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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0일 금요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예전에 썼던 글을 윤문 수준으로 수정함.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봄의 제전›은 20세기 서양음악사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변화무쌍하고 강렬한 리듬, 원초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조성을 병치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음악 어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1911년에서 1912년 사이에 스위스 클레랑스에서 작곡되었고, 작곡가는 처음부터 발레를 위한 관현악곡을 의도했으나 1912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먼저 출판되었다. 관현악 편성의 발레는 1913년 니진스키의 안무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고대 사회의 종교적 제의를 묘사한 작품으로, 스트라빈스키는 다음과 같은 표제와 설명을 붙였다.

제1부: 대지에 대한 경배

– 도입부

– 봄의 조짐 ― 젊은 처녀들의 춤
봄을 기념하는 행사가 언덕에서 시작된다. 한 노파가 나와 앞날을 예언한다.
– 유괴 의식
젊은 처녀들이 강에서 한 줄로 다가와 “유괴의 춤”을 춘다.
– 봄의 론도
젊은 처녀들이 둥글게 돌면서 호로보트(러시아 원무)를 춘다.
– 라이벌 부족들의 의식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라이벌 부족들의 의식을 치른다.
– 현자의 행렬
신성한 행렬이 장로들 앞으로 이어지며, 그들을 대표하는 현자가 의식을 잠시 중지시키고 대지에 축복을 내린다.
– 대지의 춤
사람들이 땅과 하나가 되고자 열광적으로 춤춘다.

제2부: 희생

– 도입부

– 젊은 처녀들의 신비로운 모임
젊은 처녀들이 둥글게 돌면서 신비로운 행사를 시작한다.
– 선택받은 이를 찬양함
처녀 가운데 하나가 둥근 행렬 속에서 두 번 붙잡히며 ’선택받은 이’로 지명되고, 그 운명을 받아들여 춤을 춘다.
– 조상의 혼령을 소환함
처녀들이 짧은 춤으로 조상의 혼령을 깨운다.
–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선택받은 이가 장로들에게 인도되며, 장로들이 제의를 수행한다.
– 희생의 춤
장로들이 입회한 가운데 선택받은 이가 “희생의 춤”을 추면서 죽음을 맞는다.

I. Stravinsky: Le Sacre du Printemps

One of the masterpieces of twentieth-century Western music, ‹Le Sacre du Printemps› boasts an ever-changing, intense rhythm, primitive and magical atmosphere, and uses highly unconventional musical language for the time, such as juxtaposing multiple tonalities. Completed between 1911 and 1912 in Clarens, Switzerland, Stravinsky intended it from the outset as a ballet for orchestra, but published the score for two pianos beforehand in 1912. The version for orchestra premiered with Nijinsky’s choreography in 1913. This piece describes a religious ritual of an ancient pagan society. Stravinsky added the following titles and descriptions to the piece:

Part I: Adoration of the Earth

– Introduction

– Augurs of Spring ― Dance of Young Girls
The celebration of spring begins in the hills. An old woman enters and begins to foretell the future.
– Ritual of Abduction
Young girls arrive from the river in single file and begin the “Dance of Abduction.”
– Spring Rounds
The young girls dance the Khorovod (a traditional Russian round dance), known as the “Spring Rounds.”
– Ritual of the Rival Tribes
The people divide into two groups in opposition to each other and begin the “Ritual of the Rival Tribes.”
– Procession of the Sage
A holy procession leads to the wise elders, headed by the Sage who brings the ritual to a halt and blesses the earth.
– Dance of the Earth
The people break into a passionate dance, sanctifying and becoming one with the earth.

Part II: The Sacrifice

– Introduction

– Mystic Circles of the Young Girls
The young girls engage in mysterious games, walking in circles.
– Glorification of the Chosen One
One of the young girls is caught twice in the perpetual circle, and is selected by fate to be the “Chosen One.”
– Evocation of the Ancestors
The young girls invoke the ancestors.
– Ritual Action of the Ancestors
The Chosen One is presented to the elders, who enact the ritual.
– Sacrificial Dance
The Chosen One dances to death in the presence of the old men, in the great “Sacrificial Dance.”

2011년 5월 16일 월요일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 스베틀린 루세브 / 리오 후세인 / 서울시향

2011-03-24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리오 후세인
협연: 스베틀린 루세브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1945년판)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잘린 곳이 없는 듯? 으허허허! >_<


예술 사조를 구분 짓는 잣대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들이대는 오류를 무릅쓴다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미처 꽃피기에 앞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씨앗을 뿌린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을 대표할 만한 이른바 '12음 음악'의 뿌리를 캐 봐야 한다.

18세기 화성 이론을 세운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화성 진행 원리를 뉴턴 중력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며 음악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이에 따라 음악 이론과 계몽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것이 베토벤에 이르러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per aspera ad astra)라는 말과 더불어 인류가 끝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12음 음악 또한 이러한 음악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서양음악이 '발전'하던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12음 음악이 나타난 일은 필연이라는 주장에 수많은 음악학자가 동의한다. 따라서 12음 음악은 오해와 달리 전통과 단절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통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야말로 뿌리 깊은 전통을 거부한 혁명가이다. 조성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기능 화성 작법에서 벗어나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그저 흐르고 자라고 되돌아오게끔 했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이단아 취급을 받은 정도였지만, 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힘을 얻던 때를 만나 모진 비난을 견뎌야 했다. 이를테면 아도르노는 스트라빈스키가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라며 비꼬았다.

모더니즘이 절정에 이르며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던 때에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을 내놓았다. 이 글에서 불레즈는 19세기 음악을 확장·완성했을 뿐인 쇤베르크가 아니라 음색을 현대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려준 베베른을 작곡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색이 중요해지면서 드뷔시스트라빈스키말러 등과 함께 재조명 받았다.

오늘날 드뷔시스트라빈스키 곡을 연주하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무엇보다 《불새》는 스트라빈스키 자신이 지휘해 남긴 음반이 있어서 작품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낱낱이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새로 연주하려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할까?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바를 멋지게 '배신'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불레즈는 음 하나하나가 낭비 없이 드러나도록 하며 베베른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을 《불새》에서도 연상하게끔 했다. 리카르도 샤이는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라는 특급 악단의 기능성을 살리며 세련되고 균형 잘 잡힌 음색을 뽑아냈다.

서울시향을 지휘한 리오 후세인은 조금 느린 템포로 소리를 꼼꼼하게 풀어냈으며, 때때로 연주가 너무 차분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대목은 옥에 티였다. 현 소리에 비브라토로 멋을 내어 낭만주의 냄새를 풍긴 대목은 음악에 감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스트라빈스키가 들었다면 싫어했을 법하다. 그러나 예술의 전당이라는 대형 연주회장과 그에 걸맞은 대편성 악단이 연주할 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다가 스트라빈스키가 뜻한 바를 곧이곧대로 살리는 일이 반드시 옳지도 않다.

지휘자가 보인 작품 해석은 무난했으며, 서울시향 실력에 걸맞은 깔끔한 앙상블과 다채로운 음색을 이끌어낸 대목은 칭찬할 만했다. 도입부가 끝날 무렵 나오는 변주에서 플루트와 피콜로가 새 소리를 흉내 내고 다른 악기가 그것을 따라 하는 대목이 가장 훌륭했고, 신 나게 두드려 대는 〈코시체이 왕의 사악한 춤〉도 멋졌다. 크게 부풀어 오르며 '브라보'를 부르는 〈피날레〉도 좋았다.

첫 곡으로 연주한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도 모범적인 해석에 깔끔한 앙상블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아름다운 음색을 뽐냈다.

드뷔시는 프랑스 작곡가이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작곡가이나 《불새》는 목관악기 비중을 높이는 등 프랑스 청중을 고려해 작곡했다. 멘델스존은 독일 작곡가이지만, 이날 협연자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스베틀린 루세브였다. 서울시향 악장이기도 한 스베틀린 루세브는 사실 국적은 불가리아이나 연주에서 프랑스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다른 연주자가 끊어 연주하는 곳도 웬만하면 매끄럽게 이어 연주했으며, 반드시 스타카토로 연주해야 하는 곳만 너무 거칠지 않게 끊어 연주했다. 포르타멘토는 프랑스식 포르타멘토라 불리는 B-포르타멘토를 썼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지난 2008년 12월에 베토벤 협주곡을 협연하기도 했는데, 그때와 견주면 연주법은 비슷했으나 베토벤보다는 멘델스존이 루세브와 더 잘 맞는 듯했다. 서울시향과 함께한 시간이 더 쌓인 만큼 오케스트라와 더욱 한 몸처럼 어우러진 탓도 있겠다.

2011년 1월 1일 토요일

에밀 길렐스를 괴롭힌 KGB

이스라엘 지휘자 유리 시걸(Uri Segal)이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에게 제보한 내용:
http://www.artsjournal.com/slippeddisc/2010/12/the_secret_torments_of_emil_gi.html

요약하면,

1982년 당시 구소련에서는 이스라엘 음악가와 협연 금지, 그러나 운 좋게 시걸이 길렐스와 협연할 기회가 생겼다. 함께 저녁 먹다가 길렐스가 신문 스크랩한 것을 보여 줬는데, 스트라빈스키가 망명 48년 만에 러시아에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담은 1962년 『뉴욕 타임스』 기사. 몇몇 단어는 빨간색 밑줄. 소련에 가니 뭐가 좋더냐는 기자 질문에 스트라빈스키 대답은, "보드카와 출국 비자"였다고.

(중간 생략)

"연주회 날 밤 길렐스와 나는 호텔 로비에서 만나 연주회장에 함께 가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갔더니 길렐스가 없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호텔 방으로 전화했더니 계속 통화 중이었다. 마침내 길렐스가 왔다.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벌벌 떨면서 하는 말이, "그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 나 손 떨리는 것 좀 봐. 이 지경인데 당장 연주하래." 그를 괴롭히는 것은 KGB였다. 몹시 무서웠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김원철=Norman Lebrecht에 의해 창작된 〈에밀 길렐스를 괴롭힌 KGB〉 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3.0 Unported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www.artsjournal.com의 저작물에 기초

2009년 9월 4일 금요일

2009.03.05.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 - 피닌 콜린즈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3월 5일(목)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Finghin Collins (Pf)

Borodin, Polovtsian Dances
Mozart, Piano Concerto No.24 in C minor, K.491
Stravinsky, The Rite of Spring (Le Sacre du Printemps)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감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아가는 '베토벤스러운' 믿음과 그 얼개를 이루는 낭만주의 기능화성을 싫어했다.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조성이 없거나 희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얼핏 보면 쇤베르크로 대표되는 12음 음악과 닮았으나 바탕에 깔린 마음가짐은 거꾸로다. 쇤베르크 음악은 조성과 화성이 발전 끝에 해체하고서 맺은 열매이지만, 스트라빈스키 음악은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오랜 가치관을 뿌리째 뽑아낸 자리에서 자라난 새싹이다. 요즘 눈으로 보면 모더니즘이 꽃피기에 앞서 포스트모던한 생각을 한 셈인데, 그 때문에 스트라빈스키는 모더니스트들에게 모진 말을 들어야 했으며, 이를테면 아도르노는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라고 했다.

낭만주의를 물리치면서도 모더니즘과도 거리를 둔 음악은 어떠해야 할까? <봄의 제전>에서는 현대적인 음향과 원시적인 울림이라는 '남남'을 얄궂게 엮어놓은 엉뚱함과 그 안에 담긴 비선형성(non-linearity)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또 스트라빈스키가 직접 지휘한 녹음이 남아 있어 이 작품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낱낱이 알 수 있다. 러시아 교회 종소리를 닮아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스트라빈스키 폴리포니, 비브라토를 되도록 쓰지 않아 몹시 메마른 음색, 원시 부족이 멋대로 노래하는 듯 고약한 선율과 화음이 연주에서 잘 살아난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지휘자가 스트라빈스키를 배신해 왔으며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카라얀은 두텁고 기름진 비브라토로 잔뜩 멋을 내어 낭만주의와 닿아 있는 녹음을 남겼고(스트라빈스키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불레즈는 마치 총열주의 음악인 양 차갑고 딱딱한 질서를 연주에 담아냈다. 정명훈은 이럴 때 보통 중용을 지키는데, 카라얀을 '우파'라 하고 불레즈를 '좌파'라 한다면 정명훈은 중도우파이며 아바도와 살로넨 사이 어딘가에 있다.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은 '스트라빈스키 폴리포니'를 날것 그대로 살리기보다는 주선율을 뚜렷이 살려 쏟아지는 선율과 리듬 속에서 관객이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현악기는 이를테면 1부 4곡 '봄의 론도'나 2부 2곡 '젊은이의 신비한 모임'에서도 음색이 너무 까슬까슬하지 않도록 비브라토를 알맞게 썼고, 1부 4곡 마디 331에서 비올라가 비브라토를 아낀 일처럼 드물게 메마른 음색을 살렸다. 2부 서곡에서는 제2 바이올린 플래절렛(개방현 하모닉스) 화음이 너무 고약하게 들리지 않게끔 소리를 줄였고, 하모닉스 주법으로 연주하는 독주 바이올린은 글리산도를 되도록 얌전하게 갈무리했다.

타악기는 너무 앞으로 나서지 않고 다른 악기 소리에 감칠맛을 더할 때가 잦았고, 이를테면 살로넨 녹음에서 큰북이 매우 큰 소리를 내는 1부 5곡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들의 의식' 마디 439에서도 악보에서 지시한 '메조포르테'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곳에서는 연주회장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터트리기도 했다. 1부 마지막 네 마디에서는 큰북이 무시무시한 크레셴도를 들려주었고, 2부 3곡 '선택된 처녀에게 영광을'에 들어서기 바로 앞서 나오는 4분음 11연타 때에는 큰북과 팀파니가 현 소리를 누르고 마구 두드려댔다. 2부 끝 곡 '희생의 춤'에서는 타악기끼리 어질어질한 폴리리듬을 주고받았다.

관악기 연주자들도 저마다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으며, 자주 보기 어려운 악기인 알토 플루트와 베이스 클라리넷 따위도 곳곳에서 돋보였다. 베이스 클라리넷은 이 곡에서 은근히 멋있게 나와서 이를테면 1부 서곡에서 좀 더 튀는 연주를 들려주었으면 싶었으나 그냥 다른 악기와 알맞게 어울려서 조금은 아쉬웠다. 바순은 다른 악기와 쉽게 섞여버리는 악기 특성 탓에 좀처럼 눈길을 얻기 어려운데 이날 곡 첫머리부터 곽정선 수석대행이 멋진 독주를 들려주었다. 문득 시향 수석 연주자들만 놓고 보면 이제는 웬만한 유럽 악단과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으며, 유럽으로 연주 여행을 가겠다더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협연한 피닌 콜린스는 모차르트치고는 페달을 제법 많이 쓰는 듯했고, 모차르트보다는 초기 베토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덴차는 아예 19세기 음악이라 해도 믿길 만했다. 이 작품이 모차르트 작품 가운데서도 파토스를 꽤 겉으로 들어내는 까닭에 이런 연주도 그럴싸하다 싶었다. 그런가 하면 연주자 나이에 어울리는 풋풋한 젊음과 조금 나쁘게 말하면 치기가 이곳저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3악장 세 번째 변주(마디 65)였는데, 첫머리에 나오는 뒤집힌 c단조 화음을 사납게 풀어낼 줄 알았더니 뜻밖에 화음보다 선율선을 살려 여린 느낌으로 가다가 마디 81에 이르면서 좀 더 화음을 살렸다. 앙코르로 슈만 곡을 듣고 나니 모차르트베토벤도 아닌 슈만에 가장 어울리는 연주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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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30일 일요일

2008.06.15.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II - 스티븐 애즈버리 / 빌헴 라추미아

2008년 6월 15일(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자 : Stefan Asbury
협연자 : Wilhem Latchoumia (Pf)

John Cage (1912-1992) Credo in US for piano, 2 percussions, radio and phonograph (1942) ca.12’30
Charles Ives (1874-1954) Set for Theatre Orchestra (1899-1906/1915) 7’30
- In The Cage
- In The Inn
- In The Night
Il-Ryun Chung (*1964) Glut for ensemble (2008) ca.15´
John Cage (1912-1992) , Suite for toy piano (1948) 4’
Henry Cowell (1897-1965), The Banshee for string piano (1925) 2’
Conlon Nancarrow (1912-1997), Prelude for piano (1935) 1’30
Tango? for piano (1983) 3’
John Zorn (*1953), Cat O’Nine Tails for string quartet (1988) 15’30
Igor Stravinsky (1882-1971), Ragtime for 11 instruments (1918) 4’30
George Antheil (1900-1959) Jazz Symphony for solo piano and small orchestra (1925/1955) 7’

※ 13일 연주회는 날짜를 잘못 알아서 놓쳤습니다. 털썩... 출간본을 보니 13일 연주회 리뷰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 15일 연주회 리뷰만 실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은 내용을 짧은 글에 우겨넣느라 고생할 거 없이 더 길게 써도 됐을 텐데 ㅠ.ㅠ



타악기를 하는 친구와 함께 밥을 먹다가 겪은 일이다. 그 친구가 젓가락으로 빈 밥그릇과 반쯤 비운 국그릇과 유리컵 따위를 두드리는데 매우 수준 높은 '타악기 연주'라 새삼 놀랐다. 나중에는 숟가락 두 개를 엎어 쥐고 손가락으로 튕기고 부딪히면서 이런저런 리듬을 연주해내기도 했다. 내가 흉내를 내 봤더니 왜 '비 내리는 호남선'에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되어버리는지….

존 케이지의 <크레도 인 유에스>를 연주하는 서울시향 타악기 연주자들이 통조림 캔 따위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다.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그보다 훨씬 앞서 나온 탓에 그다지 파격이랄 것은 없지만 '라디오'를 이용해 존 케이지다운 '해프닝'을 연출한 것은 흥미로웠다. 연주회 해설을 쓴 하바쿡 트라버는 이 곡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던 사건과 엮어 설명했고 곡 제목이 뜻하는 바를 그로써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향의 연주는 '해프닝'을 더 강조했다. '라디오 선곡'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빼면 무거운 것이 없었고 '언제든지요 형님'이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에는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이 나오고 말았다. '텔~미! 텔~미!'

정일련의 <작열 Glut>은 서울시향이 이번에 위촉한 작품이다. 프로그램을 쓴 하바쿡 트라버는 물질이 열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물리 현상을 중심으로 작품을 설명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트라버가 한국 문화를 잘 몰라서 반쪽만 이해한 듯싶다. 작곡가는 굿하듯이 타악기를 두드리는 동안 열이 올라 다른 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곡을 썼다고 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본 굿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대놓고 굿판을 벌이지는 않는다. 기만적인 근대화를 경험한 한국인에게 진짜 굿은 왠지 좀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지만, 정일련이 벌인 '굿판'은 마림바와 실로폰의 맑은 음색과 가멜란(Gamelan) 악기 따위가 어우러져 현대인 입맛에 맞는 '놀이'로 느껴졌다. 휴식 시간에 10대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 "간지 작렬이야!"

존 케이지의 <장난감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은 작품보다 악기가 핵심이었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피너츠>에서 슈로더가 연주하던 바로 그 장난감 피아노가 아닌가! 피아니스트 빌헴 라추미아가 무대 바닥에 주저앉아서 장난감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들이 객석에 넘쳐흘렀다. 그런데 옥에 티가 있다. 왜 장난감 피아노 위에 슈로더가 쓰던 베토벤 흉상이 없단 말인가. 그게 없으니 장난감 피아노가 무게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지 않는가!

롤플레잉 게임(RPG)을 즐겨 하는 사람이라면 헨리 코웰의 <밴시 Banshee>를 듣고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밴시는 서양 처녀 귀신으로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 마법이나 마법 무기로 공격해야 하는 언데드 몹(Undead Mob)이다. 이것을 알고 나면 클러스터 기법이나 특이한 연주법 같은 것은 관객이 알 필요 없다. 보라, 밴시가 무대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마법사, 뭐 하고 있나? 어서 공격해!

아이브스의 극장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트>와 존 조른의 <캣 오나인 테일스>는 콜라주 기법을 쓴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존 케이지의 <크레도 인 유에스>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낸캐로우의 피아노곡이나 스트라빈스키의 <래그타임>과 앤타일의 <재즈 교향곡>은 맥락이 조금씩 다르지만 '재즈'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재즈라는 음악 장르는 여러 음악이 섞여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다는 것은 매우 미국적인 가치인데,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것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각각이 대등하게 섞여 하나가 되는 융화(融和)는 한쪽이 다른 쪽에 섞여들어 가는 동화(同化)와는 다르다. 음악학자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을 융화시킨 게 아니라 서양 문화에 동화하는 과정을 내비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 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2008.03.21. 라우타바라 북극의 노래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 협주곡 / 카프리치오 /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 알렉산더 토라제 / 미코 프랑크 / 서울시향

2008년 3월 21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미코 프랑크
협연자 : 알렉산더 토라제

Rautavaara, Cantus Arcticus
Stravinsky, Concerto for Piano & Wind Instruments
Stravinsky, Capriccio for Piano & Orchestra
Sibelius, Symphony No. 7 in C, Op 105



러시아 교회 종은 유럽 교회 종과는 달리 흔들어 소리 내지 않고 두드려 소리 낸다. 종지기는 온몸으로 도구를 조작하여 종 여러 개를 동시에 두드릴 수 있으며, 이때 음색도 음높이도 다른 종들이 어울려 신비로운 폴리리듬을 이룬다. 이러한 종소리와 두드림의 미학은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를 두고 역동적인 고요함(calme dynamique)이라 했고,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은 진동하는 고요함(schwingende Ruhe)이라 고쳐 말했다.

이는 박절과 마디 구분을 무시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리듬, 어택(attack)을 강조한 음형과 느닷없는 악센트, 이 악기 저 악기 두서없이 치고 나오는 듯한 관현악법 등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음악 형식과 미학이 가지는 순환적, 대칭적 속성, 다시 말해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 자주 나타나는 아치(arch) 형식이나 발전과 진화보다는 순환과 갱생을 추구했던 미학관 또한 '진동하는 고요함'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리듬과 음형과 관현악법 등이 종소리를 닮았다면, 형식과 미학은 종이 흔들리는 모양을 닮았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카프리치오>를 협연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토라제는 러시아 사람답게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숨어있는 '종소리'를 본능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건반을 쿵쿵 신나게 두드려대며 음악의 '진동'을 제대로 이끌어냈으며, 때때로 그것이 지나쳐 선율 윤곽을 망가트려 옥에 티가 되기도 했다. 페달을 밟을 때도 만만치 않게 힘차서 온몸으로 소리 내는 종지기 이미지가 스머프 같은 외모와 겹쳐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때로는 몹시 여린 소리로 '고요함'을 '진동' 못지않게 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러시아 종'을 치는데 그다지 익숙지 못한 듯했다. 리듬이 깔끔하지 못할 때가 잦았고, 악센트는 충분히 살리지 못했으며, 어택(attack)을 살려야 할 곳에서 부드럽게 연주할 때가 잦았다. 국내 악단이 으레 그렇듯 금관이 취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지휘자가 잘만 이끌었다면 이날 연주보다는 훨씬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코 프랑크는 뛰어난 지휘자이지만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모자랐던 것인지 스트라빈스키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핀란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였다. 라우타바라의 <북극의 노래>는 무엇보다 핀란드 늪지대에서 채록했다는 새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것이 재미있다. 관악기가 흉내 내는 새 소리, 지저분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서 더 정겨울 것 같은 진짜 새 소리, 그리고 다큐멘터리 배경음악처럼 차분히 깔리는 음악이 서로 다른 시간과 역할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을 연상시킨다. 관악기 여러 대가 어지럽게 얽히며 새 소리를 흉내 내는 곳에서 지휘자가 비팅을 하지 않고 악기마다 일일이 예비박을 주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휘자가 솜씨를 가장 잘 뽐낸 것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에서였다. 몇몇 거장 지휘자들이 브람스 풍으로 묵직한 해석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미코 프랑크는 북유럽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질 듯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군데군데 템포가 너무 빠른 듯싶어서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젊은 지휘자의 패기로 좋게 볼 수도 있겠다 싶었으며, 오히려 이것으로 지휘자가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브람스'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듯싶기도 했다.

이 곡은 1924년에 작곡, 초연되었다. 이미 1908년에 쇤베르크가 현악 사중주 2번을 내놓으면서 무조음악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음을 생각해보면, 화성과 조성의 해체라는 새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기능 화성 작법을 고집한 시벨리우스는 브람스의 망령에 사로잡힌 퇴행적 작곡가라 비난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독일 중심 음악사에서 뽑아낸 틀을 유럽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나라 작곡가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것이 옳은가. 시벨리우스에게 브람스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독일 음악 논리로 따지는 조성과 화성으로 된 '뼈대'가 아니라 그 겉을 둘러싼 피와 살, 그 주변의 서늘하면서도 싱그러운 공기와 그 공기를 타고 너울너울 날아오르는 눈송이야말로 시벨리우스 음악의 참모습이 아닐까. 지휘자 미코 프랑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날 서울시향이 가장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던 곳은 빠르기말이 프레스토(매우 빠르게)로 바뀌는 마디 449부터였다. 현악기가 빠른 반복 하행 음형으로 거대한 크레셴도(점점 크게)를 만들며 열다섯 마디를 더 지나면서는 랄렌탄도(점점 느리게)가 더해져 마법 같은 고양감을 이끌어내다가 마침내 빠르기말이 아다지오로 바뀌면서 나오는 그윽하고 애틋한 트롬본 선율은 이 작품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긴 호흡으로 커다란 고양감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연주는 흔치 않다. 크레셴도의 폭이 너무 좁거나, 랄렌탄도 지시를 만나고도 별로 느려지지 않거나,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답지 않고 너무 느리거나 하는 연주가 많다. 오케스트라 연주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다.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동시에 잘 살리고도 앙상블이 흐트러져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노리티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서울시향은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꽤 잘 살렸다. 지휘자는 마디 449에서 과감하게 템포를 빠르게 잡고도 그 속도에 무너지지 않도록 영리하게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현의 크레셴도 폭이 좀 작았지만 그 대신 호른의 단음계 가락을 앞세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동시에 현의 앙상블이 흐트러지지 않게 가려준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트롬본 연주도 썩 좋았다. 아쉬운 데가 없지는 않았지만 서울시향이 이보다 잘하기는 어렵지 싶었다.

미코 프랑크가 서울시향을 지휘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에는 미처 몰랐는데, 가만 보니 젊은 지휘자와 젊은 악단이 닮았다. 서로 좌충우돌하면서 거장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많이 배웠기를 바란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2007.03.22, 25.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 리게티 추모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1
2007년 3월 22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Pascal Rophé
협연자 : 강혜선(바이올린)

Unsuk Chin: Allegro ma non troppo for percussion and tape (13')
György Ligeti: Atmosphères (9')
Conlon Nancarrow (1912-1997) Tango
Claude Debussy (1862-1918) Le matin d’un jour de fête [The morning of the festival day] (from: Ibéria; 1905-1908)
Igor Stravinsky (1882-1971) Quatre Etudes
György Ligeti (1923-2006) Violin Concerto
 
진은숙의 Ars Nova 2
2007년 3월 25일(일) 오후 6시
세종 체임버 홀
    
지휘자 : Pascal Rophé
 
Conlon Nancarrow : Toccata for xylophone, marimba, piano and violin (1935)
György Ligeti: Chamber Concerto (19'15")
Hans Abrahamsen: Märchenbilder (Fairy Tale Pictures) (14')
Chris Paul Harman: Theme and Variations for eight musicians (18')
György Ligeti: Poème symphonique for 100 metronomes (20')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는 20세기 후반 서양음악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가 작년에 타계했으니 추모의 물결이 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실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가 되지 않았다면 이번 추모 음악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한국 음악계의 역량이 아직 현대음악 작곡가를 추모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는 한국 음악계에 복이다.

'현대음악'이라는 말은 대중에게 '이해불가'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에서 사용하는 장치는 일종의 당의정(糖衣錠)이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 대중에게 비교적 익숙한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뿌리를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첫 곡으로 연주된 진은숙의 타악기 주자와 테이프를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Allegro ma non troppo>는 한발 더 나아가 대중이 가진 고정관념의 근본을 뒤흔들어줄 한 수로 적절했다. 이 작품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으로 분류되는데, 그 원류는 1948년 셰퍼(Pierre Schaeffer)에서 찾을 수 있지만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913년 루솔로(Luigi Russolo)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생각이고 대중음악에서도 종종 '새로운 시도'로 소개되어온 아이디어이지만, 현대음악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은 여전히 새롭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 소리 등을 가리켜 '자연의 음악'이라 말하곤 한다. 작곡가는 이런 소리를 입맛에 맞게 모아놓고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이 작곡가의 의도대로 조직되었다면 피아노 등의 '보통' 악기를 사용한 음악과 다를 것도 없다. 음악 별거 있나.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는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으로 고전-낭만주의 시대 교향곡 등에서 즐겨 쓰이던 나타냄 말이다. 진은숙은 왜 이 작품에 이런 엉뚱한 제목을 붙였을까? 각종 타악기와 소음이 어우러진 이 작품도 알고 보면 '보통' 교향곡과 다를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종이를 바스락거리는 등의 퍼포먼스에 의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이것을 그대로 소나타 형식에 대입시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발전부'에 해당하는 가운데 부분에서는 특히 동굴에 들어온 듯한 음향과 그에 어울리는 탐탐(tam-tam) 소리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각종 타악기가 한꺼번에 '쾅' 하고 바로 이어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특히 짜릿했다.

리게티의 <아트모스페르 Atmosphères>는 '대기(大氣)'와 '분위기'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사용한 '미크로폴리포니(micropolyphony)'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클러스터 기법은 12 음 음악이 청자에게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기초하면서 선율, 화성, 리듬의 구조를 모두 해체하여 순수한 음향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법으로 '소음의 해방'과 비슷한 시기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아트모스페르>를 이루는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미립자(微粒子)처럼 존재하며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각각이 덩어리, 즉 클러스터가 되어 '얼어붙은 시간'(리게티의 용어) 속에서 정지한 듯 흘러간다. 지휘자 파르칼 로페(Pascal Rophé)는 '나무'와 '숲' 가운데 나무를 살리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듯했으며, 미시적인 움직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음색을 전율할 만큼 섬세하게 살려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미세한 소리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으며, 뒷자리에 앉은 수많은 청중에게는 단지 흐리멍덩하게 뭉쳐진 지루한 음향의 연속일 따름이었을 것이다.

낸캐로우(Conlon Nancarrow)의 작품은 복잡하고 비주기적인 박절과 리듬 구조를 사용하는 이른바 '폴리리듬(polyrhythm)'과 '폴리템포(polytempo)'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미크로폴리포니' 이후에 리게티가 추구하던 '다차원적 폴리포니'(이희경)와도 통하며, 리게티는 낸캐로우의 양식이 "베베른과 아이브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했다. <탱고?>는 낸캐로우가 리게티에 의해 유명해진 이후인 1983년 작품인데, 그의 다른 작품보다 텍스처가 상당히 엷으면서도 폴리리듬적 특징이 살아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곡은 원래 자동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이날 연주된 것은 Yvar Mikhashoff의 앙상블 편곡 작품이었는데, 작품 제목의 물음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얼핏 들으면 탱고라기보다는 래그타임(ragtime)처럼 들렸으며, 폴리리듬적 반주 음형 속에 탱고 음악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가 리게티의 선배 작곡가로서 가지는 공통점은 계몽주의 사상과 기능화성 작법에 기초한 음악 구성의 목표지향적인 발전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생장하지만 발전하지 않는 유동적인 짜임새(드뷔시)와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스트라빈스키; C. Kaden의 표현)은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 per aspera ad astra"라는 경구로 대변되는 베토벤적 가치관에 반대되는 특징이다. 이 부동의 가치는 20세기 초 쇤베르크 등에 의해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C. Kaden)을 맞았는데, 그 때문에 특히 스트라빈스키가 사회 각계로부터 받은 비난은 격렬했다.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아도르노), "진실성 없는 음악"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는 피리를 불기 쉽다"(E. 블로흐), "근심이 없는 작곡가"(A. 베르크) 등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 작곡가이자 영원한 타자(他者)였던 리게티에게는 오히려 이런 점이 창조적 자극이 되었으니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는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가.

음악학자 이희경에 따르면 리게티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특히 관현악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파스칼 로페는 이날 연주에서 <아트모스페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음색을 생생하게 살려내어 작년 10월에 뤼디거 본이 들려준 모더니즘의 무기질적 특징과는 또 다른 현대성을 보여주었다. 드뷔시의 "축젯날 아침 Le matin d'un jour de fête"은 악보의 지시(♩= 112)보다 훨씬 느린 템포(대략♩= 85)를 사용하여 마디 11 이후의 아첼레란도 등의 템포 변화의 폭을 크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가끔 앙상블이 어긋나곤 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

리게티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89년에서 1993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낸캐로우의 음악과 중앙아프리카 음악, 14세기 말의 다성음악(Ars subtilior) 등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다차원적 폴리포니'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여전히 클러스터 기법을 응용하면서도 <아트모스페르>에서 나타난 미크로폴리포니와는 달리 선율과 리듬의 윤곽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상이한 리듬층을 상상의 음향 공간 속에 다양하게 배치"(이희경)한 결과 "리듬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폴리포니"(신인선)가 되었다. 현란한 기교를 보여준 강혜선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다채로운 음색을 연주회장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쉬웠다. 특히 1악장에서 피아니시모 또는 그보다 여린 소리를 낼 때에는 앞자리에 앉았는데도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심심한 연주로 둔갑해버렸다. 2악장 이후부터는 조금 나아졌으며, 특히 호케투스(Hoquetus) 부분에서 셋잇단음 리듬으로 텍스처를 치고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마디 84 이후)가 짜릿했다. 카덴차는 이 곡의 초연자인 가브릴로프(Saschko Gawriloff)의 것을 사용했으며,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에서 연주된 리게티의 <실내 협주곡>은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그의 작품세계에서 60년대의 미크로폴리포니가 80년대 이후의 다차원적 폴리포니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인 설명들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 아니, 음악에 대한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낯설지만 신비로운 소리 그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런 것은 애초에 몰랐어도 좋다. 리게티의 음악은 엄격한 구성과는 별개로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는 음악이며, 이론적 설명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편하게 들어도 귀가 즐거웠으며, 특히 모든 악기가 스타카토 및 피치카토 음형으로 타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3악장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5악장에서는 화학반응으로 미립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듯 촘촘하고도 빠르게, 또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음형이 오묘했다. 2악장에서 목관악기의 절규하는 듯한 마르카토 음형(마디 40)은 악기별 어택(attack)이 잘 맞아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낸캐로우의 <토카타>는 1935년 작품으로 낸캐로우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인 빠르고 기계적인 리듬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한 박제희는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특유의 점잖은 '양반 보잉'은 <토카타>처럼 신나고 어떤 면에서는 경박한(?) 곡에는 단점이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음량이 너무 작았으며, 그에 비하면 마림바와 실로폰 소리는 너무 컸다.

아브라함센(Hans Abrahamsen)의 <동화 그림 Märchenbilder>은 슈만의 <동화 그림>에서 소재를 빌렸다는데, 슈만의 작품이 19세기 동화를 그린 회화 같다면 아브라함센의 작품은 차라리 3D 컴퓨터 그래픽이 난무하는 SF 또는 판타지 영화처럼 느껴졌다. 또한, 다차원적이면서도 그물망같이 연결된 성부 진행에서는 리게티의 영향을 찾을 수 있었다.

하만(Chris Paul Harman)의 <행렬 풍자극 Procession Burlesque>은 4종 대위법(fourth species counterpoint)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음의 배음(harmonics)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음향과 그것을 오케스트라가 흉내 내는 것이 신선했는데, 이것은 마치 악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배음끼리의 클러스터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는 여러 층위를 이루면서 폴리포니 아닌 폴리포니를 이루는 것이 리게티와 닮았으면서도 또 달랐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묘하게 선동적인 리듬과 다이내믹 또한 흥미진진했다.

리게티의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는 '해프닝'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주 그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폴리리듬과 폴리템포에 대한 리게티의 화두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이날 벌어진 고유한 사건들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까지 작동을 멈추지 않고 남아있던 두어 개의 메트로놈이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진은숙이 그 끈질긴 녀석들을 손으로 멈춘 다음 태엽을 4번 감아야 할 것을 한 번 더 감았던 모양이라며 사과의 말씀을 전했다. '연주자'들은 예닐곱 명의 어린이들이었으며, 아마도 역사상 최연소 리게티 연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새로움에 대한 화두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리게티에게는 이것이 다양한 문화 양태가 "접속과 횡단"(이희경)을 통해 전혀 새로운 속성을 획득하는 식으로 구현되었다. 그는 평생 어느 한 곳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항상 외부를 향해 열려있었으며, 이방인의 시선을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조명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것이 단순한 '혼혈'과는 다른 까닭은 "손에 잡히는 듯한 섬세한 음향 감각과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아주 명료하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형식 감각"(이희경)을 바탕으로 철저한 자기비판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장은 죽어서 숙제를 남겼다. 이제 음악은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가?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2007.02.07.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터니지 트럼펫 협주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 산토라 / 하르덴베리에르 / 서울시향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
2007년 2월 7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Stravinsky: Divertimento from Fairy's Kiss (22')
Turnage: Trumpet Concerto (15')
Tchaikovsky: Symphony No. 6 in b minor, Op.74 'Pathetique' (46')

Misha Santora (cond.)
Håkan Hardenberger (tp)



올해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 레퍼토리는 놀랍다. 현대음악이 고전-낭만 시대 작품과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미 '고전'으로 자리 잡은 20세기 작품뿐 아니라 아직 개인이 악보를 구할 수 없는 최신작도 꽤 있으며, 서울시향이 국내 작곡가에게 위촉한 작품도 연주될 모양이니 더욱 놀랍다. 그동안 현대곡이 자주 연주되지 않은 것은 대중에게 외면받아온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검증된 작품만을 연주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을 점차 박제로 만드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외국 유수 악단의 공연에서는 현대음악이 심심치 않게 연주되며, 독일에서는 신작이 발표되는 연주회 티켓이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빨리 매진된다니 그에 비하면 우리 음악계는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 그런데 이제 서울시향이 (적어도 연주회 프로그램으로는) 외국 유수 악단과 발맞추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가 되고서 약 일 년만의 일이다.

2월 7일 있었던 정기연주회에서도 마찬가지로 19세기 작품(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과 20세기 작품(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그리고 21세기 작품(터니지 트럼펫 협주곡)이 함께 연주되었다. 터니지(Mark-Anthony Turnage)의 트럼펫 협주곡 "난파의 잔해로부터 From the Wreckage"는 재작년에 세계 초연된 작품으로 이날 협연을 맡은 호칸 하르덴베리에르(Håkan Hardenberger)를 위해 작곡되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듯했고, 플뤼겔혼(flügelhorn), C조 트럼펫, 피콜로 트럼펫이 각 부분의 독주에 사용되었다. 이 곡은 원래 작곡가의 어두운 시절에 대한 회상이며 '난파선'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첫째와 셋째 부분의 음울한 블루스 리듬은 묘하게 바다의 심상을 떠올리게 했다. 흐린 날 저녁 바다에 낡은 배 한 척이 파도에 흔들리고, 붉게 물든 하늘에 갈매기 한 마리가 외로이 날아가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이렇게 보면 사나운 둘째 부분은 바다에 몰아치는 폭풍우 같고, 타악기와 금관의 뒤뚱거리는 부점 리듬은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 같기도 하다.

이날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는 하르덴베리에르가 반주 없이 들려준 두 곡의 앙코르였다. 첫 곡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 작곡의 저 유명한 재즈곡 "My Funny Valentine"이었고, 두 번째 곡은 원래 스웨덴 민요라고 하나 정확한 곡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두 곡 모두 쳇 베이커(Chet Baker)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를 닮은 재즈 양식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터니지의 트럼펫 협주곡과 통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터니지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르덴베리에르가 여기서 사용한 약음기는 스템(stem)을 제거한 하몬 뮤트(harmon mute)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마일스 데이비스가 즐겨 쓰던 종류의 약음기다. 약음기를 사용한 곡을 연주한 것은 사실 이날 하르덴베리에르의 윗입술 쪽에 상처가 있어서라고도 하는데, 그럼에도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준 것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극도로 여리면서도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귀에 감기는 소리, 꿈결처럼 잔잔한 비브라토, 홀린 듯한 관객들…. 유치하게도 나는 은은한 조명 아래서 와인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휴식 시간에 지인이 말했다. 이 분위기에서 '비창 교향곡'이 웬 말이냐!

서울시향의 앙상블은 뜻밖에 실망스러웠다. 터니지 트럼펫 협주곡이야 생소한 작품이니 일단 좋은 연주였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은 서울시향의 평소 실력을 고려할 때 아쉬움이 많았고,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는 기껏해야 평균적인 국내 악단 수준이었다. 어쩌면 미샤 산토라(Misha Santora)의 지휘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휘하는 품이 영 수상한 것이 연주자들과 사인이 맞지 않아 박자가 곧잘 어긋나기도 했다. 또 어쩌면 실력은 뛰어나지만 아직 젊어서 경험이 부족한 지휘자가 외국 유수 악단보다 많이 부족한 서울시향을 이끄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아니. 상당수 단원이 지휘자에게 눈길도 잘 주지 않고 악보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악보에 뻔히 있는 악센트나 헤어핀(hairpin; <>) 등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밋밋하게 연주할 때가 많았다. 무시해도 좋을 '사소한' 실수들은 쌓이고 쌓여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혹시 그동안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이른바 '찾아가는 음악회'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기연주회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곤란하다.

한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신의 연주를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 듯하다. 서울시향도 예외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연주가 관객을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그런데 단원들과 동떨어져 홀로 연주를 즐기는 듯한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다. 객원으로 보이는 첼로 수석이다. 듣자 하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 루이지 피오바노인 모양인데, 이탈리아인 기질인지 과장된 몸짓과 앙상블을 무시하는 제멋대로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첼로 파트를 혼자 맡은 것처럼 튀는 음량 등이 마냥 듣기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향은 그의 연주를 배워야 한다. 악장을 가볍게 압도하고 때로는 지휘자마저 이끌어 가던 카리스마, 그러면서도 악보 못지않게 지휘자를 열심히 올려다보면서 지휘자의 지시를 실시간으로 연주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던 성실함은 악장을 비롯한 각 파트 수석들이 본받아야 한다.

전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시향의 트롬본 주자들은 부점 리듬에 취약한 것 같다. 이날 연주에서도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 디베르티멘토 2악장 마디 9에서 제3 트롬본이 부점 리듬을 처리하느라 갑자기 템포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말았다. 몇 마디 뒤에 같은 음형을 연주하는 제1 트롬본의 템포 또한 살짝 느려졌으며 부점 리듬도 썩 깔끔하지는 않았다. 트롬본이라는 악기 특성상 재빠른 음형을 연주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세계적인 수준을 지향하는 악단이라면 그 정도의 어려움은 일찌감치 극복해야 한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2006.10.13. 진은숙의 Ars Nova Ⅱ - 뤼디거 본 / 서울시향

LG 생활건강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Ⅱ
2006년 10월 13일 8:00 PM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J.S. 바흐 / A. 베베른, 6성부 리체르카레(<음악의 헌정> 중)
A. 베베른,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모음곡 작품
N. 그리니 / G. 벤자민, 3도 독주(17세기 오르간 곡)
브레트 딘, <카를로>
M. 라벨, <쿠프랭의 무덤>
작자 미상 / 진은숙,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14세기 사이프러스 섬의 사랑노래 중)
G. 벤자민,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겨울의 마음>
A. 비발디,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오페라 <그리셀다> 중)
I.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 모음곡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소프라노 서예리



아르스 노바(Ars Nova)는 원래 14세기 다성음악을 일컫는 음악용어로, 13세기 다성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라 하여 이와 대비시킨 말이다. 그러나 이날 연주회 제목은 진은숙의 편곡 작품을 제외하고는 아르스 노바 양식과 별 관련이 없고, 다만 '새로운 예술'이라는 말뜻을 빌렸을 뿐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기존 작품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신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익명성이 장려되던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데올로기다. Avant garde, Neue Musik, Música Nova 등이 이를 반영하는데, 모두 아르스 노바와 관련이 없는 20세기 음악 용어들이지만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르스 노바와 통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진은숙은 고음악 양식을 뜻하는 용어를 20세기 작품 위주의 연주회 프로그램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연주회의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노린 듯하다. 즉,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전통과의 연결고리는 유지하려는 현대음악의 이상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라는 제목으로 표현된 것이다. 연주회의 부제로 사용된 "EarlyNew"라는 조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바흐와 그 이전 시대 작품이 현대 작품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것이다. 비슷한 구성의 연주회를 라디오로 들어본 적도 있는데, 2001년 브레멘 음악 축제에서는 리게티(György Ligeti)와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작품 사이에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이번 연주회는 바흐뿐 아니라 비발디, 그리니, 심지어 아르스 노바 시대의 작품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유명 작곡가와의 연계성만이 아닌 시대가 낳은 전통 자체와의 연결고리를 부각시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대음악과 시대적으로 인접한 낭만주의 및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과의 연계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0월 17일에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베토벤과의 양식적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홍성지의 작품뿐이며 나머지는 패러디나 콜라주 등의 기법을 위한 소재로만 베토벤을 다루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이 바로크 시대 이전 양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는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와 단절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학 논문이 아닌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보여주기는 곤란해 보이며, 따라서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 프로그램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의 3요소'로 선율, 리듬, 화성을 꼽는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음악에서는 여기에 음색을 더해서 '4요소'라고 한다. 그만큼 현대음악에 음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대 편성보다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과 같은 소편성이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연주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처럼 울림이 많은 곳은 현대음악의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에는 재앙과도 같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귀로 전달된 느낌이 지휘자의 해석 때문인지 연주회장의 음향 탓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고, 이 때문에 시향의 연주에 대한 내 느낌은 그에 따른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바흐의 6성부 리체르카레가 너무 밋밋하게 들렸던 것, 베베른의 작품 10에서 베베른다운 음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특히 3곡에서 특유의 리듬이 흐리멍덩하게 뭉쳐져 들렸던 것,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 피날레 연습기호 104와 114에 나타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롤러코스터 같은 상승 음형과 크레셴도가 영 제맛이 안 났던 것 등은 모두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라고 판단된다. 이날 연주회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대신에 LG 아트센터에서 열렸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던 체임버홀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베베른(Anton Webern)이 편곡한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6성부 리체르카레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이번 연주회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체르카레(ricercare; ricercar, ricercata, etc.)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있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주제로 된 푸가(fugue)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쉽게 말해 이 작품은 바흐 음악 양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베른의 편곡에서는 베베른 특유의 음색이 녹아들어 있어서 모르고 들으면 베베른이 쓴 조성음악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베베른의 그림자는 옅게 하고 바흐의 느낌을 더 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앞서 말한 연주회장 문제도 있겠지만, 나중에 지휘자로부터 직접 들은 바로는 일부러 그렇게 해석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나는 베베른보다 바흐의 특색을 더 살리는 것만이 연주회 성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정반대의 해석을 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 때문에 소리가 듣기 싫게 뭉쳐서 오히려 난장판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안톤 베베른은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베르크(Alban Berg)와 함께 이른바 '제 2 빈 악파 (Second Viennese School)'의 일원으로('원조' 빈 악파는 물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무조(無調; atonal)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본격적인 20세기 음악의 분수령이었으며, 현대음악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대중의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놓은 장본인이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이루는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하게 다룬다는 이른바 '12음 기법'은 이후 현대음악의 절대적인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20세기 후반 이후 12음 기법이 작곡가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남아 있다. 한편, 인간이 12음 음악을 지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지각심리학과 정보이론 등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해 12음 음악을 구조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나 타고난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베베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몹시 당황했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이번 연주회를 앞두고 베베른의 작품 10의 악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만큼 열심히 연주회 감상 준비를 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은 이 작품의 역사적인 한국 초연이 듣기 괴롭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요술의 전당'의 안타까운 음향 환경과 유난히 심했던 관객의 소음을 힘겹게 뚫고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탓에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베베른 특유의 다양한 색채는 결국 내 귀에 이르기도 전에 흐릿하게 뭉쳐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소실된 소리를 상상해가며 들어본 결과 연주 자체는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나는 음반으로는 느낄 수 없던 신비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면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이런 식의 3차원적 공간감은 정상적인 가정용 2채널 오디오로는 재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나중에 고가의 오디오를 감상할 기회가 생기면 이 작품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이 편곡한 그리니(Nicolas de Grigny)의 오르간 곡은 악기 편성이 특이했다. 트롬본 등의 저음 악기와 고음 목관악기를 사용하면서 중간 성부를 담당할 만한 악기를 쏙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실제 오르간 소리와 매우 비슷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나오는 하바쿡 트라버(이희경 옮김)의 설명을 보자. "옛 오르간 제작자들은 이미 한 음의 음색이 근음과 특정한 배음 스펙트럼에서 나온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오르간 제작에 적용했다. 그래서 단지 배음만을 포함하는 레지스터를 제작하여, 그것이 기본 레지스터와 함께 연주될 때 독특한 음색을 낳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레지스터의 하나가 '티어스(tierce)', 제 5부분음인 '3도'다. 조지 벤자민의 편곡은 바로 이러한 오르간 음향구성을 토대로 한다. 우선 트롬본이 주 성부를 연주하고, 고음 목관들이 제2부분음에서 제9부분음에 이르는 배음스펙트럼을 연주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오보에가 4옥타브의 '라'를 불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소리의 주파수는 약 440헤르츠다. 그러나 실제 오보에 소리는 440헤르츠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두 배(즉, 880헤르츠), 네 배, 여덟 배 등에 해당하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은 피아노로 '도'를 눌렀을 때 '솔'이나 '미'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듣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음고에 해당하는 440헤르츠 성분을 '근음(fundamental)'이라 하고 그 배수열을 이루는 성분들을 '배음(harmonics; 인용된 설명에서는 '부분음')'이라 한다. 같은 음고로 소리를 냈을 때 악기마다 음색이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배음의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지 벤자민은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고음 목관악기가 트롬본의 배음을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오르간 음향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로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를 즐겼던 19세기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이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음악 이론가 카츠(Jonathan Howard Katz)는 "당신이 음악 이론 광(狂; geek)임을 나타내는 75가지 징후"라는 우스개 글에서 다음을 그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과제물 등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대해) '하지만 제수알도는 이렇게 했었단 말이에요!' 하고 자신을 변호한 적이 있다." 음대생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16세기 및 18세기 화성법과 대위법에서 금기로 여기는 선율 및 화성 진행을 16세기 작곡가인 제수알도(Carlo Gesualdo)는 곧잘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가능한데, 당시로써는 이것이 대단한 파격이었겠으나 요즘 시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통적 조성체계의 해체를 경험한 뒤로는 대중음악에도 특이한 불협화음이 곧잘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브레트 딘(Brett Dean)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나를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 두오 Moro, lasso al mio duolore>의 녹음을 샘플링하고 20세기 음악 어법으로 관현악을 더해 새로운 작품 <카를로>를 썼다. 그 결과는 제수알도가 살인을 저지르던 날을 소재로 하는 공포영화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 The Shining>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큐브릭은 이 영화에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의 음악을 사용했지만, 만약 그가 <카를로>를 알았다면 틀림없이 영화의 주요 장면, 특히 긴장감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후반부에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를로>는 이 영화가 나온 지 17년 뒤인 1997년에 발표되었다. 가만, 혹시 브레트 딘은 차라리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고 제수알도는 단지 소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벨(Maurice Ravel)의 <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 쿠프랭(François Couperin, II)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원래는 여섯 악장으로 된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은 이중 네 곡을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해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 "tombeau"는 '무덤'을 뜻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추모하는 예술작품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라벨은 원곡을 구성하는 6곡을 자신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제로 사용했으므로 추모의 뜻을 이중으로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모음곡 형식과 장식음 등이 바로크 시대의 것을 빌어온 것이고, 선율과 화성 등은 라벨 고유의 것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쓰였지만, 20세기 음악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므로 낭만주의 시대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지휘자 뤼디거 본(Rüdiger Bohn)이 현대음악 전문가인 만큼 현대음악적 특징을 강조하는 해석을 보였다. 즉, 주선율 뒤에 숨어있는 선율들을 전면으로 부각시켜 색다른(또는, 무기질적인) 소리의 질감을 이끌어내곤 했다. 템포는 다소 빠른 편이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자칫 어수선하게 들리기 쉬우며, 특히 예술의 전당의 음향 환경에서는 그러한 위험도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날 연주는 지휘자가 의도한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진은숙이 편곡한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Je sui trestout d'amour raimpli"는 14세기 키프로스 지역의 노래다. 키프로스는 터키 남쪽에 있는 나라로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종교 및 정치적 알력에 따라 네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 14세기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프랑스의 다성음악, 즉 아르스 노바 양식이 이곳에도 전해졌으며,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는 그 가운데 비를레(Virelai)라는 형식에 속한다. 곡을 이루는 세 개의 성부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탓에 매우 복잡한 곡이지만, 성악과 반주의 관계 때문에 사실은 편하게 들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진은숙의 편곡은 1999년 작품인 <시간의 거울 Miroirs des Temps> 중 다섯 번째 곡으로 쓰였는데, 베베른이나 딘의 편곡 작품과는 달리 편곡자의 색채가 옅은 것이 특이했다. 프로그램에 있는 트라버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옛 것을 우리 시대로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고유한 본질은 그대로 남겨둔 채" 현대 악기로 키프로스의 특색을 살렸다.
 
진은숙의 편곡보다 더욱 눈에 띈 것은 소프라노 서예리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녀는 비브라토를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정확한 음정과 투명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유지하여 고음악에 매우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벤자민의 <겨울의 마음>에서는 폭이 좁고 빠른 비브라토를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하게 구사했으며,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에서는 발성구의 탄력을 이용하여 여러 음을 빠르게 오르내리는 이른바 아질리타(agilita) 창법을 그야말로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정교하게 소화했다. 성량이 그리 큰 편은 아니라는 것이 옥에 티라 하겠으나, 이 역시 고음악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한국에 이런 가수가 있었나 했더니 웬걸, 진은숙이 독일에서 발굴했단다. 프로필을 보니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데, 이 정도면 고음악 마니아들은 이미 서예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도 같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의 <겨울의 마음 Mind of Winter>은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시 <눈 사람 The Snow Man>에서 제목과 가사를 따온 작품이다. '눈사람(The Snowman)'이 아니라 '눈 사람(The Snow Man)'인 까닭은 겨울 풍경의 클리셰(Cliché)로서의 눈사람이 아니라 "겨울 마음"을 가지고 눈 덮인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눈과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겨울의 공허(空虛) 그 자체가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육사가 인식한 겨울의 모습이 "강철로 된 무지개"와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 등이었다면, 스티븐스가 그린 겨울의 모습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황량한 대지와 그 속의 공허(空虛)함이다.
 

The Snow Man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 Wallace Stevens (1879~1955)

눈 사람
 
우리는 겨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눈 속에 단단해진 소나무의
서리와 가지를 헤아리기 위하여.
 
그리고 오랫동안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얼음에 엉겨붙은 로뎀나무와
저 멀리 빛나는 1월의 태양 아래
 
거칠어진 전나무를 응시하기 위하여.
얼마 남지 않은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괴로워하지 않기 위하여.
 
귀 기울이는 이에게 그것은
변함없는 바람으로 가득한
변함없이 황량한 땅의 소리
 
눈 속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자신 무(無)가 되어
그곳에 없는 무(無)와 그곳에 있는 무(無)를 응시하는 이를 위한.
 
- 월리스 스티븐스 (김원철 옮김)


그런가 하면 조지 벤자민이 그린 겨울의 모습은 날카로운 고음의 불협화음과 음산한 글리산도, 심벌즈의 차가운 울림 등으로 가득한 음악이었으며, 차라리 "강철로 된 무지개"의 심상과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술의 전당'에서 흐릿하게 뭉쳐진 음향 때문에 뜻하지 않게 스티븐스의 겨울에 더 어울리는 부분도 많았다. 또 끝 부분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은 시의 마지막 연과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영어 가사가 한국의 정가(正歌; 가곡, 가사, 시조)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탓인지 내용을 알아듣기는 몹시 힘들었다.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는 오페라 <그리셀다 Griselda> 중에서 그리셀다의 딸 코스탄자가 부르는 아리아로, 아버지 구알티에로의 명령과 연인 로베르토와의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와 폭풍을 만나 흔들리는 배를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인 동시에 서예리의 기교를 뽐내기에 매우 적당한 곡이라 할 수 있으며, 지휘자는 역시 빠른 템포로 몰아쳐서 서예리의 눈부시게 아찔한 테크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임무 때문에 사랑 때문에 Dal dovere da l'amore" 대목에서는 템포를 충분히 늦추어 계속되는 속도감에 청중이 숨 막혀 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앞뒤 부분과의 속도감의 대비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발레 곡으로 작곡한 <풀치넬라>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성악 부분을 기악으로 고친 작품이다. <풀치넬라>는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를 비롯한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로부터 새로 발견된 페르골레지의 자필 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퍼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사진으로 복사된 인쇄 악보였다고 한다. 다만 스트라빈스키가 페르골레지 등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남의 작품을 인용하고 개작하는 것은 스트라빈스키 작품세계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독일의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Christian Kaden)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추구했던 것은 자기 변신(Selbstverwandlung)이었다. 그는 발전과 진보, "목표지향적인 발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별에 다가가는 것,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대신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을 추구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순환의 속성을 가진 "흔들리는 고요함, 역동적인 고요함, 프랑스어로 calme dynamique"이다. <결혼 Les Noces> 등의 작품에서는 이것이 종소리의 정적인 울림으로 나타나며, <풀치넬라>에서는 진동하는 형식 모델(schwingende Formmodell)로 나타난다. 조성과 악장 배치, 템포와 박자 등이 순환적/대칭적 속성을 가지며, 고전적 양식과 새로운 기악적 테크닉이 진동하는 형식 모델 속에서 갱생한다.
 
이날 연주에서는 주선율과 부선율을 차별하지 않는 뤼디거 본의 '무정부주의적' 해석이 신선한 매력을 주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정교한 대위법이 그에 의해 입체적 "진동"으로 나타났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고, 이것이 독특한 악기 간 밸런스가 주는 매력을 더욱 잘 살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빠른 템포 때문에 세부적인 프레이징에 나타난 연주자의 표정들이 다소 흐릿해진 감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7악장 "비보 Vivo"에서 콘트라베이스의 매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충분히 좋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단점이다. 한편, 2악장 세레나데에서는 오보에 주자가 템포를 다소 느긋하게 잡고 솔로 연주를 하다가 두 번째 박에서 지휘자의 비팅을 보고 재빨리 템포를 수정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가엾은 연주자는 6악장 가보트에서는 반대로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았다가 역시 둘째 박 비팅을 보고 템포를 늦추기도 했다.
 
커튼콜로 연주된 곡은 파헬벨의 <캐논과 지그>였는데,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곡이다. 조지 윈스턴의 늘어지는 템포 대신 매우 빠른 템포로 연주되었고,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해체적인 성격도 여전했다. 다시 말해 '정격적인' 템포와 '현대적인' 밸런스가 절묘하게 만한, 이날 연주회 성격에 매우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있는 작곡가로, 쇤베르크와 베베른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현대음악으로 향하는 다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음악은 당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이 베토벤보다 더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말러의 대중화 과정이 오디오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러 시대부터 점차 음색이 선율이나 화성 못지않게 음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오디오의 재생능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아직도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디오 기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 그보다 전에 연주회장에서 현대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연주회처럼 '현대음악 특집'도 필요하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와 함께 현대음악이 나란히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이 브람스나 말러를 들으러 왔다가 버르토크나 리게티, 펜데레츠키를 '우연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의 작품이 더 자주 '보통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래서 나는 진은숙이 많은 돈을 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활동만으로도 많은 수입을 올리는 작곡가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그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야구 선수 지망생들이 박찬호나 이승엽을 꿈꾸는 것처럼.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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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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