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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0일 목요일

소프라노 서예리 인터뷰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Q. 피에르 불레즈와 함께 있는 사진을 페이스북 커버로 자랑스럽게 쓰고 계시네요. 베티나 에르하르트가 감독한 피에르 불레즈 다큐멘터리 주역으로 출연하셨고, 불레즈 작품 중 〈플리 슬롱 플리〉(Pli selon Pli)를 부른 뒤 불레즈에게 극찬을 받은 사연이 국내 언론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소프라노 서예리로서 작곡가 불레즈의 음악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불레즈는 처음 접할 때부터 현대음악의 생소함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어요. 일반인들에게 불편한 수준의 아방가르드 양식을 선도하는 작곡가가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정말 편안하게 해 주는 작곡가입니다. 성악가가 부를 수 있는 음의 높이와 길이, 성량 그리고 호흡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어요. 이 점은 매우 중요하지요. 일반인들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감안하는 게 아니겠냐고 하시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뚜띠와 같이 노래를 하게 해 놓았는데 낮은음으로 계속되면 그야말로 중얼거림처럼만 들리고 음을 들을 수 없게 되지요. 도저히 정상적인 발성으로 부를 수 없는 높이로 점철된 음악도 흔하고요. 불레즈는 그런 무리한 작곡이 전혀 없습니다. 좋은 발성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표현을 할 수가 있어요. 기교에 신경 쓰느라 가사를 표현할 겨를이 없는, 그런 음악이 아닙니다. 제가 연주 후에 불레즈에게 “당신의 곡은 정말 편안하게 부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더니 자기가 정말 듣기 원하는 칭찬이라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제가 불레즈의 다른 음악을 들어보아도 기악을 하는 독주자들에게도 편안히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느껴져요. 독주자로서 바로 이 면도 불레즈를 대가로 일컫게 하는 또 하나의 덕목인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불레즈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동양적 정서 같은 것이에요. 정확한 분절과 음높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서정과 자연으로부터 음을 빌어와 무리가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마치 동양의 작풍 같습니다. 때로는 동양에서 활용되는 음계만을 고집한 작품도 있고요. 악기만 서양악기일 뿐, 누가 들으면 종묘제례악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혹시 궁금해하실 분이라면 다른 곡도 많지만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곡인 〈제의 (브루노 마데르나를 추모하며)〉 ‘Rituel in Memoriam Bruno Maderna’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성악가도 그런 동양적인 정서를 느끼면서 노래를 하면 더 효과적인 작품을 만들 수가 있어요. 제 생각에는 불레즈도 제가 그와 같은 서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말년에 저와 작업을 하고 다른 단체에도 자신의 곡 연주자로서 저를 추천하곤 했습니다. 서양의 성악가들에게 말로 일일이 설명해도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그의 곡만의 방식이 있거든요. 저는 그의 음악만 들어도 어떤 방식으로 노래를 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점이 통했던 것 같아요.

인격적으로도 정말 겸손하시고 진지하시면서도 주위를 즐겁게 하실 수도 있는 훌륭한 분이시기에 생각할수록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지난 세기 서양음악사의 종말을 상징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학생 때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다가 성악 전공으로 바꾸셨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에게는 느끼기 어려운 '기악적 감성'이 특히 현대곡을 부를 때 노래에 묻어난다고 느껴집니다. 피아노를 배운 경험 가운데 어떤 부분이 노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악기든 연주경험이 성악에는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 바이올린을 했던 사람은 정확한 음높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집착이 있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연주는 수평적인 멜로디 흐름에 치중하지 아니하고 모든 파트의 음을 수직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거의 직관적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하지요. 단순하게 초견으로 악보를 읽는 것에 도움을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과 함께 표현되는 노래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기악적 감성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저는 많은 때에 저의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와 같다고 여깁니다. 어떻게 곡 전체에 저의 발성이 악기처럼 스며들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합니다. 현대음악 중에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반주’로서 배경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성악을 ‘독주’라고 분리해서 튀어 드러나도록 노래를 했다가는 망쳐버리는 작품이 많습니다. 처음 현대음악을 부르는 성악도들이 잊기 쉬운 점이에요. 저는 현대곡 연주가 있을 때 오케스트라 측에서 성악파트만 있는 악보를 보내줄 때마다 오케스트라 악기가 모두 표시된 총보를 보며 노래 공부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하여 굳이 총보를 요청해서 봅니다. 그래야 좋은 작품을 같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악보의 모든 파트를 동시에 바라보는 관심에는 피아노 전공의 경험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Q.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있었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과정이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더 나은 발성법을 고민 중인 성악도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합니다.

좋은 발성법을 몇 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화가에게 ‘그리는 법’을 짧게 설명해달라는 것과 같지요. 성악을 시작할 때부터 늙어서 연주를 그만둘 때까지 평생을 생각하고 실험하고 연주하고 교정하는 것이 곧 발성입니다. 다 되었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한 번 불러보면 곧바로 또 교정할 것이 드러나지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성악가가 똑같을 거예요. 자신의 발성법이 완성되었다고 자신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발성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 선생님, 그리고 외국사람으로서는 그루베로바입니다. 자연스럽고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정말 좋은 발성이라고 생각해요. 유연하기만 하면 소리가 민들레 홀씨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힘과 박력만을 추구하면 굳은살처럼 딱딱하고 경직된 소리로 변질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고 둘을 모두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발성의 최종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발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건강한 목소리로 무대에 서는 것이 모든 성악가의 목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결코 무리해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곡을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도 유혹은 많았지요.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새털같이 가뿐한 소리를 가졌는데 바그너 오페라 배역이 들어올 수도 있고, 비브라토의 폭이 크고 메탈릭한 음색을 가진 사람이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를 해 달라고 부탁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과 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쉽게 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풀룻 연주자에게 튜바 소리를 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무리한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소리가 갖지 못한 면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소리의 장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살리기보다, 갖지 못한 단점을 숨기려고 또는 단지 단점을 뛰어넘는 시도를 한다는 차원에서 자기 목소리와 맞지 않는 레파토어, 맞지 않는 분야를 전전하는 것은 성악가로서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일 수도 있으므로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Q. 가수로서 느끼는 유럽 고음악계, 현대음악계, 오페라 극장의 최신 경향이나 판도를 국내 애호가 및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 소개하자면?

이것은 모든 문화계에 공통된 현상 같은데, 소위 ‘유행’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1990년대 초에는 말러, 브루크너 등 대편성 교향곡, 1990년대 후반에는 고음악 원전연주 등과 같은 클래식 계의 키워드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한 켠에서는 진은숙의 음악을, 동시에 다른 데에서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 그 옆에서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아무 특별한 시선을 받지 않고 연주됩니다. 문학이나 미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거의 모든 문화소비자가 인터넷을 통해서 아무 경계가 없는 대상을 계속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것도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지요. 그 자체로서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클릭을 반복하는 문화의 소비형태 때문에, 일정 정도의 참을성을 요구하는 분야는 쇠락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우려는 생깁니다. 곧바로 흥미를 끌 수가 없는 것이라면 이내 다른 것을 클릭함으로써 외면받게 되지요. 현대음악의 경우에 예전에는 거의 소리가 안 들릴 정도의 조용한 음향으로 1분 이상 지속하면서 시작하는 음악이 많았습니다. 요즘 젊은 작곡가들의 곡은 현란한 음색의 타악기 연주나 특이한 음향으로 시작하는 게 상대적으로 많더군요. 같은 현상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느껴졌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예요. 15초 광고와 같이 빨리 흐르는 영상에만 노출되었던 사람이라면 타르코프스키의 ‘구식’ 영화를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대중의 성향 변화 때문에 클래식 음악계가 차츰 전반적으로 외면받는 흐름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Q. 요스 판 이메르세일의 '슈베르티아데' 음반 작업에 참여하셨고, 같은 제목으로 열리는 통영 무대에도 서게 되셨습니다. 바리톤 토마스 바우어와도 친하실 텐데요, 이와 관련해 독자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얘기 부탁합니다.

그 사람들 모두 오랜 시간 정말 많은 연주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가족같이 친한 모임입니다. 음악적으로는 서로를 완전히 믿는 사이라, 리허설 시간이 다른 연주 날과 겹쳐 당신 연주를 미안하지만 못 할 것 같다고 하면 비행기로 곧바로 날아와 리허설 없이 그 상태로 무대에 서라 할 만큼 음악적 신뢰가 두텁습니다. 가는 데마다 반주(?)를 곁들여가며 식사도 자주 함께하고 각자 사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누지요. 요스와 토마스는 회와 슈납스(소주)를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번에 통영으로 함께 가게 된 것을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Q. '슈베르티아데' 음반에서 슈베르트 가곡을 부르신 음반을 듣고 있으면 개인적인 추억이 노래에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실 만한 사연이 있나요?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면서 개인적인 추억에 잠시라도 잠길 수 없는 우리나라 성악가가 있을까요?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피아노과에서 성악과로 옮긴 뒤부터 사춘기 시절 내내 불렀던 것이 슈베르트의 가곡들입니다. 유럽이라는 데를 전혀 몰랐을 때도 그 가곡들을 들으면 독일, 오스트리아의 쓸쓸한 가을겨울과, 유럽 남부의 화사한 햇살이 상상으로 그려졌습니다. 슈베르트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정서가 반복되어 드러나는 것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이후에도 아무리 놓아주려 해도 일 년에 몇 번은 부르게 돼요. 그때마다 어릴 때의 그런 추억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가곡을 추억만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드러납니다. 설명은 쉽지 않지만 기교면에서도 부를수록 어렵기도 하고요. 쉽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확한 독일어 딕션이나 가사를 통한 감정처리만으로는 완성해낼 수 없는 요소가 너무도 많습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자랑이라 하기에는 그렇고, 그냥 제 연주 계획을 말씀드릴게요. 기간으로는 2019년 상반기까지 연주가 잡혀 있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것만 말씀드리면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및 가곡들로 씨디 녹음 및 투어가 계획되어 있고, 말러 4번의 연주 및 씨디 녹음도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거슈윈의 노래들로 내년 크리스마스를 장식할 예정이고, 빈 필 단원들과 파리 샹제리제 극장에서 말러 뤼케르트 가곡집, 베르크의 일곱 개의 초기 가곡 등을 부르는 계획도 있어요. 현대음악으로는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안톤 베버른의 곡들로 불레즈 추모 연주회를 하고, 빈 방송교향악단, MDR 합창단과 함께 불레즈의 〈혼례의 얼굴〉 공연도 있습니다. 쾰른에서 진은숙 선생님의 〈말의 유희〉 연주도 있고요. 한국에서는 내년 10월에 예술의 전당 클래식 스타 시리즈에서 독창회가 있습니다.

Q. 2011년 통영국제음악제 레지던스 아티스트였고, 지난해에는 통영국제음악당 기획공연에 출연하셨습니다.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전과 후 모두 통영에서 공연하셨던 만큼 통영과 인연이 남다른 음악가이신데요, 이번 '슈베르티아데' 공연을 앞두고 기대되는 점을 말씀해 주세요.

통영국제음악제는 저의 음악 여정에서 도저히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상입니다. 2005년 스콜라 하이델베르크와 처음 연주하러 왔었는데, 초기부터 자주 초청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통영국제음악제가, 곧 저의 현대음악에 대한 식견과 동시에 탄생하였고 또한 발전해왔다고 생각될 정도이니까요. 처음 음악제가 시작되어 제가 참여할 때에는 저 또한 현대음악의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제의 발전도상에서는 제가 유럽에서 활동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고요. 이제는 양쪽 모두 어느 정도 기량이 무르익어 인정받고 있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어느 한쪽 힘을 잃지 않고 둘 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청중들을 크게 만족시키는 음악제와 제 자신으로 남아서 계속 굳은 인연을 이어가길 바래봅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2006.10.13. 진은숙의 Ars Nova Ⅱ - 뤼디거 본 / 서울시향

LG 생활건강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Ⅱ
2006년 10월 13일 8:00 PM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J.S. 바흐 / A. 베베른, 6성부 리체르카레(<음악의 헌정> 중)
A. 베베른,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모음곡 작품
N. 그리니 / G. 벤자민, 3도 독주(17세기 오르간 곡)
브레트 딘, <카를로>
M. 라벨, <쿠프랭의 무덤>
작자 미상 / 진은숙,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14세기 사이프러스 섬의 사랑노래 중)
G. 벤자민,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겨울의 마음>
A. 비발디,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오페라 <그리셀다> 중)
I.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 모음곡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소프라노 서예리



아르스 노바(Ars Nova)는 원래 14세기 다성음악을 일컫는 음악용어로, 13세기 다성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라 하여 이와 대비시킨 말이다. 그러나 이날 연주회 제목은 진은숙의 편곡 작품을 제외하고는 아르스 노바 양식과 별 관련이 없고, 다만 '새로운 예술'이라는 말뜻을 빌렸을 뿐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기존 작품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신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익명성이 장려되던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데올로기다. Avant garde, Neue Musik, Música Nova 등이 이를 반영하는데, 모두 아르스 노바와 관련이 없는 20세기 음악 용어들이지만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르스 노바와 통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진은숙은 고음악 양식을 뜻하는 용어를 20세기 작품 위주의 연주회 프로그램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연주회의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노린 듯하다. 즉,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전통과의 연결고리는 유지하려는 현대음악의 이상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라는 제목으로 표현된 것이다. 연주회의 부제로 사용된 "EarlyNew"라는 조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바흐와 그 이전 시대 작품이 현대 작품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것이다. 비슷한 구성의 연주회를 라디오로 들어본 적도 있는데, 2001년 브레멘 음악 축제에서는 리게티(György Ligeti)와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작품 사이에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이번 연주회는 바흐뿐 아니라 비발디, 그리니, 심지어 아르스 노바 시대의 작품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유명 작곡가와의 연계성만이 아닌 시대가 낳은 전통 자체와의 연결고리를 부각시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대음악과 시대적으로 인접한 낭만주의 및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과의 연계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0월 17일에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베토벤과의 양식적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홍성지의 작품뿐이며 나머지는 패러디나 콜라주 등의 기법을 위한 소재로만 베토벤을 다루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이 바로크 시대 이전 양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는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와 단절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학 논문이 아닌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보여주기는 곤란해 보이며, 따라서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 프로그램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의 3요소'로 선율, 리듬, 화성을 꼽는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음악에서는 여기에 음색을 더해서 '4요소'라고 한다. 그만큼 현대음악에 음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대 편성보다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과 같은 소편성이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연주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처럼 울림이 많은 곳은 현대음악의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에는 재앙과도 같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귀로 전달된 느낌이 지휘자의 해석 때문인지 연주회장의 음향 탓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고, 이 때문에 시향의 연주에 대한 내 느낌은 그에 따른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바흐의 6성부 리체르카레가 너무 밋밋하게 들렸던 것, 베베른의 작품 10에서 베베른다운 음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특히 3곡에서 특유의 리듬이 흐리멍덩하게 뭉쳐져 들렸던 것,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 피날레 연습기호 104와 114에 나타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롤러코스터 같은 상승 음형과 크레셴도가 영 제맛이 안 났던 것 등은 모두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라고 판단된다. 이날 연주회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대신에 LG 아트센터에서 열렸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던 체임버홀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베베른(Anton Webern)이 편곡한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6성부 리체르카레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이번 연주회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체르카레(ricercare; ricercar, ricercata, etc.)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있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주제로 된 푸가(fugue)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쉽게 말해 이 작품은 바흐 음악 양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베른의 편곡에서는 베베른 특유의 음색이 녹아들어 있어서 모르고 들으면 베베른이 쓴 조성음악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베베른의 그림자는 옅게 하고 바흐의 느낌을 더 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앞서 말한 연주회장 문제도 있겠지만, 나중에 지휘자로부터 직접 들은 바로는 일부러 그렇게 해석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나는 베베른보다 바흐의 특색을 더 살리는 것만이 연주회 성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정반대의 해석을 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 때문에 소리가 듣기 싫게 뭉쳐서 오히려 난장판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안톤 베베른은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베르크(Alban Berg)와 함께 이른바 '제 2 빈 악파 (Second Viennese School)'의 일원으로('원조' 빈 악파는 물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무조(無調; atonal)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본격적인 20세기 음악의 분수령이었으며, 현대음악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대중의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놓은 장본인이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이루는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하게 다룬다는 이른바 '12음 기법'은 이후 현대음악의 절대적인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20세기 후반 이후 12음 기법이 작곡가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남아 있다. 한편, 인간이 12음 음악을 지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지각심리학과 정보이론 등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해 12음 음악을 구조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나 타고난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베베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몹시 당황했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이번 연주회를 앞두고 베베른의 작품 10의 악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만큼 열심히 연주회 감상 준비를 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은 이 작품의 역사적인 한국 초연이 듣기 괴롭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요술의 전당'의 안타까운 음향 환경과 유난히 심했던 관객의 소음을 힘겹게 뚫고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탓에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베베른 특유의 다양한 색채는 결국 내 귀에 이르기도 전에 흐릿하게 뭉쳐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소실된 소리를 상상해가며 들어본 결과 연주 자체는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나는 음반으로는 느낄 수 없던 신비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면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이런 식의 3차원적 공간감은 정상적인 가정용 2채널 오디오로는 재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나중에 고가의 오디오를 감상할 기회가 생기면 이 작품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이 편곡한 그리니(Nicolas de Grigny)의 오르간 곡은 악기 편성이 특이했다. 트롬본 등의 저음 악기와 고음 목관악기를 사용하면서 중간 성부를 담당할 만한 악기를 쏙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실제 오르간 소리와 매우 비슷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나오는 하바쿡 트라버(이희경 옮김)의 설명을 보자. "옛 오르간 제작자들은 이미 한 음의 음색이 근음과 특정한 배음 스펙트럼에서 나온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오르간 제작에 적용했다. 그래서 단지 배음만을 포함하는 레지스터를 제작하여, 그것이 기본 레지스터와 함께 연주될 때 독특한 음색을 낳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레지스터의 하나가 '티어스(tierce)', 제 5부분음인 '3도'다. 조지 벤자민의 편곡은 바로 이러한 오르간 음향구성을 토대로 한다. 우선 트롬본이 주 성부를 연주하고, 고음 목관들이 제2부분음에서 제9부분음에 이르는 배음스펙트럼을 연주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오보에가 4옥타브의 '라'를 불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소리의 주파수는 약 440헤르츠다. 그러나 실제 오보에 소리는 440헤르츠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두 배(즉, 880헤르츠), 네 배, 여덟 배 등에 해당하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은 피아노로 '도'를 눌렀을 때 '솔'이나 '미'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듣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음고에 해당하는 440헤르츠 성분을 '근음(fundamental)'이라 하고 그 배수열을 이루는 성분들을 '배음(harmonics; 인용된 설명에서는 '부분음')'이라 한다. 같은 음고로 소리를 냈을 때 악기마다 음색이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배음의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지 벤자민은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고음 목관악기가 트롬본의 배음을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오르간 음향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로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를 즐겼던 19세기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이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음악 이론가 카츠(Jonathan Howard Katz)는 "당신이 음악 이론 광(狂; geek)임을 나타내는 75가지 징후"라는 우스개 글에서 다음을 그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과제물 등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대해) '하지만 제수알도는 이렇게 했었단 말이에요!' 하고 자신을 변호한 적이 있다." 음대생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16세기 및 18세기 화성법과 대위법에서 금기로 여기는 선율 및 화성 진행을 16세기 작곡가인 제수알도(Carlo Gesualdo)는 곧잘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가능한데, 당시로써는 이것이 대단한 파격이었겠으나 요즘 시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통적 조성체계의 해체를 경험한 뒤로는 대중음악에도 특이한 불협화음이 곧잘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브레트 딘(Brett Dean)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나를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 두오 Moro, lasso al mio duolore>의 녹음을 샘플링하고 20세기 음악 어법으로 관현악을 더해 새로운 작품 <카를로>를 썼다. 그 결과는 제수알도가 살인을 저지르던 날을 소재로 하는 공포영화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 The Shining>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큐브릭은 이 영화에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의 음악을 사용했지만, 만약 그가 <카를로>를 알았다면 틀림없이 영화의 주요 장면, 특히 긴장감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후반부에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를로>는 이 영화가 나온 지 17년 뒤인 1997년에 발표되었다. 가만, 혹시 브레트 딘은 차라리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고 제수알도는 단지 소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벨(Maurice Ravel)의 <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 쿠프랭(François Couperin, II)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원래는 여섯 악장으로 된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은 이중 네 곡을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해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 "tombeau"는 '무덤'을 뜻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추모하는 예술작품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라벨은 원곡을 구성하는 6곡을 자신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제로 사용했으므로 추모의 뜻을 이중으로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모음곡 형식과 장식음 등이 바로크 시대의 것을 빌어온 것이고, 선율과 화성 등은 라벨 고유의 것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쓰였지만, 20세기 음악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므로 낭만주의 시대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지휘자 뤼디거 본(Rüdiger Bohn)이 현대음악 전문가인 만큼 현대음악적 특징을 강조하는 해석을 보였다. 즉, 주선율 뒤에 숨어있는 선율들을 전면으로 부각시켜 색다른(또는, 무기질적인) 소리의 질감을 이끌어내곤 했다. 템포는 다소 빠른 편이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자칫 어수선하게 들리기 쉬우며, 특히 예술의 전당의 음향 환경에서는 그러한 위험도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날 연주는 지휘자가 의도한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진은숙이 편곡한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Je sui trestout d'amour raimpli"는 14세기 키프로스 지역의 노래다. 키프로스는 터키 남쪽에 있는 나라로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종교 및 정치적 알력에 따라 네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 14세기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프랑스의 다성음악, 즉 아르스 노바 양식이 이곳에도 전해졌으며,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는 그 가운데 비를레(Virelai)라는 형식에 속한다. 곡을 이루는 세 개의 성부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탓에 매우 복잡한 곡이지만, 성악과 반주의 관계 때문에 사실은 편하게 들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진은숙의 편곡은 1999년 작품인 <시간의 거울 Miroirs des Temps> 중 다섯 번째 곡으로 쓰였는데, 베베른이나 딘의 편곡 작품과는 달리 편곡자의 색채가 옅은 것이 특이했다. 프로그램에 있는 트라버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옛 것을 우리 시대로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고유한 본질은 그대로 남겨둔 채" 현대 악기로 키프로스의 특색을 살렸다.
 
진은숙의 편곡보다 더욱 눈에 띈 것은 소프라노 서예리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녀는 비브라토를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정확한 음정과 투명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유지하여 고음악에 매우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벤자민의 <겨울의 마음>에서는 폭이 좁고 빠른 비브라토를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하게 구사했으며,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에서는 발성구의 탄력을 이용하여 여러 음을 빠르게 오르내리는 이른바 아질리타(agilita) 창법을 그야말로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정교하게 소화했다. 성량이 그리 큰 편은 아니라는 것이 옥에 티라 하겠으나, 이 역시 고음악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한국에 이런 가수가 있었나 했더니 웬걸, 진은숙이 독일에서 발굴했단다. 프로필을 보니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데, 이 정도면 고음악 마니아들은 이미 서예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도 같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의 <겨울의 마음 Mind of Winter>은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시 <눈 사람 The Snow Man>에서 제목과 가사를 따온 작품이다. '눈사람(The Snowman)'이 아니라 '눈 사람(The Snow Man)'인 까닭은 겨울 풍경의 클리셰(Cliché)로서의 눈사람이 아니라 "겨울 마음"을 가지고 눈 덮인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눈과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겨울의 공허(空虛) 그 자체가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육사가 인식한 겨울의 모습이 "강철로 된 무지개"와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 등이었다면, 스티븐스가 그린 겨울의 모습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황량한 대지와 그 속의 공허(空虛)함이다.
 

The Snow Man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 Wallace Stevens (1879~1955)

눈 사람
 
우리는 겨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눈 속에 단단해진 소나무의
서리와 가지를 헤아리기 위하여.
 
그리고 오랫동안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얼음에 엉겨붙은 로뎀나무와
저 멀리 빛나는 1월의 태양 아래
 
거칠어진 전나무를 응시하기 위하여.
얼마 남지 않은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괴로워하지 않기 위하여.
 
귀 기울이는 이에게 그것은
변함없는 바람으로 가득한
변함없이 황량한 땅의 소리
 
눈 속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자신 무(無)가 되어
그곳에 없는 무(無)와 그곳에 있는 무(無)를 응시하는 이를 위한.
 
- 월리스 스티븐스 (김원철 옮김)


그런가 하면 조지 벤자민이 그린 겨울의 모습은 날카로운 고음의 불협화음과 음산한 글리산도, 심벌즈의 차가운 울림 등으로 가득한 음악이었으며, 차라리 "강철로 된 무지개"의 심상과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술의 전당'에서 흐릿하게 뭉쳐진 음향 때문에 뜻하지 않게 스티븐스의 겨울에 더 어울리는 부분도 많았다. 또 끝 부분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은 시의 마지막 연과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영어 가사가 한국의 정가(正歌; 가곡, 가사, 시조)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탓인지 내용을 알아듣기는 몹시 힘들었다.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는 오페라 <그리셀다 Griselda> 중에서 그리셀다의 딸 코스탄자가 부르는 아리아로, 아버지 구알티에로의 명령과 연인 로베르토와의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와 폭풍을 만나 흔들리는 배를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인 동시에 서예리의 기교를 뽐내기에 매우 적당한 곡이라 할 수 있으며, 지휘자는 역시 빠른 템포로 몰아쳐서 서예리의 눈부시게 아찔한 테크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임무 때문에 사랑 때문에 Dal dovere da l'amore" 대목에서는 템포를 충분히 늦추어 계속되는 속도감에 청중이 숨 막혀 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앞뒤 부분과의 속도감의 대비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발레 곡으로 작곡한 <풀치넬라>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성악 부분을 기악으로 고친 작품이다. <풀치넬라>는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를 비롯한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로부터 새로 발견된 페르골레지의 자필 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퍼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사진으로 복사된 인쇄 악보였다고 한다. 다만 스트라빈스키가 페르골레지 등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남의 작품을 인용하고 개작하는 것은 스트라빈스키 작품세계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독일의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Christian Kaden)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추구했던 것은 자기 변신(Selbstverwandlung)이었다. 그는 발전과 진보, "목표지향적인 발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별에 다가가는 것,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대신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을 추구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순환의 속성을 가진 "흔들리는 고요함, 역동적인 고요함, 프랑스어로 calme dynamique"이다. <결혼 Les Noces> 등의 작품에서는 이것이 종소리의 정적인 울림으로 나타나며, <풀치넬라>에서는 진동하는 형식 모델(schwingende Formmodell)로 나타난다. 조성과 악장 배치, 템포와 박자 등이 순환적/대칭적 속성을 가지며, 고전적 양식과 새로운 기악적 테크닉이 진동하는 형식 모델 속에서 갱생한다.
 
이날 연주에서는 주선율과 부선율을 차별하지 않는 뤼디거 본의 '무정부주의적' 해석이 신선한 매력을 주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정교한 대위법이 그에 의해 입체적 "진동"으로 나타났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고, 이것이 독특한 악기 간 밸런스가 주는 매력을 더욱 잘 살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빠른 템포 때문에 세부적인 프레이징에 나타난 연주자의 표정들이 다소 흐릿해진 감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7악장 "비보 Vivo"에서 콘트라베이스의 매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충분히 좋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단점이다. 한편, 2악장 세레나데에서는 오보에 주자가 템포를 다소 느긋하게 잡고 솔로 연주를 하다가 두 번째 박에서 지휘자의 비팅을 보고 재빨리 템포를 수정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가엾은 연주자는 6악장 가보트에서는 반대로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았다가 역시 둘째 박 비팅을 보고 템포를 늦추기도 했다.
 
커튼콜로 연주된 곡은 파헬벨의 <캐논과 지그>였는데,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곡이다. 조지 윈스턴의 늘어지는 템포 대신 매우 빠른 템포로 연주되었고,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해체적인 성격도 여전했다. 다시 말해 '정격적인' 템포와 '현대적인' 밸런스가 절묘하게 만한, 이날 연주회 성격에 매우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있는 작곡가로, 쇤베르크와 베베른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현대음악으로 향하는 다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음악은 당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이 베토벤보다 더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말러의 대중화 과정이 오디오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러 시대부터 점차 음색이 선율이나 화성 못지않게 음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오디오의 재생능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아직도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디오 기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 그보다 전에 연주회장에서 현대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연주회처럼 '현대음악 특집'도 필요하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와 함께 현대음악이 나란히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이 브람스나 말러를 들으러 왔다가 버르토크나 리게티, 펜데레츠키를 '우연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의 작품이 더 자주 '보통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래서 나는 진은숙이 많은 돈을 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활동만으로도 많은 수입을 올리는 작곡가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그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야구 선수 지망생들이 박찬호나 이승엽을 꿈꾸는 것처럼.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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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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