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3일 월요일

재미로 보는 서양음악사 음모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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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법이라는 '밑밥'과 고전주의 양식이라는 '떡밥'과 근대적인 악기 체계까지 자리 잡아 가던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귀족 중심 음악 문화가 자리 잡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음악회마저 싹트던 때에도 정작 프랑스 파리에서는 음악회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 런던의 음악회는 이런 배경에서 발전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정부와 귀족이 이런 관계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왕실은 귀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모든 예술 제도를 통제하였다. 오페라와 출판 분야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통제가 상당히 약화되지만, 음악회 쪽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에서 음악가의 공연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런던에서처럼 공공 음악회 제도 안에서 후원 활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243-4쪽)

18세기 후반 동안 소수의 직업 음악가들이 음악회를 열었지만, 정부는 그 수를 철저히 제한했다. 오페라를 보호하고 독립적인 음악계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가 이렇게 규제하지 않았다면, 파리는 런던만큼 음악회가 활발했을 것이다. (243쪽)

- 이경희, "18-19세기 공공 음악회의 발전 과정: 파리, 런던, 비엔나를 중심으로." 『서양음악학』(서울: 한국서양음악학회, 2005), 제8권, pp.241-263.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프리메이슨이 앞장서서 프랑스에 음악회를 퍼트리려 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증거가 있다.

1769년 초 고섹(Gossec)이 창립한 '아마추어 음악회'(Concert des Amateurs)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것은 정기회원 기부자를 중심으로 한 기부 음악회였다. (...) 음악회는 대성공이었고 1781년까지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경희, 243쪽)

고섹(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은 프리메이슨 ☞ 'Grand Orient de Belgique' 지부 회원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기를 주름잡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별 주저없이 프랑스 혁명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프랑스와 조제프 고섹을 꼽을 것이다. 특별히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번지고 있었던 1789년부터 1794년 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그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고섹의 위치는 확고했다. 흔히 그의 경쟁자로 지목되는 메율(Méhul)이나 르 쉬에(Le Sueur), 케루비니의 활동도 집정내각 시대에만 겨우 그와 겨룰 수 있을 뿐이다. (59쪽)

그는 음악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음색의 선택에 있어 매우 확실한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중의 음악수준을 올려놓기에 적당한 그의 음악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율은 딱딱하지 않으면서 절제되어 있고, 화성은 명확하고, 악기의 관용적인 처리는 항상 매우 정확하다. (60쪽)

- 민은기, "프랑스 대혁명의 음악사적 의의."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1997), 제2권, pp.33-85.

고섹 - 공화국의 승리(Le Triomphe de la République) 서곡 (c) Chandos

'아마추어 음악회'는 미국 독립전쟁을 맞아 돈 때문에 중단되었다. (미국과 프리메이슨이 어떤 관계인지는 ☞머리말에 있는 파토님 글 참고.) 그러나 음악회는 곧이어 프리메이슨 지부 이름을 딴 음악회로 되살아난다. 정황을 보아 음악회 후원자가 다른 프리메이슨 지부로 바뀌면서 좀 더 시민 중심으로 거듭난 듯하다.

'아마추어 음악회'가 중단된 지 얼마 안 되어, '올림픽 지부 음악회(Concert de la Loge Olympique)'가 시작되었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의 모든 회원들은 프리메이슨 지부에 가입해야 했고, 입회는 기존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 1785년에는 남자 300명과 여자 102명이 회원이었고 점점 숫자가 증가했다. 회원의 출신 성분도 귀족에 한정되지 않았고, 은행가, 의사, 출판업자 등이 가입했고, 협력회원으로는 메훌(Méhul), 필리도르(Philidor)와 같은 음악가들도 있었다.

- James H. Johnson, Listening in Paris. A Cultural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p. 74. 재인용: 이경희, 243쪽.

프랑스 혁명기에 고섹의 경쟁자였다는 메율(Méhul)도 프리메이슨이었단다.

'올림픽 지부 음악회'를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사람은 고섹의 제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조제프 생조르주(Joseph Saint-George, 1745-1799)이다(Saint-Georges, Joseph Bologne,Chevalier de, NGD2). 생조르주는 이 음악회를 띄우려고 빈으로 가서 하이든에게 교향곡을 의뢰했으며(82, 84, 90, 91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이든도 프리메이슨이었는데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생조르주는 흑인이어서 '검은 모차르트 Le Mozart noir'라 불렸단다.

다음 시간부터는 프리메이슨 음악가를 하나하나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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