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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4일 목요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오리지널 버전)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오리지널 버전)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1903년과 1904년에 걸쳐 작곡되어 1904년 2월 8일, 시벨리우스 자신의 지휘와 빅토르 노바체크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다. 하지만 초연 직전까지 작품이 완성되지 않아 협연자는 준비가 부족한 채로 무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는 초연 이후 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1905년에 악보를 출판했으며, 오늘날 보편적으로 연주되는 버전은 이 1905년 개정판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1904년의 초판이 연주된다. 시벨리우스 가문의 허락을 받아야 연주할 수 있는 이 판본은 국내에서는 지난 2023년 오스모 벤스케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핀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엘레나 베헬레에 의해 처음 연주됐다. 1904년 초판은 협연자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기량을 요구하며, 개정판에서 삭제된 선율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제1악장은 변형된 소나타 형식이다. 길고 어두운 선율 속에 화려하면서도 으스스한 기운을 머금은 독주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이끌고, 오케스트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목가적인 제2주제는 첼로와 바순으로 시작하여 클라리넷과 오보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차례로 선율을 넘겨받는다. 뒤이어 독주 바이올린이 제2주제를 이어받아, 마치 울부짖는 듯한 어조로 변주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오케스트라가 다시금 선율을 주도하는 대목은 ‘작은 종결구’(codetta), 또는 관점에 따라 제3주제라 할 수 있다. 제1주제에서 제2주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카덴차를 연상시키는 빠르고 화려한 음형이 등장하는 것에 이어,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 자리를 길게 확장된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가 온전히 대체한다는 점이 이 악장의 가장 큰 특징이다. 카덴차(발전부)가 끝난 뒤에는 제시부를 변형한 형태의 재현부가 이어지며, 짧은 종결구(Coda)와 함께 악장이 마무리된다.

짜임새가 복잡한 것은 제1악장까지다. 제2악장은 A-B-C 세 도막으로 되어 있고, 제3악장은 A-B-A’-B’-종결구 꼴이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어둠을 헤치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적 서사를 따른다. 제1악장이 현실의 고통을 복잡한 구조 속에 담아냈다면, 제2악장에서는 서럽게 울부짖는 바이올린 소리가 카타르시스를 매개한다.

제3악장에서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음형으로 쉼 없이 빛을 향해 달려 나간다. 시벨리우스는 빛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작곡가였다. 특히 이 악장에서는 북유럽의 자연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공기와 그 공기를 뚫고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 음악으로 그려진다. 협연자의 화려한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다채로운 음색이 눈부신 풍경을 완성한다.

(2026. 3. 24. 수정)

J.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7 (original version)

Sibelius’ ‹Violin Concerto› ranks among the most beloved works in the violin repertoire, alongside works by composers like Tchaikovsky and Brahms. Composed between 1903 and 1904, it premiered on February 8, 1904, with Sibelius conducting and Viktor Nováček as the soloist. However, the piece was not fully completed until just before the premiere, which meant the soloist had little time to prepare adequately.

After the premiere, Sibelius worked on revisions. The score was published in 1905, and this is the version most commonly performed today. However, for this performance, the original 1904 version is used. This version can only be performed with permission from the Sibelius family and had its Korean premiere in 2023 by the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Osmo Vänskä. The 1904 edition demands a higher level of skill from the soloist and includes some melodies that were removed in the 1905 revision.

The first movement follows a modified sonata form. The first theme is lengthy, dark, and dramatic, led by the violin solo, with the orchestra providing occasional support. The second theme, more pastoral in nature, begins with the cello and bassoon, followed by the clarinet, oboe, flute, and violin taking up the melody. The solo violin then reinterprets this theme in a mournful, pleading manner.

The passage in which the orchestra once again assumes control of the melodic line may be understood as a “codetta,” or, from another perspective, as a third theme. At the juncture between the first and second themes, a rapid and dazzling figuration evocative of a cadenza emerges. Most distinctive, however, is that the traditional development section of the sonata form is entirely supplanted by an extended cadenza for the solo violin. Once this cadenza — functioning as the development — concludes, a recapitulation appears in a varied form of the exposition, and the movement is brought to a close with a brief coda.

The structural complexity is mostly confined to the first movement. The second movement follows an A-B-C form, while the third movement adopts an A-B-A’-B’-coda structure. This concerto unfolds a musical narrative of journeying through darkness toward light. If the first movement encapsulates the struggles of reality within its intricate structure, the second movement serves as a cathartic release, carried by the violin’s sorrowful wailing.

In the third movement, the music surges forward relentlessly, propelled by rapid passages that race toward the light. Sibelius had an exceptional ability to depict light through music, and in this final movement, that quality shines with remarkable brilliance. The music evokes the crisp, cool air of the Nordic landscape, pierced by radiant beams of sunlight. The brilliance of the soloist’s virtuosity and the orchestra’s rich, varied colors further enhance this vivid musical imagery.

(Modified on March 24, 2026.)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작품 설명: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림스키-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팸플릿과 웹매거진에 실은 글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g-phil.kr/?p=1507

▶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은 서곡이 가장 유명하지요. 이 글에서는 음악에 관해 자세히 얘기하기보다 줄거리를 알려드릴 테니 상상하면서 들어 보세요.

레오노라는 잉카 제국 왕족인 돈 알바로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레오노라의 아버지인 칼라트라바 후작이 그것을 반대합니다. 레오노라는 망설인 끝에 알바로를 따라 몰래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칼라트라바 후작이 칼을 들고 막아서고, 알바로는 총기 오발로 후작을 죽이게 됩니다. 두 사람은 따로 갈라져 도망칩니다.

레오노라의 오빠인 돈 카를로가 두 사람을 추적합니다. 레오노라는 알바로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먼 친척인 수도원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수도원 근처에 있는 작은 동굴에서 홀로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알바로는 레오노라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기를 바랍니다. 카를로가 전쟁터에서 알바로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영원한 우정을 맹세합니다.

알바로는 부상을 당해 후송됩니다. 알바로는 카를로에게 비밀 상자를 건네며 열지 말고 태워 달라 부탁하지만, 카를로는 상자를 열어 알바로의 정체를 알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알바로가 완쾌된 뒤 카를로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알바로는 레오노라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알바로는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고 수도사가 되어 '라파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카를로는 알바로를 찾아내고 결투를 벌인 끝에 중상을 입습니다. 카를로는 죽기 전 종부성사를 간청하고, 알바로는 가까운 동굴에 사는 수녀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레오노라를 만납니다. 카를로는 레오노라를 칼로 찌른 뒤 죽고, 레오노라는 카를로를 용서한 뒤 죽습니다. 수도원장이 달려와 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판본에 따라 알바로가 자살하기도 합니다.)

▶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딱히 표제가 없는 작품이므로, 음악 외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에 조금 딱딱하더라도 악곡의 짜임새를 설명하겠습니다. 이른바 '소나타 형식'에 관해서는 많이들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할게요.

소나타 형식은 크게 보아 제시부―발전부―재현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시부는 제1 주제, 그와 대비되는 제2 주제, 그리고 경과구 따위로 이루어져 있고, 발전부는 제시부 주제가 자유롭게 '발전'하는 곳입니다. 재현부는 제시부를 그대로 또는 비슷하게 되새기는 곳이고요. 때로는 앞뒤로 서주(intro)와 종결부(Coda)가 덧붙을 수도 있습니다. 소나타 형식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지만, 여기서 복잡한 얘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은 변형된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제1 주제는 길고 어둡고 화려하지만 으스스한 바이올린 독주가 이끌고, 오케스트라는 때로 거드는 식입니다. 목가적인 제2 주제는 첼로와 바순으로 시작하고 클라리넷, 오보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선율을 받아 뒤따릅니다. 그리고 독주 바이올린이 제2 주제를 애달프게 울부짖는 느낌으로 고쳐 연주합니다. 오케스트라가 다시금 선율을 이끄는 대목은 '작은 종결부'(codetta), 또는 관점에 따라 제3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 1악장 제2주제

▲ 1악장 제2주제의 변형(독주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협연자가 홀로 화려하게 연주하는 대목을 카덴차(cadenza)라고 하지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제1 주제에서 제2 주제로 넘어가기 직전에 카덴차를 닮은 빠르고 화려한 음형이 나오고, 1악장 발전부가 통째로 카덴차를 대신합니다.

발전부가 끝나면, 제시부가 변형된 재현부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짧은 종결구(Coda)와 함께 1악장이 끝납니다.

짜임새가 복잡한 것은 1악장까지입니다. 2악장은 A-B-C 세 도막으로 되어 있지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저마다 슬픈 기억을 하나씩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서럽게 울부짖는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쓰라린 마음을 그러모았다가 쓸쓸한 선율 속에 떠내려 보내세요.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3악장은 A-B-A'-B'-종결구 꼴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음형으로 쉼 없이 달리는 짜임새입니다. 듣기 좋은 선율과 다채로운 음색, 북유럽의 자연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공기, 그 공기를 뚫고 쏟아지는 밝은 햇빛처럼 화려한 독주 바이올린이 멋진 악장입니다. 협연자가 기교를 마음껏 뽐내는 모습이 더욱 멋지지요.

▶ 세헤라자데, 셰에라자드, 샤흐르자드

《세헤라자데》는 『천일야화』에 나오는 왕비 칭호를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원작 『천일야화』는 페르시아어이고, 프랑스 작가 앙투안 갈랑이 프랑스어로 옮겨서 유럽에 알려졌으며, 영국 작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이 옮긴 영어판이 가장 유명합니다. 판본이 복잡한 만큼 표기법도 복잡해요.

『천일야화』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비를 부르는 이름은 본디 샤흐르자드(شهرزاد‎)입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는 페르시아어 한글 표기법을 아직 정하지 않았고, 『천일야화』 관련 표기는 프랑스어를 기준으로 할 것을 권장합니다. 그래서 셰에라자드(Shéhérazade)가 되지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작곡가이므로 러시아어 표기까지 참고하자면 셰헤레자다(Шехерезада)가 됩니다.

그러나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헤라자데'라 쓰기로 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다른 이름은 페르시아어를 기준으로 쓸게요. 이를테면 왕은 '샤흐르야르'입니다. 또 《세헤라자데》 악장마다 붙은 표제에도 페르시아어를 바탕으로 '신드바드'와 '칼란다르' 등으로 썼습니다.

▶ 림스키-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는 각 악장이 『천일야화』의 특정 에피소드를 묘사한 곡은 아닙니다. 다만, 작곡가가 나중에 다음과 같은 표제를 덧붙였다고 하지요.

1.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

2. 칼란다르 왕자

3. 왕자님과 공주님

4. 바그다드의 축제. 바다. 청동 기병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배가 난파함

작곡가가 자서전에 쓴 설명에 따르면, 《세헤라자데》 1악장 처음에 나오는 짧고 묵직한 음형은 샤흐르야르, 그러니까 왕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나오는 바이올린 독주가 '세헤라자데'를 뜻하지요. '세헤라자데' 음형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조금씩 달라진 모습으로 계속 나오니까 잘 기억해 두세요.

뒤이어서 첼로가 같은 음형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기 시작합니다. 비올라가 때때로 거듭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이 '파도'를 닮았지요. 바이올린이 그 위에서 '샤흐르야르' 음형을 살짝 고친 '바다' 음형을 연주합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샤흐르야르의 사나운 성격은 거친 바다의 이미지와 겹치지요. 바다는 때로 거칠고, 때로 잔잔합니다.

2악장 '칼란다르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는 더 화려하고, 어찌 들으면 요염합니다. '칼란다르'는 종교지도자에게 붙이는 칭호인데, 2악장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칼란다르도 신드바드처럼 배를 타고 있는 듯해요. 햇볕 따사로운 나른한 오후에 갑판에서 무언가 흥미진진한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이 떠오르거든요.

3악장 '왕자님과 공주님'은 달콤한 사랑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와 달리 음악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세헤라자데' 바이올린 독주가 나옵니다. 펼침화음으로 마치 협주곡의 카덴차처럼 화려한 음형을 연주하더니 오케스트라의 사랑 노래를 이끌어 버리지요. 마치 '왕자님과 공주님'은 다름 아닌 '샤흐르야르와 세헤라자데'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세헤라자데'를 달리 쓰면 '샤흐르자드'라 했지요. '샤흐르야르와 샤흐르자드'는 '아사달과 아사녀' 또는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사랑 노래가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4악장에서는 살타렐로(Saltarello), 타란텔라(tarantella) 등 빠른 춤곡 리듬으로 마구 달리는 가운데 앞선 악장에서 나온 음형들이 이 리듬과 엇갈리고 뒤섞입니다. 살타렐로와 타란텔라는 거의 비슷하므로 이 글에서 머리 아프게 차이를 설명하지는 않을게요. 둘 다 이탈리아 춤곡 양식이라는 대목이 얄궂은데요, 생각해 보면 아라비아 사람들이 춤추고 놀 때 무슨 음악을 듣는지 머릿속에 얼른 떠오르나요? 설마 '뚫흙 뚫흙 뚫 따다다?'

신 나는 축제 분위기는 '바다' 음형을 만나고 배가 난파하면서 파국을 맞습니다. 바다가 잔잔해지면 '세헤라자데'(바이올린)와 '서툴게 다정해진 샤흐르야르'(첼로 및 더블베이스)가 여운을 주는 대화를 나누면서 음악이 끝납니다.

세헤라자데는 어떤 사람일까요? 무서운 임금님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여장부? 임금님을 유혹하는 요녀? 마음 깊은 곳 상처를 달래는 어머니? 경기필 정하나 악장님이 바이올린으로 들려주는 세헤라자데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세요!

※ 티켓 예매 바로가기 :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3004033

2011년 4월 7일 목요일

시벨리우스 《포흐욜라의 딸》 /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 유카페카 사라스테 / 서울시향

2011-02-24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유카페카 사라스테

시벨리우스, 포흐욜라의 딸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입니다. ㅡ,.ㅡa


역사와 전통이 있는 악단일수록 단원들 자존심도 그만큼 대단해서, 어지간한 지휘자는 말 안 듣는 단원들 때문에 골탕을 먹기 일쑤다. 그런데 서울시향은 그와 달리 지휘자가 무슨 요구를 하든 다 들어준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 서울시향은 유럽 기준으로도 기본기는 탄탄하므로 일류 지휘자에게도 매력 있는 악단이라는 말을 글쓴이는 언젠가 한 단원에게 들은 일이 있다. 그래서 거장 샤를르 뒤투아가 객원 지휘했을 때 분위기가 그렇게나 좋았다던가.

글쓴이가 객석에서 듣기에도 일리 있는 말이다. 요즘 서울시향은 그만큼 지휘자 솜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거물급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가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이날 연주는 그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런데 사라스테가 보여준 작품 해석은 조금 뜻밖이었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시벨리우스를 지휘하면 북유럽 서늘한 공기처럼 고음을 부풀릴 듯하지만, 이날 연주에서는 거꾸로 현이건 관이건 저음이 너무 두드러졌다는 불평이 나오기까지 했다. 《포흐욜라의 딸》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오케스트라를 눈부시게 뚫고 나올 때에는 역시 핀란드 지휘자라는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단단한 저음을 바탕으로 균형 잘 잡힌 소리였다.

'사라스테 사운드'는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발췌 모음곡에서 좀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단단한 저음, 균형 잡힌 소리, 그리고 조금이라도 균형을 해칠 만한 대목은 빈틈없이 다듬어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된 소리가 객석을 압도했다. 정명훈이 큰 틀을 짜고 나머지는 단원들에게 맡기는 식으로 소리를 다스린다면, 사라스테는 작은 소리까지 지휘봉 끝에 휘어잡아 소리를 빚어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 곳으로 이를테면 〈몬타규 가와 카풀렛 가〉에서 '줄리엣' 모티프가 처음으로 나온 대목(마디 63)을 들 수 있다. 플루트가 연주하는 주선율은 아름답지만, 약음기 낀 비올라 음형에 글리산도(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연주하기)가 있어서 문제다. 플루트 소리와 비올라 소리가 합쳐지면서 옥타브 하행 도약에 음산한 글리산도가 덧입혀져 주선율을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음반을 들어보면 지휘자에 따라 일부러 이곳에서 기괴한 느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라스테는 글리산도 음형을 들릴 듯 말 듯하게 다스려 플루트가 주선율을 확실하게 이끌고 가게끔 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비올라 글리산도 음형이 마치 왈츠를 추는 줄리엣처럼 사뿐사뿐 했다는 대목이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음색과 셈여림, 악기 간 균형 따위가 상호작용하여 음반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마법이 일어났다.

'사라스테 사운드'가 가장 충격적으로 드러난 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었다. 글쓴이는 언젠가 이 곡을 두고 '달콤한 절망과 거짓된 승리' '현실을 회피해버린 작곡가의 정신적 마스터베이션' 등으로 풀이한 바 있다. 겉보기에는 법석대며 화려하게 끝나지만 그 이면에 처절하게 궁상맞은 정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연주에서는 병든 광기가 철저하게 억눌린 대신 잘 계산된 세련미가 덧입혀져 마치 브람스가 새로 편곡이라도 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칫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대목은 대선율이 주선율을 치고 올라오게 하거나 악기 간 균형을 정교하게 다듬어 세련됨을 잃지 않게끔 했고, 곳곳에서 이음매가 자연스럽도록 템포를 다스리기도 했다. 그래서 사납게 몰아치는 대목에서도 절박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라 여유를 잃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어 마치 차이콥스키가 아닌 말러를 듣는 듯하기도 했다.

'이건 차이콥스키가 아니야!' 누군가는 이렇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라는 말이 있듯 한 가지 해석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떠올린 아름다운 선율을 베토벤이나 브람스처럼 정교한 짜임새로 풀어내는 솜씨가 모자람을 곧잘 한탄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가 이날 연주를 들었다면 자신의 약점을 없애준 연주라며 지휘자 손을 덥석 잡고 고마워하지는 않았을까.

이날 첼로 수석을 맡은 객원은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 수석인 루이지 피오바노(Luigi Piovano)로 서울시향과는 아마도 두 번째이지 싶다. 그런데 피오바노가 서울시향 객원 수석을 처음 맡았던 날을 글쓴이는 시향 개편 이후 최악의 연주회로 기억한다. 그날 시향이 연주를 망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개편 초기 취약점을 거의 털어낸 서울시향이 이날 피오바노를 다시 만나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다.

현악 파트는 보통 수석 연주자가 활놀림을 결정한다. 가끔은 악보에 지시가 있거나 지휘자 요구가 반영되기도 하지만, 그런 예외를 빼면 수석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파트 음색이 확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날 피오바노를 만난 서울시향은 평소와는 크게 달라져 고무공처럼 통통 튀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첼로 소리를 뽐냈다. 첼로를 따라 콘트라베이스 소리가 덩달아 달라지기도 했는데, 첼로와 활놀림을 맞춘 탓인 듯했다.

2010년 4월 24일 토요일

하차투리안 플루트 협주곡 /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 샤론 베잘리 / 안드레아스 델프스 / 서울시향

2010-03-25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Andreas Delfs
협연 : Sharon Bezaly, flute

Kabalevsky, Colas Breugnon Overture
Khachaturian, Flute Concerto
Sibelius, Symphony No. 2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지휘자 안드레아스 델프스는 디에고 마테우스에 이은 '대타' 지휘자였다. 미코 프랑크가 몸이 아파서 잇따라 연주회를 취소했다는데, 디에고 마테우스가 대신 지휘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아쉬웠다. 이날 프로그램에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코 프랑크는 핀란드 사람인데다 지난 2008년 3월에 가슴 뭉클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을 들려준 일도 있어서 기대하고 있었으나, 대타로 나온 델프스는 호놀룰루 심포니 수석 지휘자라니 얄궂다. 오랫동안 밀워키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았다고는 하나 '하와이'라는 이름이 주는 햇볕 뜨거운 느낌이 도드라져서 시벨리우스와는 어딘가 안 맞을 듯하지 않은가!

지휘하는 품도 괄괄하고 서울시향이 내는 소리도 그다지 서늘하지 않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뜻밖에 느리지 않은 템포에 제법 담백한 해석이었다. 그런데도 핀란드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이 그다지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은 까닭은 교향곡 7번과는 달리 시벨리우스가 아직 핀란드 본색(?)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교향곡 2번인 까닭이었을까. 글쓴이는 지휘자가 실력을 제대로 내보이지 않고 소리를 건성으로 다듬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연주가 꽤 훌륭해서 한두 해 앞서 이런 연주를 들었다면 잘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르지만, 서울시향이 그동안 놀랍게 발전한 만큼 이제는 이런 정도로는 만족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지휘자는 1악장 처음에 섬세하게 바뀌는 셈여림 기호를 꼼꼼하게 살리지도 못했고, 저음 현만으로 음형을 이어받는 대목에서 소리가 갑자기 줄어들기도 했다. 뒤이어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첫째 주제를 연주할 때에는 템포를 갑자기 조여서 '꿰맨 자국'을 드러냈다.

둘째 주제에 앞서 4분음 피치카토 음형을 되풀이하는 곳에서는 차츰 빠르고 세게 연주해야 하며, 이때 시벨리우스는 둘째 주제를 알리는 관악기 소리가 첫 박을 쉬던 관성과 부딪히며 속도감을 더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날은 관악기가 한 박자 쉬고 들어가 버렸고,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지휘자가 일부러 악보 지시를 어긴 탓이다. 1악장을 소나타 형식으로 본다면 재현부에 해당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악장에서는 절정에 해당하는 곳에서 실수가 있었다. 관악기가 포르티시모―메조포르테―포르티시시모(fff)를 오르내리며 목 놓아 울부짖다가(마디 167) 모두쉼표를 만나 살짝 숨을 돌린 다음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울부짖는 대목(마디 182)이었다. 이 숨 막히는 마디 182에서 지휘자가 예비박을 제대로 안 준 탓에 연주자들이 멈칫해 버렸고, 선율을 이끌어야 했던 트럼펫 연주자가 실수를 저지른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날 트럼펫 수석 노릇을 했던 연주자는 지난해 12월에도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었던 객원이었는데, 누군가 싶어 물어봤더니 알렉상드르 바티(Alexander Baty) 라디오 프랑스 수석이란다. 이 사람은 한때 서울시향 트럼펫 수석을 맡았던 가레스 플라워스 못지않게 훌륭한 연주자로 어떻게든 시향에 눌러 앉혔으면 싶은 사람이다. 이날 때때로 지휘자 등과 손발이 안 맞아 제 솜씨를 못 내는 듯싶을 때도 있었으나, 4악장에서 들려준 금빛 눈부신 팡파르는 너무나 훌륭했다.

트럼펫 못지않게 멋졌던 악기는 오보에였다. 제임스 버튼 부수석이 3악장 둘째 주제를 비롯한 곳곳에서 멋진 오보에 독주를 들려주었으며, 2악장 절정에 뒤이어 모든 악기가 소리를 차츰 줄이는 가운데 오보에가 홀로 소리를 키우는 마디 218에서는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솟아나는 듯했다.

하차투리안 플루트 협주곡은 관악기 및 타악기가 떠들썩한 데다가 본디 바이올린 협주곡이어서, 자칫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혀 버리기 쉽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 때때로 위태로운 곳이 있었으며 1악장 맨 앞에서 더욱 그랬다. 협연을 맡은 샤론 베잘리는 처음에 한 옥타브 높여 연주하다가 마디 15에 이르러 도로 한 옥타브 낮추었고, 바로 이때 오케스트라 소리가 플루트 독주를 거의 덮다시피 했으나 지휘자와 악단이 손발이 안 맞았는지 그다지 재빨리 소리를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샤론 베잘리지난 2008년 11월에 모차르트 D 장조 협주곡 K.314서울시향과 협연한 일이 있다. 그날은 수많은 표정을 연주에 담아내어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날 하차투리안 플루트 협주곡에서는 무시무시한 테크닉을 뽐냈으며 바이올린이 내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아닌 맑은 플루트 소리로도 곡에 담긴 팽팽한 긴장감을 그럴싸하게 살려냈다.

바이올린 더블스톱(double stop) 주법이 쓰인 곳을 빠른 음형으로 메우는 등 원곡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1악장 카덴차에서는 처음에 클라리넷과 선율을 주고받는 대목이 멋졌으며, 3악장에서는 플루트와 다른 목관 악기가 어지럽게 얽히는 마디 529에서 마치 숲 속에서 새들이 뾰로롱 뾰로롱 지저귀는 듯했다.

무엇보다 샤론 베잘리는 외모가 돋보였다. 금발에 깜찍한 얼굴이 어찌 보면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 에마 왓슨을 닮았다. 그렇게 보니 플루트는 요술 지팡이 같다. 아니, 요술피리인가?

2009년 9월 5일 토요일

2009.04.29. 릴번 아오테아로아 서곡 /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 - 시몬 트릅체스키 / 피에타리 인키넨 / 서울시향

2009년 4월 29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Pietari Inkinen
협연자 : Simon Trpčeski (Pf)

Lilburn, Aotearoa Overture
Grieg, Piano Concerto in a, Op.16
Sibelius, Symphony No.5 in E flat, Op.82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에 활동한 작곡가답지 않게 19세기 음악 어법을 이어가고자 했으며, 그러한 대목은 브람스를 닮았다. 그러나 시벨리우스를 '핀란드로 간 브람스'쯤으로만 여긴다면 그 참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도 많은 음악학자가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을 분석하면서 틀에 박힌 생각으로 소나타 형식에 끼워 맞추고자 했으며, 맞지도 않는 틀에 억지로 맞추려다 보니 저마다 엇갈린 의견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1악장에서 '재현부'는 어디인가? 곡 첫머리에 나오는 모티프가 힘차게 '재현되는' 곳은 마디 106이다. 그러나 템포가 빨라지고 스케르초 음형이 나타나는 곳은 마디 114이다. 그런가 하면 E♭ 장조가 '재현되는' 곳은 마디 158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더 뒤로 가야 재현부가 나타난다고도 한다. 그러나 글쓴이는 지난해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연주회 리뷰에서 이런 말을 쓴 바 있다. "독일 음악 논리로 따지는 조성과 화성으로 된 '뼈대'가 아니라 그 겉을 둘러싼 피와 살, 그 주변의 서늘하면서도 싱그러운 공기와 그 공기를 타고 너울너울 날아오르는 눈송이야말로 시벨리우스 음악의 참모습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교향곡 5번 1악장은 해 뜨는 모습을 담은 교향시다. 곡 첫머리에서 호른이 연주하는 모티프는 막 동틀 무렵이고, 이 모티프가 '재현되는' 마디 106부터 해가 조금씩 보인다. 그러나 해는 전등 켜지듯이 한순간에 떠오르지 않으며, 조금씩 조금씩 날이 밝다가 언제부터인가 해는 떠 있다. 1악장에서 '재현부'를 이루는 알맹이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음반을 들어보면 지휘자에 따라 마치 '여기부터 재현부!'라고 선언하듯이 템포를 갑자기 빠르게 하거나 음색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시향을 지휘한 피에타리 인키넨은 '꿰맨 자국' 없이 매끄럽게 해 뜨는 모습을 연출했으며, 핀란드 어느 경치 좋은 곳에 온 듯이 맑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질 듯했다. 브람스에 어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아니라 야무지고 시원시원한 소리를 내었으며 쓸데없는 루바토를 쓰지도 않았다. 옥에 티 하나만 말하자면 곡이 끝날 무렵인 'Piu Presto (마디 555)'에서 금관 소리가 너무 커서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눈부신 으뜸 화음이 조금은 빛이 바래버렸다.

2악장에서는 콘트라베이스가 뒤로 물러나지 않고 다른 악기와 함께 당당하게 선율을 이끌어간 대목이 썩 마음에 들었다. 콘트라베이스답지 않게 리듬이 굼뜨거나 하지도 않고 나무랄 데 없었다.

3악장에서 저 가슴 벅찬 '백조 주제'가 나올 때에는 백조떼 대신 거위를 타고 날아오르는 꼬마 닐스와 기러기떼를 떠올렸다. 템포가 조금 빨랐고 호른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해질 무렵에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 들뜬 기분은 좀 덜했으나 그 대신 하늘을 날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듯한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호른 네 대가 끊임없이 화음을 연주하는데 눈에 띄는 실수 없이 깔끔하게 잘해서 놀랐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호른 연주자를 일으켜 세우면 '브라보!' 하고 외쳐주려고 마음먹었으나 웬걸, 1악장에서 멋진 바순 독주를 들려준 곽정선 수석대행만을 일으켜 세웠다. 호른이 이만하면 꽤 훌륭했는데 지휘자가 눈이 너무 높았던 탓일까. 곡이 끝날 무렵에는 트럼펫이 '백조 주제'를 이끌고 트롬본이 뒤를 받치는데, 이날 트럼펫 수석이 없어서 조금은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연주가 제법 훌륭했다.

피에타리 인키넨은 지휘 동작이 크고 시원시원해서 참 친절하게 지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정명훈이 지휘하지 않는 서울시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앙상블이 훌륭했다.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 반주가 이토록 뛰어난 연주는 처음이라는 의견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줄을 잇기도 했다. 시향 연주회 일정을 보면 연습할 시간이라고는 뻔한데 이렇게까지 악단을 휘어잡았다면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런 훌륭한 지휘자는 자주 객원 지휘자로 데려왔으면 좋겠다.

인키넨은 뉴질랜드 심포니 음악감독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첫 곡으로 뉴질랜드 작곡가 릴번의 아오테아로아 서곡을 연주했다. 현이 이끌어가는 선율과 리듬이 산뜻하면서도 힘찬 느낌이 들었으며, 뉴질랜드 어느 낯선 들판에서 소떼가 신나게 달리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프로그램 노트를 보니 "어떻게 들으면 본 윌리엄스시벨리우스의 남반구 버전"이라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시몬 트릅체스키는 맑고 시원한 음색이 매우 멋졌다. 루바토를 떠벌리듯 쓰거나 파토스를 억지스럽게 앞세우는 일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주했고, 그러면서도 서늘하고 투명한 음색과 자연스러운 호흡만으로 입 안에서 녹는 듯 새콤달콤한 맛을 내었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다크 포스'도 달콤한 맛에 쌉쌀한 맛을 더하는 데 그쳤다. 건반 위로 통통 튀어 올라 햇볕에 반짝이는 듯한 소리는 마치 쇼팽 피아노 협주곡 같았고, 2악장뿐 아니라 1악장과 3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맑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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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3일 목요일

2009.02.19. 시벨리우스 포흐욜라의 딸 /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버르토크 이상한 중국 관리 -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 / 성시연 / 서울시향

2009년 2월 19일(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Alexander Gavryluk (Pf)

Sibelius, Pohjola's Daughter, Op.49
Prokofiev, Piano Concerto No. 2 in g, Op.16
Bartok, The Miraculous Mandarin, Op.19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x) → 올렉산드르 가브릴류크(o) http://goo.gl/7Lmwm


성시연이 지난해 1월과 9월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그가 나라 밖에서 걸어온 놀라운 발자취를 생각하면 그동안 한국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다. '나이 어린 여자'라는 약점 아닌 약점을 생각하면 꽤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를 그저 '지휘자 성시연'으로 바로 말할 때가 왔다. 이날 연주회에서 드디어 참된 솜씨를 제법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솜씨를 펼쳤다 하기는 어려우며 기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한 걸음 나아간 모습을 놓치지 마시라. 성시연은 젊으며 앞날은 밝다.

지난 연주회보다 나아진 티가 가장 잘 드러난 곡은 시벨리우스 <포흐욜라의 딸>이었다. 첫 곡이라 그만큼 연습이 모자라기도 했겠거니와 때마침 수석 연주자들이 거의 자리에 없었는데도 제법 무난한 연주를 이끌어내었다. 앙상블이 이따금 흔들리다가 '알레그로' 대목에서는 '프레스토'에 가까운 아찔한 템포로 마구 달리는 바람에 더욱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물량공세'로 뚝심 있게 밀어붙여서 이 곡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실수를 눈치 채기 어렵게 잘 다스렸다. 지난 9월 연주회 첫 곡에 견주면 놀랄 만한 발전이다.

버르토크 <이상한 중국 관리>는 성시연서울시향을 지휘해 어디까지 소리를 뽑아낼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악단을 확 휘어잡지는 못하지만 구석구석 열심히 다듬어 노력파 모범생 같은 연주를 이끌어낸 대목은 지난 연주회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 흐름을 탄탄하게 다스리고 템포와 리듬과 음색을 맛깔스럽게 다듬는 솜씨는 더 나아졌다. 때때로 결정적인 '한 방'이 아쉽기는 했으나 수석 연주자들 빈자리가 작지 않았음을 헤아리면 받아들이지 못할 바는 아니며 그 때문에라도 앞날이 더욱 기대된다.

수석 연주자가 자리를 비운 틈에 솜씨를 마음껏 뽐낸 연주자도 있었으니 바로 클라리넷 부수석 임상우다. 채재일 수석이 따듯한 음색, 부드러운 레가토, 그윽한 소토보체를 곧잘 뽐낸다면, 임상우는 겉모습부터 딱 클라리넷 연주자처럼 생겨서는 그 소리 또한 곧고 매끄럽고 빈틈없는 클라리넷 그 자체다. 무엇보다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 빠르고 어지러운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잘 다스렸다. 여자가 중국 관리를 처음 보고 두려워하는 대목에서는 지휘자가 중국풍 트롬본 소리를 일부러 줄이고 클라리넷 소리를 크게 하여 마치 카메라가 여자를 가까이 중국 관리를 멀리 잡은 듯한 원근감을 살렸는데, 이때 클라리넷 소리가 몹시 사나워서 마치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다.

이날 가장 돋보인 사람은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시향 타악기 연주자들은 매우 뛰어난데도 현대 음악이 아니면 좀처럼 솜씨를 뽐낼 때를 만나기 어려운데, 이날 모처럼 오케스트라 음색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길잡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중국 관리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대목(Maestoso)이 가장 멋졌고, 쫓고 쫓기는 대목(Sempre vivace)에서는 지휘자가 긴 호흡으로 놀랍도록 폭넓은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동안 소리에 탄탄한 뼈대를 이루었다. 이날 연주된 판본은 초연과 출판 과정에서 지워진 대목을 모두 되살린 2000년 개정판으로 판단된다. 중국 관리가 숨 막혀 죽는 대목(Pesante)부터 어딘가 낯설다고 느꼈다면 바로 판본이 달랐던 탓이며, 인기 있는 음반이 대부분 2000년 이전 녹음이라 사정을 아는 사람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타악기가 가장 훌륭했다.

트롬본은 수석 연주자가 빠졌어도 탄탄한 연주로 오케스트라 무게 중심을 잘 잡았다. 그러나 트럼펫은 소리가 너무 작을 때가 잦아 안타까웠다. 이를테면 중국 관리가 칼 맞는 대목(Ritenuto)에서 트럼펫은 약음기를 꼈어도 포르티시모로 연주해야 하지만 트롬본 메조포르테보다 훨씬 작게 들렸다. 죽지 않는 중국 관리를 여자가 안아준 다음에 나오는 트롬본 마르카토 음형은 뜻밖에 소리가 너무 작아서 갸우뚱했다. 아마도 지휘자가 목관악기 소리를 살리느라 일부러 트롬본 소리를 작게 한 모양인데, 중국 관리가 처음 나타나는 대목도 그렇지만 지휘자는 중국 관리를 조연으로 물리고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나 보다. 그래서 성욕에 빠져 죽음마저 물리친 징그러운 중국 관리보다는 불쌍하게 이용당하는 여자에게 관객이 더 마음을 쏟기를 바랐나 보다. 지휘자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한 알렉산드르 가브릴뤼크는 큰 힘으로 두드려대면서도 루바토를 꽤 달콤하게 써서 음색이 차갑거나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솜씨가 인상 깊었다. 그래서 프로코피예프 음악에서 스크리아빈이나 때로는 쇼팽 같은 느낌마저 우러나왔으며, 힘이 넘쳐도 우락부락하지 않았고 아찔한 테크닉을 드러낼 때에도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었다. 힘과 테크닉을 음악 속에 갈무리할 줄 아는 훌륭한 연주자가 1984년생이라니, 우리는 이날 거장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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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일 화요일

2008.09.19. 시벨리우스 렘민캐이넨의 귀향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 데얀 라지치 / 성시연 / 서울시향

2008년 9월 19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성시연
협연자 : Dejan Lazic, pf

Sibelius, Lemminkainen's Return
Beethoven, Piano Concerto No. 4 in G, Op. 58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arr. Ravel)



성시연은 지난 1월 9일에 서울시향을 이끌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등을 연주한 바 있다. 그러나 화려한 콩쿠르 성적과 보스턴 심포니 부지휘자라는 놀라운 경력에 비해 그때 보여준 연주는 기대에 많이 못 미쳤던 터라 이번에야말로 성시연의 참된 실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번에는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 아닌 예술의 전당이라 더욱 좋았다. 이날 연주를 돌이켜보면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지난 연주회보다 뚜렷이 나아진 모습을 보여 반가웠다. 나이 어린 여자라는 약점은 유럽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클 테니 이만하면 제법 잘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나이 어린 '남자'인 구자범 또한 독일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 제1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거머쥐고도 지난 2006년 2월 27일 연주회에서는 그만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시벨리우스 <렘민캐이넨의 귀향>을 연주할 때만 해도 도무지 잘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지휘자의 해석을 따지기에 앞서 연주자들이 초견으로 연주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앙상블에 꽉 짜인 맛이 없고 어수선했다. 각 파트 수석 연주자와 타악기 연주자를 뺀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에 적당히 묻어가려는 듯했고 지휘자의 지시에 재빨리 반응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이 신나는 작품을 연주하는데 도무지 신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수준이 낮은 악단일수록 연주회 첫 곡을 잘하는 일이 드문 법이며, 서울시향처럼 제법 수준 높은 악단이라면 지휘자가 단원들을 얼마나 잘 이끌 수 있는지와 단원들이 지휘자를 얼마만큼 대우해주는지를 연주회 첫 곡을 들어보면 웬만큼 알 수 있다. 객원 연주자가 악단을 데리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뻔하므로 첫 곡 준비에 가장 적은 시간을 들이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의 첫 곡은 성시연의 약점과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훨씬 나았다. 현 소리부터 알차서 이제야 서울시향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편성을 크게 잡은 것은 뜻밖이었다. 이런 묵직한 베토벤은 요즘 유행과도 맞지 않아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협연자 데얀 라지치의 날렵한 연주와 음색이 어울리지도 못했다. 협연자가 루바토를 과장해서 써댄 탓에 음색뿐 아니라 리듬과 템포가 안 맞을 때도 더러 있었다. 지난 1월 9일 연주회 때에도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던 세르히오 티엠포가 별난 루바토를 써서 성시연이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끌려다니는 대신 과감한 템포 변화로 협연자를 마주하며 '콘체르토'다운 한 판 겨루기를 연출했다.

데얀 라지치는 맑고 날렵한 음색에 어찌 들으면 꽤 느끼한 루바토를 어우러지게 한 점이 재미났다. 티엠포와 닮은꼴이라 하겠으나 가볍게 통통 튀어오르던 티엠포에 비해 라지치는 제법 힘 있고 단단한 소리를 냈고 페달도 더 많이 썼으며 루바토는 티엠포보다는 훨씬 얌전했다. 성시연과 협연한 두 사람 모두 연주가 능글맞은 데가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더욱 재미있게도 성시연은 다소곳하거나 나긋나긋하지 않고 씩씩한 여장부 같았다. 그런데 머리 모양은 귀엽더라.

라지치는 베토벤이 작곡한 카덴차를 쓰지 않고 직접 쓴 카덴차를 연주한 점이 남달랐다. 1악장과 3악장 모두 카덴차 바로 앞에 나온 선율을 되풀이하면서 차츰 주요 음 소재를 활용해 변주하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베토벤 양식과 라지치 색깔이 모두 살아있는 참신한 카덴차였다.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연주는 썩 훌륭했다. 물론 앙상블이 갑자기 매우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없었다. 그러나 구석구석 소리를 열심히 다듬어 얼핏 들으면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연주라 할만했으며 마치 노력파 모범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다양한 음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그런지 지난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목관악기와 타악기가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제5곡 '달걀 껍데기 속 병아리의 발레'가 특히 훌륭했고, 타악기 소리가 앞으로 나서며 긴장과 폭발을 이끌어간 제9곡 '닭다리 위 오두막집'도 멋졌다. 제10곡 '키예프의 대문'에서는 아침 햇살이 쏟아지듯 찬란하게 빛나는 금관과 힘차게 두드려대는 타악기가 연주회장을 압도하며 환호로 가득한 박수를 이끌어내었다.

그런가 하면 제7곡 '리모쥬 장터'에서는 악센트를 좀 더 또렷하게 살렸으면 싶었고, 제3곡 '튀를리 공원'이나 제6곡 '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밀레'는 현악기가 좀 더 나은 앙상블을 만들어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제2곡 '옛 성'에서는 서늘하고 쓸쓸한 느낌이 좀 더 살아났으면 싶었고, 제8곡 '카타콤'은 스산한 화음을 잘 살렸으나 시간이 멈춘 듯한 음향을 좀 더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제1곡 '난쟁이'와 제4곡 '비들로'에서는 타악기가 느슨한 앙상블을 가리며 제법 분위기를 잘 살렸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객석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휴대전화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고,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주로 고주파 음이라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는 잘 안 들리는 듯하다. 또 요즘에는 이어폰을 끼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젊은 사람 가운데서도 노인성 난청이라 할 만한 사람이 제법 되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울시향 월간지 <SPO> 페이지 넘기는 소리, 숙제하러 온 학생들이 연주는 안 듣고 열심히 필기하는 소리, 가방 여닫는 소리, 그리고 가장 고약한 비닐봉지 만지는 소리까지 모두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소리다. 휴대전화 소리를 진동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안 들릴 거라는 착각도 매우 곤란하다. 클래식 음악의 진짜 아름다움은 여린 소리에서 나올 때가 잦다. 그 소리를 객석 소음 탓에 놓쳐버린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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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2008.03.21. 라우타바라 북극의 노래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 협주곡 / 카프리치오 /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 알렉산더 토라제 / 미코 프랑크 / 서울시향

2008년 3월 21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미코 프랑크
협연자 : 알렉산더 토라제

Rautavaara, Cantus Arcticus
Stravinsky, Concerto for Piano & Wind Instruments
Stravinsky, Capriccio for Piano & Orchestra
Sibelius, Symphony No. 7 in C, Op 105



러시아 교회 종은 유럽 교회 종과는 달리 흔들어 소리 내지 않고 두드려 소리 낸다. 종지기는 온몸으로 도구를 조작하여 종 여러 개를 동시에 두드릴 수 있으며, 이때 음색도 음높이도 다른 종들이 어울려 신비로운 폴리리듬을 이룬다. 이러한 종소리와 두드림의 미학은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를 두고 역동적인 고요함(calme dynamique)이라 했고,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은 진동하는 고요함(schwingende Ruhe)이라 고쳐 말했다.

이는 박절과 마디 구분을 무시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리듬, 어택(attack)을 강조한 음형과 느닷없는 악센트, 이 악기 저 악기 두서없이 치고 나오는 듯한 관현악법 등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음악 형식과 미학이 가지는 순환적, 대칭적 속성, 다시 말해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 자주 나타나는 아치(arch) 형식이나 발전과 진화보다는 순환과 갱생을 추구했던 미학관 또한 '진동하는 고요함'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리듬과 음형과 관현악법 등이 종소리를 닮았다면, 형식과 미학은 종이 흔들리는 모양을 닮았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카프리치오>를 협연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토라제는 러시아 사람답게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숨어있는 '종소리'를 본능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건반을 쿵쿵 신나게 두드려대며 음악의 '진동'을 제대로 이끌어냈으며, 때때로 그것이 지나쳐 선율 윤곽을 망가트려 옥에 티가 되기도 했다. 페달을 밟을 때도 만만치 않게 힘차서 온몸으로 소리 내는 종지기 이미지가 스머프 같은 외모와 겹쳐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때로는 몹시 여린 소리로 '고요함'을 '진동' 못지않게 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러시아 종'을 치는데 그다지 익숙지 못한 듯했다. 리듬이 깔끔하지 못할 때가 잦았고, 악센트는 충분히 살리지 못했으며, 어택(attack)을 살려야 할 곳에서 부드럽게 연주할 때가 잦았다. 국내 악단이 으레 그렇듯 금관이 취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지휘자가 잘만 이끌었다면 이날 연주보다는 훨씬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코 프랑크는 뛰어난 지휘자이지만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모자랐던 것인지 스트라빈스키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핀란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였다. 라우타바라의 <북극의 노래>는 무엇보다 핀란드 늪지대에서 채록했다는 새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것이 재미있다. 관악기가 흉내 내는 새 소리, 지저분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서 더 정겨울 것 같은 진짜 새 소리, 그리고 다큐멘터리 배경음악처럼 차분히 깔리는 음악이 서로 다른 시간과 역할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을 연상시킨다. 관악기 여러 대가 어지럽게 얽히며 새 소리를 흉내 내는 곳에서 지휘자가 비팅을 하지 않고 악기마다 일일이 예비박을 주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휘자가 솜씨를 가장 잘 뽐낸 것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에서였다. 몇몇 거장 지휘자들이 브람스 풍으로 묵직한 해석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미코 프랑크는 북유럽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질 듯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군데군데 템포가 너무 빠른 듯싶어서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젊은 지휘자의 패기로 좋게 볼 수도 있겠다 싶었으며, 오히려 이것으로 지휘자가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브람스'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듯싶기도 했다.

이 곡은 1924년에 작곡, 초연되었다. 이미 1908년에 쇤베르크가 현악 사중주 2번을 내놓으면서 무조음악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음을 생각해보면, 화성과 조성의 해체라는 새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기능 화성 작법을 고집한 시벨리우스는 브람스의 망령에 사로잡힌 퇴행적 작곡가라 비난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독일 중심 음악사에서 뽑아낸 틀을 유럽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나라 작곡가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것이 옳은가. 시벨리우스에게 브람스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독일 음악 논리로 따지는 조성과 화성으로 된 '뼈대'가 아니라 그 겉을 둘러싼 피와 살, 그 주변의 서늘하면서도 싱그러운 공기와 그 공기를 타고 너울너울 날아오르는 눈송이야말로 시벨리우스 음악의 참모습이 아닐까. 지휘자 미코 프랑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날 서울시향이 가장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던 곳은 빠르기말이 프레스토(매우 빠르게)로 바뀌는 마디 449부터였다. 현악기가 빠른 반복 하행 음형으로 거대한 크레셴도(점점 크게)를 만들며 열다섯 마디를 더 지나면서는 랄렌탄도(점점 느리게)가 더해져 마법 같은 고양감을 이끌어내다가 마침내 빠르기말이 아다지오로 바뀌면서 나오는 그윽하고 애틋한 트롬본 선율은 이 작품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긴 호흡으로 커다란 고양감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연주는 흔치 않다. 크레셴도의 폭이 너무 좁거나, 랄렌탄도 지시를 만나고도 별로 느려지지 않거나,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답지 않고 너무 느리거나 하는 연주가 많다. 오케스트라 연주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다.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동시에 잘 살리고도 앙상블이 흐트러져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노리티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서울시향은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꽤 잘 살렸다. 지휘자는 마디 449에서 과감하게 템포를 빠르게 잡고도 그 속도에 무너지지 않도록 영리하게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현의 크레셴도 폭이 좀 작았지만 그 대신 호른의 단음계 가락을 앞세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동시에 현의 앙상블이 흐트러지지 않게 가려준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트롬본 연주도 썩 좋았다. 아쉬운 데가 없지는 않았지만 서울시향이 이보다 잘하기는 어렵지 싶었다.

미코 프랑크가 서울시향을 지휘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에는 미처 몰랐는데, 가만 보니 젊은 지휘자와 젊은 악단이 닮았다. 서로 좌충우돌하면서 거장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많이 배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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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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