지시가 있는데, 게르하르트는 도돌이표를 타고 두 번째로 연주하면서는 셈여림 지시를 무시하고 여리게(소토 보체) 루바토 섞어 연주했다.

처음에는 글쓴이도 몰랐던 사실 하나. 슈만 교향곡 1번을 연주할 때 알반 게르하르트가 슬쩍 들어와 뒷자리에 앉아 일개 객원 단원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독주와는 달라서 수석 연주자가 정하거나 지휘자가 특별히 요구한 활놀림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다면 게르하르트가 연습 때부터 이렇게 참여했다는 뜻이 된다. 참 성실한 연주자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8.01.09. 쿠르타그 '스틸리' / 슈만 피아노 협주곡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 세르히오 티엠포 / 성시연 / 서울시향

2008년 1월 9일(수)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세르히오 티엠포 Sergio Tiempo, 피아노

Kurtag, Stele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Op. 54
Shostakovich, Symphony No. 5 in d, Op. 47



쿠르타그(Kurtág György; 1926-)의 <스틸리 Stele>는 버르토크와 베베른과 리게티를 합쳐놓은 듯한 텍스처와 낯설고 신비롭고 꿈처럼 몽롱한 음향이 인상깊은 작품이다.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크게 앓다가 혼이 잠시 몸을 벗어나 흐느적거리며 떠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높은 곳에 떠서 제 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찝찝한 느낌에 몸서리치다 집 밖으로 나오면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세상과 그로부터 동떨어진 자신이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장면처럼 어지럽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마침내 뒤죽박죽 세상으로부터 눈과 귀를 닫아버리면 물속 깊은 곳을 천천히 흘러다니는 듯한 느낌에 편안해진다. 서울시향의 연주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곡 끝머리에서 되풀이되는 다섯잇단음의 물결 치는 듯한 느낌이 좀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섬세한 음향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음향 환경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기도 하다.

세르히오 티엠포가 협연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격 또 파격이었다. 첫 타건부터 톡톡 튀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 이어지는 독주에서는 셈여림 표시가 p인데 아예 ppp로 터무니 없이 여리게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뒤로도 오케스트라가 나서지 않을 때마다 마치 연인이 속삭이듯 여리게 여리게 연주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그냥 여린 소리와 여리면서도 멀리 퍼져 나가는 소리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여리고 멀리 퍼지는 소리를 내려면 손가락을 오히려 크게 움직여야 한다더니 과연…. 그런데 티엠포는 큰 소리를 낼 때에도 비슷한 손놀림을 한다. 피아노 소리가 빠르고 가볍게 통통통 튀어오른다! 화음을 쿵쿵 두드려댈 때에는 갑자기 아찔한 빠르기로 달린다. 세상에, 이건 슈만이 아냐! 장난꾸러기처럼 종잡을 수 없는 다이내믹과 '제비 본색'으로 어르고 달래는 루바토는 차라리 감정 과잉 슈만을 놀리는 듯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에 정신없이 끌려다니기만 한다. 제멋대로도 이런 제멋대로가 없으니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학생이 이렇게 연주했다면 틀림없이 선생님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슈만 망령을 날려버리고 나니 티엠포의 연주에 설득당하고 만다. 그래, 슈만은 없었다. 오직 티엠포, 티엠포! 나 그대에게 불타는 팬심(fan心)을 바칠 테야요!

지휘자 성시연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해석은 특별히 모난 데 없이 무난했다. 템포는 대부분 악보의 메트로놈 지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악기 간 밸런스에도 무리가 없었다. 므라빈스키의 과장된 해석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듣자 하니 이날 연주된 작품 모두 처음 지휘해본 것이라 악보에 충실한 것이 당연하다. 나는 앞서 티엠포의 장난질에 열광하고 말았지만 편법으로 정공법을 이기기는 어렵다.

다만, 4악장 시작 부분의 템포는 ♩= 115 정도로 악보에서 지시한 ♩= 88에 비해 너무 빨랐고, 아첼레란도를 거쳐 마디 11에 이르렀을 때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 104가 아니라 거의 ♩= 140 가까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에 비해 악보에서 지시한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낄 수 있으므로 성시연의 해석이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템포가 빨라진 만큼 앙상블이 흐트러졌으며, 특히 트럼펫이 힘들어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문제다. 3악장 마디 129와 마디 130 사이의 짧은 게네랄파우제(Generalpause)를 무시하고 넘어간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특히 1악장 앞부분에서 템포와 리듬이 흔들리면서 음악이 지루해지곤 했는데, 템포가 느리다고 풀어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집중해서 얼음장 같은 긴장감을 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피아노의 묵직한 스타카토 음형을 업고 호른이 전면에 나서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앙상블이 흐트러지는 것은 여전했지만 연주자들 사이에 묘한 열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디 188에서는 심벌즈의 제대로 된 '한 방'과 함께 팀파니와 작은북이 신나게 두드려댔고, 트럼펫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2악장에서는 단조로운 템포에 힘입어 앙상블도 꽤 좋았으며, 3악장에서 목놓아 울부짖는 듯한 현도 훌륭했다. 4악장에서는 앙상블은 가장 나빴지만 그것을 덮을 만한 열기로 연주회장을 압도했다. 곡을 끝맺는 큰북의 무시무시한 타격 일곱 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이끌어내었다.

나는 서울시향이 이토록 미쳐 날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정명훈이 지휘할 때에는 집중력은 높아도 오히려 단원들이 너무 긴장한 듯한 느낌을 받곤 했지만, 성시연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은 군데군데 삐걱거리기는 했어도 단원들이 뿜어내는 열기만큼은 정명훈 때보다 더했다. 물론 작품 특성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코랄 팡파르는 '브라보'를 이끌어내는 보증수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휘자의 역할이 작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시연은 여자이고 나이도 어리다. 그가 주로 활동해온 유럽에서는 유색인종이다. 얕잡아 보이기 딱 좋은 처지에서 악단을 이끌어야 하는 어려움이 오죽할까. 그러나 그는 한 발 잘못 디디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위험을 살살 헤치고 단원들 스스로 음악에 몰입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뼈대를 탄탄하게 살리는 솜씨도 돋보였다. 화려한 콩쿠르 입상 경력이 어떤 바탕에서 나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웃지 못할 일화 하나. 성시연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미 그보다 한 해 앞서 그가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침 김선욱이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음악계가 온통 김선욱 소식으로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김선욱은 뜻하지 않은 피해자 성시연에게 협주곡 협연으로 보상해야 한다. 아님 말고.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2007.04.06. 윤이상 '융단' / 브루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 Op. 88 / 슈만 교향곡 4번 - 스코트 유 / 서울시향

2007년 4월 6일(금) 오후 8시
LG 아트센터
    
지휘자 : Scott Yoo
협연자 : Dennis Kim (vn), Hung-Wei Hwang (va)

Isang Yun: Tapis (8')
Bruch: Concerto for Violin and Viola, Op. 88 (19')
Schumann: Symphony No.4 in d minor, Op.120 (25')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이 독일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축구 선수 차범근에 비할 만하다. 그는 이른바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사용한 '음향음악(Klangkomposition)' 작곡가로서 리게티, 펜데레츠키 등의 당대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현대음악의 시류에 맞으면서도 동아시아의 음악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양식적 독자성을 크게 인정받았다. '주요음(Hauptton)' 또는 '주요음향(Hauptklang)' 기법 등의 용어로 설명되는 그의 음악 양식은 유럽 작곡가들의 클러스터 기법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면서도 그 짜임새에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윤이상은 "유럽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이며,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에 이미 고유한 의미가 있다."라고 지적했으며, 이것을 펜 글씨와 붓글씨의 차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음악에서 '주요음', 또는 몇 개의 음이 결합한 '주요음향'은 한국의 전통 음악과 유사한 원리로 유연하게 흐르듯이 변화하며, 이때 트릴, 장식음, 글리산도 등의 서양음악의 어법이 사용된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음악 양식이 윤이상에 의해 당대의 유럽 사정에 맞게 '번역'된 결과이며, 그의 음악은 동양적이기는 하나 엄연히 서양음악에 속한다.

윤이상의 음악은 1975/76년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았는데, 1967년 간첩 혐의로 한국 정부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외교적 압력에 의해 풀려나는 경험과 그로 말미암은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이 그러한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뒤로 그는 타계할 때까지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으며, 타계 후 12년이 지난 2006년에 이르러서야 국정원 진실위의 과거사 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음악에 정치적인, 또는 인류애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으며, 메시지 전달이 용이하도록 양식적으로 좀 더 유연한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음악학자 홍은미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전의 엄격하고 복잡한 음악구조가 차츰 완화되어 그 직조과정에서 개별음들의 화성관계가 보다 부드럽고 명료하게 처리"되었다.

<융단 Tapis pour cordes>은 1987년 작품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제2 창작기의 작품답게 현대음악치고는 상당히 듣기 쉽다. 곡 첫머리에 등장하는 단3도 상행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명확하게 지각된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음향음악적 특성 또한 여전히 나타나는데, 그 음향이 생장하고 변화하는 양상은 작품 제목인 '융단'의 느낌과 매우 그럴싸하게 닮았다. 특히 이날 연주된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은 날실과 씨실이 얽히는 느낌보다는 실의 양태를 벗어난 완성된 천의 느낌이 강했다. 지휘자 스코트 유(Scott Yoo)는 작품의 핵심이 되는 음향을 상당히 안정감 있게 살려 서울시향의 평소 실력을 상회하는 연주를 이끌어내었으며, 다소 아담한 크기의 LG 아트센터는 이런 소편성 작품도 소리를 섬세하게 전달해주었다.

브루흐의 <이중 협주곡 Op.88>은 서울시향의 간판급 단원인 데니스 김(악장)과 헝웨이 황(비올라 수석)의 독주자로서의 기량을 뽐내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음을 끄는 듯 살짝 기름진 데니스 김의 연주와 빈틈없이 야무진 헝웨이 황의 연주가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었으며, 그러면서도 호흡은 썩 잘 맞아서 두 가지 음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다소 느린 듯한 템포로 그윽한 향취가 묻어난 것은 좋았는데, 다만 템포를 풀고 조임이 너무 무른 감이 있어서 지루한 느낌이 든 것은 옥에 티였다. 앙코르로 헨델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모음곡 7번 G 단조 중에서 파사칼리아(J. Halvorsen 편곡)를 연주하여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슈만의 교향곡 4번은 커다란 정서적 기복과 현장의 열기로 승부를 겨루기보다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앙상블과 계산된 음악적 연출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완만한 템포로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는 스타일이었다. 지휘자 스코트 유는 청중의 귀를 현혹하는 트릭을 쓰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소 고지식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작년 초에 같은 곡을 지휘했던 구자범이 이를테면 2악장 독주 바이올린 사이의 짧은 경과구(마디 34-38) 부분에서 트럼본의 음량을 최대한 줄여 영화적인 화면 전환 효과를 노린다거나, 4악장 마디 243 이후 등에서 금관에 의한 두터운 화성과 점층 효과를 과장한다거나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은 안정된 앙상블을 구현하는 힘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거시적인 추진력을 위해 세부를 희생시켜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는 단점도 있었다. 특히 금관의 음량을 지나치게 억제하여 전체적인 다이내믹을 손실시킨 것이 양날의 칼처럼 작용했는데, 이를테면 1악장 마디 122에서 모든 악기가 포르티시모로 연주해야 하는데도 금관이 뒤로 숨어버린 것이나 4악장 마디 291 이후의 호른과 트럼펫의 음량이 너무 작아서 목관과 금관의 강약 대비를 살리지 못한 것 등은 수긍하기 어려웠다.

앙코르는 베토벤의 로망스 2번 F 장조 Op.50을 연주했다. 지휘자 스코트 유가 직접 연주한 바이올린 솔로는 작품 특성 때문인지 서늘하거나 찬란하지 않은 대신에 부드럽고 따스한 광택을 뽐냈으며, 활이 바이올린 줄에 쫄깃하게 붙으면서도 소리가 거칠지 않고 미끈했다. 이것은 본 프로그램의 연주와도 일맥상통하는 특징이었는데, 어쩌면 지휘자의 성격도 이럴까.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글 찾기

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