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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양영광, 양승원, 박선영, 라재혁의 전통과 현대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연주가 어정쩡하게 멈춰버린 순간, 한 연주자가 동전을 던집니다. 무대 위에 떨어진 동전이 적막을 깨트립니다. 객석에 있던 한 남자가 무대로 올라와 동전을 확인한 다음 주머니에 넣습니다. 무대 위 조명이 그 남자를 비추고, 남자는 객석을 등진 채로 종이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봉지를 ‘부욱’ 뜯습니다. 과자를 ‘와구와구’ 먹습니다. 캔 음료를 ‘딸깍’ 따서 ‘후후룩’ 마시고 다시 과자를 먹습니다. 남자는 객석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는, 씩 웃으면서 과자를 ‘와사삭’ 씹습니다. 조명이 꺼집니다.

라재혁 작곡가의 ‘귀머거리의’(taub) 아시아초연이었습니다. 작품 제목에는 취소선이 그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누가 귀머거리라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깜깜한 무대 위에 얼굴만 흐릿하게 비추는 조명이 연주자들을 유령처럼 보이게끔 했던 점이 특이했고, 더블베이스 상행 음계로 시작했던 음악 또한 심령현상이라도 일어날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과자 퍼포먼스’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습니다.

작곡가가 쓴 프로그램 노트는 단 두 문장입니다. “곡이 끝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나요? 우리는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은 다른 자극들로 덮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음악을 듣고 나면 곧잘 이렇지 않던까요? 어쩌면 라재혁 선생은 새로운 작품이 공연되고 나서 너무 쉽게 잊혀 버리는 것이 속상해서 음악으로 자학 개그를 했던 것일까요?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10월 7일과 8일에 걸쳐 신작 다섯 곡이 세계초연, 두 곡이 아시아초연되었습니다. 작곡 부문으로 열린 2021 TIMF아카데미를 위한 작품 공모를 거쳐 위촉작곡가로 선정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지요. 그 일곱 작품이 너무 쉽게 잊힐까 아쉬운 마음에 제 소박한 감상이나마 글로 써봤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일단 첫째 날 공연 얘기부터 할게요.

첫째 날인 10월 7일에는 국악기와 서양 악기를 혼용한 작품 위주로 공연되었습니다. 전통과 현대에 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관점이 흥미롭더군요.

양영광의 소리(Sŏnus)는 객석에서 봤을 때 무대 왼쪽에 장구, 생황, 양금, 대금이 있고 오른쪽에 바이올린, 비올라, 플루트, 호른, 더블베이스가 있고, 무대 뒤에 타악기가 있는 배치가 특이했습니다. 또 한국 전통 악기가 서양 현대음악 어법을 사용했던 것, 귀로 듣기로는 동서양이 딱히 구분되지 않으며 총체적인 덩어리(클러스터)를 형성한 것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곡가는 “이 모든 소리에 대한 현상이 나만의 공간 안에서 나의 눈과 귀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환각적 현상으로서 동서양의 융화를 시도했다고 하네요.

양승원의 ‘낙차’(落差)는 여창가객이 현대음악 앙상블과 협연하는 작품으로 여창가곡 우조 이수대엽 ’버들은’을 차용했다고 합니다. 여창가객 박민희 선생이 무대가 아닌 객석 쪽에서 노래하다가, 중간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무대 구석으로 물러나 소외되는 과정이 마치 한국 전통문화가 서양 문화에 밀려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으며, 그와 맞아떨어지는 음악의 짜임새가 인상 깊었습니다.

작곡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계절이 변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피륙을 짜내는 화자의 한탄 섞인 독백은 마치 현대에 시대적 격차를 이겨내지 못하고 […] 시간적인 대립의 격차 속에 여창가객은 정체성을 잃어가고, 주기적으로 변하는 맥락 안에 지속적으로 들려지는 원곡의 조각들은 공명되어 잔향으로 남아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박선영의 2018년 작품 ’절반의 고요’는 일종의 대금 협주곡이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이번이 아시아초연이었습니다. 유홍 선생이 협연한 대금이 전통 연주법과 현대음악 어법을 아우르는 모습을 보여준 반면 나머지 서양 악기는 그냥 현대음악 어법을 사용했는데, 다만 곡 처음에 타악기를 사용한 방식에서 수제천이나 영산회상이 떠올랐습니다. 시조시인 유재영의 현대시조 ’절반의 고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네요.

구본우의 ‘보카 키우사와 멜리스마의 노래’(Canti di bocca chiusa e melisma)는 신작이 아닌 기성 작품이었고, 여창가객이 협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양승원의 신작과 비슷하면서도 느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작품에서 구본우 선생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서양 음악은 원래 이질적이야. 다른 것은 다른 대로 둬도 괜찮아. 보라고! 그래도 상생은 가능해!”

2018년 6월 13일 수요일

제라르 페송: 현악사중주 3번 '파라고'(Farrago) (2013)

파라고(Farrago)는 라틴어로 여러 가지 곡식으로 된 혼합물을 뜻한다. 쥐베날(Juvénal)은 그의 첫 번째 작품 ‹풍자›에서 자신의 시가 사람의 감정과 격정에서 온 것임을 밝히며 이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가 찻잔(도시와 정원)에서 실낱같은 연상 작용을 거쳐 그의 책의 모든 소재를 찾아낸 것과 비슷하다.

‹파라고›에서는 끝없이 순환하는 소우주들이 음악을 이룬다. 각각의 소우주는 다른 소우주에 의해 변형되어 다시 나타나고, 한 음향은 다음 음향으로 슬며시 이어지며, 모든 음악적 오브제는 순환을 거듭하면서 모습을 갖춰 나간다. 이처럼 모든 형상이 다른 형상의 재현이 됨으로써 '하이퍼 론도' 효과가 생겨나는데, 그동안 고정된 기억이 격렬한 에너지를 받아 물과 기름의 혼합물처럼 변형되고, 반복되는 음과 음계가 솟구치는 프레시티모로 끝난다.

‹파라고›는 33가지 요소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세트'나 '샘플' 모음, 또는 건반악기의 여러 건반을 이룬다. 그래서 반음계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곡 전체가 매우 촘촘한 화음에서 나왔고, 그 화음은 4도 또는 5도 음정을 채우고 때로는 유니슨이나 공허5도로 분해되는 작은 음 덩어리(클러스터)이다. 이런 화음으로부터 신경질적으로 충돌하는 순간들, 호흡과 배음의 타악기적 텍스처, 기계적인 반복 또는 내가 '오르간 놀이 클러스터'라 부르는 것들이 나온다. 비올라로 연주하는 매우 냉소적인 주제는 내가 최근작에서 자주 사용해 왔던 것으로,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를 위한 ‹프루스트 순간들›에서 따온 것이다. 이 삼중주곡은 형식적 구성에 관한 넘치는 아이디어와 때로 갑작스러운 감각 일탈로 이어질 수 있는 혼잡함을 다룬 작품이다.

때로는 느린 순간들이 ‹파라고›의 아찔한 속도를 멈추곤 한다. 이것은 거의 잊힌 옛 선율과 사라져 가는 화성들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러한 뒤섞임과 음소재의 유사성, 그리고 가속 효과가 어떤 내러티브를 생성하고, 이렇게 유발된 시간성은 한 아이디어를 다른 아이디어로 모핑(morphing)함으로써 끊임없이 생겨나는 흐름처럼 느껴진다.

파라고(Farrago)라는 낱말이 바늘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ago'로 끝난다는 사실도 나쁘지 않다. 이 작품을 내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시몽 앙타이가 그린 유명한 그림들이 접거나 묶어서 다양한 빛깔을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끈적한 침묵'마저도 음악으로 엮었다.

제라르 페송 (김원철 옮김)

Farrago signifie en latin mélange de plusieurs sortes de grains. Juvénal utilise le mot dans sa première Satire, annonçant que son poème sera fait des humeurs et des passions des hommes, de même que, par l’effet d’une fragile réminiscence, Marcel Proust voit sortir de sa tasse de thé - ville et jardins - toute la matière de son livre à venir.

Ainsi, la musique dans Farrago est faite d’un ensemble de micro-mondes pris dans une incessante circulation, chaque élément reparaissant déformé par l’autre, chaque sonorité glissant vers la suivante, de sorte que tout objet musical se trouve chaque fois profilé, façonné par son propre retour, induisant ainsi un effet d’hyper rondo, car toute figure y est le refrain réciproque et simultané des autres, comme si la durée était l’émulsion d’un souvenir permanent tenu par cette énergie fouettée qui vient aboutir à un prestissimo fait de notes répétées et d’échelles en fusées.

Farrago est fait de trente-trois éléments qui forment comme un set, un réservoir de samples, ou bien autant de touches d’un clavier, de sorte qu’on pourrait parler ici de chromatisme formel. La musique est entièrement déduite d’harmonies très serrées, de petits clusters remplissant une quarte ou une quinte qui se résolvent parfois sur des unissons lancés comme des signaux, ou sur des quintes à vide. De cette harmonie proviennent aussi bien des impacts nerveux de secondes, des textures en batteries de souffles ou d’harmoniques, des mécaniques itératives ou de ce que j’appelle des « clusters en jeu d’orgue ». Un thème très vibré de caractère sarcastique, joué par l’alto, reparaissant à travers plusieurs de mes dernières musiques, provient d’un trio pour violon, violoncelle et piano sous-titré « moments Proust » - trio qui traitait du surgissement de l’idée dans la construction formelle et du fourmillement qui en résulte parfois, pouvant porter à de brusques écarts ou ruptures de sens.

Quelques moments lents viennent suspendre ce temps précipité de Farrago. Ils se construisent autour d’une mélodie presque effacée, portée par des harmonies glissées et fuyantes. Une sorte de récit se compose ainsi par associations, par assonances et par effets d’accélération, induisant une temporalité qui semble comme un flux sans cesse tendu par ce morphing d’une idée vers l’autre.

Il ne me déplaît pas que le mot Farrago finisse par ago qui veut dire aiguille en italien. Cela me fait songer que la musique de Farrago a été cousue, maille par maille, comme les fameuses toiles du peintre Simon Hantaï, faites pour être pliées ou nouée de manière que leurs surfaces reçoivent aussi bien la lumière, la couleur, que ce silence adhésif dont j’ai tissé ma musique.

Gérard Pesson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윤이상: 예악(禮樂)

통영국제음악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Grand Wing》에 실린 칼럼입니다.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전통적으로 서양음악을 이루는 3요소로 꼽혀 왔지요.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음색'이 그 못지않게 중요해졌습니다. 전통적으로 음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작곡 기법은 관현악법(orchestration), 즉 특정 선율 · 리듬 · 화성에 특정 악기를 지정하고 다른 악기와 섞어 소리를 빚는 방법이었고, 음악학자 달하우스는 현대적인 관현악법의 가능성을 제시한 말러 교향곡 1번과 R. 슈트라우스 《돈 쥬앙》을 가리켜 음악적 모더니즘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1960년대에 오면, 전통적인 화음 개념을 확장한 이른바 음 덩어리(cluster)로 선율 · 리듬 · 화성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음색 또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나타납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쓰여서 ― 사실은 감독이 도용해서 ― 더욱 유명한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그리고 음악보다 제목이 더 유명한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같은 작품이 그렇지요.

음을 덩어리로 쌓아 만든 '음향'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작곡가 윤이상이 찾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응용하면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을 서양 악기로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윤이상이 만들어 낸 '음향'은 리게티나 펜데레츠키 같은 서양 작곡가들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서양음악에서는 개별 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지지만,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음 하나만으로도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면서 음악을 이루거든요. 살아있는 음이 모여 살아있는 화음, 살아있는 음향층을 이루는 것이 윤이상 음악 어법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이 《예악》(禮樂)입니다. 1966년 독일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면서 윤이상은 국제적인 스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해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극찬이 따라붙었고, 작품 속에 녹아든 정중동(靜中動) 원리는 '음 덩어리'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원리를 고민하던 서양 작곡가들에게 훌륭한 돌파구로 제시되었습니다.

주요음향 또는 중심음향(Hauptklang)이라 불리는 윤이상식 음향은, 그 구성요소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살리고 덜 살리느냐에 따라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이 살아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점에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전통음악을 모르는 서양 지휘자가 윤이상 작품을 지휘하면 그냥 서양음악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처럼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만도 없겠지요.

다만, 언젠가 롤란드 클루티히(Roland Kluttig)라는 독일 지휘자가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이 곡을 연주했을 때, 그 음향이 종묘제례악이나 수제천에서 들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원류'를 모르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를 독일인 지휘자가 만들어 냈던 것이지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탁월한 《예악》 연주였습니다.

재미난 사실. 《예악》에는 국악기가 하나 쓰입니다. 한국 궁중음악에서 곡의 시작과 끝, 각 절의 끝에 연주되는 악기인 박(拍)이지요. 이 글 초고를 보신 어떤 분이 '공간을 가르며 침묵을 정주(停住)시키'는 악기가 박이라 평하시더군요. 악보를 보면 작곡가는 이것을 채찍을 뜻하는 'Peitsche'라는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그 뒤에 괄호를 치고 'Bak'이라고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 궁중음악처럼 《예악》 처음과 끝과 중간 중간에 박이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2015 통영국제음악제 폐막 공연에서는 크리스토프 포펜이 지휘하는 통영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예악》을 연주합니다. 이들이 빚어내는 음향은 어떤 느낌일까요? 포펜 선생께 미리 《수제천》을 들려드려야 할까 봅니다.

2013년 4월 7일 일요일

새로운 작품이 있는 공연을 위하여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원문 링크 : http://g-phil.kr/?p=1479

"국내 어느 교향악단도 한국 작곡가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작곡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길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동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관현악단을 사는(!) 방법, 젊은 작곡가라면 콩쿠르에 응모하는 방법 등이 있을 뿐이다. 지원을 받기도, 관현악단을 사기도, 콩쿠르에 응모하기도 어려운 입장에 있는 작곡가들은 당연히 그나마 연주가 용이한 실내악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양적인 감소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에 뒤따르는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작곡가 전상직 선생께서 10년 전에 쓰신 글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당시 명칭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문예연감』 서양음악 분야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쓰신 글이었지요. 이 글에서 지적하신 우리나라 작곡계 형편은 10년이 지난 2013년 현재 조금은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인 듯합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그곳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작곡가가 활동하기 훨씬 좋은 든든한 인프라가 있어요.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 극장 등에서 작곡가에게 새 작품을 위촉하고, 그 작품이 초연되면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다른 악단이 그 작품을 또 연주하는 선순환이 일어나곤 합니다.

요즘은 방송 인터넷 중계가 흔해서, 조금만 찾아 보면 외국 유명 악단의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지요. 공연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발표된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작품들이 한 곡쯤 들어 있곤 합니다. 아예 현대 작품만 연주하는 공연도 제법 있고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음악 공연은 '그들만의 잔치'가 되기 일쑤이지요.

조금 자극적인 통계 수치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2012년판 『문예연감』에 나타난 2011년 전체 공연 건수는 8,274건입니다. 그 가운데 작곡발표회로 분류된 공연은 1.1%이고, 경기 지역만 따지면 단 한 건입니다. 한 건도 공연되지 못한 해도 있고요. 다른 범주로 분류된 공연에서 신작이 초연된 사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공연장에서 창작곡을 얼마나 들을 수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 수치도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집니다.

"한해의 작곡계를 돌아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자발적 청중의 부재와 그로 인한 창작곡의 고립현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작곡가 단체(동인)들의 발표회 및 몇몇 현대음악제라는 인적(人的), 공간적으로 폐쇄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답답함을 더해온다." (전상직)

음악 애호가라면 윤이상이나 진은숙 같은 세계적인 작곡가의 이름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어요. '피겨 여왕'이라 불리는 김연아 선수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에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기르는 인프라가 훌륭해서 김연아 선수가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렵잖아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예술 창작을 지원하는 공공기관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술단체가 신작을 초연하면, 작곡가와 예술단체가 각각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지요. 그러나 국민이 낸 세금으로 어느 예술가와 예술단체를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작품이 얼마만큼 훌륭한지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외 공연장이나 연주단체들의 기획프로그램과 연주자 개개인의 연주회에서 창작품을 연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그 또한 행사용이거나 문예진흥기금 수령을 위한 방편으로 짜맞춤형 연주회에 창작품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작곡가 이만방 선생이 2006년 『문예연감』에 쓰신 글입니다. 공공기관답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곤 하지요. 정부가 나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지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이를테면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확정 받아놓고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신작 오페라 공연이 취소된 사례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연이 종연(終演)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작곡가가 자비를 들이거나 지원금을 받아 신작을 발표하면, 대개 초연을 끝으로 그 작품이 다시 연주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다시 연주되더라도 '그들만의 잔치'라 할 만한 공연이 되기 일쑤이고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번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한국의 악단들이 동시대 한국 작곡가의 곡을 프로그램에 삽입해 소개하는 공연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 공연처럼 대규모 공립 오케스트라가 동시대 현역 작곡가 한 사람의 곡들로만 정기연주회 전체 프로그램을 구성해 연주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곡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어떤 면에서 공공재(公共財)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하는 일에 경기필이 나서고자 합니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류재준의 밤》 공연을 준비하면서 티켓 판매 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공공 예술단체로서 수익률보다는 국내 최초로 한국 작곡가를 집중 조명한다는 취지에 뜻을 두고 이번 공연에 예산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경기필이 작곡가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함은 물론 협연자와 합창단 등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이번 공연이, 현 시대의 작곡가들에게 진정한 예술 창작 의욕을 고양하고 음악애호가들에겐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에 가다 ①

▶ 다름슈타트로 간 까닭

여름휴가 때 유럽에 가려고 연주회 일정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이때쯤이면 공연 단체 대부분이 시즌 끝나고 쉽니다. 하긴, 예술가들도 휴가 가야죠. 그런데 휴양지에서 공연이 열리면? 놀러 가서 돈도 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열리는 음악 축제는 휴가철 특수를 노리는 곳이 많습니다. 대관령 국제음악제가 비슷하지요.

바이로이트로 갈까요? 제 휴가 기간이랑 살짝 어긋나네요.
런던으로 갈까요? BBC 프롬스가 열립니다. 로열 알버트 홀 음향 나쁘다던데.
루체른은 8월이나 돼야 개막하는데다, 올해 페스티벌은 뭔가 삐걱거리는 게 영…
잘츠부르크로 갈까요? 일정도 안 맞는데다, 여기에 가느니 바이로이트 갑니다.

고민 끝에 다름슈타트로 결정했습니다. 현대음악이야말로 실연을 들어 봐야 제맛을 알 수 있거든요. 국내에서는 서울시향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로 한 해 두 차례 현대음악을 연주하고, 또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를 지향하는 TIMF 앙상블도 훌륭하지만, 저는 한 번쯤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음악 공연을 직접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앙상블 모데른(Ensemble Modern)이 개막 공연을 맡았습니다.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Internationalen Ferienkurse für Neue Musik Darmstadt)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아방가르드 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행사입니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이 비꼬아 쓴 말을 빌자면 "특허청으로 달려가는" 온갖 혁신적인 음악들이 초연되며 인정투쟁을 벌여 왔던, 불레즈 · 슈토크하우젠 등 거물 작곡가가 살벌한 의견 대립을 벌여 댔던, 그래서 20세기 음악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행사입니다. 다름슈타트는 그야말로 현대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지요.

▶ 오후 4시 33분에 열린 엽기 개회식

올해 다름슈타트 여름 현대음악 강좌는 존 케이지 특집이었습니다. 탄생 100주년이라고요. 4시 33분이라는 특이한 개회 시각은 《4분 33초》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소개되었다지요? 그런데 《4분 33초》는 드라마 속 '강마에'와 달리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휘자 구자범 선생님 말씀을 들어 볼까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이번 개회식은 시작 시각만 특이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 시작하겠습니다' 하는 뻔한 인사말이 없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고요. 홈페이지에는 마틸다 언덕(Mathildenhöhe)이라는 곳에서 공연이 있다는 얘기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데다, 그 '마틸다 언덕'이라는 곳은 알고 보니 무슨 공연장 같은 곳이 아니라 건물 여러 채 있는 개방된 곳이었습니다. 행사와 무관한 전시회 부스를 찾아가 물어보고 그곳 광장에서 열린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무슨 현수막 하나 없어요.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합니다. 바람이 쌩쌩 붑니다. 행사장 이곳저곳에 빨간 줄 같은 것을 달아 놔서, 그 줄이 바람에 날리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웅성웅성…"
"여기가 거기예요?"
"맞지 싶기는 한데…."
"웅성웅성…"

…아오, 진짜 여기 맞아?

시계를 쳐다봅니다. 4시 33분을 가리키는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어딘가 싶어서 쳐다보니까 시계탑에서 웬 여자가 확성기로 뭐라고 떠듭니다. 랩(rapping)인가?

그리고 오른쪽 난간에서 웬 남자가 타악기를 연주합니다. 좀 있으니 더 오른쪽에서 동양계 여자가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빨간 끈이 바람에 나부끼며 윙윙 뿌지직(?) 소리를 냅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처음에는 멋졌는데, 조금씩 지루해집니다.

…뭐야? 이게 개회식?

주위를 둘러보니 한구석으로 사람이 몰리고 있습니다. 뭔가 싶어서 가보니 몇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끈 나부끼는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립니다. 또 어딘가에서는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트롬본을 연주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마치 학회 포스터 발표회 같은, 또는 박람회 부스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인공은 바람과 빨간 끈입니다.

…뭐, 존 케이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숙소로 돌아갑니다.

▶ 엽기 개회식에 이은 엽기 전자음악 공연

다음 공연은 다름슈타티움(Darmstadtium)이라는 곳에서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앙상블 모데른' 연주회가 본 공연이고, 그에 앞서 로비에서 "달리는 라디오" 앙상블이 무료 공연을 했습니다. 작품 제목이 《네 곡짜리 라디오-카논, 그리고 메타케이지》(Vier Radio-Kanons und ein metaCage)라고요. 제목은 그럴싸한데…

'치―' 하는 라디오 백색소음이 아주 작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약 3분에 걸쳐 조금씩 커집니다. 사람들 시선이 완전히 몰리는 순간 멈춥니다. 박수. 여기까지는 멋졌어요. 그 뒤로 타악기 소리가 살짝 곁들여진다거나 하는데, 처음이랑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님들아, 그게 전부임? 너네 왜 그러냐능?

본 공연 표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저도 재빨리 표를 샀습니다. 입장권에 좌석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리 찜 하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엽기 전자음악을 뒤로하고 공연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앙상블 모데른. 이 공연부터가 진짜였습니다.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아르프, »Mémoire (추억)« für Flöte und Orchester

※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웹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원본 출처: http://g-phil.kr/?p=342


글: 에마뉘엘 제라르 (김원철 옮김)

이 작품은 클라우스 아르프가 플루트 연주자 장클로드 제라르(Jean-Claude Jérard)를 위해 작곡한 네 번째 곡이다. 앞서 작곡한 곡으로는 플루트 독주와 녹음기 두 대를 위한 《토마토 샐러드》(Tomatensalat), 플루트, 하프, 타악기와 무용수를 위한 《사중주》(Quartett), 플루트 여섯 대를 위한 《현미경》(Mikroskopie)이 있다.

음악은 세 음짜리 세포가 플루트로 나타난 뒤에 악기를 옮겨 가며 진화한다. 이 모티프는 《토마토 샐러드》에서 되풀이되던 가락을 따온 것이며, 이것은 마치 기억이 떠오르고, 재빨리 잡아채이고, 넘겨져 회상되는 듯하다. 이러한 에코 현상, 다시 말해 자꾸만 서두르는 듯한 리듬은 조금씩 소리의 겉면을 이루어 악기군을 옮겨 다닌다.

두 번째 모티프인 짤막한 16분음 상행 음형이 현악기로 나타나고, 뒤이어 바순과 호른이 응답한다. 플루트가 앙상블 위로 솟아오르고, 모티프 사이를 옮겨 다니고, 압도하고, 앞을 예고한다. 절정에 이르면 새로운 모티프가 나타난다. 점8분음표―16분음표 하행 음형이 호른으로 나오고, 현악기 리듬은 그동안 조금씩 늘어나고 느려진다. 목관악기가 천천히 죽어가고, 플루트는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동안 조용하다. 플루트 가락이 되살아나자마자 리듬은 다시 느슨해진다.

플루트를 반주하는 현악기군과 클라리넷 두 대 소리가 시적인 긴 악구가 끝날 때까지 들린다. 이 소리마저 사그라지면 오보에 둘과 클라리넷 하나가 해결되지 못한 a단조 화음으로 남는다. 플루트 독주는 처음 두 마디를 뒤집은 음형과 함께 끝난다. 마치 기억이 작업하고, 유지되고, 저장되고, 진화하고, 쇠퇴했다가 때때로 다시 깨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곡은 갑자기 멈춘다. 죽음이 어루만지는 순간 생각의 끈이 끊어지는 것처럼.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품 속 기억은 개인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추억을 일깨우도록 의도한 자극이며, 이 자극은 플루트가 일으키고 다른 악기로 옮겨가며 더욱 발전합니다." 클라우스 아르프는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에서 있었던 (장클로드 제라르와 아르프 자신의) 공통된 옛일을 암시하며 윙크와 함께 덧붙였다. "알려진 주제선율들이 가리키는 것이 있다면 모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고, 기억해 보자…

※ 옮긴이 주: 이 글은 음반 속지에 있는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본디 문단 구분이 없는 글이었으나 옮긴이가 멋대로 문단을 나누었음을 밝힙니다.

☞ 미니멀리즘 음악에 대하여 (글: 서의석)

― 티켓 예매 ―

고양아람누리
http://www.artgy.or.kr/PF/PF0201V.aspx?showid=0000003323

인터파크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MN=Y&GoodsCode=11010067

2011년 5월 21일 토요일

홍성지 《Vernal Equinox》 ― TIMF 앙상블

5월 20일 (금)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건반의 변주 (Keyboard Variation)

CPE BACH_ Fantasie in C major for fortepiano H291 Wq61/6

MOZART_ Sonata for fortepiano in Bb major K333

멜빈 탄 Melvyn Tan (FortePiano)

LISZT_Mephisto Waltz No.1 S.514

김영호 Youngho Kim (Pf)

INTERMISSION

SUNGJI HONG_'Vernal Equinox' for oboe, violin, viola and cello
(Grand prize winner of the 1st SSF Composition Competition)

통영국제음악제(TIMF) 앙상블 Tongyeong International Music Festival (TIMF) Ensemble
김현수 Hyeon Su Kim (Cond), 임수미 Su Mi Lim (Ob), 정호진 Ho Jin Jeong (Vn), 강주이 Jui Kang (Va), 오주은 Joo Eun Oh (Vc)

SAINT-SAËNS_ Caprice-Valse 'Wedding Cake' for piano and strings op.76

김영호 Youngho Kim (Pf), 배익환 Ik-Hwan Bae (Vn), 김현아 Hyuna Kim (Vn), 김상진 Sang-Jin Kim (Va), 송영훈 Young Song (Vc), 이창형 Chang-Hyung Lee (Bass)

SMETANA_ Piano Trio in g minor Op.15

피어스 레인 Piers Lane (Pf), 엘리나 베헬레 Elina Vähälä (Vn), 조영창 Young-Chang Cho (Vc)


Vernal Equinox. '봄'을 뜻하는 라틴어 'vernalis'와 '균등한(equal) 밤(night)'을 뜻하는 라틴어 'aequinoctium'에서 온 말. 밤과 낮이 길이가 같아지는 주야평분점(Equinox) 가운데 봄에 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춘분'(春分)이다. 우리말로 하면 말맛이 달라져서 시(詩)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음악을 들어보니 작곡가 홍성지도 '춘분'이라는 말 느낌을 더 살린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이 곡을 썼다고 한다.

바이올린 등이 하모닉스 주법으로 페달 포인트(pedal point)를 길게 이어 연주하는 대목이 얼핏 말러 교향곡 1번 도입부와 비슷했지만, 곧이어 현악기를 마치 가야금이나 거문고 뜯듯 연주하는 소리가 더하니 차라리 윤이상이 생각났다. 그러나 윤이상 작품에 나타나는 이른바 '중심음 기법'(Hauptton-Technik)과도 조금 달랐다. 중심음이 딱히 '붓글씨를 닮은'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고, 중심음을 둘러싼 음들이 이루는 음향층은 차라리 자친토 셸시(Giacinto Scelsi)를 더 닮았다. 나중에 프로그램 책자를 얻어다 읽어 보니 작곡가 스스로 '중심음'이라는 말을 썼던데, 윤이상셸시 가운데 누구를 더 의식했을까?

오보에로 같은 음을 운지법을 바꿔가며 연주하는 이른바 '음색 비브라토'는 서울시향이 홍성지에게 위촉한 피아노 협주곡에서도 쓰인 바 있다. 서울시향 연주를 들으면서는 그저 특이한 연주법을 썼구나 싶었지만, 《Vernal Equinox》에서는 윤이상을 닮은 텍스쳐(texture) 때문인지 마치 대금이나 피리를 부는 듯하기도 했다. '음색 비브라토'가 아니더라도 때때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현악기 글리산도 음형이나 한 음에서 이리저리 가지를 뻗어 나가며 얽히는 소리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처럼 꽃이 피고 풀이 쑥쑥 자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화적·마법적인 분위기에서 레드제플린 《Rain Song》이 떠오르기도 했다. 봄 느낌.

2011년 5월 16일 월요일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 스베틀린 루세브 / 리오 후세인 / 서울시향

2011-03-24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리오 후세인
협연: 스베틀린 루세브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1945년판)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잘린 곳이 없는 듯? 으허허허! >_<


예술 사조를 구분 짓는 잣대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들이대는 오류를 무릅쓴다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미처 꽃피기에 앞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씨앗을 뿌린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을 대표할 만한 이른바 '12음 음악'의 뿌리를 캐 봐야 한다.

18세기 화성 이론을 세운 작곡가이자 이론가 장필리프 라모는 화성 진행 원리를 뉴턴 중력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며 음악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이에 따라 음악 이론과 계몽주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것이 베토벤에 이르러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per aspera ad astra)라는 말과 더불어 인류가 끝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리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12음 음악 또한 이러한 음악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서양음악이 '발전'하던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12음 음악이 나타난 일은 필연이라는 주장에 수많은 음악학자가 동의한다. 따라서 12음 음악은 오해와 달리 전통과 단절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통을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드뷔시스트라빈스키야말로 뿌리 깊은 전통을 거부한 혁명가이다. 조성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기능 화성 작법에서 벗어나 음악이 '발전'하지 않고 그저 흐르고 자라고 되돌아오게끔 했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이단아 취급을 받은 정도였지만, 스트라빈스키모더니즘이 힘을 얻던 때를 만나 모진 비난을 견뎌야 했다. 이를테면 아도르노는 스트라빈스키가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라며 비꼬았다.

모더니즘이 절정에 이르며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던 때에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을 내놓았다. 이 글에서 불레즈는 19세기 음악을 확장·완성했을 뿐인 쇤베르크가 아니라 음색을 현대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려준 베베른을 작곡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색이 중요해지면서 드뷔시스트라빈스키말러 등과 함께 재조명 받았다.

오늘날 드뷔시스트라빈스키 곡을 연주하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무엇보다 《불새》는 스트라빈스키 자신이 지휘해 남긴 음반이 있어서 작품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낱낱이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새로 연주하려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 할까?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바를 멋지게 '배신'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불레즈는 음 하나하나가 낭비 없이 드러나도록 하며 베베른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을 《불새》에서도 연상하게끔 했다. 리카르도 샤이는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라는 특급 악단의 기능성을 살리며 세련되고 균형 잘 잡힌 음색을 뽑아냈다.

서울시향을 지휘한 리오 후세인은 조금 느린 템포로 소리를 꼼꼼하게 풀어냈으며, 때때로 연주가 너무 차분해서 긴장감이 떨어진 대목은 옥에 티였다. 현 소리에 비브라토로 멋을 내어 낭만주의 냄새를 풍긴 대목은 음악에 감정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스트라빈스키가 들었다면 싫어했을 법하다. 그러나 예술의 전당이라는 대형 연주회장과 그에 걸맞은 대편성 악단이 연주할 때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다가 스트라빈스키가 뜻한 바를 곧이곧대로 살리는 일이 반드시 옳지도 않다.

지휘자가 보인 작품 해석은 무난했으며, 서울시향 실력에 걸맞은 깔끔한 앙상블과 다채로운 음색을 이끌어낸 대목은 칭찬할 만했다. 도입부가 끝날 무렵 나오는 변주에서 플루트와 피콜로가 새 소리를 흉내 내고 다른 악기가 그것을 따라 하는 대목이 가장 훌륭했고, 신 나게 두드려 대는 〈코시체이 왕의 사악한 춤〉도 멋졌다. 크게 부풀어 오르며 '브라보'를 부르는 〈피날레〉도 좋았다.

첫 곡으로 연주한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도 모범적인 해석에 깔끔한 앙상블이 돋보였으며, 무엇보다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아름다운 음색을 뽐냈다.

드뷔시는 프랑스 작곡가이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작곡가이나 《불새》는 목관악기 비중을 높이는 등 프랑스 청중을 고려해 작곡했다. 멘델스존은 독일 작곡가이지만, 이날 협연자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인 스베틀린 루세브였다. 서울시향 악장이기도 한 스베틀린 루세브는 사실 국적은 불가리아이나 연주에서 프랑스 느낌이 많이 묻어났다. 다른 연주자가 끊어 연주하는 곳도 웬만하면 매끄럽게 이어 연주했으며, 반드시 스타카토로 연주해야 하는 곳만 너무 거칠지 않게 끊어 연주했다. 포르타멘토는 프랑스식 포르타멘토라 불리는 B-포르타멘토를 썼다.

스베틀린 루세브는 지난 2008년 12월에 베토벤 협주곡을 협연하기도 했는데, 그때와 견주면 연주법은 비슷했으나 베토벤보다는 멘델스존이 루세브와 더 잘 맞는 듯했다. 서울시향과 함께한 시간이 더 쌓인 만큼 오케스트라와 더욱 한 몸처럼 어우러진 탓도 있겠다.

2011년 5월 14일 토요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인쇄 매체에 보낸 원고는 발간된 뒤에나 블로그에 올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연주회 프로그램 해설이라 미리 올려도 좋지 싶네요. 내일 고양에서 열리는 구자범-경기필 연주회입니다.

나중에 붙임: 구글이 데이터 오류 났는지 글 날려먹어서 새로 올립니다. 아오….


▶ 트리스탄 화음, 어쩌다 마주친 그대 눈동자

짝사랑을 앓아보았는가. 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또는 연인을 처음 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는가. 바그너는 바로 그러한 눈 마주침을 《트리스탄과 이졸데》 첫 화음으로 나타낸 듯하다. 이와 관련해 바그너가 직접 언급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극 중에서 이 화음과 엮인 모티프는 눈 마주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이 모티프는 때때로 영화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패러디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바그너는 이 작품을 쓸 때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과 불륜 관계였다.

이 화음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트리스탄 화음'(Tristan Chord)이라 부른다. 그때까지 서양음악이 바탕으로 삼던 조성 체계를 이 화음이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무조음악 시대를 열어젖힌 작품은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이지만, 무조음악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작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며, 그 핵심은 트리스탄 화음이다. 트리스탄 화음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글쓴이에게 그럴 깜냥이 없을뿐더러 이 글에서는 지면이 모자라므로 어쩔 수 없이 전문 용어를 잔뜩 써서 짧게 설명하겠다.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흘려 읽어도 좋다.

조성음악은 '긴장과 이완'을 근본 원리로 삼는다. 불협화음을 쓰려면 그에 앞서 '예비'를 해야 하고, 불협화음을 쓰고 난 뒤에는 안정된 협화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화성법 지식이 없는 사람은 모차르트 음악에 기본 3화음만 나온다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예비'와 '해결'을 잘했을 뿐 모차르트도 불협화음을 얼마든지 썼다. 심지어 모차르트가 트리스탄 화음을 쓴 일도 있다면 믿겠는가? 사실이다.

트리스탄 화음은 F―B―D♯―G♯ 또는 단3도, 감5도, 단7도 음정으로 쌓거나 이것을 전위시킨 화음이며, 따라서 변종 반감7화음이다. 모차르트를 비롯한 이전 작곡가도 썼던 이 화음이 바그너의 발명품(?)처럼 불리는 까닭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화음이 쓰인 맥락 때문이다. 음악이 으뜸화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성이 분명하지 않은 단선율로 시작하는 대목부터 문제다. 이것을 얼렁뚱땅 A 단조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프랑스 6화음이라 할 수 있고, G♯ 음은 전타음이 된다. 그런데 전타음이 비정상적으로 길다. 더군다나 이 음이 해결되어야 할 A 음은 A♯ 음으로 가는 '경과음'처럼 쓰였다. 주객전도다. 게다가 이 화음과 얽힌 모티프는 딸림7화음으로 끝나지만,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하는 이 화음이 다른 조성 영역으로 곧바로 옮겨가 버린다. 같은 패턴이 되풀이된다.

조성을 A 단조가 아닌 A♭ 단조 등으로 보면 트리스탄 화음은 또 달리 해석된다. 그러나 설명이 길어지니 여기서 줄이자. 중요한 것은 이 화음으로 말미암아 조성이 확립되지 않은 채로 화성이 선율 속을 둥둥 떠다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한선율'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그리고 반음계적인 조바꿈이 일탈이 아닌 본질처럼 바뀌었으니 음계음과 변화음, 화성음과 비화성음을 구분하는 일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조성은 이렇게 붕괴했다.

▶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트리스탄 화음을 실제로 연주하는 일은 이론적 설명과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성적 중심이 사라지고 화성이 둥둥 떠다니면서 나타나는 몽환적인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음 하나하나가 서로 부딪히게 하기보다 차라리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게끔 하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트리스탄 화음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결을 신비로운 음향으로 나타낸 것이 된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도 꿈결처럼 어른어른한 느낌이 잘 살아나게끔 다스리는 해석이 어울린다. 지휘자 대다수가 이 해석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며,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꿈결을 빚어낸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둘째는 짝사랑하는 임과 어쩌다 눈 마주쳤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살리는 해석이다. 강력한 불협화음에서 나오는 음향적 충격을 되도록 날것 그대로 살려야 한다. 목관악기의 어택(attack)을 날카롭게 살리고 그에 앞서 나오는 현악기의 크레셴도를 가파르게 다스린다. 이어지는 음악에서는 이졸데를 절정으로 이끈 노랫말처럼 "파도치는 물결 속에"(In dem wogenden Schwall) 몸을 내던지는 듯한 격정을 살린다. 글쓴이는 이 해석을 지지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해석을 따른 지휘자는 글쓴이가 아는 한 셋뿐이다. 카를 뵘, 한스 크나퍼츠부슈, 마리스 얀손스.

이번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지휘자 구자범은 어떤 해석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꿈결인가, 파도치는 물결인가?

▶ 서곡인가 전주곡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는 서곡이 없다. 이번 연주회에서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곡은 서곡이 아닌 1막 전주곡이다. 왜 서곡이 아닌 전주곡인가? 서곡과 전주곡은 어떻게 다른가? 서곡과 전주곡은 자주 헷갈리는 개념이다. 둘 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인 탓에 더욱 헷갈리기 쉽다. 이 글에서는 혼동을 줄이고자 바그너 시대 맥락에서 쓰인 오페라 서곡과 오페라 전주곡에 대해서만 얘기하겠다.

서곡은 영어로는 'Overture'이다. '입구' 또는 '문'을 뜻하는 라틴어 'apertura'에서 온 말이다. 'apertus'라고 하면 드러낸다, 펼쳐 보인다는 뜻이다. 오페라에서 서곡은 전체 줄거리를 음악으로 요약해서 들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처음 듣는 오페라도 서곡을 들어 보면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것, 요즘 하는 말로 스포일러(spoiler)다. 네타바레(ネタバレ)다. 미리니름이다. 바그너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뭐? ○○○가 범인이라고? 이런!

전주곡은 영어로 'Prelude'이다. '준비하다' 또는 '미리 해보다'를 뜻하는 라틴어 'praeludere'에서 온 말이다. 독일어로 전주곡은 'Vorspiel'인데, 말짜임은 영어와 비슷하다. 바그너 오페라 또는 악극(Musikdrama)에서 전주곡은 결말을 알려주지 않는다. 전주곡은 막이 오르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뿐이며, 서곡과 달리 막마다 제법 길게 나온다. 전주곡은 음악적으로도 완결되지 않은 채 다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으뜸화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그너는 오페라 《로엔그린》에서부터 서곡 대신 전주곡을 썼다.

▶ 사랑의 죽음, 죽음과 변용

"사랑의 죽음"(Liebestod)이라는 말은 본디 바그너《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을 설명하면서 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습적으로 이졸데가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 "부드럽고 상냥하게 그이가 웃음 짓네"(Mild und leise wie er lächelt)를 '사랑의 죽음'이라 부른다. 바그너는 이 장면을 일컬어 "이졸데의 변용"(Isoldes Verklärung)이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가사 없이 관현악으로 편곡된 판본을 연주한다.)

변용(Verklärung, Transfiguration)은 쇼펜하우어 사상에서 따온 말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 사상에 열광했으되 입맛에 맞게 비틀어 작품에 반영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글쓴이도 잘 모르는 쇼펜하우어 얘기를 늘어놓는 대신 바그너가 쓴 노랫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절정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Ohne Nennen,
ohne Trennen,
neu Erkennen,
neu Entbrennen;
endlos ewig,
ein-bewusst:
heiss erglühter Brust
höchste Liebeslust!


이름을 부르지 말고,
떨어지지 말고,
새롭게 자각하고,
새롭게 타오르리라.
끝없이 영원히,
하나됨을 자각하리라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유지원 옮김)

쇼펜하우어가 말한 '변용'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비슷한 개념이고, 따라서 죽음과 변용은 동의어에 가깝다. 그런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지고한 사랑의 쾌락"(höchste Liebeslust)으로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명백히 성애를 가리키며, 따라서 바그너에게 죽음과 변용과 섹스는 동의어가 된다. 위 노랫말과 더불어 음악에 나타난 성적 고양감은 "우리 이제 죽으리, 한 몸으로"(So stürben wir, um ungetrennt)라는 말로부터 비롯한다. 또한 "새롭게 자각하고"(neu Erkennen)라 할 때 "Erkennen"이라는 말은 독일어 성경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고…" 할 때처럼 성교한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와 동시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각자의 에고를 초월해 하나가 된 상태, 곧 죽음과 변용을 뜻한다. "이름을 부르지 말고"(Ohne Nennen)라는 말은 변용을 거쳐 새로운 자아로 거듭났으므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고한 사랑의 쾌락"은 마지막 순간 마르케 왕 일당이 나타나면서 안타깝게 부서진다. 이것이 3막 끝에 이르러 트리스탄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어진다. 이미 죽은 트리스탄과 하나 되어 "새롭게 자각"하려면 이졸데 또한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졸데는 "지고한 사랑의 쾌락"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In dem wogenden Schwall,
in dem tönenden Schall,
in des Welt-Atems
wehendem All ---
ertrinken,
versinken ---
unbewußt ---
höchste Lust!


파도치는 물결 속에,
소리치는 울림 속에,
세상 숨결 불어오는
우주 속에
빠져들어,
가라앉아
나를 잊으리라
더없는 기쁨이여!

글쓴이는 몇 가지 이유로 "지고한 쾌락"을 "더없는 기쁨"이라 옮겼지만, 원어는 "höchste Lust"로 2막에 나오는 "höchste Liebeslust"와 거의 같은 말이다. 엑스터시(ecstasy)인 동시에 죽음과 변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 대본에는 위 노랫말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이졸데는 변용된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르케는 주검에 축복을 내린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바그너의 망상이 유난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바그너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노랫말 가운데 이런 것도 있지 않은가.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지금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이 노래는 실제로 동반자살한 연인을 추모하는 곡이라고 한다.

▶ 모더니즘의 씨앗과 바그너의 후예들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바그너 음악 어법은 후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후예'를 대표할 만한 작곡가이다. 그리고 오페라 《살로메》는 슈트라우스 작품 가운데 바그너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또한 슈트라우스 못지않은 바그네리안(Wagnerian) 작곡가였다. (다만, 말러는 나중에 바그너와 맞수였던 브람스 음악 어법을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러와 슈트라우스가 바그너에게 받은 영향은 화성 어법만은 아니다. '라이트모티프'로 대표되는 극(drama)적 장치 또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 1928~1989)는 1889년을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꼽으며 '음악적 모더니즘'이 이때부터 비롯했다고 보았다. 이해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과 말러 교향곡 1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59년에 완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견주면, 이 두 작품의 화성 어법은 차라리 퇴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하우스가 두 작품에서 발견한 '음악적 모더니즘'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화성이 아닌 음색, 바로 현대적인 관현악법이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관현악법 대가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 앞서 관현악법에 혁명을 불러온 작곡가가 둘 있었으니,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였다. 그러니까 바그너는 화성법으로나 관현악법으로나 현대음악에 씨앗 역할을 한 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은 바그너 관현악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트리스탄 화음'에서 목관악기가 빚어내는 음색이나 '사랑의 죽음'에서 빛을 머금은 듯 넘실거리는 현, 그리고 그 속에서 맑게 울려 퍼지는 하프 소리 등은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플레이보이』 모델을 소재로 삼은 오페라 《안나 니콜》 초연 소식

마크-앤서니 터니지(Mark-Antony Turnage)가 작곡한 오페라 《안나 니콜》(Anna Nicole)이 어제 17일 영국 코벤트 가든(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연합 뉴스』 기사 참고

이 공연을 두고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 원문 보기)

오늘 밤 오페라 초연에 무슨 옷을 입어야 좋겠느냐는 순진한 물음이 트위터에 올라와 큰 웃음과 조금은 진지한 고민을 불러왔다.

[…] 알몸(bare-butt), 립스틱과 지미추(Jimmy Choo) 구두, 왕가슴 정장(double-breasted (law) suit)과 넥타이 등 다양한 제안이 들어왔다. 한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행사를 그토록 재미있게 만든 것은 로열오페라하우스가 평소 딱딱하던 분위기를 몰아내는 데 성공해서 굵은 글씨로 세계 초연을 무슨 다 함께 부르는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만들어서 관객들을 나치 또는 수녀로 돌변하게끔 했던 대목이다.

오페라에서 이런 걸 더 보고 싶다. 《카르멘》에서는 집시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고, 《나비부인》에는 게이샤 아가씨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고, 《니벨룽의 반지》에는 나치주의자가 더 많이 왔으면 좋겠다. 다른 의견 또 있으면 알려주시라.

그러니까 이날 공연에 연예인들이 잔뜩 왔다네요. 그러나 이날 핵심은 역시 '안나 니콜' 역을 맡은 소프라노 에바-마리아 웨스트브뤼크(Eva-Maria Westbroek)입니다. 아랫글 제목에서부터 나타나듯이, 참… 건강하네요. ^^;

Anna Nicole the Opera ( . Y . ) in photos

지금부터는 사진 위주로 갑니다.

아래 사진은 ☞이곳에서 퍼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리승환님의 ☞명언(?)을 인용하고픈 욕망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무젖유죄 유젖무죄"

나중에 붙임: 동영상도 나왔네요!

2011년 2월 7일 월요일

소프라노 캐슬린 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닉슨 인 차이나》에서 장칭(江青) 역으로 호평

존 애덤스(John Adams)가 가 쓴 오페라 《닉슨 인 차이나》(Nixon in China)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이 1972년 미국 대통령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사건을 다룬 오페라입니다. 이 오페라는 1987년 휴스턴 오페라에서 존 드메인(John DeMain) 지휘로 세계초연되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지난 2월 2일에 초연되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한국인 소프라노 캐슬린 김(Kathleen Kim)은 마오쩌둥(毛澤東) 셋째 부인 장칭(江青, 1914~1991) 역을 맡았습니다. 음악평론가 앤서니 토마시니(Anthony Tommasini)는 『뉴욕 타임스』 리뷰에서 캐슬린 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캐슬린 김은 악의에 찬 마오 부인의 신경질적이고 앙칼진 노랫가락에 미친 듯한 사나움을 담아냈다. (The coloratura soprano Kathleen Kim delivered the skittish, shrieking vocal lines of the malevolent Madame Mao with maniacal intensity.)

http://www.nytimes.com/2011/02/04/arts/music/04nixon.html

『나머지는 소음이다』를 쓴 음악 평론가 알렉스 로스(Alex Ross)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개한 동영상 가운데 캐슬린 김이 부른 아리아 "나는 마오쩌둥의 아내"(I am the wife of Mao Tse-tung)를 ☞블로그에 따로 소개했습니다.


▲ 장칭. (캐슬린 김은 그러니까 코스프레;;)

캐슬린 김은 서울예고, 맨해튼 음대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4번째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입니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kathleenkim.com

아래 동영상은 오펜바흐 《호프만 이야기》(Les Contes d'Hoffmann) 가운데 인형 올림피아가 부르는 "나무 숲속의 새들"(Les oiseaux dans la charmille)입니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작곡가·음악이론가 밀턴 배빗 타계, 향년 94세

밀턴 배빗(Milton Babbitt, 1916~2011)은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할 만한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입니다. 본디 수학자 출신이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음악교수와 수학교수를 모두 지냈습니다. 12음 음렬 이론을 체계화하고 확장·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고, 전자음악에도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배빗은 음악이론가 앨런 포오트(Allen Forte, 1926~)와 더불어 음악이론이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대음악을 분석할 때 곧잘 쓰이는 이른바 '집합이론'(Set Theory)의 주요 개념을 세웠습니다.

배빗은 현대음악이 대중과 동떨어지는 현실이 그다지 문제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수학이나 물리학 논문을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듣건 말건 누가 신경 쓰겠는가?"(Who Cares if You Listen?)라는 글이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High Fidelity 8/2(1958), pp. 38~40). 이 글에 본디 배빗이 붙인 제목은 "전문가로서의 작곡가"(The Composer as Specialist)입니다.

※ 보통 '밀튼 배빗'이라 쓰지만, 이 글에서는 표준외래어표기법을 따라 '밀턴 배빗'이라 썼습니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TIMF앙상블 〈한국작곡가의 밤〉 연주회 짧은 감상

TIMF앙상블 〈한국작곡가의 밤〉
2010년 12월 15일(수) 19:30
영산아트홀

홍성지             Tempestuous (2010) *  
이홍석             Sempre mormorando für Flöte und Klavier (2010) **  
신나라             Echo (from Scene1) (2009)  
배동진             Stille suchen für Klavier, Vibraphone und Violine (2006/07) *  
나실인             Pilgergesang für Flöte, Violine und Violoncello (2010) ***  
박용빈             3 Toccatas and 2 Interlude for Large Ensemble (2010) ***

(***TIMF앙상블 위촉 세계 초연  **세계 초연  *아시아초연)

공짜 표를 준다기에 날름 신청했는데 대부분 모르는 작곡가다. 딱 한 사람, 홍성지는 내가 연주회 ☞리뷰를 쓴 일도 있어서 익숙한 이름이다. 서울시향이 홍성지한테 위촉한 피아노 협주곡이 가장 좋았는데 이제 보니 내가 리뷰를 안 썼나 보네. 아무튼, 제목 같은 것 다 잊어버리고 팸플릿도 없이 그냥 들었다.

※ 나중에 붙임: 알고 보니 첫 곡이 홍성지 《Tempestuous》였다고 한다. 급하게 준비한 탓에 연주가 썩 잘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좋게 들었던 곡은 신나라 《Echo (from Scene1)》였다. 이에 따라 내용을 고쳤다.

첫 곡이 피아노 독주곡이었으니, 홍성지 《Tempestuous》였나 보다. 화음 또는 클러스터를 퍼붓는 대목이 퍼니호우(Ferneyhough)랑 비슷했으나 그보다는 조금 얌전하다 싶었다. 이런 음악은 악보를 보면 몹시 복잡하겠으나 막상 귀에 들리는 소리는 차라리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이런 곡은 크지 않은 방에서 연주하면 제법 그럴싸할지도 모르겠지만, 영산아트홀이 생각보다 커서 피아노를 마구 두드려대어도 그에 걸맞은 음량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근접 마이킹(miking)해서 스피커로 쏴 주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전자음악 별거 있나.

이홍석 《Sempre mormorando für Flöte und Klavier》는 웬만하면 평범한 연주법을 쓰는 얌전한 음악이어서, 현대음악 맥락을 떠나 그냥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조성이 드러나지도 않고 선율이 귀에 쏙 들어온다거나 하지도 않아서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음악이 참 길기도 하더라. 무엇보다 얌전하기만 하고 제대로 때려 부수는 '한 방'이 없어 불만이었는데, 나중에 제목을 보니, 음… 속삭이는 음악이라는데 어쩔껴…-_-; 3악장(?)이었나, 피아노가 재즈 리듬에 저음군과 고음군이 대략 유니슨으로 연주하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신나라 《Echo (from Scene1)》는 이날 연주된 곡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으며, 홍성지 곡으로 잘못 알았다가 나중에 바로 알고 작곡가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가사를 한두 단어씩 끊어서 툭 툭 던지듯 말하는 대목은 딱히 낯설지는 않았지만, 가사가 우리말이다 보니 그 뜻에 자연스럽게 집중되며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음악 속에 묻혀서 잘 안 들리는 가사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한 강박감이 생기기도 했으나 곧이어 그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베토벤 교향곡 9번에서도 몇몇 단어만 두드러져 들릴 뿐 모든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음악학자 주대창이 한 말을 빌자면, 이 곡에서 가사는 승화적(昇華的)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한두 단어씩 끊어지는 가사 내용은 초현실적이었고, 그에 걸맞게 살짝 헤테로포닉한(?) 음악과 맞물려 마치 숨 가쁘게 교차편집된 영화를 보는 듯했다.

배동진 《Stille suchen für Klavier, Vibraphone und Violine》는 타악기 따위를 쿵 두드렸다가 재빨리 소리를 죽였을 때, 살짝 남은 소리가 악기 울림통 속에서 울리고 연주회장을 한 바퀴 돌며 또 울리다 마침내 귀에 들리는 소리를 잘 살린 대목이 인상 깊었다. 그런데 나중에 제목을 보니 "Stille suchen"이라, 제목 참 잘 지었다. 곡이 끝날 무렵 비브라폰을 손으로 두드려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저음에서 고음으로 꾸준히 올라가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이날 연주된 곡 가운데 두 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

나실인 《Pilgergesang für Flöte, Violine und Violoncello》는 들으면서는 참 잘 쓴 곡이라 생각했지만, 어째 집에 와서 기억에 남은 게 거의 없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었기 때문일까. 현을 활로 두드리고 박박 긁거나 글리산도로 왔다갔다하는 등 현 소리를 다채롭게 살린 대목이 훌륭했다.

박용빈 《3 Toccatas and 2 Interlude for Large Ensemble》는 처음에 화음 또는 클러스터 하나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대목이 홍성지 《Tempestuous》와 비슷했으며, 이거 혹시 유행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곧이어 음악이 요란해지는 대목부터는, 귀로 듣기에는 참 좋았지만… 어째 존 애덤스랑 너무 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앞에 나온 화음을 가지고 변주 비슷하게 했나 싶기도 한데, 그건 악보를 봐야 알 수 있겠지. 그런데 연주 끝나고 인사할 때 보니 참 어리다. 혹시 학부생? 곡을 짜임새 있게 이끌어 가는 솜씨와 음색을 맛깔스럽게 살리는 솜씨가 매우 훌륭하던데, 기억해 두어야 할 이름이다.

2010년 6월 6일 일요일

메시앙 《잊혀진 제물》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라벨 《어미 거위》 《라 발스》 ― 비비아네 하그너 / 정명훈 / 서울시향

2010-05-20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명훈
협연: Viviane Hagner

메시앙, 잊혀진 제물 Messiaen, Les Offrandes oubliées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Chin, Violin Concert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ère l’Oye
라벨, 라 발스 Ravel, La Valse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5년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는 유럽 무대에서도 꿀리지 않을 기량을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유럽 무대에서 연주한다. 억지로 만들어낸 연주회가 아니라 정식으로 초청받아 갔다고 한다. 김주호 대표 말처럼, 이제는 서울시향이 유럽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뜻이다. 정명훈이라는 거장이 지닌 이름값만으로 악단이 덩달아 인정받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그만한 실력을 길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덜 됐을 때는 안 하는 게 나아요. 괜히 창피만 당한다고. 하지만 이젠 준비가 됐어요. 적어도, 유럽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 겁니다.”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단다. 지난 5년 동안 서울시향을 지켜본 글쓴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석급 단원들은 웬만한 유럽 지방악단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실력을 지녔고, 그 가운데 한둘은 유럽에서도 수석 자리를 노릴 만하다. 몇몇 외국인 단원은 유럽 악단 수석을 겸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있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이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이다. 역사와 전통 없이 현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유럽에 간다는 말은 현이 그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현악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응집력이 때때로 유럽 수준을 살짝 넘보게 된 때가 지난해 즈음이다. 실수 없이 악보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일이 지난해부터 차츰 늘고 있다. 악기군끼리 어우러짐 또한 크게 늘었다.

이날 연주회는 유럽에서 연주할 곡들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 가운데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장 반가웠다. 서울시향이 이 곡을 연주한 일이 두어 차례 있지만, 글쓴이는 그때마다 다른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 실연은 이날 처음 들었다. 아직 악보를 개인에게 팔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빌려주기만 하는지라 글쓴이는 이 곡을 음반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는데, 이날 연주를 들어보니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몬트리올 심포니 녹음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은 마림바와 여러 타악기 따위를 음반보다 앞세워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 또는 악기) 느낌을 조금 더 살렸고,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등하게 어우러져 교향곡 느낌마저 들었다. 스튜디오 작업을 거친 음반이 실연과 다른 탓도 있겠으나, 그것을 헤아려도 이날 타악기가 독주 바이올린 소리를 자신 있게 치고 나올 때가 잦았다.

1악장에서 큰북이 내는 묵직한 소리가 독주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는 대목을 글쓴이는 참 좋아하는데, 이날 시향 타악기 연주자 김문홍이 무대 오른쪽에서 큰북을 맡아 마치 바이올린과 2중주를 하는 듯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무대 왼쪽 벽 가운데쯤에 바짝 붙어서 글록켄슈필과 갖가지 타악기를 연주했고, 김미연은 무대 왼쪽 뒷벽에서 마림바 따위를 연주하는 등 타악기만으로도 입체감을 주었다.

여기에 다른 악기 소리가 마치 살아있는 빛알갱이처럼 뭉치고 흩어지곤 했으며, 독주 바이올린은 빛 가루를 뿌리며 무리를 이끌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빛 요정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이럴까. 협연을 맡은 비비아네 하그너는 어렵기로 소문난 이 곡을 마치 가볍게 몸 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곤 했으나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라벨 관현악곡은 화려한 색채감을 빼면 짜임새가 단순해서 연주자의 해석이 끼어들 곳이 적으며, 음색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살리느냐가 연주자에게 중요할 때가 잦다. 이날 연주된 《어미 거위》 모음곡과 《라 발스》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지휘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지휘자 못지않게 악단이 많은 주목을 받게 할 수 있으니 서울시향을 유럽에 알리기에 매우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이날 연주는 시시콜콜 따질 일 없이 그저 좋았다고만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이미 여러 차례 연주한 일이 있어서 서울시향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곡이라고도 할 만한 《라 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미 거위》 모음곡 또한 심각한 표정 지을 일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곡에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메시앙 《잊혀진 제물》도 훌륭했지만, 사납게 몰아치는 가운데 부분에서 현이 조금 더 단단히 뭉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싶었다. 서울시향이 앞으로 더 나아질 곳이 얼마든지 있음이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하겠는데, 정명훈 말마따나 이번 유럽 연주 여행이 “서울시향의 단원들에게 큰 공부와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오케스트라를 보면서 자신들을 되돌아볼 기회도 생길 테고, 음향이 훌륭한 연주회장을 두루 경험해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눈이 잔뜩 높아질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전용 연주회장이다. 계획에 차질 없이 하루빨리, 그러나 음향에는 배려에 모자람 없이 지어지기를 바란다.

2010년 5월 6일 목요일

국제 윤이상 협회 2010년 데모 CD

국제 윤이상 협회에 인터넷으로 가입했다가 돈은 안 냈는데 데모 CD가 왔더라는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2008년 일인데 두 해 만에 또 왔네요. 앗싸 득템~

참고: ☞ 〈국제 윤이상 협회 2008년 데모 CD〉 http://wagnerian.textcube.com/363

음반 정보는 윤이상 협회 홈페이지에서 퍼옴:


Isang Yun - CD 8 (CD IYG 008 of the International Isang Yun Society, © 2010, P 2010)

Réak for large orchestra (1966)

14'06

 

SWR Sinfonieorchester Baden-Baden and Freiburg, Hans Zender

 

2

Harmonia for wind instruments, harp and percussion (1974)

14'35

 

Radio-Sinfonieorchester Basel, Heinz Holliger

 

3

Symphonsiche Szene for large orchestra (1960/61)

13'23

 

Sinfonieorchester des Südwestfunks, Bruno Maderna

 

 

 

 

4

Konzertante Figuren for small orchestra with flute, violin and oboe (1972)

18'40

 

Roswitha Staege (flute), N.N. (violin), Jochen Müller-Brincken (oboe), Bochumer Symphoniker, Kyung-Soo Won

 

 

 

 

 

 

 

 

Total running time:

61’19

CD IYG 008 of the International Isang Yun Society, © 2010, P 2010


한스 첸더 지휘, SWR Sinfonieorchester Baden-Baden이 연주한 《예악》 2001년 녹음이 있네요! 돈 주고 살 수 있는 《예악》 음반으로는 1966년 에른스트 부어 지휘로 아마도 세계초연 녹음한 것이 있고, 스테판 애즈버리―베를린 도이체 오케스트라 2001년 녹음,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참고: http://discography.goclassic.co.kr/show.html?code=works&keyfield=fid&key=8147

첸더 녹음은 애즈버리보다는 부어 녹음과 닮은 곳이 더 많은 듯한데, 자세한 내용은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일단은 말로만. ㅡ,.ㅡa)

국제 윤이상 협회에서 온 우편물에는 언제나 독일어로만 된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_-; 언제나 그렇듯이 돈 내라는 얘기가 핵심이지 싶은데, 혹시나 다음에는 돈 안 내면 CD 안 보내준다는 말이 있을까 싶어서 구글 번역기 돌려 봤습니다. 그냥 돈 좀 내줬으면 고맙겠다는 말만 있네요. 그래서 언젠가는 돈 내겠다고 생각만… ㅡ,.ㅡa

번역기 돌리려고 타이핑해 놓은 게 아까워서 올려 둡니다.

Unsere Neuveröffentlichung mit Orchesterstücken aus Isang Yuns erster Schaffensphase inn Europa erscheint im Jahr seines 15. Todestages und ist ein weiterer Versuch, Yuns Kompositionen und ihren spezifischen Aufführungsstil zu dokumentieren.

Bei den bisher kaum bekannten Archivaufnahmen handelt es sich um Dokumente einer vergangenen Orchesterkultur, die die Chance verdienen, von neuem und neu gehört zu werden ― wie auch die Werke durch weitere Aufführungen fortleben sollten.

Wir überreichen die CD IYG 008 unseren Mitgliedern und Freunden, ausübenden Musikern sowie einigen Redakteuren und Journalisten. Finanziert wird ihre Herstellung ausschließlich durch die Mitgliedsbeiträge der Internationalen Isang Yun Gesellschaft e. V. sowie durch private Zuwendungen.

Diejenigen, die an der CD Gefallen finden, bitten wir, die Arbeit am Werk Isang Yuns mit einer kleinen Spende zu unterstützen.

2010년 3월 31일 수요일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 김소옥 /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 서울바로크합주단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45주년 기념 특별정기연주회Ⅰ

2010년 3월 16일(화) 저녁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지휘: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 Piotr Borkowski
• 바이올린: 김소옥
• 색소폰: 그렉 바나스작 Greg Banaszak
• 오보에: 사토 키아오야마 Satoki Aoyama
• 클라리넷: 히데미 미카이 Hidemi Mikai
• 호른: 마코토 가나보시 Makoto Kanaboshi
• 바순: 모토코 가와무라 Motoko Kawamur

• A.Vivaldi - Concerto for 2 violins & 2 cellos in G major F.IV/1
• F.Chopin - Suite Chopiniana (이윤국 편곡) 한국초연
• Pierre Max Dubois - Concerto for Alto Saxophone & Orchestra
• W.A.Mozart - Sinfonia Concertante for Winds in E-flat Major, K.297b
• 류재준 - Violin Concerto No.1 Op.10 한국초연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문화예술위원회 평가 대상 공연에서 연주된 다른 창작곡과 견주어 압도적인 예술성을 자랑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훌륭했으나 악단이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수준에는 조금 못 미쳤으며,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현대음악에 어울리는 음향을 충분히 살려냈다 하기 어려웠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을 보이며, 이러한 대목에서 이날 연주된 곡들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빼면 다른 곡들과 연결고리가 탄탄하다 하기 어려우며, 이날 전체 공연 구성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미화하기에는 난잡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미 낙소스(Naxos)에서 음반으로 발매했을 만큼 뛰어난 곡임이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 곡을 한국 초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공연은 그 가치가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김원철은 공연 관계자와 이렇다 할 친분관계가 없다. 그러나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김민은 한국바그너협회를 만든 사람으로 자칭·타칭 바그네리안인 김원철이 김민의 업적과 영향력을 존경해 마지 않음을 밝혀 둔다.

작곡가 류재준이 대표이사로 있는 ㈜오푸스에서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류재준 음악을 두고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장르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성과"라 했다는 마리안 보르코프스키(Marian Borkowski) 폴란드 쇼팽 음악원 교수의 평이 눈길을 끈다. 원문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네오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은 류재준을 알리는 데 알맞은 말이라 보기 어려우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첫째, '바로크'(Baroque)라는 말에 '―ism'을 붙이려면 '바로키즘'(Baroquism)이라 해야 옳다. 'Classicism'(고전주의)와 'Romanticism'(낭만주의)를 흉내 내느라 별생각 없이 '바로크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모양이나, 음운론에 비추어 보면 무지를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둘째,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와는 달리 바로크 양식에는 본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고전주의·낭만주의를 '―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계몽주의 및 시민사회 담론과 얽힌 사회 이념 또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은 예술 양식일 뿐이므로 이념을 뜻하는 '주의(―ism)'라는 말을 붙일 까닭이 없다. 다만, 20세기 예술사를 헤아린다면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을 어떤 예술사조를 뜻하는 말로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셋째,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바로크 양식에서 무엇인가를 되살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서양음악 작곡가들이 바로크 양식을 끌어다 쓴 일은 드물지 않으며, 그러한 작품을 모두 '네오바로키즘'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뒤따른다.

'네오바로키즘'이라는 말은 아마도 류재준 스승인 펜데레츠키 후기 양식을 일컬어 때때로 '신낭만주의'(Neo-Romanticism)라 하는 일과 관련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류재준 음악이 '신낭만주의'와 구분되는 특징을 찾던 마리안 보르코프스키는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보다 바로크 양식과 닮은 곳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으리라 짐작된다. 자세한 맥락을 알려면 펜데레츠키 음악 양식 변화를 20세기 음악사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인류가 무한히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바탕에 두었으며, 이것이 모더니즘으로까지 이어졌다. 19세기 기능화성이 12음 기법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았고,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 음악은 그것이 발전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몇몇 작곡가가 일찍이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던지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나타나고 나서야 이것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이 내놓은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은 '구조'와 '발전'을 따지던 패러다임을 비틀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새롭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음악 전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펜데레츠키는 1965/66년 《누가 수난곡》에서부터 20세기 작곡가들이 일부러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적 음악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른바 '신낭만주의'를 거쳐 다원주의(Pluralism) 양식으로까지 이어졌다.

펜데레츠키는 1982년 『첼로협주곡 2번』으로 신낭만적 음악경향에서 벗어났다. 낭만적 이상과 연결시킴에 따라 때때로 펜데레츠키는 자신의 초기 양식을 부정했어야만 했다면,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다원주의를 추구함에 따라 즉 "옛" 펜데레츠키를 다시 새롭게 복원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는 펜데레츠키는 양식의 연속성을 확고히 하고(즉 작곡 양식 발전의 단절을 없애고), 또한 양식의 다원주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원주의 Pluralismus〉는 한편으로 순수한 조성을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초기의 소음적 양식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 보다 폭 넓은 차원의 양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 오희숙, 『20세기 음악 I: 역사·미학』 (서울: 심설당, 2006). 314쪽.

음악이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펜데레츠키는 이렇게 무너뜨렸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이러한 역사를 잇는 작품이며, 많은 곳에서 펜데레츠키 후기 음악 양식이 엿보인다. 펜데레츠키가 즐겨 썼다는 단2도 음형인 이른바 '탄식' 모티프가 작품에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악보 맨 앞에는 이 곡을 펜데레츠키에게 헌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펜데레츠키가 류재준을 후계자로 선언했다고도 한다.

예술 작품이 다른 사람이 쓴 작품과 비슷하다는 말은 으레 칭찬이 아니다. 그러나 베베른과 베르크를 쇤베르크의 아류라 하지 않듯이, 류재준 음악이 펜데레츠키와 닮았다고 해서 류재준 음악을 낮추어 볼 까닭은 없다.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는 펜데레츠키 작품에서 곧잘 나타나는 탄식과 절망도 있으나 그 못지않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힘찬 리듬이 얽히는 대위법과 "말러처럼 강렬한 클라이맥스"(exquisitely scored, almost Mahler-like climaxes; 마리안 보르코프스키), 정교한 관현악법 등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펜데레츠키, 루토스와프스키, 구레츠키와 류재준 등을 묶어서 '바르샤바 악파'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바르샤바' 하면 쇼팽이 먼저 생각나니 '신 바르샤바 악파'라 해도 좋겠다. 신빈악파와 닮은 말이라 더욱 좋다. '신 바르샤바 악파'의 음악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양식적 다양성을 보이면서 무엇보다 오래 듣기 부담스러울 만큼 진지하고 엄숙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주는 그저 무난했으며, 다른 작품을 제법 훌륭하게 연주한 일과 견주어 보면 류재준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곳곳에서 리듬이 뭉개지거나 현대음악다운 음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대목에 아쉬움이 남았다. 지휘자 피오트르 보르코프스키는 세계초연 지휘자이자 낙소스(Naxos)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지휘를 맡은 바 있으니, 아무래도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이 연주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 곡에서 가장 멋진 곳이 'Misterioso'(마디 428)부터 끝까지라고 생각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엇갈린 리듬으로 마치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텍스처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글록켄슈필이 두 차례 맑게 울린 다음, 팀파니와 탐탐 따위가 갑자기 '빠바밤 빠바밤' 하고 세게 두드려대면서 음악이 끝난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마치 사람들이 웅성거리듯 현이 두루뭉술한 리듬을 만들어낸 데다가 글록켄슈필이 이끌어 내는 음색 대비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끝내 타악기가 조금은 뜬금없이 쿵쾅거리다 끝나버리고 말았다. 세계초연자이기도 한 김소옥의 협연은 훌륭했다.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2010.01.28 김도윤 《디베르티멘토》 /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 리게티 《라미피카시옹》 ― 이병욱 / TIMF앙상블

TIMF앙상블 ‘사통팔달[四通八達] 시리즈 1’ 《메타모르포젠》

2010년 1월 28일(목) 오후 8시 00분
호암아트홀

이병욱 지휘
TIMF 앙상블

김도윤 Doyun Kim, 《디베르티멘토》 Divertimento for 13 strings
펜데레츠키 K. Penderecki, 《샤콘느》 Chaconne
김정길 Chung-Gil Kim, 현악합주를 위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 TIMF앙상블 위촉
- 휴식 -
리게티 G. Ligeti, 《라미피카시옹》 Ramification (version for 12 solo strings)
R. 슈트라우스 R. Strauss,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 for 23 strings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TIMF 앙상블은 다른 악단과 견주어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으며 연주회 프로그램도 매우 훌륭했다. 창작곡 또한 다른 공연에서 연주된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뛰어났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호암아트홀이 현대음악과 어울리는 연주회장인지는 의심스러우나, 이날 프로그램은 호암아트홀 실내음향과 썩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김도윤 작품은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처럼 잔향이 좀 더 짧은 곳에서 연주되었다면 느낌이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창작곡은 전체 공연과 조화를 이루는 본격 현대음악이었다.

공연 시작에 앞서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이 연주회 해설 강연을 열었는데, 내용은 훌륭했으나 사전 공지가 없었고 연주회장 밖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로 진행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TIMF 앙상블은 본격 현대음악 전문 연주 단체로, 그것만으로도 예술위원회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높다. 연주 실력 또한 매우 뛰어나고 창작곡 또한 훌륭하므로 지원 가치는 더욱 높다.

▶ 총평


※ 공연 관계자와 김원철의 친분 관계 요약

작곡가 김정길은 서울대학교 작곡과 교수였다가 퇴임했고, TIMF 앙상블 예술감독 최우정은 현재 같은 과 교수이며, 작곡가 김도윤은 같은 과 학생이다. 김원철은 같은 과 이론 전공 석사이나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으며, 이론 전공은 작곡 전공과는 사실상 학과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김도윤은 이날 처음 알았고, 최우정은 서로 얼굴 알아보고 인사할 만한 친분은 있으며 서울시향이 최우정에게 위촉한 첼로 협주곡 초연 리뷰를 김원철이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기고한 일도 있다. 김정길은 작곡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컸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김원철이 완벽하게 객관적인 평을 하지 못하리라 의심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렵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팸플릿에 있는 작품 설명이 어렵다. 그러나 음 소재를 조각내고 비틀어 음악을 이끌어 간다는 아이디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멀리는 브람스나 베토벤까지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요즘 작곡가 가운데에는 크리스 폴 하르만(Chris Paul Harman) 같은 사람도 김도윤과 닮은꼴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짜임새로 나타나는가이며, 무엇보다 이론적인 장난질에 그치지 않고 감상자에게 듣는 재미를 주느냐이다.

김도윤 《디베르티멘토》는 '듣기 좋은' 작품이었다. 현대음악인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음악치고 그다지 어렵지 않고 뭔가 엉뚱한 연주법을 쓰지도 않으면서도 어딘가 귀를 즐겁게 하는 곳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진동하는 듯한 화음 또는 음 덩어리(Cluster)가 조성감을 얼핏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긴장감을 이룬 대목이나 콘트라베이스가 피치카토 음형으로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운 (악보를 보면 생각보다 머리를 쥐어뜯게끔 하는) 리듬을 이끌어가며 만들어 내는 박진감 따위가 멋졌다. 무엇보다 작곡가가 '변주곡의 원리'를 말한 만큼 음 소재를 짜임새 있게 이끌어 가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곡가가 1984년생이란다. 이 '어린놈'이 이토록 멋진 곡을 썼다니, 나는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외쳐주었다. "브라보!"

고백하건대 나는 김정길 작품을 이날 처음 들었다. 현대음악에 거부감은 없으나 국내 작곡가 작품을 일부러 찾아 들을 정도는 아니다 보니 이름은 익히 들어온 작곡가라도 작품은 모르는 일이 더러 있다. 이날 연주된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을 들어보니 김정길이 윤이상 제자였다는 사실이 곧바로 떠올랐다. 윤이상 수제자로 보통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를 꼽는데, 이제 보니 음악 양식만 따지자면 김정길이야말로 윤이상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물려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를 비롯한 음악학자들은 윤이상 음악을 가리켜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며 "동아시아적인 것을 서구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자국적 전통과 융합시키면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적"이라 했다. 그러나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의 융화가 아니라 "이주민 고유의 전통적 특색들이 서구 사회에 동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고 상실되는 원리가 윤이상에게도 적용"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윤신향,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 파주: 한길사, 2005.)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융화'가 아니라 '동화'인 까닭은 음악을 이루는 두 세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정길 《올래, 오름, 그리고 백록담》은 화음과 장식음 따위가 윤이상과 닮은꼴이면서도 음계와 리듬 등에 한국적인 요소가 조금 늘어서 '두 세계' 사이가 좀 더 균형 잡힌 음악이었다. 20세기 서양음악사와 온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윤이상과는 여러모로 처지가 달랐으리라.

리게티는 《라미피카시옹》(Ramification)에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 첫째 그룹이 표준 조율법보다 4분음 높게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또한 둘이 섞여 있어서 안개처럼 흐릿한 소리가 되게끔 했는데, 리게티는 두 그룹이 따로 연습한 다음 마지막 연습 때에는 무대에서 따로 앉아 연주하고, 실제 공연에서는 섞여 앉도록 제안했다. 그런데 이날 TIMF 앙상블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두 그룹이 나뉘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섞여 앉았다면 연주자끼리 서로 영향을 주면서 오히려 소리가 엉망이 될까 걱정한 탓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거나 '안개' 음향은 제법 그럴싸하게 살아나서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연주는 매우 훌륭했으며, 딱 한 군데 아쉬웠던 곳을 말하자면 마디 101에서 콘트라베이스가 악보에서 지시한 만큼 '위협적이고 잔인하게'(minaccioso brutale) 연주하지 못한 대목이었다. 이곳에서 콘트라베이스는 활을 지판 쪽에서 매우 여리고 부드럽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매우 세게 ― ffff에서 ffffff로 크레셴도 ― 폭발하듯 박박 긁어대야 한다. 곧이어 활이 줄받침(bridge)과 지판을 오가며 꾸준히 음색을 바꾸면서 길게 연주해야 하는데, 마디 106에서 바이올린 하모닉스 음형이 더해질 때까지 다른 모든 악기는 침묵하면서 이 대목이 자연스럽게 곡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그러나 이날은 콘트라베이스 한 대로 이 대목을 연주하느라 음량이 크게 모자랐고, 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긁어대지도 않았다.

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2009.10.13. 홍성지 〈귀천〉 / 〈Gloria〉-《Missa 'Lumen de Lumine'》 etc ― 박치용 / 서울모테트합창단 /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2009년 10월 13일 오후 8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지휘자: 박치용
협연자: 김영미/sop 유소영/sop 박은주/alt 송기창/bar 김현정/org

Mendelssohn - ‘Magnificat(한국초연)’ ‘Psalm42 op.42’ ‘Hör mein Bitten’
홍성지 - 〈귀천〉, 《Missa 'Lumen de Lumine'》 가운데 〈Gloria〉
박성춘 - 〈눈이 오는 밤〉, 〈바람의 시〉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연예술창작기금지원사업으로 기획한 국민평가단 평가 자료를 겸하는 글이며, 평가서 항목에 맞추어 썼음을 밝힙니다.

▶ 공연작품의 예술적 수월성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외국 일류 합창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합창단이 아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가장 훌륭한 합창단이라 할 수 있고, 열악한 환경까지 생각하면 이런 훌륭한 합창단이 2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이날 연주회는 국내 합창단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가장 훌륭한 연주회였으며, 박치용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창작곡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 공연계획 실행의 충실성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은 음향이 제법 훌륭한 연주회장이다. 그러나 홍성지 작품은 일반적인 연주회장이 아니라 잔향이 긴 성당에서 연주했더라면 좋았겠다. 멘델스존 작품도 종교곡인 만큼 잔향이 길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며, 전자오르간 소리는 성당에서 울리는 진짜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박성춘 곡은 음악 양식이 다른 작품과 어울린다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연주회 내내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서 짜증이 났다. 관객이 그랬으리라 믿기는 어렵고 합창단 또는 연주회장 관계자 아니면 기자였을 터인데, 합창단·연주회장 관계자라면 반성이 필요하겠고 기자였다면 감히 '기자님'을 나무라기는 어려웠을 터이니 합창단 측에 위로를 보낼 일이다.

▶ 공연성과 및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

합창단이 자생하기 어려운 국내 환경을 고려할 때 더 많은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서울시향처럼 독립 재단 형태로 지원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예술위원회 차원에서도 서울모테트합창단은 공연창작기금을 지원할 가치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 총평

작곡가 홍성지는 서울시향이 7개 악기를 위한 〈Beethoven Frieze〉와 피아노 협주곡 〈Prismatic〉을 연주한 일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호감을 느낀다. 홍성지 작품에서는 마치 공기 속에서 빛 알갱이가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마침 프로그램을 보니 인용해 놓은 평들이 모두 '빛'과 관련이 있다. 이날 연주된 〈귀천〉과 제목부터 빛이 나는 듯한 《Missa 'Lumen de Lumine'》 가운데 〈Gloria〉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 곡 모두 '빛깔'은 제각각이었으며, 〈귀천〉이 무지갯빛 뿌연 알갱이가 구름 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라면 〈Gloria〉는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온 빛이 요정처럼 교회 안을 날아다니는 듯했다.

〈귀천〉과 〈Gloria〉는 원래 합창곡이 아니라 각각 여성 4명과 3명이 부르도록 작곡되었으며, 음악 양식을 보면 잔향이 긴 교회 음향에 알맞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연주회 주체가 서울모테트합창단이므로 합창단이 이 곡을 부른 일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연주회장이 교회가 아니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이었던 점은 못내 아쉽다. 이곳은 잔향 시간이 관현악곡에 알맞게 맞춰져 있어서 마치 영화관에 햇볕이 쏟아지는 듯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또 작품이 주는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에는 합창단 기량이 모자라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특히 〈귀천〉에서 여린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대목이 답답했다. 나는 국내 합창단이 'pp'(매우 여리게)를 제대로 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는데, 〈귀천〉은 'pp'보다 더 여린 'ppp'를 정교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절반은 실패한 연주라 본다.

매우 느린 템포(♪ = 80) 때문에 길어진 호흡을 합창단원들이 견디지 못하는 듯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는 있는 듯 없는 듯했고, 여린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해서인지 모두쉼표(Generalpause)는 무시되었다. 곡을 끝맺는 음에서는 셈여림표가 ppp인 마당에 몇몇 사람이 중간에 숨을 쉬었다 새로 부르는 바람에 '만득이 현상'마저 나타났다.

이런 문제는 일차적으로 합창단원 개개인에게 원인이 있다 하겠으나 더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문제, 시스템 문제다. 성악 전공자가 실력이 어느 이상 되면 합창을 하건 오페라 가수로 나서건 유럽으로 가려고 할 뿐 한국에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매력적인 직업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Gloria〉에서는 여린 음과 느린 호흡보다는 리듬과 화음이 중요한 까닭에 〈귀천〉과 달리 약점이 드러나지 않고 합창단 솜씨가 돋보였다. 이 곡은 만약 14세기 교회 음악 양식이 새로운 기법을 매우 보수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중세·르네상스 양식에 현대음악 어법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데, 서울모테트합창단은 안정된 화음을 바탕으로 화려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장식음들을 잘 살렸으며, 이날 연주회를 통틀어 이 곡이 가장 인상 깊었다. 옥에 티 한 가지만 말하자면, 마디 52―66에서 종소리를 흉내 내도록 지시하고 있으나 이날 연주에서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나중에 고침: 2010년 4월 26일 최종 수정. 박성춘 작품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썼으나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내용을 지웠습니다. 〈바람의 시〉 등은 서울시구립여성합창단에서 의뢰한 작품으로, 합창단에서는 대중성 있는 조성음악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합창 음악 수요가 매우 적은 현실을 고려할 때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창작곡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저 또한 진심으로 공감하며, 그러한 사정을 헤아리고 나면 박성춘 작품은 흥행성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됩니다.

제가 비평문을 쓸 때에는 이러한 맥락을 알지 못했으므로 음악사에 비추어 작품을 판단할 때 양식적·기법적·미학적으로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어 예술적 가치가 낮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성춘 작품과 다른 합창 음악에 대해 판단 기준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단락 전체를 지웁니다. 다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는 이미 삭제되지 않은 전문을 전달했음을 밝힙니다.)

소프라노 김영미는 발성과 딕션이 매우 뛰어나서 반가웠다. 음색이 깊고 어두우며 이탈리아 오페라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는데, 요즘 유행하는 역사주의 연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서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고, 목소리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다면 바그너를 하면 좋겠으나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소프라노 유소영은 김영미 같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알토 박은주 목소리가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상대적으로 '강성' 이미지처럼 두드러졌다. 둘이 맡은 성부를 생각할 때 그 반대보다는 훨씬 낫다 하겠으나 좀 더 균형 있는 앙상블이 아쉬웠다.

바리톤 송기창은 묵직하면서도 맑고 단단한 목소리로 멜리스마(melisma; 모음 하나에 장식적인 음형이 길게 이어지는 선율)를 날렵하고 깔끔하게 살려서 매우 인상 깊었다. 소프라노 김영미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에너지는 없어서 바그너를 부르기에는 알맞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쉬웠으며, 모차르트를 부르면 매우 멋질 듯했다.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이름에서 짐작게 하는 탄탄한 재정 때문인지 연주력이 웬만한 지방 시향보다 나아 보였다. 트럼펫과 팀파니가 매우 돋보였고 다른 관악기도 훌륭했다. 단점 하나만 말하자면 현악기 연주자들이 숫자에 적당히 묻어가려는 이른바 '안전빵 보잉'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은 한국 오케스트라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다.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2009 명지국제현대음악제

명지대학교 음악연구소가 주관하는 <2009 Myongji International Contemporary Music Festival>이 10월 8일(목)과 9일(금) 이틀 동안 명지대학교 용인캠퍼스에서 열린다. 2006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제4회를 맞이하는 이번 <2009 명지국제현대음악제>에서는 미국, 독일, 러시아, 폴란드, 홍콩과 국내의 저명 음악가와 음악학자들이 참가하여 다채로운 학술행사와 연주회 그리고 마스터클래스를 꾸밀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의 스티븐 브런스(Steven Bruns)교수가 죠지 크럼의 음악과 작곡기법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이며, 러시아 모스크바 콘써바토리의 안톤 로브너(Anton Rovner)교수가 <러시아 현대음악의 최근 경향>이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MICMF에 관한 자세한 문의는 명지대학교 음악학부(031-330-6311).

― 서양음악학회 뉴스레터에서 퍼옴

2009년 9월 6일 일요일

2009.06.05. 라벨 어릿광대의 새벽노래 / 히그던 타악기 협주곡 / 프랑크 교향곡 d단조 - 콜린 커리 / 성시연 / 서울시향

2009년 6월 5일(금)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Colin Currie (percussion)

Ravel, Alborada del Gracioso
Higdon, Percussion Concerto
Franck, Symphony in d minor, Op. 48



성시연은 이미 여러 차례 서울시향을 객원 지휘했으며, 이번에 마침내 서울시향 부지휘자가 되어 이날 첫선을 보였다. 글쓴이는 지난 2월 19일 연주회 때부터 성시연이 참된 솜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쓴 바 있는데, 이날 라벨 <어릿광대의 새벽 노래>를 듣고 나서 내 생각이 맞았다는 믿음이 생겼다. 연주회 첫 곡을 이만큼 다듬었다면 시향 부지휘자로 모자람이 없다.

히그던 타악기 협주곡은 협주곡답지 않게 타악기와 오케스트라가 나란하지 않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악기가 음악을 이끌어가는 동안 오케스트라는 '반주' 노릇에 그치며, 그 때문에 협주곡이라기보다는 '타악기를 위한 오페라 아리아'에 가까워 보였다. 더군다나 카덴차에 이르니 이제까지는 카덴차를 맞이하는 전주곡이었을 따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작곡가가 뒤로 물러난 만큼 협연자를 앞세우고 있으니 콜린 커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콜린 커리는 지난 2007년 5월 24일에 제임스 맥밀런 <베니, 베니, 엠마누엘>을 협연하여 큰 박수를 받았는데, 이날도 현대음악치고는 듣기 어렵지 않고 음 소재가 적당히 신기한 곡으로 객석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프랑크 D 단조 교향곡이 초연된 1889년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과 말러 교향곡 1번이 초연된 해이기도 하며, 두 해 앞서 브루크너는 교향곡 9번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내놓은 지는 스무 해도 넘었다. 20세기 음악이 얼추 이 무렵부터 비롯하였음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몹시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크는 브람스만큼 꼼꼼한 논리를 이 곡에 담아내지도 못했다. 차이콥스키처럼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율도 없다. 그럼에도 프랑크 교향곡이 훌륭한 곡임은 틀림없다. 다만, 곡이 여러모로 무뚝뚝한 만큼 연주마저 어정쩡하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또한 지난 글에서 성시연이 '노력파 모범생'같은 지휘자라 여러 차례 쓴 바 있다. 이 말은 성시연이 잔꾀를 쓰기보다는 정직하게 음악을 풀어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날 프랑크 교향곡이 자칫 너무 맨송맨송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웬걸, 잔꾀 없이 올곧은 해석만으로도 음악은 너무나 훌륨했다. 지휘자나 악단이나 기초 '내공'이 탄탄하여 소리를 야무지게 다듬어 풀어냈는데다가 연주회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성시연의 정직함이 드러난 곳, 거꾸로 말하면 '꼼수'를 쓰기 좋은 곳을 몇 군데 살펴보자. 1악장 느린 도입부에서는 악보에 없는 아첼레란도를 크레셴도에 얹어서 '베토벤스러운' 도움닫기를 할 수 있으며 푸르트벵글러가 바로 그렇게 했다. 첫째 주제가 나타나는 마디 29에서는 도입부가 사나울수록 마르카토에 가깝게 박박 긁어댈 수 있다. 그러나 성시연은 넉넉하되 사납지 않은 크레셴도와 가파르지 않은 템포로 처음부터 '발작'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 첫째 주제를 연주할 때에는 활놀림을 눈여겨보았더니 내림-내림-올림으로 모나지 않고 부드럽게 연주했다. 트롬본과 트럼펫 및 코넷이 선율을 되풀이해 주고받는 마디 331에서는 울부짖듯이 사납게 연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떠벌리지 않고 알맞은 파토스를 뿜어냈다.

2악장 첫머리에서는 현 소리를 줄이고 하프를 앞세우면 맑은 하프 음색에 달콤쌉쌀한 감화음이 어우러져 '게르만스러운' 무뚝뚝함을 한결 부드럽게 녹여낼 수 있으며 첼리비다케와 몽퇴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성시연은 하프와 현이 딱 알맞게 어울리도록 했다. 음반을 들어 봐도 이 대목에서 이토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고른 소리를 내는 연주는 드문 듯한데 어쩌면 음반으로는 살리기 어려운 현장감 때문이었을까.

이 곡은 대위법이 썩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부선율이나 장식음 따위를 잘못 살리면 그야말로 얕은꾀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를테면 2악장 마디 49 같은 곳에서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 16분음 음형을 잘 살리면 음악이 더욱 다채로워지기도 하며 몽퇴가 바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성시연은 제1 바이올린 주선율을 뚜렷이 살리고 16분음 음형은 뒤에서 어른어른하게 다스렸다.

딱 한 군데 갸우뚱했던 곳이 있다. 3악장 마디 227에는 늘임표가 있는데, 그 앞서 몇 차례 나오는 늘임표와는 달리 "매우 길게 très long"라는 나타냄말이 더 붙어 있다. 마지막 음을 매우 길게 늘일 수도 있겠고, 숨이 모자란다면 브루크너 음악에 곧잘 나오는 모두쉼표처럼 멈췄다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시연은 앞서 나오는 다른 늘임표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적당히 늘여주고 넘어갔다.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티 나지 않게 하기가 어렵다 했던가. 성시연의 올곧은 마음가짐은 나이를 생각하면 매우 알맞으나 또한 피 끓는 나이에는 지키기 어렵기도 하다. 경험을 쌓을수록 융통성이 늘어날 테고, 그럴수록 성시연은 '화장발'에도 마음을 쏟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일구어놓은 바탕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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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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