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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월요일

드뷔시 《야상곡》과 홀스트 《행성》, 밤과 우주의 음악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진에 실은 글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g-phil.kr/?p=1358

▶ 드뷔시, 홀스트, 그리고 어떤 모더니즘

"말하자면 두 가지 아방가르드가 나란히 형성되고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밝은 일상의 세계로 옮겨갔다. 빈 사람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성스러운 횃불로 무시무시한 심연을 밝혀 나갔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Alex Ross)는 1900년대 유럽 음악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빈 사람들"은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을 가리키고, "파리 사람들"은 드뷔시, 사티 등을 가리키지요.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으로 나아갈 때, 드뷔시는 전통적인 기능화성과 장·단조 체계를 살짝 비켜가면서 재즈나 각국의 민속 음악 등 이국적인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녹여 내는 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모더니티'(modernity)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입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Carl Dahlhaus)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초연된 1890년을 음악적 모더니즘의 시초로 보았지요. 바로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관현악법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뷔시가 빚어낸 음색은 때때로 '인상주의'라 불리는 음악 어법과 결합해 프랑스 모더니즘 음악 전통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영국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도 어찌 보면 드뷔시와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영국 민요 선율을 음악에 녹여내고자 했고,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복조성(polytonality)이나 교회선법 등으로 전통적인 조성음악 어법을 살짝 비켜가는 동시에 현대적인 관현악법으로 나름의 현대성을 좇았습니다.

▶ 드뷔시 《야상곡》

야상곡(Nocturne)이라 하면 쇼팽이나 존 필드 등이 작곡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곧잘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드뷔시 《야상곡》은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야상곡》 연작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한 3악장 관현악곡으로, 작곡가가 한 말을 빌자면 "야상곡의 흔한 형식이 아니라 낱말이 암시하는 여러 가지 인상과 빛이 만드는 특별한 효과"를 낸 작품입니다.

작곡가는 '구름'(Nuages) 악장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하늘의 변함없는 정경과 구름의 느리고 장엄한 움직임이 잿빛에 살짝 흰 빛깔을 더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구름' 악장에서는 목관악기와 바이올린이 음악을 끌고 가면서 중간 음역이 비어 있을 때가 잦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붕 떠있는 느낌을 주지요. 화성 진행도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음악 속을 둥둥 떠다닙니다.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음색과 음역 등의 요인이 악곡을 지배하면서 전통적인 조성·화성 체계를 회피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축제'(Fêtes) 악장은 파리에 있는 볼로뉴 숲(Bois de Boulogne)에서 열리는 축제를 묘사한 음악입니다. 드뷔시는 이렇게 설명했지요. "공기가 떨리고 춤추는 리듬과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을 떠올리게끔 한다. 여기에 행진 에피소드(현란하고 비현실적인 환상)가 나타나 축제 장면을 지나며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배경은 꿋꿋하게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음악과 반짝이는 가루가 우주적인 리듬 속에서 뒤섞이는 축제 분위기이다."

'인어'(Sirènes) 악장에는 여성 합창단이 가사 없이 부르는 '인어의 노래'가 나오지요. 드뷔시는 이와 관련해 "바다의 모습과 끊임없는 리듬을 그렸으며, 달빛을 받은 은빛 물결 속에서 인어가 웃으며 지나갈 때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가 들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어'와 '세이렌'은 조금 다르지만, 때때로 두 낱말이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냥 '인어'라고 쓰겠습니다.)

드뷔시 《야상곡》은 1900년 12월 9일 파리에서 1·2악장이 초연되었고, 1901년 10월 27일 전곡이 초연되었습니다.

▶ 홀스트 《행성》

홀스트 《행성》은 7악장으로 된 관현악곡으로 1918년 9월 29일 영국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홀스트는 본디 점성술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그때 기술로는 태양계 행성을 자세히 관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과학적 사실보다 점성술에서 더 큰 영감을 받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그런데 음악을 들어 보면,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 아예 우주선을 타고 가까이에서 행성들을 구경하는 느낌마저 들어요. 참 신기하지요.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오는 현대적인 음색이 가장 큰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화성, 전쟁을 가져오는 자 : 화성을 뜻하는 ‘마르스’(Mars)는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 이름이지요. 이 곡은 워낙 강렬해서, 그냥 블록버스터 SF 영화 한 편 보듯이 감상하면 됩니다. 이 곡을 듣고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텐데요, 사실은 작곡가 존 윌리엄스가 《스타워즈》 주제곡에서 이 음악을 흉내 냈습니다. 특히 관현악법이 비슷해요.

금성, 평화를 가져오는 자 : 금성을 뜻하는 ‘비너스’(Venus)는 사랑의 여신이자 평화와 화합을 부르는 여신이기도 하지요. 음악이 참 우아하지만, 악보를 들여다보면 화성과 리듬, 템포 등이 잔뜩 꼬여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 영향받은 홀스트의 '영국식 모더니즘'이 이렇게도 나타나는군요. 어찌 생각하면 이 곡에서 금관은 호른만 나오고 저음역 악기가 거의 안 나오는 점 등이 드뷔시 《야상곡》의 '구름'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수성, 날개 달린 전령 : 수성을 뜻하는 ‘머큐리’(Mercury)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교역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영어 이름이지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음악을 들어 보면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듯한 음형이 나타납니다.

목성, 쾌락을 가져오는 자 : 목성을 뜻하는 ‘주피터’(Jupiter)는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동일시되는 ‘유피테르’(Iuppiter)의 영어 이름이지요. 16분음표로 소나기처럼 후두두 시원하게 쏟아지는 현악기 소리가 마치 휘산제나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이 상쾌합니다. 곧이어 호른이 호쾌한 선율을 노래합니다. 이 대목은 1980년대 MBC 뉴스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어 국내에 널리 알려졌지요. 중간에 찬가처럼 나오는 영국 민요풍 선율도 유명합니다.

토성, 황혼을 가져오는 자 : 토성을 뜻하는 ‘새턴’(Saturn)은 시간과 농업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사투르누스(Satur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음악에서 느껴지는 몸서리 쳐지는 황량함은 마치 우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별을 보는 듯합니다.

천왕성, 마법사 : 천왕성을 뜻하는 ‘우라누스’(Uranus)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주피터(제우스)와 대립하는 하늘의 신 이름이지요. 바순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음형이 어찌 들으면 뒤카(Paul Dukas)의 명곡 《마법사의 제자》와 닮았습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우주적인 규모로 분탕질을 치는 모습이 떠오른달까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 '솔-미♭-라-시' 음형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독일어식 음계로 바꾸면 'G-Es-A-H'가 되지요. 'Es'는 'S'를 영어식으로 읽은 발음과 같고, 여기에 알파벳 몇 개만 채워 넣으면 GuStAv-Holst, 그러니까 작곡가의 이름이 됩니다. 장난꾸러기 마법사의 정체는 작곡가 자신이로군요!

해왕성, 신비로운 자 : 해왕성을 뜻하는 '넵튠'(Neptune)은 로마 신화에서 바다의 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동일시되는 넵투누스(Neptūnus)의 영어 이름이지요. 인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여성 합창이 음악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드뷔시 《야상곡》의 '인어' 악장과 닮은꼴입니다. 여성 합창뿐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는 음악 어법이 드뷔시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 망망대해와 망망우주(茫茫宇宙)

일상의 풍경을 그린 드뷔시 《야상곡》과 우주를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린 홀스트 《행성》이 '바다'라는 공통분모로 만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홀스트가 드뷔시 음악에서 영향받기도 했지만, 바다와 우주가 닮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망망대해'라는 말을 우주에 관해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인공위성도 레이더도, 무선통신 기술도 없이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바다를 헤매야 했던 시절에는 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우주선(宇宙船 · Starship)이라는 말은 우주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죠. 《스타트렉》이라는 유명한 SF 드라마를 보면, 우주를 탐사하는 군대 이름이 '우주해군'(Starfleet)이고 계급 체계가 미국 해군 계급과 일치합니다. 'USS 엔터프라이즈'라는 우주 전함은 미국 해군에서 현재 운용하고 있는 항공모함 이름이기도 하고요. 전함에 탑재된 무기 이름은 '광자 어뢰'(photon torpedo)입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는 인간이 느낄 외로움에는, 그래서 '인어의 노래'라는 판타지가 필요합니다. 드뷔시의 '인어'와 홀스트의 '인어'가 이렇게 만났습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천자문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우리 조상은 어려서 글을 익힐 때부터 우주에 대해 배웠다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합니다. 경기필이 연주하는 밤과 우주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을 한 번 찬찬히 눈에 담아 보면 어떨까요?

※ 티켓 예매 :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20805

2013년 1월 24일 일부 표기법 수정

2011년 5월 16일 월요일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 스베틀린 루세브 / 리오 후세인 / 서울시향

2011-03-24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리오 후세인
협연: 스베틀린 루세브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1945년판)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잘린 곳이 없는 듯? 으허허허! >_<


예술 사조를 구분 짓는 잣대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들이대는 오류를 무릅쓴다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미처 꽃피기에 앞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씨앗을 뿌린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을 대표할 만한 이른바 '12음 음악'의 뿌리를 캐 봐야 한다.

18세기 화성 이론을 세운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화성 진행 원리를 뉴턴 중력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며 음악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이에 따라 음악 이론과 계몽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것이 베토벤에 이르러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per aspera ad astra)라는 말과 더불어 인류가 끝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12음 음악 또한 이러한 음악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서양음악이 '발전'하던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12음 음악이 나타난 일은 필연이라는 주장에 수많은 음악학자가 동의한다. 따라서 12음 음악은 오해와 달리 전통과 단절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통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야말로 뿌리 깊은 전통을 거부한 혁명가이다. 조성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기능 화성 작법에서 벗어나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그저 흐르고 자라고 되돌아오게끔 했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이단아 취급을 받은 정도였지만, 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힘을 얻던 때를 만나 모진 비난을 견뎌야 했다. 이를테면 아도르노는 스트라빈스키가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라며 비꼬았다.

모더니즘이 절정에 이르며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던 때에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을 내놓았다. 이 글에서 불레즈는 19세기 음악을 확장·완성했을 뿐인 쇤베르크가 아니라 음색을 현대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려준 베베른을 작곡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색이 중요해지면서 드뷔시스트라빈스키말러 등과 함께 재조명 받았다.

오늘날 드뷔시스트라빈스키 곡을 연주하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무엇보다 《불새》는 스트라빈스키 자신이 지휘해 남긴 음반이 있어서 작품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낱낱이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새로 연주하려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할까?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바를 멋지게 '배신'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불레즈는 음 하나하나가 낭비 없이 드러나도록 하며 베베른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을 《불새》에서도 연상하게끔 했다. 리카르도 샤이는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라는 특급 악단의 기능성을 살리며 세련되고 균형 잘 잡힌 음색을 뽑아냈다.

서울시향을 지휘한 리오 후세인은 조금 느린 템포로 소리를 꼼꼼하게 풀어냈으며, 때때로 연주가 너무 차분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대목은 옥에 티였다. 현 소리에 비브라토로 멋을 내어 낭만주의 냄새를 풍긴 대목은 음악에 감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스트라빈스키가 들었다면 싫어했을 법하다. 그러나 예술의 전당이라는 대형 연주회장과 그에 걸맞은 대편성 악단이 연주할 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다가 스트라빈스키가 뜻한 바를 곧이곧대로 살리는 일이 반드시 옳지도 않다.

지휘자가 보인 작품 해석은 무난했으며, 서울시향 실력에 걸맞은 깔끔한 앙상블과 다채로운 음색을 이끌어낸 대목은 칭찬할 만했다. 도입부가 끝날 무렵 나오는 변주에서 플루트와 피콜로가 새 소리를 흉내 내고 다른 악기가 그것을 따라 하는 대목이 가장 훌륭했고, 신 나게 두드려 대는 〈코시체이 왕의 사악한 춤〉도 멋졌다. 크게 부풀어 오르며 '브라보'를 부르는 〈피날레〉도 좋았다.

첫 곡으로 연주한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도 모범적인 해석에 깔끔한 앙상블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아름다운 음색을 뽐냈다.

드뷔시는 프랑스 작곡가이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작곡가이나 《불새》는 목관악기 비중을 높이는 등 프랑스 청중을 고려해 작곡했다. 멘델스존은 독일 작곡가이지만, 이날 협연자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스베틀린 루세브였다. 서울시향 악장이기도 한 스베틀린 루세브는 사실 국적은 불가리아이나 연주에서 프랑스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다른 연주자가 끊어 연주하는 곳도 웬만하면 매끄럽게 이어 연주했으며, 반드시 스타카토로 연주해야 하는 곳만 너무 거칠지 않게 끊어 연주했다. 포르타멘토는 프랑스식 포르타멘토라 불리는 B-포르타멘토를 썼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지난 2008년 12월에 베토벤 협주곡을 협연하기도 했는데, 그때와 견주면 연주법은 비슷했으나 베토벤보다는 멘델스존이 루세브와 더 잘 맞는 듯했다. 서울시향과 함께한 시간이 더 쌓인 만큼 오케스트라와 더욱 한 몸처럼 어우러진 탓도 있겠다.

2011년 5월 14일 토요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인쇄 매체에 보낸 원고는 발간된 뒤에나 블로그에 올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연주회 프로그램 해설이라 미리 올려도 좋지 싶네요. 내일 고양에서 열리는 구자범-경기필 연주회입니다.

나중에 붙임: 구글이 데이터 오류 났는지 글 날려먹어서 새로 올립니다. 아오….


▶ 트리스탄 화음, 어쩌다 마주친 그대 눈동자

짝사랑을 앓아보았는가. 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또는 연인을 처음 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바그너는 바로 그러한 눈 마주침을 《트리스탄과 이졸데》 첫 화음으로 나타낸 듯하다. 이와 관련해 바그너가 직접 언급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극 중에서 이 화음과 엮인 모티프는 눈 마주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이 모티프는 때때로 영화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패러디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바그너는 이 작품을 쓸 때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과 불륜 관계였다.

이 화음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이라 부른다. 그때까지 서양음악이 바탕으로 삼던 조성 체계를 이 화음이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무조음악 시대를 열어젖힌 작품은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이지만, 무조음악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작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며, 그 핵심은 트리스탄 화음이다. 트리스탄 화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글쓴이에게 그럴 깜냥이 없을뿐더러 이 글에서는 지면이 모자라므로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를 잔뜩 써서 짧게 설명하겠다.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흘려 읽어도 좋다.

조성음악은 '긴장과 이완'을 근본 원리로 삼는다. 불협화음을 쓰려면 그에 앞서 '예비'를 해야 하고, 불협화음을 쓰고 난 뒤에는 안정된 협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화성법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차르트 음악에 기본 3화음만 나온다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예비'와 '해결'을 잘했을 뿐 모차르트도 불협화음을 얼마든지 썼다. 심지어 모차르트가 트리스탄 화음을 쓴 일도 있다면 믿겠는가? 사실이다.

트리스탄 화음은 F―B―D♯―G♯ 또는 단3도, 감5도, 단7도 음정으로 쌓거나 이것을 전위시킨 화음이며, 따라서 변종 반감7화음이다. 모차르트를 비롯한 이전 작곡가도 썼던 이 화음이 바그너의 발명품(?)처럼 불리는 까닭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화음이 쓰인 맥락 때문이다. 음악이 으뜸화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성이 분명하지 않은 단선율로 시작하는 대목부터 문제다. 이것을 얼렁뚱땅 A 단조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프랑스 6화음이라 할 수 있고, G♯ 음은 전타음이 된다. 그런데 전타음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더군다나 이 음이 해결되어야 할 A 음은 A♯ 음으로 가는 '경과음'처럼 쓰였다. 주객전도다. 게다가 이 화음과 얽힌 모티프는 딸림7화음으로 끝나지만,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하는 이 화음이 다른 조성 영역으로 곧바로 옮겨가 버린다. 같은 패턴이 되풀이된다.

조성을 A 단조가 아닌 A♭ 단조 등으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또 달리 해석된다. 그러나 설명이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자. 중요한 것은 이 화음으로 말미암아 조성이 확립되지 않은 채로 화성이 선율 속을 둥둥 떠다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한선율'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그리고 반음계적인 조바꿈이 일탈이 아닌 본질처럼 바뀌었으니 음계음과 변화음, 화성음과 비화성음을 구분하는 일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조성은 이렇게 붕괴했다.

▶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트리스탄 화음을 실제로 연주하는 일은 이론적 설명과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성적 중심이 사라지고 화성이 둥둥 떠다니면서 나타나는 몽환적인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음 하나하나가 서로 부딪히게 하기보다 차라리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게끔 하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트리스탄 화음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결을 신비로운 음향으로 나타낸 것이 된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도 꿈결처럼 어른어른한 느낌이 잘 살아나게끔 다스리는 해석이 어울린다. 지휘자 대다수가 이 해석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며,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꿈결을 빚어낸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둘째는 짝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강력한 불협화음에서 나오는 음향적 충격을 되도록 날것 그대로 살려야 한다. 목관악기의 어택(attack)을 날카롭게 살리고 그에 앞서 나오는 현악기의 크레셴도를 가파르게 다스린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는 이졸데를 절정으로 이끈 노랫말처럼 "파도치는 물결 속에"(In dem wogenden Schwall) 몸을 내던지는 듯한 격정을 살린다. 글쓴이는 이 해석을 지지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해석을 따른 지휘자는 글쓴이가 아는 한 셋뿐이다. 카를 뵘, 한스 크나퍼츠부슈, 마리스 얀손스.

이번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지휘자 구자범은 어떤 해석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 서곡인가 전주곡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는 서곡이 없다. 이번 연주회에서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곡은 서곡이 아닌 1막 전주곡이다. 왜 서곡이 아닌 전주곡인가? 서곡과 전주곡은 어떻게 다른가? 서곡과 전주곡은 자주 헷갈리는 개념이다. 둘 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인 탓에 더욱 헷갈리기 쉽다. 이 글에서는 혼동을 줄이고자 바그너 시대 맥락에서 쓰인 오페라 서곡과 오페라 전주곡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서곡은 영어로는 'Overture'이다. '입구' 또는 '문'을 뜻하는 라틴어 'apertura'에서 온 말이다. 'apertus'라고 하면 드러낸다, 펼쳐 보인다는 뜻이다. 오페라에서 서곡은 전체 줄거리를 음악으로 요약해서 들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처음 듣는 오페라도 서곡을 들어 보면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것, 요즘 하는 말로 스포일러(spoiler)다. 네타바레(ネタバレ)다. 미리니름이다. 바그너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뭐? ○○○가 범인이라고? 이런!

전주곡은 영어로 'Prelude'이다. '준비하다' 또는 '미리 해보다'를 뜻하는 라틴어 'praeludere'에서 온 말이다. 독일어로 전주곡은 'Vorspiel'인데, 말짜임은 영어와 비슷하다. 바그너 오페라 또는 악극(Musikdrama)에서 전주곡은 결말을 알려주지 않는다. 전주곡은 막이 오르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뿐이며, 서곡과 달리 막마다 제법 길게 나온다. 전주곡은 음악적으로도 완결되지 않은 채 다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으뜸화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그너는 오페라 《로엔그린》에서부터 서곡 대신 전주곡을 썼다.

▶ 사랑의 죽음, 죽음과 변용

"사랑의 죽음"(Liebestod)이라는 말은 본디 바그너《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을 설명하면서 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습적으로 이졸데가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 "부드럽고 상냥하게 그이가 웃음 짓네"(Mild und leise wie er lächelt)를 '사랑의 죽음'이라 부른다. 바그너는 이 장면을 일컬어 "이졸데의 변용"(Isoldes Verklärung)이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가사 없이 관현악으로 편곡된 판본을 연주한다.)

변용(Verklärung, Transfiguration)은 쇼펜하우어 사상에서 따온 말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사상에 열광했으되 입맛에 맞게 비틀어 작품에 반영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글쓴이도 잘 모르는 쇼펜하우어 얘기를 늘어놓는 대신 바그너가 쓴 노랫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절정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Ohne Nennen,
ohne Trennen,
neu Erkennen,
neu Entbrennen;
endlos ewig,
ein-bewusst:
heiss erglühter Brust
höchste Liebeslust!


이름을 부르지 말고,
떨어지지 말고,
새롭게 자각하고,
새롭게 타오르리라.
끝없이 영원히,
하나됨을 자각하리라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유지원 옮김)

쇼펜하우어가 말한 '변용'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비슷한 개념이고, 따라서 죽음과 변용은 동의어에 가깝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지고한 사랑의 쾌락"(höchste Liebeslust)으로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명백히 성애를 가리키며, 따라서 바그너에게 죽음과 변용과 섹스는 동의어가 된다. 위 노랫말과 더불어 음악에 나타난 성적 고양감은 "우리 이제 죽으리, 한 몸으로"(So stürben wir, um ungetrennt)라는 말로부터 비롯한다. 또한 "새롭게 자각하고"(neu Erkennen)라 할 때 "Erkennen"이라는 말은 독일어 성경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고…" 할 때처럼 성교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와 동시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각자의 에고를 초월해 하나가 된 상태, 곧 죽음과 변용을 뜻한다. "이름을 부르지 말고"(Ohne Nennen)라는 말은 변용을 거쳐 새로운 자아로 거듭났으므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고한 사랑의 쾌락"은 마지막 순간 마르케 왕 일당이 나타나면서 안타깝게 부서진다. 이것이 3막 끝에 이르러 트리스탄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어진다. 이미 죽은 트리스탄과 하나 되어 "새롭게 자각"하려면 이졸데 또한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졸데는 "지고한 사랑의 쾌락"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In dem wogenden Schwall,
in dem tönenden Schall,
in des Welt-Atems
wehendem All ---
ertrinken,
versinken ---
unbewußt ---
höchste Lust!


파도치는 물결 속에,
소리치는 울림 속에,
세상 숨결 불어오는
우주 속에
빠져들어,
가라앉아
나를 잊으리라
더없는 기쁨이여!

글쓴이는 몇 가지 이유로 "지고한 쾌락"을 "더없는 기쁨"이라 옮겼지만, 원어는 "höchste Lust"로 2막에 나오는 "höchste Liebeslust"와 거의 같은 말이다. 엑스터시(ecstasy)인 동시에 죽음과 변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 대본에는 위 노랫말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졸데는 변용된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르케는 주검에 축복을 내린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바그너의 망상이 유난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바그너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노랫말 가운데 이런 것도 있지 않은가.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지금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이 노래는 실제로 동반자살한 연인을 추모하는 곡이라고 한다.

▶ 모더니즘의 씨앗과 바그너의 후예들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바그너 음악 어법은 후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후예'를 대표할 만한 작곡가이다. 그리고 오페라 《살로메》는 슈트라우스 작품 가운데 바그너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또한 슈트라우스 못지않은 바그네리안(Wagnerian) 작곡가였다. (다만, 말러는 나중에 바그너와 맞수였던 브람스 음악 어법을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러와 슈트라우스가 바그너에게 받은 영향은 화성 어법만은 아니다. '라이트모티프'로 대표되는 극(drama)적 장치 또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 1928~1989)는 1889년을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으며 '음악적 모더니즘'이 이때부터 비롯했다고 보았다. 이해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과 말러 교향곡 1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9년에 완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견주면, 이 두 작품의 화성 어법은 차라리 퇴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하우스가 두 작품에서 발견한 '음악적 모더니즘'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화성이 아닌 음색, 바로 현대적인 관현악법이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관현악법 대가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 앞서 관현악법에 혁명을 불러온 작곡가가 둘 있었으니,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였다. 그러니까 바그너는 화성법으로나 관현악법으로나 현대음악에 씨앗 역할을 한 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은 바그너 관현악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트리스탄 화음'에서 목관악기가 빚어내는 음색이나 '사랑의 죽음'에서 빛을 머금은 듯 넘실거리는 현, 그리고 그 속에서 맑게 울려 퍼지는 하프 소리 등은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말러 교향곡 10번 (데릭 쿡 판본) ― 제임스 드프리스트 / 서울시향

2010-10-07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제임스 드프리스트 James DePreist, conductor

말러, 교향곡 제10번 (데릭 쿡 버전 Ⅱ)
Mahler, Symphony No. 10 (Deryck Cooke ver. 2)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입니다. 이번에는 편집을 조금 이상하게 해서 마치 김문경 씨가 지어낸 말을 제가 표절해 쓴 것처럼 되어버렸더군요. ㅠ.ㅠ 새삼 밝혀 두지만, '사나운 브람스'와 '흰 건반 베베른'은 제가 아니라 김문경 씨가 지어낸 말입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낭만주의 마지막 세대 작곡가이자 현대음악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현대음악과 관련해 말러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대적인 관현악법에서 나오는 현대적인 음색이다.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말러 교향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이 발표된 1889년을 음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으며 '음악적 모더니즘'이 이때부터 비롯했다고 보는데, 현대적인 관현악법이 두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음색이야말로 현대음악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현대음악말러'가 본격적으로 재조명 받은 때는 20세기 후반부터다. 불레즈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이러한 생각을 이끌었고, 몇몇 작곡가는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새로운 말러 해석을 내놓았으며, 현대음악에 관심 있는 전문 지휘자들이 함께 하며 큰 흐름을 만들어 갔다. 오디오 기술이 발전하고 '마크 레빈슨' 등 현대적인 소리를 뽐내는 명품 오디오 브랜드가 성공을 거두면서 '현대음악말러'가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바탕 또한 마련되었다.

음악평론가 김문경은 말러를 낭만주의자로 보는 전통적인 말러 해석을 '사나운 브람스' 계열이라 이름 붙였으며, 번스타인, 텐슈테트, 바비롤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대적인 말러 해석은 '흰 건반 베베른' 계열이라 할 수 있으며 불레즈, 길렌, 샤이, 마이클 틸슨 토머스 등을 대표적인 지휘자로 꼽을 수 있다.

이번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10번을 지휘한 제임스 드프리스트는 '흰 건반 베베른' 계열 해석을 선보였다. 숨어있는 성부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드러내며 다채로운 음색을 잘 살렸다는 대목에서 그렇게 볼 수 있겠는데, 그러나 소리를 예쁘게 다듬는데 신경을 많이 써서 현대음악다운 무표정함이 묻어날 때는 드물었다.

때때로 목관 악기로 맛깔스런 앙상블을 살려내어 '식물성 음색'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바그너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인용한 듯 목관 악기가 아기자기하게 얽히는 대목이 그랬으며, 이곳에서 서울시향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매우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어 냈다.

말러 음악에 곧잘 나오는 신경질적이고 때로 악마적이기까지 한 음형은 지휘자가 달콤쌉쌀한 느낌을 앞세우고 예쁘게 다듬은 음색 속에 녹아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가 연주한 E♭조 클라리넷이나 부악장 웨인 린이 연주한 독주 바이올린 등이 좀 더 되바라진 소리를 내지 못한 대목은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달콤한 슬픔'이 가장 서럽게 흐르는 5악장에서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으며, 마치 1악장부터 4악장까지가 모두 5악장을 돋보이게 하는 긴 전주곡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플루트 수석 박지은이 연주한 칸틸레나(cantilena) 선율은 너무나 애달팠고, 김미연이 연주한 큰북 소리는 심장을 내려치는 듯했다. 코다에 바로 앞서 칸틸레나 주제로 크게 부풀리는 대목에서는 누구라도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5악장 마지막에 현이 부풀어 오르는 이른바 '알므슈!'(Almsh!) 대목은 말러답지 않게 너무 단순하고 뜬금없다고 느껴진다. 이것은 말러가 남긴 스케치에 그리 쓰여 있다고 하지만, 만약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말러가 완성했다면 이 대목을 조금 더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어떻게든 손을 보지 않았을까. 이날 지휘자는 크레셴도를 써서 성긴 이음매를 만들었으나 서울시향이 만들어낸 크레셴도가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루바토를 좀 더 쓰거나 해서 부드럽게 다스렸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말러 교향곡 10번은 4단짜리 약식 총보로는 말러가 끝까지 완성했으며, 데릭 쿡 등이 완성한 판본에서 오케스트레이션과 대위구 첨가 수준을 넘어 완전히 새로 쓰여진 곳은 없다. 이런 까닭에 글쓴이는 이 작품을 사실상 완성된 악곡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해 왔다. 그러나 말러를 '음악적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본다면 이 작품에 '음색'이라는 핵심 요소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완성판 녹음을 남긴 지휘자가 대부분 '흰 건반 베베른' 계열 지휘자인 까닭 또한 음색에 빈 곳을 메울 아이디어를 그들이 나름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1악장만 연주해야 옳다는 뜻은 아니다. 데릭 쿡 판본을 가장 정통성 있는 '원전판'(Urtext) 악보처럼 여기되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판본이 꾸준히 시도되고 소개되어야 한다. 악보를 파기하라는 유언을 남긴 말러가 이것을 어찌 생각할지는 또 다른 문제이겠으나, 그리 따지자면 죽은 작곡가가 쓴 일기와 편지 따위를 연구하는 일 또한 죄스러운 일일 터이다. 어차피 관음증적 욕망을 떨치지 못한 동반자 의식을 지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린 텍스트와 열린 마음이다. 카펜터, 마제티, 바르샤이, 또 다른 판본은 어떨까?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현대음악의 '모더니티' - 아래 글에 이어

아래 글에 이어 씁니다:

http://blog.goclassic.co.kr/fishtail/1248785425
http://blog.goclassic.co.kr/fishtail/1248852994


▶ 모더니즘 음악, 양식이 아닌 시대 구분

먼저, 제가 '모더니즘'을 너무 좁은 뜻으로 가두려고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달하우스가 말러와 슈트라우스와 드뷔시를 가리켜 '프로그레시비스트(progressivist)'도 아니고 '모더니스트(Modernist)'라고 했다니 말이에요.

더군다나 1890년을 "역사적 단절 시기"라 한 대목이나 대표작으로 슈트라우스 <돈 후안>을 집어 말한 대목을 보면 여기서 달하우스가 말한 '모더니티'란 제가 말한 조성 및 화성의 해체가 아닌 현대적인 관현악법에 더 쏠려 있다고 보아야 하며, 여기에 '헤겔스러운' 생각을 갖다 붙이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문헌을 읽어보면 달하우스는 이 대목에서 '모더니즘'을 음악 양식이 아닌 단순 시대 구분으로만 쓴 듯합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제가 '모더니즘'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썼던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모더니즘으로 이루고자 했던 유토피아적 이상마저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어찌 보면 모더니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모더니즘 음악과 관련한 문헌을 여러 가지 읽어 봤는데, 이 말을 둘러싼 '층'이 세 가지쯤 되는 듯합니다. 첫째, 단순 시대 구분. 둘째, fishtail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념. 셋째, 역사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특정 음악 양식.

그러나 곁가지로 몇 군데 반론을 펴지 않을 수 없네요.


▶ 근대 화성 이론과 모더니즘

먼저, '역사의 완성'이라는 말은 카덴이 썼던 레토릭(rhetoric)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제가 부분 인용하면서 조금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장을 했는데, '근대 화성 이론'과 '표현주의'를 나누어 더 자세하게 써야겠네요. 먼저 fishtail님이 인용하신 Karol Berger를 살펴보지요.

Karol Berger(2005)는 시기를 더 앞당겨 베토벤의 소나타가 바흐의 푸가를 대체한 시기, 즉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한 18세기에 모더니티가 태동했고 18세기말에 이것이 첨예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제가 처음에 했던 주장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18세기 음악을 '모더니즘'과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이 옳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한 18세기에 모더니티가 태동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제가 라모 얘기를 갖다 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기도 하고요. 다시 말하면 18세기에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된 바탕이 바로 18세기 화성 이론입니다.

근대 화성 이론이 '목표지향적'인 까닭은 화성 이론을 이해하고 나면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논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용정희, "라모의 화성이론에 나타난 음악사상과 배경."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5), 제10권, pp.112-129.

fishtail님은 "12음 기법의 옹호자들과 그들의 후예들만을 모더니스트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고자 Berger를 인용하셨는데 저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어요. "콕 집어 말하자면 12음 음악과 그 자식들"이라는 말이 그런 오해를 부른 듯한데, 이 말은 모더니즘을 12음 음악에만 배타적으로 붙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12음 음악을 뒷받침하는 '헤겔스러운' 생각에 바탕을 둔 음악만을 일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제가 바로 위에서 인정해버렸으니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 '발전사관'과 "역사의 완성"

"역사의 완성"이라는 말은 무조성 또는 범조성이 역사의 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헤겔스러운' 생각, Berger가 했던 말을 빌자면 18세기에 태동한 "직선적 시간관"이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을 맞기까지 했다."(C. 카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발전사관'을 믿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니 이상하네요. 쇤베르크가 앞으로 몇십 년만 지나면 가게 점원이 12음렬로 된 휘파람을 흥얼거릴 것이라 예언한 일은 매우 잘 알려졌는데요. 청중이 '발전'하고 '진보'하리라 믿지 않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신은 그 흐름에 발맞추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이곳저곳에서 했으니 관련 문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백 번 양보해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발전사관'을 믿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음악 언어가 이미 18세기부터 이어온 '발전론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를 고전주의 음악가라 부르거나 바흐를 바로크 음악가로 부르는데 굳이 작곡가가 동의할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fishtail님이 인용하신 쇤베르크 말은 다른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러나 쇤베르크가 추구한 모든 변화가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발전된 형태이고 또 그 변화과정이 점진적이었다는 점, 즉 그의 모든 행위들이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지닌 귀결이었다는 점 때문에 쇤베르크의 선택이 그 당시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는 당위성을 띤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 예컨대 쇤베르크가 아니라면 다른 작곡가에 의해 무조음악이 시작되었을 터이지만, 그 음악양식은 쇤베르크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식의 무조음악이 탄생했을 것이다.

- 이석원, "아르놀트 쇤베르크." 『20세기 작곡가 연구 I』(서울: 음악세계, 2003), 303쪽.


▶ 표현주의와 모더니즘

'표현주의'라는 말은 쇤베르크 음악 양식이 미술 사조에 종속되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주므로 여기서는 '주관성과 내면성' 쯤으로 고쳐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쇤베르크의 '주관성과 내면성'은 쇤베르크가 어쩌다 갖게 된 예술 '취향'이 아닙니다. 무조음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성과 내면성' 또한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지닌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음악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듯이 예술의 의미와 정당성은 인습과 타협하지 않는 내면성의 표출에서 가름되었다. 이러한 주관성의 강조는 낭만주의의 연장선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 인간의 주관성의 강조는 "예술적 자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낭만주의에서의 주관적 감정 표출이 초월적·종교적 세계와 맥을 잇는다면, 모더니즘에서의 주관성은 인간의 의식과 심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구별된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미학』(서울: 심설당, 2004), 378쪽.

아도르노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보이며 주관성을 강조한다. 이는 표현주의에 대한 정당화에도 나타난다. "예술에까지 펼쳐지는 생명 중 주관은 유일하게 비기계적인 측면이다. 예술 작품은 다른 아무 곳에서도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음악은 주관을 닮지 않아야 하지만, 주관을 전혀 닮지 않아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은 존재이유가 없는 절대적 변질(소외)이나 마찬가지이다."(『콰지 우나 판타지아』, 417쪽). 음악을 통해 반영된 사회 또한 주관을 통해 파악된 사회이다. 예술은 주관 없이 예술에 이르지 못한다. 사회와 관계가 없는 순수 주관 또한 생명을 가진 예술이 아니다. 이것이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아도르노의 예술론이다.

- 오희숙, 386쪽.


현대음악의 '모더니티'

아래 글을 읽고 씀:
http://blog.goclassic.co.kr/fishtail/1248785425

사람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에 대한 관점 또한 다를 수 있지요. 그러나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이라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지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르더라도 '발전' '진보' '구조' 같은 개념들은 '모더니즘'이라는 대명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fishtail님이 말씀하신 "서양음악의 하모니와 주제의 기초를 뒤흔들려는 표현주의적인 충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기능화성을 버리더라도 다른 맥락에서나마 '화음'은 남게 마련이며, 그 바탕에 깔린 '질서'와 '구조'는 오히려 더욱 탄탄해질 뿐입니다. 음악에 정치적 사상을 담아야만 "진보사관"과 엮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음악을 이루는 얼개에 이미 모더니즘이 녹아들어 갔다는 말이에요.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은 이를 두고 "역사의 완성"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음악 활동과 작품들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반화되어 있는 역사모델, 즉 헤겔의 세계정신에 기인하며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계산에 두는, 그리고 선(線)적인 시간 개념에 사로잡혀 있고 사회의 자율적 움직임과 음악 재료들의 자율적 움직임에 의거하는 역사모델을 훼손했다. (...) 그는 아주 분명하고 도발적으로 서양문화의 터부에 대항했다. 표현예술과 표현수단으로서의 음악 개념에 대항한 것이다. 적어도 계몽주의시대부터 이 개념은 (극진한 보호를 받는) 상투어가 되었고 문화 진열장에서 부동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음악의 표현주의와 20세기 초 무렵의 음악에서의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을 맞기까지 했다.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이, 또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cker)의 오페라가 이에 한 몫을 했다.

- Christian Kaden, 나주리 옮김, "20세기의 음악과 세계관: 스트라빈스키의 경우."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6), 제11권, pp.209-230.

'근대적인' 화성 이론에 이미 '발전'이나 '목표 지향' 같은 개념이 깔렸고, 그것이 더 튼튼한 질서에 따라 거듭나고 '표현주의'가 이에 더해진 20세기 양식이 '역사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무조 음악이 전통의 '단절'이 아니라 거꾸로 전통의 '완성'이며 '필연'이라는 관점에는 수많은 음악학자가 동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화성 이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장 필리프 라모에 이르게 되지요. 라모는 화성 이론을 설명하면서 뉴튼의 중력 이론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제가 위에 '베토벤스러운'이라는 말을 했으나 참된 뿌리는 '라모'에서부터 비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되 '음모론'은 빼고 읽으세요.

http://wagnerian.textcube.com/428

그런가 하면, 쇤베르크가 스트라빈스키를 옹호한 일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온도차 정도로 받아들여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제가 인용한 말을 보아도 사상가(아도르노, 블로흐)와 예술가(베르크)가 뚜렷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쇤베르크는 예술가인 만큼 사상을 가지고 예술의 자유를 깎아내리려는 행동을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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