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 머리말
☞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1)
프리메이슨 그랜드 랏지. CopyLeft by Adrian Pingstone
영국으로 도망가 숨어 살던 그들은 1717년 런던에 그랜드 랏지(The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를 세우면서 조금씩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72년 동안 그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혁명을 일으키려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계몽주의 사상?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대부분 프리메이슨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조직의 '명령'에 따랐다기보다는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맞물렸다고 보는 게 옳겠다. '혁명 기획자'가 보기에 혁명이 성공하게 하려면 무엇이 실질적으로 가장 시급한 과제였을까?
계몽주의 사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인 계층뿐이다.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던 18세기 프랑스에서 글을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못살게 굴어도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했다. 이들을 계몽시키려면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을 먼저 파고들어야 한다.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노래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이 곡을 작곡한 루제 드 릴(Claude Joseph Rouget de Lisle, 1760-1836) 또한 프리메이슨이었다고 한다.
즉 혁명노래를 분석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혁명노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주도세력들은 혁명이 시작된 직후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이상을 민중에게 전달하고, 보다 많은 수의 민중을 혁명에 동참시켜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40쪽)
그러나 실제로 '잠자던' 민중들을 깨워서 혁명 투사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들은 노예상태에 이미 익숙해 있었고, 자율적인 사고능력은 물론 기본적으로 글을 읽거나 혁명법의 의의를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너무나 수동적이어서 스스로 혁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주도세력에게 있어 혁명 노래는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민중교육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일반인의 언론의 자유를 허락했던 혁명은 정치노래들을 자유롭게 부르고 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다. (41쪽)
프랑스대혁명기에 있어 노래가 차지했던 비중은 그 기간동안 출판된 노래의 수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특별히 1889년 혁명 100주년 기념 사업이었던 '프랑스 대혁명 관련자료의 출판 (Publications relatives à la Révolution française)'의 일환으로 꽁스땅 삐에르(Constant Pierre)가 정리한 혁명기 음악 목록에 따르면, 혁명기에 출판된 노래는 거의 3000개에 이른다. 제한된 시기(1789년-1800년)에 제한된 장소(프랑스)에서 이렇게 많은 숫자의 노래가 작곡된 예는 음악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40쪽)
노래의 전달 파급 효과는 상당하였다. 노래는 어디에서나 불려졌다. 거리, 공원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노래가 불려졌다. 또한 속속 탄생한 새로운 노래는 순식간에 전국에 알려졌다. (68쪽)
혁명기의 노래의 주제는 그 연주장소 만큼 다양하다.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주요한 법률내용, 정치적 군사적 사건 등 당시 노래는 혁명에 관한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래는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으며 문맹율이 매우 높았던 당시의 대중에게 오늘날의 언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42쪽)
결국 혁명주도세력은 혁명이 진행되어 갈수록 음악을 매우 강력한 도덕적, 시민적, 공화주의적 교육수단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음악을 국민교육수단으로 사용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음악은 결국 화음이며, 음악이 갖는 환유작용을 통해 사회 속에 조화와 일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음악은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혁명을 일으켰고, 인권과 공화정을 방어함으로 혁명을 지속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바로 그 에너지가 음악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67쪽)
결론적으로, 음악을 도덕적, 시민적, 공화주의적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한 혁명정부의 전략은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 건립된 음악교육기관이 양성해낸 음악가들, 새 음악출판소의 활발한 출판작업, 전 국민에게 확산된 노래운동, 대규모 화합의 장이 되었던 국가 축제 등이 혁명정부의 목표를 달성하는데에 결정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9쪽)
잦은 쿠테타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과 빈부격차가 확대되던 이 시기에 사회적 통합은 이루기 힘든 목표였으나 그것은 거의 국가적 강박관념의 정도로까지 강조되게 된다. 당시 이러한 국가적 필요를 음악만큼 훌륭히 수행할 분야가 없었다. (70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그런데 문제가 있다. 수많은 노래가 생겨나 널리 퍼지려면 부르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이 '음모(?)'를 꾸미던 1717년 당시 음악이 과연 그랬을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BWV 80.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조지 프리드릭 헨델, 샨도스 성가(Chandos Anthem) 제8번,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이른바 '바로크 양식'으로 불리는 이러한 음악은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고 아마추어도 조금만 배우면 어렵지 않게 작곡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바로크 양식이 다른 양식으로 바뀌어야만 했고, 그에 앞서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야만 했다. 혁명이 닥치고 나면 이미 늦다.
프랑스 대혁명은 (...) 10년이라는 기간은 그것이 아무리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기라고 할지라도, 음악적 내용에 있어 '혁명적'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음악 역시 그 이전시대의 음악과 비교하여 볼 때 혁명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음악에도 만약 혁명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음악의 역할과 위치, 음악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작곡가들의 생각이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민은기, 34쪽)
그래서 프리메이슨은 바로크 양식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고전주의 양식'으로 바꾸려고 1717년부터 '밑밥'을 뿌려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다섯 해 지나 '☞화성법'이라는 큼지막한 밑밥이 마련된다.
장-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1722년 논문 <화성론 Treatise on Harmony>
18세기 프랑스 제일의 음악가 장 필립 라모는 짜를리노(Zarlino, 1517-1590)에서 가져온 12선법의 체계를 가지고 18세기 계몽주의의 실제와 근거를 바탕으로 음향학의 법칙으로부터 화성의 기초 원리를 이끌어 낸 최초의 이론가이며, 전통적으로 현대 화성이론의 창시자이다. (112쪽)
- 용정희, "라모의 화성이론에 나타난 음악사상과 배경."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5), 제10권, pp.112-129.
라모와 프리메이슨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라모가 프리메이슨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Stanley Sadie, "freemasonry and music." The Oxford Companion to Music.) 또 프리메이슨 집회(예배?)에서 라모가 쓴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다고도 한다. (Masonic music, NGD2)
프리메이슨 및 계몽주의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라모의 화성 이론이 서양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음악을 이루는 바탕이 ☞대위법에서 화성법으로 바뀌면서 근대적인 ☞호모포니가 뿌리내리게 했다. 주선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화음이 뚜렷이 나뉘어 음악 짜임새가 단순해졌고, 그에 따라 비전문가가 작곡을 배우기가 더욱 쉬워졌다. 혁명기 10여 년 동안 프랑스에서만 3,000여 곡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직업 음악가뿐 아니라 아마추어 작곡가들도 앞다투어 혁명 노래를 썼기 때문이며, '라 마르세예즈'를 작곡한 루제 드 릴 또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그리고 그들이 있기에 앞서 라모가 마련한 이론적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라모는 화성 진행 원리를 뉴턴 중력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고 음악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을 퍼트렸으며, 이에 따라 음악 이론과 계몽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고전 역학에서 물체의 정지 또는 운동 둘 중 하나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처럼 조성음악도 두 개의 상태, 즉 협화음과 불협화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모의 역학적 표현에서 협화음은 역학의 평형과 같고 협화음은 완벽한 정지와 안정 상태를 구성한다. 불협화음은 바꾸려는 힘이며 이러한 경지를 파괴한다. (용정희, 116쪽)
라모가 생각하는 화성학의 진정한 가치는 각 화음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화성연결과 함께 보았다. 한 화음에서 다른 화음으로 연결을 지배하는 화성 진행의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화성진행은 기초저음에서 출발한다. (126쪽)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베토벤에 이르러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 per aspera ad astra"라는 말과 더불어 인류가 무한히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오로지 예술과 학문만이 인간을 신의 경지로 들어 올린다."
"우리에게는 도덕규범이 그리고 우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칸트!!"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작곡 노트에서.
계몽주의적 음악관은 20세기에 들어 모더니즘으로 이어졌으며, 음악학자 카덴(C. Kaden)은 이를 두고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가 그 믿음을 배신하고 목표지향적 발전을 거부한 음악을 내놓았을 때 다음과 같은 비난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 - T. 아도르노
"진실성 없는 음악"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는 피리를 불기 쉽다" - E. 블로흐
"근심이 없는 작곡가" - A. 베르크
- Christian Kaden, 나주리 옮김, "20세기의 음악과 세계관: 스트라빈스키의 경우."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6), 제11권, pp.209-230.
다음 시간에는 화성법이라는 '밑밥'이 어떻게 고전주의라는 '떡밥'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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