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goclassic.co.kr/fishtail/1248785425
http://blog.goclassic.co.kr/fishtail/1248852994
▶ 모더니즘 음악, 양식이 아닌 시대 구분
먼저, 제가 '모더니즘'을 너무 좁은 뜻으로 가두려고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달하우스가 말러와 슈트라우스와 드뷔시를 가리켜 '프로그레시비스트(progressivist)'도 아니고 '모더니스트(Modernist)'라고 했다니 말이에요.
더군다나 1890년을 "역사적 단절 시기"라 한 대목이나 대표작으로 슈트라우스 <돈 후안>을 집어 말한 대목을 보면 여기서 달하우스가 말한 '모더니티'란 제가 말한 조성 및 화성의 해체가 아닌 현대적인 관현악법에 더 쏠려 있다고 보아야 하며, 여기에 '헤겔스러운' 생각을 갖다 붙이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문헌을 읽어보면 달하우스는 이 대목에서 '모더니즘'을 음악 양식이 아닌 단순 시대 구분으로만 쓴 듯합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제가 '모더니즘'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썼던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모더니즘으로 이루고자 했던 유토피아적 이상마저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어찌 보면 모더니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모더니즘 음악과 관련한 문헌을 여러 가지 읽어 봤는데, 이 말을 둘러싼 '층'이 세 가지쯤 되는 듯합니다. 첫째, 단순 시대 구분. 둘째, fishtail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념. 셋째, 역사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특정 음악 양식.
그러나 곁가지로 몇 군데 반론을 펴지 않을 수 없네요.
▶ 근대 화성 이론과 모더니즘
먼저, '역사의 완성'이라는 말은 카덴이 썼던 레토릭(rhetoric)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제가 부분 인용하면서 조금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장을 했는데, '근대 화성 이론'과 '표현주의'를 나누어 더 자세하게 써야겠네요. 먼저 fishtail님이 인용하신 Karol Berger를 살펴보지요.
Karol Berger(2005)는 시기를 더 앞당겨 베토벤의 소나타가 바흐의 푸가를 대체한 시기, 즉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한 18세기에 모더니티가 태동했고 18세기말에 이것이 첨예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제가 처음에 했던 주장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18세기 음악을 '모더니즘'과 곧바로 이어 말하는 일이 옳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한 18세기에 모더니티가 태동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제가 라모 얘기를 갖다 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기도 하고요. 다시 말하면 18세기에 "순환적 시간관이 직선적 시간관으로 교체"된 바탕이 바로 18세기 화성 이론입니다.
근대 화성 이론이 '목표지향적'인 까닭은 화성 이론을 이해하고 나면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논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용정희, "라모의 화성이론에 나타난 음악사상과 배경." 『음악이론연구』(서울: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5), 제10권, pp.112-129.
fishtail님은 "12음 기법의 옹호자들과 그들의 후예들만을 모더니스트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고자 Berger를 인용하셨는데 저는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어요. "콕 집어 말하자면 12음 음악과 그 자식들"이라는 말이 그런 오해를 부른 듯한데, 이 말은 모더니즘을 12음 음악에만 배타적으로 붙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12음 음악을 뒷받침하는 '헤겔스러운' 생각에 바탕을 둔 음악만을 일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제가 바로 위에서 인정해버렸으니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 '발전사관'과 "역사의 완성"
"역사의 완성"이라는 말은 무조성 또는 범조성이 역사의 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헤겔스러운' 생각, Berger가 했던 말을 빌자면 18세기에 태동한 "직선적 시간관"이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을 맞기까지 했다."(C. 카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발전사관'을 믿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니 이상하네요. 쇤베르크가 앞으로 몇십 년만 지나면 가게 점원이 12음렬로 된 휘파람을 흥얼거릴 것이라 예언한 일은 매우 잘 알려졌는데요. 청중이 '발전'하고 '진보'하리라 믿지 않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신은 그 흐름에 발맞추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이곳저곳에서 했으니 관련 문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백 번 양보해 쇤베르크와 그 제자들이 '발전사관'을 믿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음악 언어가 이미 18세기부터 이어온 '발전론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를 고전주의 음악가라 부르거나 바흐를 바로크 음악가로 부르는데 굳이 작곡가가 동의할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fishtail님이 인용하신 쇤베르크 말은 다른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러나 쇤베르크가 추구한 모든 변화가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발전된 형태이고 또 그 변화과정이 점진적이었다는 점, 즉 그의 모든 행위들이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지닌 귀결이었다는 점 때문에 쇤베르크의 선택이 그 당시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는 당위성을 띤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 예컨대 쇤베르크가 아니라면 다른 작곡가에 의해 무조음악이 시작되었을 터이지만, 그 음악양식은 쇤베르크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식의 무조음악이 탄생했을 것이다.
- 이석원, "아르놀트 쇤베르크." 『20세기 작곡가 연구 I』(서울: 음악세계, 2003), 303쪽.
▶ 표현주의와 모더니즘
'표현주의'라는 말은 쇤베르크 음악 양식이 미술 사조에 종속되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주므로 여기서는 '주관성과 내면성' 쯤으로 고쳐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쇤베르크의 '주관성과 내면성'은 쇤베르크가 어쩌다 갖게 된 예술 '취향'이 아닙니다. 무조음악이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성과 내면성' 또한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지닌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음악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듯이 예술의 의미와 정당성은 인습과 타협하지 않는 내면성의 표출에서 가름되었다. 이러한 주관성의 강조는 낭만주의의 연장선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보다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 인간의 주관성의 강조는 "예술적 자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낭만주의에서의 주관적 감정 표출이 초월적·종교적 세계와 맥을 잇는다면, 모더니즘에서의 주관성은 인간의 의식과 심리와 관계를 맺으면서 구별된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미학』(서울: 심설당, 2004), 378쪽.
아도르노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보이며 주관성을 강조한다. 이는 표현주의에 대한 정당화에도 나타난다. "예술에까지 펼쳐지는 생명 중 주관은 유일하게 비기계적인 측면이다. 예술 작품은 다른 아무 곳에서도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음악은 주관을 닮지 않아야 하지만, 주관을 전혀 닮지 않아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은 존재이유가 없는 절대적 변질(소외)이나 마찬가지이다."(『콰지 우나 판타지아』, 417쪽). 음악을 통해 반영된 사회 또한 주관을 통해 파악된 사회이다. 예술은 주관 없이 예술에 이르지 못한다. 사회와 관계가 없는 순수 주관 또한 생명을 가진 예술이 아니다. 이것이 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아도르노의 예술론이다.
- 오희숙, 3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