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3일 월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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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프랑스 대혁명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때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노래가 오늘날 언론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말 기억하시는가? 혁명이 일어날 동안 노래는 어디에서나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노래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곳은 아마도 광장일 터, 이때 흥을 돋우려면 악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프리메이슨이 혁명을 '기획'했다면, 그 얼개가 처음 마련되었을 1717년 즈음 악기는 어땠을까? 앞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어보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 BWV 80.
"내 주는 강한 성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조지 프리드릭 헨델, 샨도스 성가(Chandos Anthem) 제8번,
"와서 주님께 노래하자 O come, let us sing unto the Lord"

동영상에서 연주한 악기가 곡이 쓰였을 때 악기를 올바로 고증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저런 소리로 광장에서 혁명을 노래할 수는 없다.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빠졌거나 제 몫을 하지 못해서 기본적인 '음량'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서의 하나의 혁명이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일어났다. 바로 오케스트라에 금관악기가 첨가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관악기는 그 선명한 음색과 거대한 음량 덕분에 혁명기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였던 야외 축제에서 연주하기에 적당했다. 물론 대부분의 야외 축제 연주는 군악대 편성으로 (...) 무엇보다 혁명기의 야외축제가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금관악기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혁명이전에는 간단한 군악대용 악기로 취급되던 금관악기는 혁명기의 대대적인 야외축제를 통해 그 음악적 표현 능력을 인정받았다. (...) 이 시기에 관악기 자체의 성능이 놀랍게 좋아진 것을 더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55-6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악기는 옛날부터 꾸준히 변화 또는 발전해 왔으며, 표준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뿌리내리려는 움직임은 대략 17세기 즈음부터 있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과정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혼합편성 오케스트라는 표준편성으로 넘어갔을까? 이러한 과정은 우선 오페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수 계층을 대상으로 하던 초기 오페라는 베네치아를 거쳐 점차적으로 '대중화' 됨과 동시에 이태리를 벗어나 전 유럽에 확산된다. 유럽의 주요 도시 곳곳에는 곧 오페라 극장이 생겨났고 이 곳에서는 자국인의 작품 외에도 대량의 이태리 오페라 작품이 공연된다. 이러한 현상, 즉 작품들이 서로 교환되고 공연됨에 따라 오페라의 반주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통일된 편성이 점점 더 필요시 되었던 것은 자유스러운 결과였다 할 수 있다. 즉 오페라의 특정 지역을 초월한 국제적 확산은 초창기 몬테베르디가 요구하였던 다양한 악기편성에 따른 비현실성에서 벗어나 점점 더 표준적 편성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물론 원래부터 이 편성을 기준으로 작곡도 되었지만, 설사 다른 편성을 토대로 하는 작품일지라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현실성에 맞게 악기를 바꿔 공연하는 것도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풍토였다. (123쪽)

- 연상춘, "바로크 오케스트라에서 고전 오케스트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1999), 제2권, pp.115-135.

그러나 근대적인 오케스트라 악기 체계가 자리를 굳힌 때는 18세기 즈음이었으며, 이와 함께 악기가 '혁명적으로' 개량되었다.

18세기는 악기 제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포르테의 탄생과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개량은 작곡가와 연주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한 오케스트라 규모의 확대로 작곡가들은 더욱 다양한 음색을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민은기, 55쪽)

또 18세기 중반 터키(오스만 튀르크)가 유럽을 침공하면서 타악기가 유럽에 수입되고 터키 음악이 유행하기도 했다.

터키 행진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지 싶은,
베토벤 교향곡 9번 (1824년 초연) 4악장 가운데 "alla Marcia"
유튜브에 요 대목만 딴 오케스트라 연주가 없어서 만돌린 독주를 올린다. -_-;

이 전쟁을 프리메이슨이 부추기지 않았을까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휴머니즘을 앞세운 단체가 이런 짓까지 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타악기 수입에 관여했을 수는 있겠고 관악기 개량에도 앞장섰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당시 악기 제작자를 아무리 캐 봐도 도무지 증거가 없다. 김원철이 염력으로 '뷔뷔뷔' 해보면 이 사람들 모조리 프리메이슨 맞는데 물증이 없으니 이거슨 음모가 틀림 엄따!


...응? 곱게 미치라고? 알았다. -_-;

사실은 하나 찾은 게 있기는 한데, 관악기가 아니라 현악기다.

첼로가 표현력을 지닌 독주악기가 된 데에는 연주 테크닉의 개발로 악기의 기량을 충분히 드러내 줄 수 있게 해 주었던 뒤포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빠리 국립음악원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첼로 연주자들을 길러냈을 뿐만아니라, 1815년에 출판된 <첼로의 운지법과 활의 사용법 Sur le doigté du violoncelle et sur la conduite de l'archet>이라는 논문에서 새로운 첼로 연주 테크닉을 소개하였다. (민은기, 56쪽)

뒤포르(Jean-Louis Duport, 1749-1819)는 후원자였던 Baron de Bagge(바그 남작?)과 더불어 프리메이슨이었단다(Jean-Louis Duport, NGD2). 바이올린 발전에 이바지했던 슈포어(Louis Spohr, 1784-1859) 또한 프리메이슨이었으나 이 양반은 프랑스 대혁명과는 시기가 안 맞는다.

이번 시간에는 헛소리가 많았다. 다음 시간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본색'을 드러내던 정황을 살펴보겠다. 이건 증거가 제법 많고 구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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