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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7일 목요일

2007.11.06.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V - 김호정 / 홍웨이 황, 진민호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4
2007년 11월 6일(화)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김호정(첼로), 홍웨이 황/진민호(비올라)

Charles Ives(1874-1954), The Unanswered Question (1906)   5'
Giacinto Scelsi (1905-1988), Anagamin for 11 Strings (1965)    7'  
George Benjamin (1891-1945), Viola, Viola for two violas (1997) 12" Korean Premiere
Pierre Boulez (*1926)   Messagesquisse pour violoncelle solo et six violoncelles, sur le nom de Paul Sacher (1976)   8'
Chris Paul Harman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for 16 strings   16' Asian Premiere
Uzong Choe (*1968) Love Song, chamber concerto for violoncello and strings(2006) 15'  (commission by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orld Premiere)



아이브스는 <대답 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을 두고 "존재에 대한 해묵은 질문"이라 했는데, 제목이나 악곡 구성이 마치 20세기 음악사를 내다보는 듯해서 번스타인은 이 곡을 "조성적 갈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도 했다. 조성이 흐릿한 트럼펫과 조성이 없는 플루트 앙상블의 '문답' 그리고 3화음을 쓰면서도 조성음악답지 않게 무심히 관조하는 듯 흘러가는 현 사이의 관계가 조성음악이 생명을 다한 20세기 서양음악이 맞이한 화두와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지휘자는 플루트 앙상블이 무대 좌우 연주자 대기실 쪽에서 번갈아 또는 동시에 연주하게 하고 객석 2층에 자리한 트럼펫이 '질문'을 할 때마다 위치를 옮기게 하는 등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여 '문답'을 더욱 뚜렷이 드러냈다. 또 트럼펫이 마지막에는 객석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마지 청중에게 이런 화두를 던지는 듯했다. 현악기로 어떻게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소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자친토 셸시(Giacinto Scelsi, 1905-1988)는 요즘 뒤늦게 인기를 얻는 사람으로 작곡 기법이나 그 바탕에 깔린 동양 사상 등이 윤이상과 거울상처럼 닮았으면서도 또한 정반대다. 셸시는 그가 살았던 로마가 동서양의 경계라고 생각했으며, 인도와 티베트 등을 여행하면서 명상을 배웠다. 이른바 '단음 음악(Single-note Music)'이라 불리는 작곡 기법은 이름처럼 음 하나로 끝나지 않고 트레몰로, 비브라토, 글리산도, 미분음(microtone) 등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그 원리는 윤이상의 중심음(Hauptton) 기법과 마찬가지로 정중동(靜中動)이다. 윤이상이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 특징을 서양 악기로 표현하려고 중심음향(Hauptklang) 기법을 고안했다면, 셸시는 음 하나가 가진 배음(harmonics)을 원래 음으로부터 끄집어내 한 음이되 한 음이 아니게 했으니 이것은 윤이상과 닮았으면서도 또 다르다. 1965년 작품인 <아나가민 Anagamin>은 불교 수행 단계를 뜻하는 성문 4과(聲聞四果), 즉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가운데 아나함이며, 사바세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래(不來)라고도 한다. 셸시가 그 속뜻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듣기로는 참된 아나함을 얻었다기보다는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벼랑 끝에서 번뇌와 싸우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 속 아나함은 <대답 없는 질문>처럼 음악 속에서 새 뜻을 찾을 수도 있겠다. 즉,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주류 작곡 기법이 싫지만 조성음악으로 돌아갈 수도 없던 셸시가 마침내 찾아낸 돌파구를 그만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여 불래(不來)를 이룬 것이다.

조지 벤자민의 <비올라, 비올라>와 불레즈의 <메사줴스키스 Messagesquisse>는 '현 긁는 맛'을 잘 살린 곡이었다. <비올라, 비올라>가 투박하지만 담백한 비올라 음색을 잘 살리는 동시에 마치 도깨비 감투를 쓴 연주자가 옆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는 듯 신기한 음향을 만들어냈다면, <메사줴스키스>는 첼로 일곱 대가 현을 박박 긁어대는 박력이 피부로 직접 느껴질 듯 짜릿했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박박 긁는 소리는 역시 첼로가 제맛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근본적인 저음 한계 탓에 박력이 모자라며, 콘트라베이스는 악기가 너무 커서 굼뜨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썩 훌륭했지만 좀 더 미친 듯이 긁어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했다.

크리스 폴 하먼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우타>와 마찬가지로 만화 같은 과장과 풍자가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었는데, '하먼식 조각내기'에 웬만큼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보통 변주곡을 듣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들었다. '조각 맞추기'를 하다가 엉뚱한 선율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여전했으며, 이를테면 오르간 음향에 얹은 바로크풍 선율은 제목을 의식한 탓인지 생일 축가를 떠올리게 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것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음 덩어리(cluster)가 <전람회의 그림>의 '프롬나드'처럼 계속 변형되며 나타나는 것도 인상 깊었다.

최우정의 첼로 협주곡 <러브 송 Love Song>은 서울시향이 위촉하여 이번이 세계초연이라 더욱 뜻깊다. 그런데 '사랑 노래'라니 첼로 협주곡이라기에는 너무 통속적이고, 대중음악에 쓰기에도 낡아빠진 제목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흔한 사랑 노래와는 달리 그다지 달콤하거나 신파조이거나 하지 않았고, 대중음악에 어울리는 선율과 리듬이 이리저리 비틀려 있어서 남의 연애담 듣듯이 편하게 들을 수만은 없는 곡이었다. 중간에 박진감 넘치는 대목은 영화 <졸업>에서처럼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신부 납치라도 하는 듯했고, 또 어찌 들으면 싫다고 구박하는데도 열심히 쫓아다니는 바보스러운 사랑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다. 마침 이 곡 악보 첫머리에는 작은 글씨로 "à mon père"라고 쓰여 있다. 프랑스어로 '아버지께'라는 뜻이다. 작품 끝머리에 불안한 음형이 되풀이되다가 매우 여린(pppp) 16분음 스타카토 세 번으로 마치 시계가 멈춘 듯 끝나버린 것이 너무나 애틋해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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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6일 수요일

2007.11.02.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II - 리처드 용재 오닐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3
2007년 11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KBS 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Richard Yongjae O'Neil (Viola)

Väinö Raitio: Moonlight on Jupiter op. 24 (12')
Brett Dean: Viola Concerto (27')
Chris Paul Harman: Uta for viola and orchestra (19'30")
Alexander Scriabin: Le poème de l'extase op.54 (22')



비올라는 참 애매한 악기다. 음색이 투박해서 독주 악기로도 주목받지 못했고, 앙상블에서도 흔히 내성부, 즉 화음의 뉘앙스에 작은 변화를 주는 역할이 고작이다. 그러나 애매함은 곧 유연함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지닌 특징을 알맞게 나누어 가졌으면서 투박하지만 담백한 음색을 낼 수 있으니 새로운 소리를 원하는 20세기 작곡가들이 좋아할 만했다. 조성이 무너진 시대라 화음에 억눌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비올라 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런 새 시대가 만든 스타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비올라 협주곡과 크리스 폴 하먼(Chris Paul Harman)의 <우타>를 협연한 그가 들려준 소리는 그야말로 천 가지 색깔을 지닌 비올라였다.

브레트 딘의 비올라 협주곡은 용재 오닐이 솜씨를 뽐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모닉스 글리산도가 어지럽게 얽히는 부분은 아찔했으며, '딴따다 딴따다 다다다다' 하는 폴카(?) 리듬 모티프에서는 묘한 중독성을 느꼈다. 또 느린 부분에서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햇빛이 부서지는 느낌과 비슷해서 작년 10월 연주회 때 소개된 조지 벤자민의 <겨울 마음> 생각도 잠시 들었다. 현악기가 잘근잘근 하는 소리를 약음기를 낀 금관이 흉내 내듯 하는 것과 타악기가 그에 맞추어 떠들썩하지만 싸늘하게 두드려대는 것 등은 역시 작년 10월에 소개된 <전원 교향곡>과 비슷했는데, 문득 브레트 딘의 관현악 어법이 비올라를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곡가가 비올라 주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하먼의 <우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일본어 'うた'에서 제목을 따왔고 일본 동요집에서 재료를 따와서 조각내고 비틀어 새로 짜맞췄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조각조각 흩어진 느낌이 마치 만화를 보는 듯했다.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조각 맞추기'를 하다 보니 원래 재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엉뚱한 선율로 튀는 느낌도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닮은 선율이 중간에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다. 남이 쓴 음악을 잘라내고 흩트려 새로 짠다는 아이디어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 짤막한 이야기를 지어내 봤는데, 어쩌면 이것이 하먼의 작품세계에 대한 가장 진지한(?) 감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오덕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하루는 장사꾼이 그를 반겨 말하기를,

여보게 덕, 당나라 악사 아루농굴이 온다네.
뭣이?
차에코풀었스키의 《쌍피 여왕》을 한다네.
오 벗이여 얼마면 돼?
마흔닷 냥이라네.

오덕이 신용카드를 내미는 순간 웬 여인이 오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외치기를,

훠이 지름귀신 물렀거라!
너, 누구냐?
이 녀석아 내가 니 애미다. 포스에 빛나는 회초리 맛 좀 보아라.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살인을 면한다 하지 않습니까.
어허 무슨 소리냐, 옛말에 개처럼 날아서 정승처럼 쏜다 했다.
히익! 수위일로께서는 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 하셨습니다. 덥석! 일단 고정하시고...
호호호 유료 허그란다. 일 초에 열 냥.

오덕이 놀라 만세신공을 시전하니 만근거력이 담긴 회초리가 날아들더라.
삑!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로그아웃합니다.

오덕은 '듣보르잡의 환장 교향곡은 조첨이 본좌'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었다.

써놓고 보니 지난 3월에 소개된 <행렬 풍자극>에 더 잘 어울릴 듯싶다. <우타>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작품은 아니었고 오히려 마지막에 착 가라앉은 일본풍 비올라 선율은 용재 오닐이 연주한 '섬집 아기'를 생각나게 했다.

베이뇌 라이티오(Väinö Eerikki Raitio, 1891-1945)는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작곡가인데, <목성의 달빛 Kuutamo Jupiterissa>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1922년 작품이라는데 도무지 20세기 초 작품 같지 않아 뭔가 속는 기분이었다. 무조음악이 아니면서도 조성음악 관습과는 꽤 동떨어진 소리가 어찌 들으면 20세기 후반 작품처럼 들리기도 했으며, 음악이 꽤 흐른 뒤에야 시대에 어울리는 감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홀스트가 작곡한 <행성> 중 '목성'이 무척 고루하게 느껴지다니 시대를 너무 앞서간 가엾은 작곡가가 아닌가.

지휘자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François-Xavier Roth)는 다양한 음색으로 현대음악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모더니즘의 무표정함에 빠지지 않고 낭만주의의 '드라마'를 살려내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스크랴빈의 <법열의 시 Le Poeme de l'extase>에서 특히 그랬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그 특징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Allegro volando(빠르게 날듯이; 마디 39) 부분으로, 느린 앞부분과 템포 차이를 크게 벌리면 작품의 표제적 성격을 살리기에 좋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옅어질 위험이 있기도 하다. 지휘자는 느리기에 더욱 신비로운 앞부분을 아주 살짝 희생시켜 '알레그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템포 차이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자연스럽게 했다. 마디 95 이후 트럼펫에 맞서는 저음 현의 무게중심도 탄탄했고 햇빛이 구름을 뚫듯 강렬히 흩어지는 고음 현도 멋졌다. 금가루 날리는 트럼펫 소리와 끝에 금관이 밀어붙이는 '뒷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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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2007.03.22, 25.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 리게티 추모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1
2007년 3월 22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Pascal Rophé
협연자 : 강혜선(바이올린)

Unsuk Chin: Allegro ma non troppo for percussion and tape (13')
György Ligeti: Atmosphères (9')
Conlon Nancarrow (1912-1997) Tango
Claude Debussy (1862-1918) Le matin d’un jour de fête [The morning of the festival day] (from: Ibéria; 1905-1908)
Igor Stravinsky (1882-1971) Quatre Etudes
György Ligeti (1923-2006) Violin Concerto
 
진은숙의 Ars Nova 2
2007년 3월 25일(일) 오후 6시
세종 체임버 홀
    
지휘자 : Pascal Rophé
 
Conlon Nancarrow : Toccata for xylophone, marimba, piano and violin (1935)
György Ligeti: Chamber Concerto (19'15")
Hans Abrahamsen: Märchenbilder (Fairy Tale Pictures) (14')
Chris Paul Harman: Theme and Variations for eight musicians (18')
György Ligeti: Poème symphonique for 100 metronomes (20')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는 20세기 후반 서양음악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가 작년에 타계했으니 추모의 물결이 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실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가 되지 않았다면 이번 추모 음악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한국 음악계의 역량이 아직 현대음악 작곡가를 추모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는 한국 음악계에 복이다.

'현대음악'이라는 말은 대중에게 '이해불가'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에서 사용하는 장치는 일종의 당의정(糖衣錠)이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 대중에게 비교적 익숙한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뿌리를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첫 곡으로 연주된 진은숙의 타악기 주자와 테이프를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Allegro ma non troppo>는 한발 더 나아가 대중이 가진 고정관념의 근본을 뒤흔들어줄 한 수로 적절했다. 이 작품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으로 분류되는데, 그 원류는 1948년 셰퍼(Pierre Schaeffer)에서 찾을 수 있지만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913년 루솔로(Luigi Russolo)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생각이고 대중음악에서도 종종 '새로운 시도'로 소개되어온 아이디어이지만, 현대음악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은 여전히 새롭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 소리 등을 가리켜 '자연의 음악'이라 말하곤 한다. 작곡가는 이런 소리를 입맛에 맞게 모아놓고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이 작곡가의 의도대로 조직되었다면 피아노 등의 '보통' 악기를 사용한 음악과 다를 것도 없다. 음악 별거 있나.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는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으로 고전-낭만주의 시대 교향곡 등에서 즐겨 쓰이던 나타냄 말이다. 진은숙은 왜 이 작품에 이런 엉뚱한 제목을 붙였을까? 각종 타악기와 소음이 어우러진 이 작품도 알고 보면 '보통' 교향곡과 다를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종이를 바스락거리는 등의 퍼포먼스에 의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이것을 그대로 소나타 형식에 대입시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발전부'에 해당하는 가운데 부분에서는 특히 동굴에 들어온 듯한 음향과 그에 어울리는 탐탐(tam-tam) 소리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각종 타악기가 한꺼번에 '쾅' 하고 바로 이어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특히 짜릿했다.

리게티의 <아트모스페르 Atmosphères>는 '대기(大氣)'와 '분위기'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사용한 '미크로폴리포니(micropolyphony)'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클러스터 기법은 12 음 음악이 청자에게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기초하면서 선율, 화성, 리듬의 구조를 모두 해체하여 순수한 음향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법으로 '소음의 해방'과 비슷한 시기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아트모스페르>를 이루는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미립자(微粒子)처럼 존재하며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각각이 덩어리, 즉 클러스터가 되어 '얼어붙은 시간'(리게티의 용어) 속에서 정지한 듯 흘러간다. 지휘자 파르칼 로페(Pascal Rophé)는 '나무'와 '숲' 가운데 나무를 살리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듯했으며, 미시적인 움직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음색을 전율할 만큼 섬세하게 살려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미세한 소리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으며, 뒷자리에 앉은 수많은 청중에게는 단지 흐리멍덩하게 뭉쳐진 지루한 음향의 연속일 따름이었을 것이다.

낸캐로우(Conlon Nancarrow)의 작품은 복잡하고 비주기적인 박절과 리듬 구조를 사용하는 이른바 '폴리리듬(polyrhythm)'과 '폴리템포(polytempo)'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미크로폴리포니' 이후에 리게티가 추구하던 '다차원적 폴리포니'(이희경)와도 통하며, 리게티는 낸캐로우의 양식이 "베베른과 아이브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했다. <탱고?>는 낸캐로우가 리게티에 의해 유명해진 이후인 1983년 작품인데, 그의 다른 작품보다 텍스처가 상당히 엷으면서도 폴리리듬적 특징이 살아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곡은 원래 자동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이날 연주된 것은 Yvar Mikhashoff의 앙상블 편곡 작품이었는데, 작품 제목의 물음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얼핏 들으면 탱고라기보다는 래그타임(ragtime)처럼 들렸으며, 폴리리듬적 반주 음형 속에 탱고 음악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가 리게티의 선배 작곡가로서 가지는 공통점은 계몽주의 사상과 기능화성 작법에 기초한 음악 구성의 목표지향적인 발전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생장하지만 발전하지 않는 유동적인 짜임새(드뷔시)와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스트라빈스키; C. Kaden의 표현)은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 per aspera ad astra"라는 경구로 대변되는 베토벤적 가치관에 반대되는 특징이다. 이 부동의 가치는 20세기 초 쇤베르크 등에 의해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C. Kaden)을 맞았는데, 그 때문에 특히 스트라빈스키가 사회 각계로부터 받은 비난은 격렬했다.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아도르노), "진실성 없는 음악"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는 피리를 불기 쉽다"(E. 블로흐), "근심이 없는 작곡가"(A. 베르크) 등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 작곡가이자 영원한 타자(他者)였던 리게티에게는 오히려 이런 점이 창조적 자극이 되었으니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는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가.

음악학자 이희경에 따르면 리게티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특히 관현악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파스칼 로페는 이날 연주에서 <아트모스페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음색을 생생하게 살려내어 작년 10월에 뤼디거 본이 들려준 모더니즘의 무기질적 특징과는 또 다른 현대성을 보여주었다. 드뷔시의 "축젯날 아침 Le matin d'un jour de fête"은 악보의 지시(♩= 112)보다 훨씬 느린 템포(대략♩= 85)를 사용하여 마디 11 이후의 아첼레란도 등의 템포 변화의 폭을 크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가끔 앙상블이 어긋나곤 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

리게티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89년에서 1993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낸캐로우의 음악과 중앙아프리카 음악, 14세기 말의 다성음악(Ars subtilior) 등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다차원적 폴리포니'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여전히 클러스터 기법을 응용하면서도 <아트모스페르>에서 나타난 미크로폴리포니와는 달리 선율과 리듬의 윤곽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상이한 리듬층을 상상의 음향 공간 속에 다양하게 배치"(이희경)한 결과 "리듬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폴리포니"(신인선)가 되었다. 현란한 기교를 보여준 강혜선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다채로운 음색을 연주회장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쉬웠다. 특히 1악장에서 피아니시모 또는 그보다 여린 소리를 낼 때에는 앞자리에 앉았는데도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심심한 연주로 둔갑해버렸다. 2악장 이후부터는 조금 나아졌으며, 특히 호케투스(Hoquetus) 부분에서 셋잇단음 리듬으로 텍스처를 치고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마디 84 이후)가 짜릿했다. 카덴차는 이 곡의 초연자인 가브릴로프(Saschko Gawriloff)의 것을 사용했으며,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에서 연주된 리게티의 <실내 협주곡>은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그의 작품세계에서 60년대의 미크로폴리포니가 80년대 이후의 다차원적 폴리포니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인 설명들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 아니, 음악에 대한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낯설지만 신비로운 소리 그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런 것은 애초에 몰랐어도 좋다. 리게티의 음악은 엄격한 구성과는 별개로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는 음악이며, 이론적 설명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편하게 들어도 귀가 즐거웠으며, 특히 모든 악기가 스타카토 및 피치카토 음형으로 타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3악장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5악장에서는 화학반응으로 미립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듯 촘촘하고도 빠르게, 또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음형이 오묘했다. 2악장에서 목관악기의 절규하는 듯한 마르카토 음형(마디 40)은 악기별 어택(attack)이 잘 맞아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낸캐로우의 <토카타>는 1935년 작품으로 낸캐로우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인 빠르고 기계적인 리듬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한 박제희는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특유의 점잖은 '양반 보잉'은 <토카타>처럼 신나고 어떤 면에서는 경박한(?) 곡에는 단점이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음량이 너무 작았으며, 그에 비하면 마림바와 실로폰 소리는 너무 컸다.

아브라함센(Hans Abrahamsen)의 <동화 그림 Märchenbilder>은 슈만의 <동화 그림>에서 소재를 빌렸다는데, 슈만의 작품이 19세기 동화를 그린 회화 같다면 아브라함센의 작품은 차라리 3D 컴퓨터 그래픽이 난무하는 SF 또는 판타지 영화처럼 느껴졌다. 또한, 다차원적이면서도 그물망같이 연결된 성부 진행에서는 리게티의 영향을 찾을 수 있었다.

하만(Chris Paul Harman)의 <행렬 풍자극 Procession Burlesque>은 4종 대위법(fourth species counterpoint)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음의 배음(harmonics)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음향과 그것을 오케스트라가 흉내 내는 것이 신선했는데, 이것은 마치 악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배음끼리의 클러스터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는 여러 층위를 이루면서 폴리포니 아닌 폴리포니를 이루는 것이 리게티와 닮았으면서도 또 달랐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묘하게 선동적인 리듬과 다이내믹 또한 흥미진진했다.

리게티의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는 '해프닝'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주 그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폴리리듬과 폴리템포에 대한 리게티의 화두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이날 벌어진 고유한 사건들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까지 작동을 멈추지 않고 남아있던 두어 개의 메트로놈이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진은숙이 그 끈질긴 녀석들을 손으로 멈춘 다음 태엽을 4번 감아야 할 것을 한 번 더 감았던 모양이라며 사과의 말씀을 전했다. '연주자'들은 예닐곱 명의 어린이들이었으며, 아마도 역사상 최연소 리게티 연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새로움에 대한 화두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리게티에게는 이것이 다양한 문화 양태가 "접속과 횡단"(이희경)을 통해 전혀 새로운 속성을 획득하는 식으로 구현되었다. 그는 평생 어느 한 곳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항상 외부를 향해 열려있었으며, 이방인의 시선을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조명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것이 단순한 '혼혈'과는 다른 까닭은 "손에 잡히는 듯한 섬세한 음향 감각과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아주 명료하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형식 감각"(이희경)을 바탕으로 철저한 자기비판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장은 죽어서 숙제를 남겼다. 이제 음악은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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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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