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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0일 월요일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정적(靜寂)의 파편' 세계초연 리뷰 번역 (Seen and He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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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와 버르토크도 훌륭했지만, 이번 런던 심포니 공연은 진은숙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2022년 1월 7일 콜린 클라크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바이올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 사이먼 래틀 경 (지휘). 바비칸 홀, 런던, 2022년 1월 7일


사이먼 래틀 경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 Mark Allan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정적(靜寂)의 파편’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버르토크: 놀라운 만다린 모음곡

내가 가장 최근에 들은 진은숙 음악은 지난해 9월 초, BBC 프롬스의 마지막에 있었던 공연으로 마크 엘더 경이 지휘하고 할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그녀의 2020년 작품 ’수비토 콘 포르차’였다. 그녀의 음악은 예외 없이 참신하고, 감상자에게나 연주자에게나 만만치 않다. 그녀의 신작 세계초연에 참석하는 일은 진정 특별한 혜택이라 할 수 있으며, 이번에 초연된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신작의 창작의 계기가 된 것은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였다. 진은숙은 카바코스에 관해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독특한 사람이며,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장르에 다시 한번 도전할 영감을 내게 주었다.”라고 말했다. 진은숙은 또한 카바코스 연주의 “불타는 강렬함”을 극찬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2번 사이에는 20여 년의 세월이 있다. 협주곡 1번은 4개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이번 신작은 25분짜리 단악장으로 되어 있다.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정적(靜寂) 속에서 나타난다(물론 많은 현대곡이 그렇다). 또 이 작품의 음 소재는 제스처를 닮았고, 그야말로 ‘파편’을 닮았다. 그래서 작품의 부제가 ’정적(靜寂)의 파편’(Scherben der Stille)이다. 다섯 음으로 된 모티프를 세포로 해서 음악 언어가 구축되어 나가면, 마치 한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탐험하는 듯한 느낌이 된다. 어쩌면 작품의 마지막에 도입부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입부는 빠르고 유리 같은 하모닉스 음형과 더 길게 지속하는 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때때로 반복되는 제스처이며, 그 시작에는 더 큰 에너지가 잠재해 있는 듯하고, 길게 지속하는 음은 결국 외부로 확장되다가 정지한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 돌아온 도입부에서는 같은 제스처가 평화로움을 담아낸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 난이도는 무시무시하다(바이올린 협주곡 두 곡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돌아온 음형은 처음과 같을 수 없다.

진은숙은 흔히 ‘낭만적’이라고 이해될 만한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는 정말로 긴 솔로 바이올린 선율이 나오는데, 그것은 과거의 전통에서 온 소재에 더 현대적인 화음을 입힌 듯하다. 이것은 어찌 들으면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에서 솔로 바이올린이 가장 높은 음역에서 ’끝도 없는’ 선율을 이어가는 것을 닮았다. 카바코스의 연주는 한순간도 탁월함을 잃지 않았다. 소리가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고, 진은숙 음악에 의심할 여지 없이 어울리는 금속성을 담은 소리였다. 금관이 이끄는 춤곡풍 섹션은 솔로 바이올린과 대비되어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며, 이것이 나중에는 금관과 건반타악기의 어우러짐으로 변화한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솔로 바이올린 음형의 탁월함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음형의 상상력으로도 드러나는 진은숙의 작곡 기법에 그저 압도당하게 된다. 그녀가 흔히 쓰는 기법으로, 극단적인 고음과 저음으로 음역대를 구성한 다음 그 사이를 강렬한 음악으로 채우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솔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현악기 솔로가 어우러지게 한 기법 또한 소리의 팔레트에 색채를 더했다. 이 곡은 반복해서 들을수록 그 위상이 높아질 것이 틀림없는 경이로운 작품이다. 진은숙은 첫 번째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저 유명한 그로마이어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이 비슷한 반열에 올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이먼 래틀 경, 진은숙,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 Mark Allan

(시벨리우스 및 버르토크 작품에 관한 두 문단 생략)

이 공연은 메디치TV를 구독해 감상할 수 있으며, 1월 18일 BBC Radio 3에서 방송할 예정입니다.

콜린 클라크 (김원철 옮김)

2016년 4월 1일 금요일

사이렌의 침묵, 그리고 어느 사무실의 어수선한 풍경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해서 바다에 뛰어들게끔 한다는 요정 세이렌에 관해 다들 아실 겁니다.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가 꾀를 내어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낸다는 이야기나, 영어식 표기인 '사이렌'이 '경보'를 뜻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많이들 아실 듯해요.

윤이상 이후 국제 사회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한국 작곡가인 진은숙 선생은 《사이렌의 침묵》(Le Silence des Sirènes)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썼습니다. 2014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세계초연됐고,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에서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아시아초연 예정이지요.

'사이렌의 침묵'이라는 제목은 카프카가 쓴 수필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세이렌의 노래보다 침묵이 사실은 더 무서운 무기라는 카프카의 역설적인 말이 작곡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독일어 수필 제목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세이렌'이 아닌 '사이렌'이 되었는데, 진은숙 작품이 세계초연된 소식이 한국에 보도되면서 그 제목이 널리 알려졌지요.

진은숙 작곡가는 이야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오디세이아』와 제임스 조이스 소설 『율리시스』에 나오는 세이렌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습니다. 악보를 보면 『율리시스』가 핵심이고 『오디세이아』가 앞뒤를 액자처럼 감싸는 짜임새예요. 무엇보다 『율리시스』 에피소드 11 앞부분에 나오는 시(?)를 주요 노랫말로 쓰고 있지요.

유혹. 부드러운 말. 하지만 보라! 빛나는 별빛은 흐려져 간다. 오, 장미여! 지저귀면서 대답하는 멜로디. 캐스틸. 아침은 온다.
짤랑, 짤랑, 이륜마차가 경쾌하게 짤랑, 짤랑.
동전이 땡그랑, 시계가 땡.
[…] 맙소사, 그는 전혀―듣고 있지 않―았어.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한 『율리시스』 번역본(김성숙 옮김)에서 조금 인용해 봤습니다. 작가는 '세이렌'이라는 키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말장난으로 에피소드 11 앞부분을 시작했다지요. 덕분에 영어 원문이나 우리말 번역본이나 참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의미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본질이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율리시스』에서 작가는 에피소드마다 『오디세이아』를 패러디하거나 모티브를 따와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에피소드 11에 나오는 세이렌은 술집 아가씨 '미스 케네디'와 '미스 다우스'입니다. 에피소드 11에서 오디세우스에 해당하는 '레오폴드 블룸'이 호텔 바에서 연애편지를 쓰다가 두 아가씨가 잡담하는 내용에 자꾸만 주의를 빼앗기지요.

뭔가에 집중하려는데 자꾸만 주의를 뺏기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요즘 통영국제음악제 때문에 바쁨이 폭발하고 있어요. 사무실에서는 긴박하거나 골치 아픈 상황이 수시로 일어나고, 그것을 수습하느라 곧잘 왁자지껄해집니다. 그 와중에 각자 급한 일을 처리하려면 집중해야 하는데, 협업을 하려면 또 마냥 귀를 닫고 있을 수만도 없어요. 『율리시스』 에피소드 11이 어찌나 마음에 와 닿는지요!

이제,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저 시(?)를 다시 읽어 보세요. 작곡가는 바로 이 느낌을 진은숙 스타일로 기막히게 살려 음악에 담았습니다. 작곡가는 소프라노 바바라 해니건을 위해 이 곡을 썼고 바바라 해니건이 세계초연을 맡았는데요, 현대음악계에서 명성이 그 못지않은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 마리솔 몬탈보가 들려주는 세이렌은 어떨지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율리시스』 에피소드 11의 시(?) 마지막 대목을 인용할게요.

암갈색 머리를 가까이에서 어디로? 금발은 멀리에서 어디로? 말발굽은 어디로?
르르프르. 크라. 크란들.
그때 바로 그때까지는. 나의 비명(碑銘). 작성되어 있길.
끝.
시작해!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2010년 클래식 음악계 주요 사건 ③ 국내 소식

트위터로 떠들기만 했더니 정리하기 쉽지 않네요. 놓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 서울시향, 유럽에서 상품성 인정받아

저는 이것을 올해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고: http://goo.gl/jJsJo

2. 지휘자 구자범, 광주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도 광주시와 갈등 끝에 경기필로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54592

'구자범 신드롬'은 말러 교향곡 2번 광주 MBC 다큐멘터리를 봐도 조금 알 수 있지만, 직접 광주에 가서 《라 보엠》 공연을 보니 제대로 알 수 있겠더군요. 광주시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3. 인천시향 음악감독 정명훈 → 금난새

인천시장 송영길이 정명훈을 자르고 금난새를 그 자리에… http://goo.gl/PQtT

금난새는 경기필 음악감독 겸임하려다 재계약 불가 통보받고는, 도의회 간담회에서 "충격과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http://goo.gl/j17xU

4. 지휘자 정치용, 원주시향에서 잘리다

원주시가 정치용을 일방적으로 해고, 음악감독 체제를 상임지휘자 체제로 바꾸면서 새로 지휘자를 뽑았습니다. http://goo.gl/LL4ck

지휘자 정치용이 당한 굴욕을 정명훈이 바스티유에서 쫓겨난 일에 빗댄 강원일보 사설 http://goo.gl/opqO7

5.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 샌드위치 사 먹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도둑맞다

도둑맞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연합뉴스 기사 http://goo.gl/R4ZFA

샌드위치 가게 점원은 김민진 씨가 당시 아이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증언 http://goo.gl/oasAC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라는 네티즌 여론.;;

절도범 3명이 잡혔는데 두 명은 미성년자. 그러나 바이올린은 못 찾았다네요. http://goo.gl/NUQW4

6. 서울시향 트럼펫 수석, RCO 수석 되다

알렉상드르 바티(Alexander Baty)는 본디 라디오 프랑스 수석입니다. 그런데 서울시향 객원으로 활동하다 서울시향 수석도 겸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콘세르트허바우 수석이 되면서 둘 다 그만둔 모양인데요, 그러나 객원으로 서울시향에 더 자주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어제 말러 교향곡 3번 연주회 때에도 엄청난 연주를 들려줬죠.

알렉상드르 바티가 비중 있게 활약한 연주회 리뷰 참고:
http://wagnerianwk.blogspot.com/search/label/Alexander%20Baty

7. 〈엘 시스테마〉가 국내에서도 주목받다

《엘 시스테마》 영화도 개봉되고, 여러 단체에서 일단 무늬는 비슷한 시도를 했고, 교육부에서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학교 100개 지정 및 악기 구입비와 방음교실 설치비 지원 계획 발표. 김원철은 돈을 주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는 없어서 답답하다고 논평. http://goo.gl/E9R9

무작정 도입하기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세우라는 한국경제 사설 http://goo.gl/GieM

뒤이어 내년 1~2월 사이에 교육부에서 베네수엘라에 시찰단을 파견한다는 반가운 소식. 일정은 곽승 지휘자 베네수엘라 연주회에 맞췄는데, 곽승은 18년째 〈엘 시스테마〉를 후원해 왔다네요!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위주의 활동이면 성공 가능성이 충분할 것" http://goo.gl/DZSDC

8. 작곡가 진은숙,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시리즈 영국판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현대음악 프로그램 〈오늘의 음악〉(Music of Today) 예술감독 된다는 소식.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연주회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결과라네요. http://goo.gl/sbxJ

진은숙이 '모나코 피에르 대공 작곡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수상작은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 10월 16일 서울시향이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연주회에서 한국 초연. http://bit.ly/dcopU9

9. 모 음대 '쓰리썸' 교수 사건

좋지 않은 소식이므로 링크만: http://goo.gl/wBcIj

이런 일은 음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카더라' http://goo.gl/xl84Y

10.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2016년으로 준공 연기

이런저런 이유로 연기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_-; http://goo.gl/xJ5Uy

처음부터 딱 필요한 것만 (연주회장이라든가, 연주회장이라든가, 연주회장이라든가) 짓든가 참나.

한국일보 사설 http://bit.ly/9bI1M1

박범신 작가 한겨레 사설 "예술은 우리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것이니, 복지와 같다. […] 시의원들이 할 일은 그런 것이다." http://goo.gl/U7Jri

안태호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반박 사설: http://goo.gl/ulMxE

2010년 6월 6일 일요일

메시앙 《잊혀진 제물》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라벨 《어미 거위》 《라 발스》 ― 비비아네 하그너 / 정명훈 / 서울시향

2010-05-20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명훈
협연: Viviane Hagner

메시앙, 잊혀진 제물 Messiaen, Les Offrandes oubliées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Chin, Violin Concert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ère l’Oye
라벨, 라 발스 Ravel, La Valse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5년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는 유럽 무대에서도 꿀리지 않을 기량을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서울시향이 유럽 무대에서 연주한다. 억지로 만들어낸 연주회가 아니라 정식으로 초청받아 갔다고 한다. 김주호 대표 말처럼, 이제는 서울시향이 유럽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게 됐다는 뜻이다. 정명훈이라는 거장이 지닌 이름값만으로 악단이 덩달아 인정받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그만한 실력을 길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덜 됐을 때는 안 하는 게 나아요. 괜히 창피만 당한다고. 하지만 이젠 준비가 됐어요. 적어도, 유럽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선 겁니다.”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단다. 지난 5년 동안 서울시향을 지켜본 글쓴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석급 단원들은 웬만한 유럽 지방악단에서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실력을 지녔고, 그 가운데 한둘은 유럽에서도 수석 자리를 노릴 만하다. 몇몇 외국인 단원은 유럽 악단 수석을 겸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있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이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이다. 역사와 전통 없이 현이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서울시향이 유럽에 간다는 말은 현이 그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글쓴이가 판단하기에 현악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응집력이 때때로 유럽 수준을 살짝 넘보게 된 때가 지난해 즈음이다. 실수 없이 악보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일이 지난해부터 차츰 늘고 있다. 악기군끼리 어우러짐 또한 크게 늘었다.

이날 연주회는 유럽에서 연주할 곡들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 가운데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장 반가웠다. 서울시향이 이 곡을 연주한 일이 두어 차례 있지만, 글쓴이는 그때마다 다른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 실연은 이날 처음 들었다. 아직 악보를 개인에게 팔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빌려주기만 하는지라 글쓴이는 이 곡을 음반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는데, 이날 연주를 들어보니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몬트리올 심포니 녹음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은 마림바와 여러 타악기 따위를 음반보다 앞세워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 또는 악기) 느낌을 조금 더 살렸고,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등하게 어우러져 교향곡 느낌마저 들었다. 스튜디오 작업을 거친 음반이 실연과 다른 탓도 있겠으나, 그것을 헤아려도 이날 타악기가 독주 바이올린 소리를 자신 있게 치고 나올 때가 잦았다.

1악장에서 큰북이 내는 묵직한 소리가 독주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는 대목을 글쓴이는 참 좋아하는데, 이날 시향 타악기 연주자 김문홍이 무대 오른쪽에서 큰북을 맡아 마치 바이올린과 2중주를 하는 듯했다.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는 무대 왼쪽 벽 가운데쯤에 바짝 붙어서 글록켄슈필과 갖가지 타악기를 연주했고, 김미연은 무대 왼쪽 뒷벽에서 마림바 따위를 연주하는 등 타악기만으로도 입체감을 주었다.

여기에 다른 악기 소리가 마치 살아있는 빛알갱이처럼 뭉치고 흩어지곤 했으며, 독주 바이올린은 빛 가루를 뿌리며 무리를 이끌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빛 요정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이 이럴까. 협연을 맡은 비비아네 하그너는 어렵기로 소문난 이 곡을 마치 가볍게 몸 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곤 했으나 개방현으로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라벨 관현악곡은 화려한 색채감을 빼면 짜임새가 단순해서 연주자의 해석이 끼어들 곳이 적으며, 음색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살리느냐가 연주자에게 중요할 때가 잦다. 이날 연주된 《어미 거위》 모음곡과 《라 발스》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지휘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면서도 지휘자 못지않게 악단이 많은 주목을 받게 할 수 있으니 서울시향을 유럽에 알리기에 매우 훌륭한 곡이라 하겠다.

이날 연주는 시시콜콜 따질 일 없이 그저 좋았다고만 말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이미 여러 차례 연주한 일이 있어서 서울시향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곡이라고도 할 만한 《라 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미 거위》 모음곡 또한 심각한 표정 지을 일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곡에 나무랄 데 없는 연주였다.

메시앙 《잊혀진 제물》도 훌륭했지만, 사납게 몰아치는 가운데 부분에서 현이 조금 더 단단히 뭉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싶었다. 서울시향이 앞으로 더 나아질 곳이 얼마든지 있음이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하겠는데, 정명훈 말마따나 이번 유럽 연주 여행이 “서울시향의 단원들에게 큰 공부와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오케스트라를 보면서 자신들을 되돌아볼 기회도 생길 테고, 음향이 훌륭한 연주회장을 두루 경험해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눈이 잔뜩 높아질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전용 연주회장이다. 계획에 차질 없이 하루빨리, 그러나 음향에는 배려에 모자람 없이 지어지기를 바란다.

2009년 8월 30일 일요일

2008.06.15.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II - 스티븐 애즈버리 / 빌헴 라추미아

2008년 6월 15일(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자 : Stefan Asbury
협연자 : Wilhem Latchoumia (Pf)

John Cage (1912-1992) Credo in US for piano, 2 percussions, radio and phonograph (1942) ca.12’30
Charles Ives (1874-1954) Set for Theatre Orchestra (1899-1906/1915) 7’30
- In The Cage
- In The Inn
- In The Night
Il-Ryun Chung (*1964) Glut for ensemble (2008) ca.15´
John Cage (1912-1992) , Suite for toy piano (1948) 4’
Henry Cowell (1897-1965), The Banshee for string piano (1925) 2’
Conlon Nancarrow (1912-1997), Prelude for piano (1935) 1’30
Tango? for piano (1983) 3’
John Zorn (*1953), Cat O’Nine Tails for string quartet (1988) 15’30
Igor Stravinsky (1882-1971), Ragtime for 11 instruments (1918) 4’30
George Antheil (1900-1959) Jazz Symphony for solo piano and small orchestra (1925/1955) 7’

※ 13일 연주회는 날짜를 잘못 알아서 놓쳤습니다. 털썩... 출간본을 보니 13일 연주회 리뷰를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 15일 연주회 리뷰만 실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많은 내용을 짧은 글에 우겨넣느라 고생할 거 없이 더 길게 써도 됐을 텐데 ㅠ.ㅠ



타악기를 하는 친구와 함께 밥을 먹다가 겪은 일이다. 그 친구가 젓가락으로 빈 밥그릇과 반쯤 비운 국그릇과 유리컵 따위를 두드리는데 매우 수준 높은 '타악기 연주'라 새삼 놀랐다. 나중에는 숟가락 두 개를 엎어 쥐고 손가락으로 튕기고 부딪히면서 이런저런 리듬을 연주해내기도 했다. 내가 흉내를 내 봤더니 왜 '비 내리는 호남선'에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되어버리는지….

존 케이지의 <크레도 인 유에스>를 연주하는 서울시향 타악기 연주자들이 통조림 캔 따위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다.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그보다 훨씬 앞서 나온 탓에 그다지 파격이랄 것은 없지만 '라디오'를 이용해 존 케이지다운 '해프닝'을 연출한 것은 흥미로웠다. 연주회 해설을 쓴 하바쿡 트라버는 이 곡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던 사건과 엮어 설명했고 곡 제목이 뜻하는 바를 그로써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향의 연주는 '해프닝'을 더 강조했다. '라디오 선곡'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빼면 무거운 것이 없었고 '언제든지요 형님'이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에는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이 나오고 말았다. '텔~미! 텔~미!'

정일련의 <작열 Glut>은 서울시향이 이번에 위촉한 작품이다. 프로그램을 쓴 하바쿡 트라버는 물질이 열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물리 현상을 중심으로 작품을 설명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트라버가 한국 문화를 잘 몰라서 반쪽만 이해한 듯싶다. 작곡가는 굿하듯이 타악기를 두드리는 동안 열이 올라 다른 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곡을 썼다고 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본 굿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대놓고 굿판을 벌이지는 않는다. 기만적인 근대화를 경험한 한국인에게 진짜 굿은 왠지 좀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지만, 정일련이 벌인 '굿판'은 마림바와 실로폰의 맑은 음색과 가멜란(Gamelan) 악기 따위가 어우러져 현대인 입맛에 맞는 '놀이'로 느껴졌다. 휴식 시간에 10대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 "간지 작렬이야!"

존 케이지의 <장난감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은 작품보다 악기가 핵심이었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피너츠>에서 슈로더가 연주하던 바로 그 장난감 피아노가 아닌가! 피아니스트 빌헴 라추미아가 무대 바닥에 주저앉아서 장난감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들이 객석에 넘쳐흘렀다. 그런데 옥에 티가 있다. 왜 장난감 피아노 위에 슈로더가 쓰던 베토벤 흉상이 없단 말인가. 그게 없으니 장난감 피아노가 무게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지 않는가!

롤플레잉 게임(RPG)을 즐겨 하는 사람이라면 헨리 코웰의 <밴시 Banshee>를 듣고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밴시는 서양 처녀 귀신으로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 마법이나 마법 무기로 공격해야 하는 언데드 몹(Undead Mob)이다. 이것을 알고 나면 클러스터 기법이나 특이한 연주법 같은 것은 관객이 알 필요 없다. 보라, 밴시가 무대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마법사, 뭐 하고 있나? 어서 공격해!

아이브스의 극장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트>와 존 조른의 <캣 오나인 테일스>는 콜라주 기법을 쓴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존 케이지의 <크레도 인 유에스>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낸캐로우의 피아노곡이나 스트라빈스키의 <래그타임>과 앤타일의 <재즈 교향곡>은 맥락이 조금씩 다르지만 '재즈'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재즈라는 음악 장르는 여러 음악이 섞여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다는 것은 매우 미국적인 가치인데,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것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각각이 대등하게 섞여 하나가 되는 융화(融和)는 한쪽이 다른 쪽에 섞여들어 가는 동화(同化)와는 다르다. 음악학자 윤신향은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을 융화시킨 게 아니라 서양 문화에 동화하는 과정을 내비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 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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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2007.11.06.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V - 김호정 / 홍웨이 황, 진민호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4
2007년 11월 6일(화) 오후 8시
호암아트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김호정(첼로), 홍웨이 황/진민호(비올라)

Charles Ives(1874-1954), The Unanswered Question (1906)   5'
Giacinto Scelsi (1905-1988), Anagamin for 11 Strings (1965)    7'  
George Benjamin (1891-1945), Viola, Viola for two violas (1997) 12" Korean Premiere
Pierre Boulez (*1926)   Messagesquisse pour violoncelle solo et six violoncelles, sur le nom de Paul Sacher (1976)   8'
Chris Paul Harman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for 16 strings   16' Asian Premiere
Uzong Choe (*1968) Love Song, chamber concerto for violoncello and strings(2006) 15'  (commission by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World Premiere)



아이브스는 <대답 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을 두고 "존재에 대한 해묵은 질문"이라 했는데, 제목이나 악곡 구성이 마치 20세기 음악사를 내다보는 듯해서 번스타인은 이 곡을 "조성적 갈등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도 했다. 조성이 흐릿한 트럼펫과 조성이 없는 플루트 앙상블의 '문답' 그리고 3화음을 쓰면서도 조성음악답지 않게 무심히 관조하는 듯 흘러가는 현 사이의 관계가 조성음악이 생명을 다한 20세기 서양음악이 맞이한 화두와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지휘자는 플루트 앙상블이 무대 좌우 연주자 대기실 쪽에서 번갈아 또는 동시에 연주하게 하고 객석 2층에 자리한 트럼펫이 '질문'을 할 때마다 위치를 옮기게 하는 등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여 '문답'을 더욱 뚜렷이 드러냈다. 또 트럼펫이 마지막에는 객석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마지 청중에게 이런 화두를 던지는 듯했다. 현악기로 어떻게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소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자친토 셸시(Giacinto Scelsi, 1905-1988)는 요즘 뒤늦게 인기를 얻는 사람으로 작곡 기법이나 그 바탕에 깔린 동양 사상 등이 윤이상과 거울상처럼 닮았으면서도 또한 정반대다. 셸시는 그가 살았던 로마가 동서양의 경계라고 생각했으며, 인도와 티베트 등을 여행하면서 명상을 배웠다. 이른바 '단음 음악(Single-note Music)'이라 불리는 작곡 기법은 이름처럼 음 하나로 끝나지 않고 트레몰로, 비브라토, 글리산도, 미분음(microtone) 등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그 원리는 윤이상의 중심음(Hauptton) 기법과 마찬가지로 정중동(靜中動)이다. 윤이상이 동아시아 음악의 음향 특징을 서양 악기로 표현하려고 중심음향(Hauptklang) 기법을 고안했다면, 셸시는 음 하나가 가진 배음(harmonics)을 원래 음으로부터 끄집어내 한 음이되 한 음이 아니게 했으니 이것은 윤이상과 닮았으면서도 또 다르다. 1965년 작품인 <아나가민 Anagamin>은 불교 수행 단계를 뜻하는 성문 4과(聲聞四果), 즉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가운데 아나함이며, 사바세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래(不來)라고도 한다. 셸시가 그 속뜻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듣기로는 참된 아나함을 얻었다기보다는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벼랑 끝에서 번뇌와 싸우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 속 아나함은 <대답 없는 질문>처럼 음악 속에서 새 뜻을 찾을 수도 있겠다. 즉, 12음 기법으로 대표되는 주류 작곡 기법이 싫지만 조성음악으로 돌아갈 수도 없던 셸시가 마침내 찾아낸 돌파구를 그만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여 불래(不來)를 이룬 것이다.

조지 벤자민의 <비올라, 비올라>와 불레즈의 <메사줴스키스 Messagesquisse>는 '현 긁는 맛'을 잘 살린 곡이었다. <비올라, 비올라>가 투박하지만 담백한 비올라 음색을 잘 살리는 동시에 마치 도깨비 감투를 쓴 연주자가 옆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연주하는 듯 신기한 음향을 만들어냈다면, <메사줴스키스>는 첼로 일곱 대가 현을 박박 긁어대는 박력이 피부로 직접 느껴질 듯 짜릿했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박박 긁는 소리는 역시 첼로가 제맛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근본적인 저음 한계 탓에 박력이 모자라며, 콘트라베이스는 악기가 너무 커서 굼뜨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썩 훌륭했지만 좀 더 미친 듯이 긁어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했다.

크리스 폴 하먼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우타>와 마찬가지로 만화 같은 과장과 풍자가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었는데, '하먼식 조각내기'에 웬만큼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보통 변주곡을 듣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들었다. '조각 맞추기'를 하다가 엉뚱한 선율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여전했으며, 이를테면 오르간 음향에 얹은 바로크풍 선율은 제목을 의식한 탓인지 생일 축가를 떠올리게 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것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음 덩어리(cluster)가 <전람회의 그림>의 '프롬나드'처럼 계속 변형되며 나타나는 것도 인상 깊었다.

최우정의 첼로 협주곡 <러브 송 Love Song>은 서울시향이 위촉하여 이번이 세계초연이라 더욱 뜻깊다. 그런데 '사랑 노래'라니 첼로 협주곡이라기에는 너무 통속적이고, 대중음악에 쓰기에도 낡아빠진 제목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흔한 사랑 노래와는 달리 그다지 달콤하거나 신파조이거나 하지 않았고, 대중음악에 어울리는 선율과 리듬이 이리저리 비틀려 있어서 남의 연애담 듣듯이 편하게 들을 수만은 없는 곡이었다. 중간에 박진감 넘치는 대목은 영화 <졸업>에서처럼 결혼식장에 쳐들어가 신부 납치라도 하는 듯했고, 또 어찌 들으면 싫다고 구박하는데도 열심히 쫓아다니는 바보스러운 사랑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다. 마침 이 곡 악보 첫머리에는 작은 글씨로 "à mon père"라고 쓰여 있다. 프랑스어로 '아버지께'라는 뜻이다. 작품 끝머리에 불안한 음형이 되풀이되다가 매우 여린(pppp) 16분음 스타카토 세 번으로 마치 시계가 멈춘 듯 끝나버린 것이 너무나 애틋해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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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6일 수요일

2007.11.02.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III - 리처드 용재 오닐 /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 / 서울시향

진은숙의 Ars Nova 3
2007년 11월 2일(금) 오후 7시 30분
KBS 홀

지휘자 : François-Xavier Roth
협연자 : Richard Yongjae O'Neil (Viola)

Väinö Raitio: Moonlight on Jupiter op. 24 (12')
Brett Dean: Viola Concerto (27')
Chris Paul Harman: Uta for viola and orchestra (19'30")
Alexander Scriabin: Le poème de l'extase op.54 (22')



비올라는 참 애매한 악기다. 음색이 투박해서 독주 악기로도 주목받지 못했고, 앙상블에서도 흔히 내성부, 즉 화음의 뉘앙스에 작은 변화를 주는 역할이 고작이다. 그러나 애매함은 곧 유연함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지닌 특징을 알맞게 나누어 가졌으면서 투박하지만 담백한 음색을 낼 수 있으니 새로운 소리를 원하는 20세기 작곡가들이 좋아할 만했다. 조성이 무너진 시대라 화음에 억눌리지 않아도 되니 더욱 좋았다. 비올라 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런 새 시대가 만든 스타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비올라 협주곡과 크리스 폴 하먼(Chris Paul Harman)의 <우타>를 협연한 그가 들려준 소리는 그야말로 천 가지 색깔을 지닌 비올라였다.

브레트 딘의 비올라 협주곡은 용재 오닐이 솜씨를 뽐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모닉스 글리산도가 어지럽게 얽히는 부분은 아찔했으며, '딴따다 딴따다 다다다다' 하는 폴카(?) 리듬 모티프에서는 묘한 중독성을 느꼈다. 또 느린 부분에서는 한겨울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햇빛이 부서지는 느낌과 비슷해서 작년 10월 연주회 때 소개된 조지 벤자민의 <겨울 마음> 생각도 잠시 들었다. 현악기가 잘근잘근 하는 소리를 약음기를 낀 금관이 흉내 내듯 하는 것과 타악기가 그에 맞추어 떠들썩하지만 싸늘하게 두드려대는 것 등은 역시 작년 10월에 소개된 <전원 교향곡>과 비슷했는데, 문득 브레트 딘의 관현악 어법이 비올라를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곡가가 비올라 주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하먼의 <우타>는 '노래'라는 뜻으로 일본어 'うた'에서 제목을 따왔고 일본 동요집에서 재료를 따와서 조각내고 비틀어 새로 짜맞췄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조각조각 흩어진 느낌이 마치 만화를 보는 듯했다.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조각 맞추기'를 하다 보니 원래 재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엉뚱한 선율로 튀는 느낌도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학교 종이 땡땡땡'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닮은 선율이 중간에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했다. 남이 쓴 음악을 잘라내고 흩트려 새로 짠다는 아이디어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 짤막한 이야기를 지어내 봤는데, 어쩌면 이것이 하먼의 작품세계에 대한 가장 진지한(?) 감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오덕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하루는 장사꾼이 그를 반겨 말하기를,

여보게 덕, 당나라 악사 아루농굴이 온다네.
뭣이?
차에코풀었스키의 《쌍피 여왕》을 한다네.
오 벗이여 얼마면 돼?
마흔닷 냥이라네.

오덕이 신용카드를 내미는 순간 웬 여인이 오덕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외치기를,

훠이 지름귀신 물렀거라!
너, 누구냐?
이 녀석아 내가 니 애미다. 포스에 빛나는 회초리 맛 좀 보아라.
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살인을 면한다 하지 않습니까.
어허 무슨 소리냐, 옛말에 개처럼 날아서 정승처럼 쏜다 했다.
히익! 수위일로께서는 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 하셨습니다. 덥석! 일단 고정하시고...
호호호 유료 허그란다. 일 초에 열 냥.

오덕이 놀라 만세신공을 시전하니 만근거력이 담긴 회초리가 날아들더라.
삑! 체력이 바닥났습니다. 로그아웃합니다.

오덕은 '듣보르잡의 환장 교향곡은 조첨이 본좌'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었다.

써놓고 보니 지난 3월에 소개된 <행렬 풍자극>에 더 잘 어울릴 듯싶다. <우타>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작품은 아니었고 오히려 마지막에 착 가라앉은 일본풍 비올라 선율은 용재 오닐이 연주한 '섬집 아기'를 생각나게 했다.

베이뇌 라이티오(Väinö Eerikki Raitio, 1891-1945)는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작곡가인데, <목성의 달빛 Kuutamo Jupiterissa>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1922년 작품이라는데 도무지 20세기 초 작품 같지 않아 뭔가 속는 기분이었다. 무조음악이 아니면서도 조성음악 관습과는 꽤 동떨어진 소리가 어찌 들으면 20세기 후반 작품처럼 들리기도 했으며, 음악이 꽤 흐른 뒤에야 시대에 어울리는 감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홀스트가 작곡한 <행성> 중 '목성'이 무척 고루하게 느껴지다니 시대를 너무 앞서간 가엾은 작곡가가 아닌가.

지휘자 프랑소아 자비에르 로트(François-Xavier Roth)는 다양한 음색으로 현대음악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모더니즘의 무표정함에 빠지지 않고 낭만주의의 '드라마'를 살려내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스크랴빈의 <법열의 시 Le Poeme de l'extase>에서 특히 그랬다. 이 작품을 연주할 때 그 특징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Allegro volando(빠르게 날듯이; 마디 39) 부분으로, 느린 앞부분과 템포 차이를 크게 벌리면 작품의 표제적 성격을 살리기에 좋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옅어질 위험이 있기도 하다. 지휘자는 느리기에 더욱 신비로운 앞부분을 아주 살짝 희생시켜 '알레그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템포 차이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자연스럽게 했다. 마디 95 이후 트럼펫에 맞서는 저음 현의 무게중심도 탄탄했고 햇빛이 구름을 뚫듯 강렬히 흩어지는 고음 현도 멋졌다. 금가루 날리는 트럼펫 소리와 끝에 금관이 밀어붙이는 '뒷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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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2일 토요일

2007.03.22, 25.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 리게티 추모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1
2007년 3월 22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Pascal Rophé
협연자 : 강혜선(바이올린)

Unsuk Chin: Allegro ma non troppo for percussion and tape (13')
György Ligeti: Atmosphères (9')
Conlon Nancarrow (1912-1997) Tango
Claude Debussy (1862-1918) Le matin d’un jour de fête [The morning of the festival day] (from: Ibéria; 1905-1908)
Igor Stravinsky (1882-1971) Quatre Etudes
György Ligeti (1923-2006) Violin Concerto
 
진은숙의 Ars Nova 2
2007년 3월 25일(일) 오후 6시
세종 체임버 홀
    
지휘자 : Pascal Rophé
 
Conlon Nancarrow : Toccata for xylophone, marimba, piano and violin (1935)
György Ligeti: Chamber Concerto (19'15")
Hans Abrahamsen: Märchenbilder (Fairy Tale Pictures) (14')
Chris Paul Harman: Theme and Variations for eight musicians (18')
György Ligeti: Poème symphonique for 100 metronomes (20')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는 20세기 후반 서양음악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가 작년에 타계했으니 추모의 물결이 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실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가 되지 않았다면 이번 추모 음악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한국 음악계의 역량이 아직 현대음악 작곡가를 추모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는 한국 음악계에 복이다.

'현대음악'이라는 말은 대중에게 '이해불가'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시리즈에서 사용하는 장치는 일종의 당의정(糖衣錠)이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 대중에게 비교적 익숙한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현대음악의 뿌리를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첫 곡으로 연주된 진은숙의 타악기 주자와 테이프를 위한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Allegro ma non troppo>는 한발 더 나아가 대중이 가진 고정관념의 근본을 뒤흔들어줄 한 수로 적절했다. 이 작품은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으로 분류되는데, 그 원류는 1948년 셰퍼(Pierre Schaeffer)에서 찾을 수 있지만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913년 루솔로(Luigi Russolo)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낡은 생각이고 대중음악에서도 종종 '새로운 시도'로 소개되어온 아이디어이지만, 현대음악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은 여전히 새롭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 소리 등을 가리켜 '자연의 음악'이라 말하곤 한다. 작곡가는 이런 소리를 입맛에 맞게 모아놓고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이 작곡가의 의도대로 조직되었다면 피아노 등의 '보통' 악기를 사용한 음악과 다를 것도 없다. 음악 별거 있나.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는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으로 고전-낭만주의 시대 교향곡 등에서 즐겨 쓰이던 나타냄 말이다. 진은숙은 왜 이 작품에 이런 엉뚱한 제목을 붙였을까? 각종 타악기와 소음이 어우러진 이 작품도 알고 보면 '보통' 교향곡과 다를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종이를 바스락거리는 등의 퍼포먼스에 의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이것을 그대로 소나타 형식에 대입시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발전부'에 해당하는 가운데 부분에서는 특히 동굴에 들어온 듯한 음향과 그에 어울리는 탐탐(tam-tam) 소리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각종 타악기가 한꺼번에 '쾅' 하고 바로 이어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특히 짜릿했다.

리게티의 <아트모스페르 Atmosphères>는 '대기(大氣)'와 '분위기'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사용한 '미크로폴리포니(micropolyphony)'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클러스터 기법은 12 음 음악이 청자에게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기초하면서 선율, 화성, 리듬의 구조를 모두 해체하여 순수한 음향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법으로 '소음의 해방'과 비슷한 시기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아트모스페르>를 이루는 선율과 리듬과 화성은 미립자(微粒子)처럼 존재하며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각각이 덩어리, 즉 클러스터가 되어 '얼어붙은 시간'(리게티의 용어) 속에서 정지한 듯 흘러간다. 지휘자 파르칼 로페(Pascal Rophé)는 '나무'와 '숲' 가운데 나무를 살리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듯했으며, 미시적인 움직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음색을 전율할 만큼 섬세하게 살려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미세한 소리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으며, 뒷자리에 앉은 수많은 청중에게는 단지 흐리멍덩하게 뭉쳐진 지루한 음향의 연속일 따름이었을 것이다.

낸캐로우(Conlon Nancarrow)의 작품은 복잡하고 비주기적인 박절과 리듬 구조를 사용하는 이른바 '폴리리듬(polyrhythm)'과 '폴리템포(polytempo)'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미크로폴리포니' 이후에 리게티가 추구하던 '다차원적 폴리포니'(이희경)와도 통하며, 리게티는 낸캐로우의 양식이 "베베른과 아이브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했다. <탱고?>는 낸캐로우가 리게티에 의해 유명해진 이후인 1983년 작품인데, 그의 다른 작품보다 텍스처가 상당히 엷으면서도 폴리리듬적 특징이 살아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곡은 원래 자동 피아노를 위한 작품으로 이날 연주된 것은 Yvar Mikhashoff의 앙상블 편곡 작품이었는데, 작품 제목의 물음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얼핏 들으면 탱고라기보다는 래그타임(ragtime)처럼 들렸으며, 폴리리듬적 반주 음형 속에 탱고 음악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가 리게티의 선배 작곡가로서 가지는 공통점은 계몽주의 사상과 기능화성 작법에 기초한 음악 구성의 목표지향적인 발전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생장하지만 발전하지 않는 유동적인 짜임새(드뷔시)와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스트라빈스키; C. Kaden의 표현)은 "고난을 거쳐 별들의 나라로 per aspera ad astra"라는 경구로 대변되는 베토벤적 가치관에 반대되는 특징이다. 이 부동의 가치는 20세기 초 쇤베르크 등에 의해 "일종의 역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비약적인 발전"(C. Kaden)을 맞았는데, 그 때문에 특히 스트라빈스키가 사회 각계로부터 받은 비난은 격렬했다. "그는 지붕을 뜯어내 버렸고, 그래서 이제 그의 대머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아도르노), "진실성 없는 음악" "속이 비어 있는 것으로는 피리를 불기 쉽다"(E. 블로흐), "근심이 없는 작곡가"(A. 베르크) 등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 작곡가이자 영원한 타자(他者)였던 리게티에게는 오히려 이런 점이 창조적 자극이 되었으니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는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가.

음악학자 이희경에 따르면 리게티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특히 관현악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파스칼 로페는 이날 연주에서 <아트모스페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음색을 생생하게 살려내어 작년 10월에 뤼디거 본이 들려준 모더니즘의 무기질적 특징과는 또 다른 현대성을 보여주었다. 드뷔시의 "축젯날 아침 Le matin d'un jour de fête"은 악보의 지시(♩= 112)보다 훨씬 느린 템포(대략♩= 85)를 사용하여 마디 11 이후의 아첼레란도 등의 템포 변화의 폭을 크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 가끔 앙상블이 어긋나곤 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

리게티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989년에서 1993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낸캐로우의 음악과 중앙아프리카 음악, 14세기 말의 다성음악(Ars subtilior) 등 다양한 양식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다차원적 폴리포니'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여전히 클러스터 기법을 응용하면서도 <아트모스페르>에서 나타난 미크로폴리포니와는 달리 선율과 리듬의 윤곽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상이한 리듬층을 상상의 음향 공간 속에 다양하게 배치"(이희경)한 결과 "리듬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폴리포니"(신인선)가 되었다. 현란한 기교를 보여준 강혜선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다채로운 음색을 연주회장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쉬웠다. 특히 1악장에서 피아니시모 또는 그보다 여린 소리를 낼 때에는 앞자리에 앉았는데도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심심한 연주로 둔갑해버렸다. 2악장 이후부터는 조금 나아졌으며, 특히 호케투스(Hoquetus) 부분에서 셋잇단음 리듬으로 텍스처를 치고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마디 84 이후)가 짜릿했다. 카덴차는 이 곡의 초연자인 가브릴로프(Saschko Gawriloff)의 것을 사용했으며,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에서 연주된 리게티의 <실내 협주곡>은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그의 작품세계에서 60년대의 미크로폴리포니가 80년대 이후의 다차원적 폴리포니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인 설명들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 아니, 음악에 대한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낯설지만 신비로운 소리 그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런 것은 애초에 몰랐어도 좋다. 리게티의 음악은 엄격한 구성과는 별개로 감성과 직관에 호소하는 음악이며, 이론적 설명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편하게 들어도 귀가 즐거웠으며, 특히 모든 악기가 스타카토 및 피치카토 음형으로 타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3악장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5악장에서는 화학반응으로 미립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듯 촘촘하고도 빠르게, 또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음형이 오묘했다. 2악장에서 목관악기의 절규하는 듯한 마르카토 음형(마디 40)은 악기별 어택(attack)이 잘 맞아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낸캐로우의 <토카타>는 1935년 작품으로 낸캐로우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인 빠르고 기계적인 리듬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한 박제희는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특유의 점잖은 '양반 보잉'은 <토카타>처럼 신나고 어떤 면에서는 경박한(?) 곡에는 단점이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음량이 너무 작았으며, 그에 비하면 마림바와 실로폰 소리는 너무 컸다.

아브라함센(Hans Abrahamsen)의 <동화 그림 Märchenbilder>은 슈만의 <동화 그림>에서 소재를 빌렸다는데, 슈만의 작품이 19세기 동화를 그린 회화 같다면 아브라함센의 작품은 차라리 3D 컴퓨터 그래픽이 난무하는 SF 또는 판타지 영화처럼 느껴졌다. 또한, 다차원적이면서도 그물망같이 연결된 성부 진행에서는 리게티의 영향을 찾을 수 있었다.

하만(Chris Paul Harman)의 <행렬 풍자극 Procession Burlesque>은 4종 대위법(fourth species counterpoint)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음의 배음(harmonics)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음향과 그것을 오케스트라가 흉내 내는 것이 신선했는데, 이것은 마치 악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배음끼리의 클러스터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는 여러 층위를 이루면서 폴리포니 아닌 폴리포니를 이루는 것이 리게티와 닮았으면서도 또 달랐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묘하게 선동적인 리듬과 다이내믹 또한 흥미진진했다.

리게티의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는 '해프닝'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주 그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폴리리듬과 폴리템포에 대한 리게티의 화두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만, 이날 벌어진 고유한 사건들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까지 작동을 멈추지 않고 남아있던 두어 개의 메트로놈이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진은숙이 그 끈질긴 녀석들을 손으로 멈춘 다음 태엽을 4번 감아야 할 것을 한 번 더 감았던 모양이라며 사과의 말씀을 전했다. '연주자'들은 예닐곱 명의 어린이들이었으며, 아마도 역사상 최연소 리게티 연주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새로움에 대한 화두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리게티에게는 이것이 다양한 문화 양태가 "접속과 횡단"(이희경)을 통해 전혀 새로운 속성을 획득하는 식으로 구현되었다. 그는 평생 어느 한 곳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항상 외부를 향해 열려있었으며, 이방인의 시선을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조명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것이 단순한 '혼혈'과는 다른 까닭은 "손에 잡히는 듯한 섬세한 음향 감각과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아주 명료하게 형상화하는 탁월한 형식 감각"(이희경)을 바탕으로 철저한 자기비판을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장은 죽어서 숙제를 남겼다. 이제 음악은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가?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2006.10.17.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 色다른 베토벤

LG 생활건강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진은숙의 Different Beethoven
2006년 10월 17일 (화)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P.D.Q. 바흐/ P. 시켈레, <음악 감상의 새로운 지평>
J. 티엔슈, ‘오보(또는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샘플러/테이프를 위한 <베토벤의 무덤>’
홍성지, 7개의 악기를 위한 <베토벤 프리즈>
브레트 딘, <전원 교향곡>
M. 카헬, <루드비히 반> (영상물 상연)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베토벤은 흔히 고전주의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경전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는 특히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의 역사는 "단계적인 진화의 과정이 아니라" "각각의 주요 작품들이 베토벤이라는 단 하나의 중심축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질 뿐"이라 했다. 이 주장은 물론 20세기 이후의 음악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色다른 베토벤>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베토벤을 단지 하나의 소재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발칙하게' 다루었다.
 
시켈레(Peter Schickele), 또는 그가 내세운 P.D.Q. 바흐라는 가공의 인물의 작품 <음악 감상의 새로운 지평 New Horizons in Music Appreciation>은 베토벤 교향곡 제5번 C단조에 TV 개그 프로에나 어울릴 법한 해설을 덧붙인, 음악이라기보다는 행위예술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그맨 강성범이 나와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연주회 실황 영상이 나오는 동안 스포츠 중계를 하듯 코믹한 해설을 덧붙였다. 만약 시켈레의 의도가 베토벤의 음악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대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웃는 것이었다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이런 식의 '스포츠 중계 음악 해설'이 TV 쇼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음악을 학구적으로 대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클래식 음악이 어렵고 따분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당의정 효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학술적인 내용마저도 쇼 프로그램의 외형을 가지는 것이 요즘의 세태가 아니던가!
 
티엔슈(Jukka Tiensuu)의 <베토벤의 무덤 Tombeau de Beethoven>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켈레의 작품과 통했다. 베토벤이라는 소재를 다소 코믹하게 다루었다는 점도 비슷했다. 피아노 주자는 무대에 불이 들어오기 전에 입장하여 세 번의 발구름 소리를 냈고, 이어서 스피커를 통해 베토벤의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첼로 주자가 연습 시간에 지각한 오케스트라 단원, 또는 수업에 늦은 학생처럼 헐레벌떡 첼로를 들고 입장했다. 그리고 오보에 주자는 공주병 환자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그리고 스피커와 세 명의 연주자가 교대로 또는 엉성한 앙상블을 이루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을 단편적으로 연주했다. 연주자들은 음악으로 만담을 나누는 듯했으며, 첼로 주자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피날레 부분을 뽐내며 연주하는 동안 나머지 연주자가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질하며 웃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과는 달리 티엔슈의 <베토벤의 무덤>은 추모하는 방식이 너무 가볍다. 거인 베토벤이 아닌 인간 베토벤을 추모하려는 뜻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베토벤을 소비하는 방식이라고?
 
홍성지의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는 클림트의 그림에서 제목과 아이디어를 가져온 작품이다.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고, 홍성지는 클림트의 그림을 소재로 작곡을 했다. 그래서 이 곡의 내적 구조는 베토벤을 닮았지만, 외적 음향은 클림트를 닮았다. 하프의 투명한 울림이 현악기 및 목관악기의 길게 여운을 주는 소리와 어우러져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으며, 클림트의 그림 가운데 '적대적인 힘' 부분에 대응하는 악곡의 중간 부분에서도 베이스 클라리넷의 저음이 텍스처의 무게중심을 차지하여 전체 악곡에 일관된 '식물성 음향'을 유지했다. 클림트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세기말적 퇴폐성을 담았다면, 홍성지는 클림트의 그림에 마치 요정의 마을에 온 듯한 신비감을 담았다. 예술가의 시선에 따라 결과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인가 보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전원 교향곡 Pastoral Symphony>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과는 달리 파괴되어가는 현대의 전원을 표현하고 있다. 프로그램에 나타난 작곡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찬란한 새 소리, 그것이 직면한 위협, 손실, 모두가 사라진 뒤에 우리에게 남겨진 영혼 없는 소음을 다룬 것이다." 몸살을 앓는 자연을 새가 겪는 위협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와 닮았다. 샘플링된 새 소리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가" 애처로운 울음이 되고,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울음은 점점 절규로 변한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나마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는 여유라도 가지지만, 브레트 딘의 새들은 총포처럼 쏟아지는 각종 타악기 소리에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사람들은 문명에 익숙해져 새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단지 일그러진 재즈 리듬에 흥이 날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인간의 목숨마저도 위협하는 법. 타악기 소리가 다른 악기들을 압도해 나가다가 곡이 끝날 무렵에는 새 소리 대신 심판의 날에 나타날 법한 양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마침내 거대한 폭발이 곡을 마무리한다. 이런 식의 경종이 회색빛 빌딩과 회색빛 하늘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서울 시민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2006년의 서울에는 1968년의 서울이나 2000년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을 새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공원에서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닭둘기'들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무거운 메시지를 떨쳐버리고 나면 타악기와 약음기를 낀 트럼펫 등을 앞세운 자극적인 음색이 독특한 매력을 준다.
 
카헬(Mauricio Kagel)의 <루드비히 반 Ludwig van>은 현대에 살아서 나타난 베토벤의 시선을 담은 1970년 작 영화다. 배경에 깔린 음악들은 엽기적인 편곡으로 유명한 유리 케인(Uri Caine) 앙상블의 연주 같았는데, 잔뜩 뒤틀린 베토벤의 음악이 냉소적인 영상과 어울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발 속의 돌과 같은" 불편함은 베토벤의 집을 복원한 설치 작품에서는 보고 있기 끔찍한 것이 되었고(이때부터 관객들은 하나둘씩 연주회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절정은 욕조에 가득한 베토벤의 석고 두상을 하나씩 꺼내는 장면이었다. 물에 부풀어 나병 환자처럼 문드러진 석고상을 하나씩 꺼내는 장면이 끔찍하도록 지겹게 이어지는 동안 흘러나온 음악은 역설적이게도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이었다.
 
연주자의 몸에 여러 가지 기록장치를 달아 실험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기록장치 대신에 조악하고 우스꽝스러운 모형을 사용하여 예술에 과학의 메스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음악학도인 나로서는 이에 대해 반론을 펴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개똥철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음악을 이루는 여러 부분이 나누어 생각될 수 있으며 다른 부분과 비교될 수도 있다. 시켈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저 유명한 모티프를 작품 자체로부터 "떼어내어" 기업이 마케팅에 사용하는 오디오-로고와 "비교"했으며, 전체 교향곡이 그 모티프로부터 나왔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켈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분석"한 것이다. 음악학자 김연은 "음악분석은 하나의 완성된 음악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보다 단순한 부분들을 나누어보고 그 관계들을 연구하는 일"이라 했다. 또 그로브 음악 사전에 따르면, "음악분석의 대상은 그것이 악보인지, 또는 악보가 지시하는 소리의 심상인지, 작곡가가 떠올렸던 소리의 심상인지, 해석을 바탕으로 한 연주인지, 또는 청취자가 연주를 들으면서 가지는 일시적 경험인지 결정되어야 한다. 이 모든 범주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은 분석될 수 있으며, 분석된 결과를 음악 자체와 혼동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음악을 더욱 다채롭게 이해하고 즐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오프사이드'가 무엇인지 몰라도 축구 경기를 즐겁게 볼 수는 있지만, 각종 축구 용어와 규칙, 경기에 참가한 선수와 감독의 면면을 이해하는 사람은 축구의 묘미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섯 명의 작곡가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고, 나도 여기에 글로써 내 목소리를 보탰다. 다른 관점은 대상의 색다른 면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을 보기 위해 기존의 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열린 자세다. 당신은 색다른 경험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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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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