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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7일 월요일

베토벤 교향곡 5번 /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 넬손 괴르너 / 성시연 / 서울시향

2011-05-19 오후 08:0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 성시연
피아노 : 넬손 괴르너

드보르자크, 사육제 서곡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베토벤, 교향곡 5번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음악을 들으면서 지휘 흉내를 낸 일이 있는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이야말로 '남이 보면 안 되는 지휘 생쇼'를 하기에 가장 신 나는 곡일 터. 그런데 실제로 지휘하려면 '운명 모티프'라 불리는 첫 두 마디부터 만만치 않다. 처음부터 빠른 음형이 그것도 여린박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예비박을 어찌 줘야 할까? 8분음표로 시작하므로 8분음표만큼 예비박을 주면, 비팅(beating)이 너무 날카로워서 악단이 첫 박으로 착각하기 딱 좋다. 지휘자에 따라서는 아예 예비박이 아닌 예비 '마디'를 세 마디나 넣어 헷갈리지 않게끔 하기도 하지만, 실용적이기는 해도 모양새가 영 좋지 않다.

지휘자 성시연은 지휘봉을 살짝 올렸다가 멈춘 다음 날카로운 예비박을 주는 모범적인 지휘를 했다. 그런데 아뿔싸! 몇몇 단원이 반 박자 빨리 나오는 바람에 이른바 '만득이 현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곡이 워낙 이러니 실연 때 이런 일이 곧잘 일어난다. 마침 이날 프라하 스메타나 홀에서는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방송 녹음을 들어 보니 바이올린 연주자 하나가 반 박자도 아니고 한 박자나 빨리 튀어나오는 사고 현장이 마이크에 또렷하게 잡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따따따 따안―' 할 때 긴 음에는 늘임표(fermata)가 붙어 있다. 얼마만큼 늘여야 할까? '늘임표'라는 말에 맞게 감으로 대충 늘일 수도 있겠고, 제시부 끝과 코다에서 비슷한 음형이 나올 때 늘어난 음 길이를 근거로 한 마디를 세 마디로 늘일 수도 있겠다. 음반을 들어 보면 아예 늘임표를 무시하는 연주도 있다. 성시연은 감으로 대충 늘인 듯했으며, 둘째 마디를 네 마디쯤으로 늘이고 넷째-다섯째 마디를 다섯 마디쯤으로 늘였다. 이처럼 이 곡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지휘자가 여러 가지로 고민했을 흔적이 드러난다.

악기 편성도 문제다. 옛날에는 악보에서 지시한 것보다 훨씬 큰 편성으로 연주하는 일이 잦았지만, 요즘은 악보 지시를 그대로 지키는 일이 보통이다. 이날 서울시향은 호른 한 대를 더블링(doubling)한 것을 빼면 악보에서 지시한 2관 편성을 그대로 지켰다. (현악기는 글쓴이가 객석에서 세어 보니 5-5-4-4-3 편성이었다.) 이른바 '역사주의 연주'가 힘을 얻으면서 생긴 유행으로, 정명훈 지휘자도 시향 개편 초기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면서 9번 교향곡을 뺀 모든 곡을 악보대로 편성했다. 지난해 9월 베토벤 교향곡 3번을 지휘한 로렌스 르네스도 비슷한 시도를 한 바 있다.

관습적으로 금관을 덧붙이는 등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던 대목을 악보 그대로 연주한 것 또한 역사주의를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1악장 제시부 제2 주제를 여는 E♭ 장조 호른 음형은 재현부에서 바순이 C 장조로 연주하는데, 이 곡이 나왔을 당시 호른으로 연주할 수 없는 음형이라서 베토벤이 할 수 없이 호른이 아닌 바순에 맡겼다는 주장이 있다. 4악장 마디 132에서는 비슷한 근거로 악보에 없는 금관 음형을 덧붙여 연주하는 관습이 있었다. 작품이 끝날 무렵에 트럼펫이 주선율을 연주하도록 고치기도 한다. 이날 서울시향은 이 대목을 모두 악보대로 연주했다.

이처럼 소편성으로 연주하고 금관을 덧붙이지도 않으면 투명한 음색과 날렵한 리듬을 살리기에 좋다. 그러나 대형 연주회장에서는 음량이 작아서 단점이 따르기도 한다. 연주회장 음향이 그다지 좋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음향이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들 하지만, 외국에서 이름난 연주회장과 견주면 그다지 좋은 연주회장이라 하기 어렵다. 글쓴이는 이날 1층 뒷자리에 앉은 탓에 이런 단점을 크게 느꼈다. 귀로 들은 것만으로 판단하자면, 이날 연주는 소리가 둥글둥글하고 마이크로다이내믹스(micro-dynamics)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 많았다. 물론 이것은 글쓴이가 음향적 왜곡을 경험한 것으로 실제 연주는 그렇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중2병'이라는 것이 있다. 사춘기 시절 과대망상을 희화화하는 말이며 맥락에 따라 욕설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2병도 예술로 승화하면 걸작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사평론가 한윤형은 타나카 요시키가 쓴 대하소설 『은하영웅전설』을 두고 "가장 탁월한 중2병 텍스트"라 논평하며 『삼국지』와 견주기도 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서양 낭만주의 시대에는 중2병이 시대정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중2병 작곡가는 쇼팽바그너다. '자폐형 중2병'과 '민폐형 중2병'으로 성격은 거꾸로지만.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넬손 괴르너는 가장 탁월한 '중2병 아티큘레이션'을 들려주었다. 툭 건드리면 울어버릴 듯한 표정이 묻어나는 프레이징, 때때로 너무하다 싶을 만큼 흔들리는 루바토, 그리고 물결에 되비친 햇살처럼 반짝이는 음색이 알맞게 어우러져 그야말로 '중2병스러움'이 예술로 승화했다. '중2병'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옴므 파탈'(Homme fatal)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2009.12.30. 베토벤 교향곡 9번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2월 30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정명훈
독창 : 이명주(소프라노) 김선정(메조소프라노) 김석철(테너) 임채준(베이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d단조, 작품 125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125 "Choral"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정명훈서울시향을 이끈 뒤로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는 정기연주회로는 이번이 세 번째다. 연말에 이 곡을 연주하는 일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곡을 해마다 연주하면서 그때마다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다. 지난해와 견주어 수석급 연주자는 거의 바뀌지 않았으나 합주력이 두루 늘었으며,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휘자가 뜻한 바를 악단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이날에는 지휘자의 해석이 아닌 그럴싸한 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정명훈이 보여준 해석은 거의 그대로였다. 1악장 코다에 들어서며 고집저음(ostinato)이 나타나는 대목(마디 513)에서 긴 호흡으로 아첼레란도를 썼고, 4악장 처음과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7)에서 악보에 없는 트럼펫/호른 선율을 덧붙이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악보 그대로 연주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3악장 마디 133에서 제2 바이올린이 악보에서 지시한 pp보다 세게 연주한 것도 비슷했는데, 다만 옛날에는 ff로 들렸으나 이날에는 mf쯤으로 들렸다. (객석 위치가 달라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기 배치는 제법 달라졌다. 합창단을 합창석이 아닌 무대 위에 두고 팀파니를 오른쪽, 나머지 타악기를 무대 왼쪽 끝으로 몰았으며 트럼펫은 트롬본 오른쪽으로 두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사이에 있는 독창자를 배려하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과 어우러지는 소리를 내려면 독창자를 그 사이에 두어야 옳다. 그러나 타악기와 트럼펫 등이 무대 뒷벽 쪽 음향 고약하기로 소문난 예술의 전당과 만나 독창자를 헷갈리게 하니 문제다. 바로 지난해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독창자는 뒤에 투명 반사판을 쓰고도 모자라 손을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끝내 4중창에서 화음이 자꾸만 어긋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악기 배치를 이처럼 바꾸니 마법이 일어났다. Deine Zauber binden wieder! 글쓴이는 실연을 들을 때면 처음부터 기대를 접곤 하는 4중창에서 뜻하지 않게 균형잡힌 소리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오케스트라는 음량을 크게 줄이기까지 했으며, 그런 가운데 4중창과 나란히 울리는 플루트 소리가 멋졌다. 다만, 이어지는 마디 305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좀 더 소리를 키웠으면 싶기도 했다.

테너 김석철은 지난 4월 말러 《대지의 노래》를 TIMF 앙상블 협연으로 멋지게 불러 글쓴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김석철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시원하며, 무엇보다 리듬이 굼뜨지 않고 단단해서 앞날이 크게 기대되는 가수다. 이번 연주회도 매우 훌륭했으며, 빠른 리듬이나 화려한 멜리스마(한 음절에 많은 장식음)도 야무지게 다스렸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베이스나 바리톤은 많아도 훌륭한 테너는 드물어서 새삼 보물이 나타난 듯한 생각이 든다. 여린 소리를 잘 못 내고 음정이 살짝 흔들리곤 하는 단점을 이겨낸다면 세계를 뒤흔드는 가수가 될지도 모르니 기대하시라.

베이스 임채준 또한 단단한 리듬이 돋보였다. 이 곡에서 베이스(바리톤) 독창은 음역도 넓은데다가 긴 호흡으로 멜리스마를 풀어내야 해서 몹시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그런데 임채준은 놀랍도록 깔끔한 리듬을 들려주었으며, 굳이 더 욕심을 내자면 목소리가 좀 더 묵직했으면 싶기도 했다. 또 딕션(diction)이 제법 훌륭했으나 이탈리아어 발음이 섞여 있었는데, 이를테면 'Freude'(환희)를 단모음으로 쪼개서 소리 내곤 했다.

소프라노 이명주는 맑게 빛나는 목소리로 4중창 선율을 잘 이끌었으며, 더욱이 여린 소리에서 남다른 솜씨를 뽐냈다. 목소리가 이토록 고우니 말러 교향곡 8번 제2 소프라노(그레첸)를 맡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까다로운 멜리스마에서 리듬이 살짝 늘어지는 단점을 이겨내고 고음에서도 여린 소리를 지켜낼 수 있다면 아주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조소프라노(알토) 김선정은 다른 사람보다 작은 역할이나마 균형잡힌 화음을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

지난 22일 연주회 때 인상 깊었던 트럼펫 수석이 이번에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고, 악기 특성 탓에 실수가 잦게 마련인 호른도 이날따라 현 소리와 맛깔스럽게 어우러지곤 했다. 더욱이 1악장 마디 139 또는 같은 음형이 나오는 마디 408에서 호른이 딱 알맞은 음량으로 리듬을 살린 대목이 매우 멋졌다.

이날 가장 멋졌던 곳 한 군데만 꼽자면 4악장 마디 92부터 마디 164까지였다. 첼로·콘트라베이스 레치타티보가 막 끝나고 합창 선율을 연주하면서 차근차근 소리를 키워가다가 마침내 금관이 선율을 받는 그 대목까지다. 이곳에서 이토록 긴 호흡으로 자연스러운 크레셴도를 이끌어낸 정명훈도 대단하고, 그 소리를 만들어낸 서울시향도 새삼 대단하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2008.12.30.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9번 - 스베틀린 루세브 / 정명훈 / 서울시향

※ 나중에 고침: 니키친 → 니키틴(Никитин)

원래 ☞《파르지팔》 2막이었다가 프로그램이 바뀌어버린 연주회. 실바스티, 네메스, 니키틴이 각각 파르지팔, 쿤드리, 클링조르였는데 뒤늦게 인드라 토마스가 끼어들어 앙상블을 망쳐놓은, 그러나 그것만 빼면 참 좋았던 연주회.


2008년 12월 30일(화)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Svetlin Roussev/vn, Indra Thomas/sop, Judit Nemeth/mez, Jorma Silvasti/ten, Evgeny Nikitin/bar, 서울시합창단, 국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61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정명훈 지휘자는 서울시향을 맡고서 그 이듬해부터 악단 기본기를 닦겠다며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게 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를까. 먼저 단원들이 저마다 더 나은 솜씨를 길렀고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와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등 훌륭한 연주자를 새로 뽑기도 했다. 악단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도 더욱 좋아졌다. 또 지지난해와는 달리 연주회장이 세종문화회관이 아니라 예술의 전당이라 더욱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다.

정명훈의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편성 악단을 쓰고 템포를 대체로 느리게 잡으면서도 금관을 뒤로 물려서 소리에 기름기를 빼는 등 역사주의 연주 경향을 중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옛날 녹음에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맥빠진 연주라고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특히 4악장 도입부에서는 트럼펫이 주선율을 연주하는 옛 관습을 버리고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유행을 따랐으며, 그 때문에 목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고 트럼펫은 목관악기를 살짝 거들기만 하면서 투명한 소리를 내었다. 지지난해에는 연주회장이 저 거대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라 이 대목에서 마치 앙상블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 것처럼 들렸으나 올해에는 제법 그럴싸한 소리가 났다.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3)에서도 마찬가지로 호른이 주선율을 이끄는 대신 뒤로 물러나 악보대로 연주했다.

1악장 종결구 저음 오스티나토(ostinato)가 시작되는 마디 513에서 템포를 크게 늦춘 다음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속도를 높인 것도 여전했다. 3악장 마디 133에서는 제2 바이올린이 피아니시모로 연주해야 하지만 서울시향은 일부러 포르티시모에 마르카토로 꾹꾹 눌러 마치 비올라처럼 들리게 했다. 시향이 연주한 3악장은 밝고 포근했으나 이 대목만큼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을 올해에도 받았다. 그래, 따듯한 위로를 받았으니 한 번쯤 목놓아 울기도 해야겠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면서 독창자들이 연주를 망치지 않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없다. 가수들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에는 잘해도 교향곡에서 다른 악기에 녹아드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외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가수들을 모셔와서 기대했는데 소프라노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 뻔했다. 소프라노 인드라 토마스가 노래할 때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화음이 망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음 처리가 까다로운 마디 841에서는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느라 리듬엔블루스처럼 되어버렸다. 연주가 끝나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소프라노를 탓하는 소리가 컸다. '오 벗이여, 이 소리가 아니야!'

가수들이 무대 앞으로 나오지 않고 금관악기와 나란히 서서 노래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가 다른 악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좋으며 지지난해에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금관악기와 타악기 소리 때문에 가수들이 제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지는 게 문제다. 게다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무대 위 음향이 매우 나쁘다고 한다. 가수 바로 뒤에 투명한 반사판을 두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랐던 모양이라 베이스바리톤 예프게니 니키틴은 노래할 때마다 오른손을 귀에 갖다대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가수를 뒤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대에 적응할 시간을 좀 더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예프게니 니키틴은 지난 2005년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 때 보탄(방랑자)을 맡았던 가수다. 그때는 목소리가 꽤 단단했는데 3년 만에 다시 보니 조금 부드러워진 대신 깊은 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작품 성격이 다른 만큼 고약한 독일어 발음이 더 자주 발목을 잡았고 이것이 좋지 않은 루바토로 이어져 선율이 느슨해지곤 했다. 특히 /r/ 발음에 굳이 모음 하나 음표 하나를 더 넣어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며,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할 때 엉뚱하게도 "Wo" 바로 뒤에 숨을 쉬어버려 가사 전달과 선율 흐름을 모두 망치기도 했다. 다만, 중창 때에는 다른 가수와 어울려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었다.

테너 요르마 실바스티는 경력을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밀리는 듯싶지만 이날 노래를 들어보니 오히려 가장 뛰어났다. 맑고 탱글탱글하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악단과 하나가 되었고 딕션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메조소프라노 유디트 네메스는 비중이 작아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테너와 함께 화음에 탄탄한 기둥을 만들어 내는 솜씨가 매우 훌륭했으며 딕션도 좋았다.

합창단은 이날 진짜 주인공이었다 할 만큼 멋졌다. 우리나라 합창단 어려운 사정은 안 봐도 뻔한데 이렇게 좋은 연주를 해내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시향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는 부드럽고 우아한 '프랑스풍' 연주를 들려주었다. 베토벤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싫어할 사람도 있을 듯싶지만, 편견을 버리고 들으면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2007.12.27.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교향곡 4번 - 넬손 프레이리 / 정명훈 / 서울시향

2007년 12월 27일(목)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정명훈
협연자 : 넬손 프레이리 (Nelson Freire, 피아노)

Brahms : Piano Concerto No. 2 in Bb Major, Op.83 (44')
Brahms : Symphony No. 4 in e minor, Op.98 (39')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협주곡이라기보다는 교향곡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협연자는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량에 맞서 일단 살아남아야 하며, 연주 테크닉 또한 매우 뛰어나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브람스 음악이 가진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연주자가 삼중고를 떠안아야 하는 까닭에 매우 유명한 작품인데도 국내에서 연주되는 일이 거의 없다.

넬손 프레이리의 피아노 연주는 여러모로 지난 5월 18일에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개리 그래프만을 떠올리게 했다. 커다란 밑그림이나 악상의 자연스러운 흐름, 다양하고 적절한 음색 등은 훌륭했으며, 이 점에서는 지난 2005년 11월에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여 음반으로도 나온 명연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수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리듬이 곧잘 망가지곤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손가락 골절 때문에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단다.

아픈 손가락으로 이렇게까지 연주해낸 것을 보면 역시 일류 연주자라 하겠지만, 아무래도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뒷감당하느라 고생이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되도록 작게 내려고 벌서는 듯 연주하기 일쑤였고, 어택(attack)을 죽이고 여린 음에 크레셴도를 주는 식으로 협연자를 배려하기도 했다. 피아노 리듬이 망가질 때마다 정명훈이 재빨리 수습하려고는 했으나 서울시향은 아직 그런 돌발사태에 재빨리 대처하는 능력은 충분히 기르지 못한 모양이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발목을 잡기도 했다. 3악장 첼로 독주가 매우 뛰어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출신 객원이었다고 한다.

앙코르로 연주한 글룩의 "멜로디"(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가운데 '정령들의 춤'을 스감바티(Giovanni Sgambati)가 피아노곡으로 편곡)는 여린 음만으로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손가락 골절을 손쉽게 감추어주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특히 1악장에서 여러 성부가 조각조각 정교하게 맞물리는 독특한 텍스처 때문에 앙상블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한 소리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는데, 이날 연주가 이따금 그랬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기운이 빠져버렸던 것일까. 결코 졸연은 아니었지만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치고는 뭔가 좀 모자란 듯했다. 물론 이것은 연주회장 탓도 크다. 소리가 무뎌지곤 했던 것은 단원들이 큰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리듬이 서로 어긋나거나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거나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팀파니 소리가 이날따라 이상했으며, 악기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을 만큼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 총주를 휘감아 올라 결정적인 '한 방'으로 터트리지 못하고 자신감 없이 뒤로 빠질 때도 더러 있었다(이를테면, 마디 129). 저음 현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왠지 끌려다니는 듯했다. 작품에 담긴 '다크 포스'를 4악장에 몰아서 '거대한 크레셴도'를 만들어내려고 지휘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까도 잠깐 생각해보았으나, 또 달리 생각하면 마에스트로가 1악장을 그렇게 간단히 희생시키려고 했을 리는 없다.

2악장은 템포가 대략 ♪= 60 정도로 꽤 느렸는데, 3악장의 빠른 템포와 대비시키는 것은 크게 보면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으나 느린 만큼 집중력 있는 앙상블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설득력을 충분히 얻지는 못했다. 마디 84에서는 힘없는 클라이맥스가 되었고, 마디 88에서는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는 좋았으나 두터운 화음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현악기군의 피치카토 음형은 깔끔했으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3악장부터는 명쾌한 리듬을 업고 썩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반복되는 16분음 스타카토 음형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게 일치시켜 놀라운 소노리티(sonority)를 만들어내었고, 서울시향의 앙상블이 사실은 뛰어난데 작품이 작품이라 이제껏 고전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돌이켜보건대 이토록 훌륭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악단인데도 음형이 복잡하게 얽힐 때에는 영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이 요술을 부린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이것만 보아도 시향 전용 연주회장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템포는 ♩= 135 정도로 꽤 빠른 편이었고, 군데군데 리타르단도를 써서(이를테면, 마디 5) 뚜렷한 템포 대비를 준 것이 인상깊었다. 앙코르로 3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했는데, 이때는 가운데 부분(마디 35-223)을 생략하고 템포 변화도 거의 없이 신나게 달려서 그야말로 앙코르다웠다.

4악장은 3악장에서 되찾은 기운을 살리고 파사칼리아(passacaglia) 특유의 반복과 점층 구조에 힘입어 마치 예고된 파국처럼 한 발 또 한 발 무게를 더해가는 거대한 크레셴도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디 33에서 바이올린의 비장한 선율도 훌륭했고, 마디 193의 셋잇단음은 절망에 빠져 목놓아 부르짖는 듯했다. 다만, 마디 97의 플루트 독주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했으나 너무 무덤덤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름대로 루바토를 쓰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부러 무표정한 연주를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구슬프게 흐느끼는 연극적인 표현이 낯 간지러웠던 게 아닐까 싶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이끈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향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지만, 세계적인 악단을 목표로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친다. 정명훈이나 시향 단원들이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너무 컸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시향 전용 연주회장도 없이 '남의 집 살이'를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정명훈과 계약하면서 시향 전용 연주회장을 마련하기로 약속했음을 잊지 않기 바란다.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2006.10.13. 진은숙의 Ars Nova Ⅱ - 뤼디거 본 / 서울시향

LG 생활건강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진은숙의 Ars Nova Ⅱ
2006년 10월 13일 8:00 PM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J.S. 바흐 / A. 베베른, 6성부 리체르카레(<음악의 헌정> 중)
A. 베베른,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모음곡 작품
N. 그리니 / G. 벤자민, 3도 독주(17세기 오르간 곡)
브레트 딘, <카를로>
M. 라벨, <쿠프랭의 무덤>
작자 미상 / 진은숙,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14세기 사이프러스 섬의 사랑노래 중)
G. 벤자민,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겨울의 마음>
A. 비발디,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오페라 <그리셀다> 중)
I. 스트라빈스키, <풀치넬라> 모음곡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소프라노 서예리



아르스 노바(Ars Nova)는 원래 14세기 다성음악을 일컫는 음악용어로, 13세기 다성음악을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라 하여 이와 대비시킨 말이다. 그러나 이날 연주회 제목은 진은숙의 편곡 작품을 제외하고는 아르스 노바 양식과 별 관련이 없고, 다만 '새로운 예술'이라는 말뜻을 빌렸을 뿐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기존 작품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신께 드리는 봉헌으로써 익명성이 장려되던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오늘날까지도 굳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데올로기다. Avant garde, Neue Musik, Música Nova 등이 이를 반영하는데, 모두 아르스 노바와 관련이 없는 20세기 음악 용어들이지만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르스 노바와 통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진은숙은 고음악 양식을 뜻하는 용어를 20세기 작품 위주의 연주회 프로그램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연주회의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효과를 노린 듯하다. 즉,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전통과의 연결고리는 유지하려는 현대음악의 이상이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라는 제목으로 표현된 것이다. 연주회의 부제로 사용된 "EarlyNew"라는 조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연주회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바흐와 그 이전 시대 작품이 현대 작품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것이다. 비슷한 구성의 연주회를 라디오로 들어본 적도 있는데, 2001년 브레멘 음악 축제에서는 리게티(György Ligeti)와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작품 사이에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이번 연주회는 바흐뿐 아니라 비발디, 그리니, 심지어 아르스 노바 시대의 작품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유명 작곡가와의 연계성만이 아닌 시대가 낳은 전통 자체와의 연결고리를 부각시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대음악과 시대적으로 인접한 낭만주의 및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과의 연계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0월 17일에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지만,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베토벤과의 양식적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홍성지의 작품뿐이며 나머지는 패러디나 콜라주 등의 기법을 위한 소재로만 베토벤을 다루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이 바로크 시대 이전 양식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는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와 단절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음악학 논문이 아닌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보여주기는 곤란해 보이며, 따라서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 프로그램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의 3요소'로 선율, 리듬, 화성을 꼽는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음악에서는 여기에 음색을 더해서 '4요소'라고 한다. 그만큼 현대음악에 음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거대 편성보다는 고전주의 시대 이전과 같은 소편성이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연주회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처럼 울림이 많은 곳은 현대음악의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에는 재앙과도 같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귀로 전달된 느낌이 지휘자의 해석 때문인지 연주회장의 음향 탓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고, 이 때문에 시향의 연주에 대한 내 느낌은 그에 따른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바흐의 6성부 리체르카레가 너무 밋밋하게 들렸던 것, 베베른의 작품 10에서 베베른다운 음색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특히 3곡에서 특유의 리듬이 흐리멍덩하게 뭉쳐져 들렸던 것,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 피날레 연습기호 104와 114에 나타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롤러코스터 같은 상승 음형과 크레셴도가 영 제맛이 안 났던 것 등은 모두 일차적으로 연주회장 탓이라고 판단된다. 이날 연주회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대신에 LG 아트센터에서 열렸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色다른 베토벤> 연주회가 있었던 체임버홀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베베른(Anton Webern)이 편곡한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6성부 리체르카레는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이번 연주회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리체르카레(ricercare; ricercar, ricercata, etc.)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있는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주제로 된 푸가(fugue)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쉽게 말해 이 작품은 바흐 음악 양식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베른의 편곡에서는 베베른 특유의 음색이 녹아들어 있어서 모르고 들으면 베베른이 쓴 조성음악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연주에서는 베베른의 그림자는 옅게 하고 바흐의 느낌을 더 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앞서 말한 연주회장 문제도 있겠지만, 나중에 지휘자로부터 직접 들은 바로는 일부러 그렇게 해석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나는 베베른보다 바흐의 특색을 더 살리는 것만이 연주회 성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정반대의 해석을 했다면 연주회장의 음향 때문에 소리가 듣기 싫게 뭉쳐서 오히려 난장판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안톤 베베른은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베르크(Alban Berg)와 함께 이른바 '제 2 빈 악파 (Second Viennese School)'의 일원으로('원조' 빈 악파는 물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무조(無調; atonal)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본격적인 20세기 음악의 분수령이었으며, 현대음악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대중의 머릿속에 단단히 심어놓은 장본인이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이루는 12개의 음을 모두 평등하게 다룬다는 이른바 '12음 기법'은 이후 현대음악의 절대적인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20세기 후반 이후 12음 기법이 작곡가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남아 있다. 한편, 인간이 12음 음악을 지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혹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지각심리학과 정보이론 등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해 12음 음악을 구조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나 타고난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베베른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나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몹시 당황했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이번 연주회를 앞두고 베베른의 작품 10의 악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만큼 열심히 연주회 감상 준비를 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은 이 작품의 역사적인 한국 초연이 듣기 괴롭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요술의 전당'의 안타까운 음향 환경과 유난히 심했던 관객의 소음을 힘겹게 뚫고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탓에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베베른 특유의 다양한 색채는 결국 내 귀에 이르기도 전에 흐릿하게 뭉쳐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소실된 소리를 상상해가며 들어본 결과 연주 자체는 매우 훌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나는 음반으로는 느낄 수 없던 신비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면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이런 식의 3차원적 공간감은 정상적인 가정용 2채널 오디오로는 재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나중에 고가의 오디오를 감상할 기회가 생기면 이 작품을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이 편곡한 그리니(Nicolas de Grigny)의 오르간 곡은 악기 편성이 특이했다. 트롬본 등의 저음 악기와 고음 목관악기를 사용하면서 중간 성부를 담당할 만한 악기를 쏙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실제 오르간 소리와 매우 비슷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 나오는 하바쿡 트라버(이희경 옮김)의 설명을 보자. "옛 오르간 제작자들은 이미 한 음의 음색이 근음과 특정한 배음 스펙트럼에서 나온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오르간 제작에 적용했다. 그래서 단지 배음만을 포함하는 레지스터를 제작하여, 그것이 기본 레지스터와 함께 연주될 때 독특한 음색을 낳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레지스터의 하나가 '티어스(tierce)', 제 5부분음인 '3도'다. 조지 벤자민의 편곡은 바로 이러한 오르간 음향구성을 토대로 한다. 우선 트롬본이 주 성부를 연주하고, 고음 목관들이 제2부분음에서 제9부분음에 이르는 배음스펙트럼을 연주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오보에가 4옥타브의 '라'를 불었을 때 이에 해당하는 소리의 주파수는 약 440헤르츠다. 그러나 실제 오보에 소리는 440헤르츠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두 배(즉, 880헤르츠), 네 배, 여덟 배 등에 해당하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은 피아노로 '도'를 눌렀을 때 '솔'이나 '미'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듣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음고에 해당하는 440헤르츠 성분을 '근음(fundamental)'이라 하고 그 배수열을 이루는 성분들을 '배음(harmonics; 인용된 설명에서는 '부분음')'이라 한다. 같은 음고로 소리를 냈을 때 악기마다 음색이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배음의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지 벤자민은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고음 목관악기가 트롬본의 배음을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오르간 음향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로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를 즐겼던 19세기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이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음악 이론가 카츠(Jonathan Howard Katz)는 "당신이 음악 이론 광(狂; geek)임을 나타내는 75가지 징후"라는 우스개 글에서 다음을 그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과제물 등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대해) '하지만 제수알도는 이렇게 했었단 말이에요!' 하고 자신을 변호한 적이 있다." 음대생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16세기 및 18세기 화성법과 대위법에서 금기로 여기는 선율 및 화성 진행을 16세기 작곡가인 제수알도(Carlo Gesualdo)는 곧잘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가능한데, 당시로써는 이것이 대단한 파격이었겠으나 요즘 시각으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전통적 조성체계의 해체를 경험한 뒤로는 대중음악에도 특이한 불협화음이 곧잘 쓰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브레트 딘(Brett Dean)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 <나를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 두오 Moro, lasso al mio duolore>의 녹음을 샘플링하고 20세기 음악 어법으로 관현악을 더해 새로운 작품 <카를로>를 썼다. 그 결과는 제수알도가 살인을 저지르던 날을 소재로 하는 공포영화에 어울릴 만한 음악이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샤이닝 The Shining>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큐브릭은 이 영화에 리게티와 펜데레츠키 등의 음악을 사용했지만, 만약 그가 <카를로>를 알았다면 틀림없이 영화의 주요 장면, 특히 긴장감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는 후반부에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를로>는 이 영화가 나온 지 17년 뒤인 1997년에 발표되었다. 가만, 혹시 브레트 딘은 차라리 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고 제수알도는 단지 소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벨(Maurice Ravel)의 <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 쿠프랭(François Couperin, II)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원래는 여섯 악장으로 된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은 이중 네 곡을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해 발레 음악으로 만들었다. "tombeau"는 '무덤'을 뜻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추모하는 예술작품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라벨은 원곡을 구성하는 6곡을 자신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우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제로 사용했으므로 추모의 뜻을 이중으로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모음곡 형식과 장식음 등이 바로크 시대의 것을 빌어온 것이고, 선율과 화성 등은 라벨 고유의 것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쓰였지만, 20세기 음악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므로 낭만주의 시대 작품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지휘자 뤼디거 본(Rüdiger Bohn)이 현대음악 전문가인 만큼 현대음악적 특징을 강조하는 해석을 보였다. 즉, 주선율 뒤에 숨어있는 선율들을 전면으로 부각시켜 색다른(또는, 무기질적인) 소리의 질감을 이끌어내곤 했다. 템포는 다소 빠른 편이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자칫 어수선하게 들리기 쉬우며, 특히 예술의 전당의 음향 환경에서는 그러한 위험도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날 연주는 지휘자가 의도한 독특한 매력을 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진은숙이 편곡한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 Je sui trestout d'amour raimpli"는 14세기 키프로스 지역의 노래다. 키프로스는 터키 남쪽에 있는 나라로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종교 및 정치적 알력에 따라 네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 14세기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프랑스의 다성음악, 즉 아르스 노바 양식이 이곳에도 전해졌으며, "나는 사랑에 빠졌답니다"는 그 가운데 비를레(Virelai)라는 형식에 속한다. 곡을 이루는 세 개의 성부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탓에 매우 복잡한 곡이지만, 성악과 반주의 관계 때문에 사실은 편하게 들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진은숙의 편곡은 1999년 작품인 <시간의 거울 Miroirs des Temps> 중 다섯 번째 곡으로 쓰였는데, 베베른이나 딘의 편곡 작품과는 달리 편곡자의 색채가 옅은 것이 특이했다. 프로그램에 있는 트라버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옛 것을 우리 시대로 끌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고유한 본질은 그대로 남겨둔 채" 현대 악기로 키프로스의 특색을 살렸다.
 
진은숙의 편곡보다 더욱 눈에 띈 것은 소프라노 서예리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녀는 비브라토를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정확한 음정과 투명하고도 풍부한 음색을 유지하여 고음악에 매우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벤자민의 <겨울의 마음>에서는 폭이 좁고 빠른 비브라토를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하게 구사했으며,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에서는 발성구의 탄력을 이용하여 여러 음을 빠르게 오르내리는 이른바 아질리타(agilita) 창법을 그야말로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빠른 템포로 정교하게 소화했다. 성량이 그리 큰 편은 아니라는 것이 옥에 티라 하겠으나, 이 역시 고음악 스페셜리스트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한국에 이런 가수가 있었나 했더니 웬걸, 진은숙이 독일에서 발굴했단다. 프로필을 보니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데, 이 정도면 고음악 마니아들은 이미 서예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도 같다.
 
조지 벤자민(George Benjamin)의 <겨울의 마음 Mind of Winter>은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시 <눈 사람 The Snow Man>에서 제목과 가사를 따온 작품이다. '눈사람(The Snowman)'이 아니라 '눈 사람(The Snow Man)'인 까닭은 겨울 풍경의 클리셰(Cliché)로서의 눈사람이 아니라 "겨울 마음"을 가지고 눈 덮인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눈과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겨울의 공허(空虛) 그 자체가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육사가 인식한 겨울의 모습이 "강철로 된 무지개"와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 등이었다면, 스티븐스가 그린 겨울의 모습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황량한 대지와 그 속의 공허(空虛)함이다.
 

The Snow Man
 
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
To regard the frost and the boughs
Of the pine-trees crusted with snow;
 
And have been cold a long time
To behold the junipers shagged with ice,
The spruces rough in the distant glitter
 
Of the January sun; and not to think
Of any misery in the sound of the wind,
In the sound of a few leaves,
 
Which is the sound of the land
Full of the same wind
That is blowing in the same bare place
 
For the listener, who listens in the snow,
And,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the nothing that is.
 
- Wallace Stevens (1879~1955)

눈 사람
 
우리는 겨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눈 속에 단단해진 소나무의
서리와 가지를 헤아리기 위하여.
 
그리고 오랫동안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얼음에 엉겨붙은 로뎀나무와
저 멀리 빛나는 1월의 태양 아래
 
거칠어진 전나무를 응시하기 위하여.
얼마 남지 않은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괴로워하지 않기 위하여.
 
귀 기울이는 이에게 그것은
변함없는 바람으로 가득한
변함없이 황량한 땅의 소리
 
눈 속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자신 무(無)가 되어
그곳에 없는 무(無)와 그곳에 있는 무(無)를 응시하는 이를 위한.
 
- 월리스 스티븐스 (김원철 옮김)


그런가 하면 조지 벤자민이 그린 겨울의 모습은 날카로운 고음의 불협화음과 음산한 글리산도, 심벌즈의 차가운 울림 등으로 가득한 음악이었으며, 차라리 "강철로 된 무지개"의 심상과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술의 전당'에서 흐릿하게 뭉쳐진 음향 때문에 뜻하지 않게 스티븐스의 겨울에 더 어울리는 부분도 많았다. 또 끝 부분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은 시의 마지막 연과 매우 잘 맞았다. 그러나 영어 가사가 한국의 정가(正歌; 가곡, 가사, 시조)처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탓인지 내용을 알아듣기는 몹시 힘들었다.
 
비발디의 "두 줄기 바람이 몰아치고 Agitata da due venti"는 오페라 <그리셀다 Griselda> 중에서 그리셀다의 딸 코스탄자가 부르는 아리아로, 아버지 구알티에로의 명령과 연인 로베르토와의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와 폭풍을 만나 흔들리는 배를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이 곡은 이날 연주된 작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인 동시에 서예리의 기교를 뽐내기에 매우 적당한 곡이라 할 수 있으며, 지휘자는 역시 빠른 템포로 몰아쳐서 서예리의 눈부시게 아찔한 테크닉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임무 때문에 사랑 때문에 Dal dovere da l'amore" 대목에서는 템포를 충분히 늦추어 계속되는 속도감에 청중이 숨 막혀 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앞뒤 부분과의 속도감의 대비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발레 곡으로 작곡한 <풀치넬라>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성악 부분을 기악으로 고친 작품이다. <풀치넬라>는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를 비롯한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데,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단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로부터 새로 발견된 페르골레지의 자필 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퍼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실제로는 사진으로 복사된 인쇄 악보였다고 한다. 다만 스트라빈스키가 페르골레지 등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남의 작품을 인용하고 개작하는 것은 스트라빈스키 작품세계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독일의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Christian Kaden)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추구했던 것은 자기 변신(Selbstverwandlung)이었다. 그는 발전과 진보, "목표지향적인 발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별에 다가가는 것,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부했으며, 대신 순환을 통한 갱신, "선(線)적인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그리고 무(無)시간적이고 신화적인 시간 안에서 선조의 음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을 추구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순환의 속성을 가진 "흔들리는 고요함, 역동적인 고요함, 프랑스어로 calme dynamique"이다. <결혼 Les Noces> 등의 작품에서는 이것이 종소리의 정적인 울림으로 나타나며, <풀치넬라>에서는 진동하는 형식 모델(schwingende Formmodell)로 나타난다. 조성과 악장 배치, 템포와 박자 등이 순환적/대칭적 속성을 가지며, 고전적 양식과 새로운 기악적 테크닉이 진동하는 형식 모델 속에서 갱생한다.
 
이날 연주에서는 주선율과 부선율을 차별하지 않는 뤼디거 본의 '무정부주의적' 해석이 신선한 매력을 주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정교한 대위법이 그에 의해 입체적 "진동"으로 나타났다. 템포는 빠른 편이었고, 이것이 독특한 악기 간 밸런스가 주는 매력을 더욱 잘 살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빠른 템포 때문에 세부적인 프레이징에 나타난 연주자의 표정들이 다소 흐릿해진 감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7악장 "비보 Vivo"에서 콘트라베이스의 매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주회장의 음향이 충분히 좋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르는 단점이다. 한편, 2악장 세레나데에서는 오보에 주자가 템포를 다소 느긋하게 잡고 솔로 연주를 하다가 두 번째 박에서 지휘자의 비팅을 보고 재빨리 템포를 수정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가엾은 연주자는 6악장 가보트에서는 반대로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았다가 역시 둘째 박 비팅을 보고 템포를 늦추기도 했다.
 
커튼콜로 연주된 곡은 파헬벨의 <캐논과 지그>였는데,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곡이다. 조지 윈스턴의 늘어지는 템포 대신 매우 빠른 템포로 연주되었고,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해체적인 성격도 여전했다. 다시 말해 '정격적인' 템포와 '현대적인' 밸런스가 절묘하게 만한, 이날 연주회 성격에 매우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는 낭만주의 시대의 끝자락에 있는 작곡가로, 쇤베르크와 베베른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현대음악으로 향하는 다리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의 음악은 당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이 베토벤보다 더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말러의 대중화 과정이 오디오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러 시대부터 점차 음색이 선율이나 화성 못지않게 음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오디오의 재생능력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아직도 평범한 가정용 오디오로는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디오 기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 그보다 전에 연주회장에서 현대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연주회처럼 '현대음악 특집'도 필요하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레퍼토리와 함께 현대음악이 나란히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이 브람스나 말러를 들으러 왔다가 버르토크나 리게티, 펜데레츠키를 '우연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의 작품이 더 자주 '보통 연주회(?)' 프로그램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래서 나는 진은숙이 많은 돈을 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활동만으로도 많은 수입을 올리는 작곡가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그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야구 선수 지망생들이 박찬호나 이승엽을 꿈꾸는 것처럼.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정보공유라이선스

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연주회 실황 중계/녹화 방송 유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어떤 클래식 음악 사이트에서 연주회 평이 호평과 악평으로 뚜렷하게 갈린 일이 있었다. 호평을 한 사람들은 연주회장에 직접 가서 들은 사람이었고 악평을 한 사람들은 TV 방송을 본 사람이었다. 호평을 한 사람이 모두 '막귀'였을까? 내가 알기로 그 가운데 지휘를 전공한 사람도 있으니 그렇게 믿기는 어렵다. 연주회장이 저 악명 높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어서 실연을 들어도 호평이 나오기 어려우니 아무래도 방송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방송을 본 사람은 끝끝내 지휘자와 악단 탓이라고 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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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그 뒤로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제법 오랫동안 따져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음향 엔지니어링 전문가가 아니라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맥은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 11월 6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서울시향 연주회. 첫 곡은 모차르트 ☞<구도자의 엄숙한 저녁기도 K. 339>였다. 이 곡은 비올라를 쓰지 않는 등 악기 편성이 특이한데, 이날 서울시향은 제2 바이올린을 무대 오른쪽으로 보내고 첼로를 가운데로 모았다.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을 떨어뜨려 놓으면 어지간한 합주력으로는 소리가 망가지기 일쑤인데, 서울시향이 훌륭하기도 했거니와 이날 소편성으로 연주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앙상블이 매우 훌륭했다. 지휘자는 ☞정명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집에 와서 라디오 중계방송 녹음을 다시 들어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악기 소리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고 밸런스는 산으로 도망가버린 탓에 참고 들어주기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연주했던 ☞말러 교향곡 4번에서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으니 내가 보기에 원인은 하나다. 음향 엔지니어가 작품과 악기 배치에 따라 알맞게 믹싱(mixing)을 하지 않고 '기본 설정' 그대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말러 교향곡 4번 또한 그럭저럭 참고 들어줄 만했을 뿐 소리를 잘 잡았다고 하기 어려웠다. 모든 악기 소리가 나무랄 데 없이 고르게 나지도 않았고, '언제나 그렇듯이' 클라리넷 소리가 혼자서 튄다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악기 소리가 고르지 않을 때 지휘자는 연주자에게 소리를 크게 또는 작게 내라고 말해주면 된다. 마이크와 믹서 따위로 소리를 잡아내는 음향 엔지니어는 믹서로 소리 크기를 바꿔주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떤 소리가 고른 소리인지 알려면 어느 대목에서 어느 악기가 얼마만 한 크기로 어떻게 연주하는지 엔지니어가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멀티채널 녹음을 하면 나중에 편집이라도 할 수 있으나 중계방송이라면 소리가 나기에 앞서 믹싱을 해줘야 하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엔지니어가 곡을 잘 모른다면?

밸런스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이 있다. 마이크 두 개만으로 스테레오 사운드를 잡는 이른바 '원 포인트 마이킹'을 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마이크 위치와 연주회장 음향 사정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등 여러 가지 걸리는 것들이 있어서 보통은 마이크를 여러 대 놓고 믹싱을 하게 된다. 마이크를 악기 가까이 두면 또렷한 소리를 잡을 수 있으나 다른 악기와 어우러지게 하기 어렵고 생동감이 줄어든다. 거꾸로 마이크를 멀리 두면 자연스러운 소리를 잡을 수 있으나 연주회장 음향에 따라 소리가 멍청해질 수 있고 위상 간섭이 일어나 소리를 갉아먹기도 한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은 보통 가까운 곳과 먼 곳에 모두 마이크를 놓고 믹서로 알맞게 섞는다고 한다.


결국 믹서 다루는 솜씨에 따라 소리가 크게 달라지는데, 우리나라 연주회 실황 중계/녹화 방송을 들어보면 마치 악기 가까이에만 마이크가 있는 듯이 들린다. 그래서 현악기가 아기자기하게 주고받는 대목에서는 썩 듣기 좋은 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총주 때에는 밸런스가 꼬이고 생동감이 없어지곤 한다. 마이크 가까이 있는 연주자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것이 크게 과장되기도 한다. 나란히 비교해 보지는 못했으나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KBS 1FM 중계방송보다 MBC TV 녹화방송이 조금 더한 듯하다.

컴프레서(compressor)를 함부로 쓰는 일도 큰 문제다. 컴프레서란 쉽게 말해 다이내믹 레인지를 줄여서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게 하는 장치 또는 알고리듬이다. 음반 녹음을 할 때면 가정용 오디오에 알맞게 다이내믹 레인지를 줄이곤 하는데, 라디오는 전송 대역폭이 좁아서 다이내믹 레인지를 더 줄일 때가 잦다. 그런데 연주회 실황 방송에서는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 다이내믹 레인지가 좁아서 문제이며, 대편성 관현악곡을 연주할 때에는 이것이 치명적이다. 컴프레서는 작품에 따라, 그리고 연주회장 음향에 따라 알맞게 써야 하며, 얼마만큼이 알맞은지 정답은 없다. 그러나 글쓴이가 보기에 우리나라 연주회 실황 방송에서는 '기본 설정'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 듯하다.

2009년 3월 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있었던 서울시향 연주회에서는 정명훈 지휘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을 연주했다. 글쓴이는 ☞서울시향 월간지 <SPO>에 보낸 연주회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타악기는 너무 앞으로 나서지 않고 다른 악기 소리에 감칠맛을 더할 때가 잦았고, 이를테면 살로넨 녹음에서 큰북이 매우 큰 소리를 내는 1부 5곡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들의 의식' 마디 439에서도 악보에서 지시한 '메조포르테'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곳에서는 연주회장이 무너질 듯한 소리를 터트리기도 했다. 1부 마지막 네 마디에서는 큰북이 무시무시한 크레셴도를 들려주었고, 2부 3곡 '선택된 처녀에게 영광을'에 들어서기 바로 앞서 나오는 4분음 11연타 때에는 큰북과 팀파니가 현 소리를 누르고 마구 두드려댔다. 2부 끝 곡 '희생의 춤'에서는 타악기끼리 어질어질한 폴리리듬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KBS 1FM 라디오 중계방송이나 MBC TV 녹화방송에서는 무시무시한 타악기 소리가 관악기에 묻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꾸만 일어났다. 타악기 소리가 아니더라도 음악에 '펀치력'이 없어서 밋밋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밸런스도 곧잘 어긋나서 음악에 담긴 뉘앙스가 자꾸만 어그러졌다.

우리나라 방송국 음향 엔지니어는 왜 이토록 무능한가? 이 말은 참 어리석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는 왜 유럽이나 일본 오케스트라보다 연주를 못하는가? 솜씨 있는 연주자들이 국내 오케스트라에서 푸대접받으며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음향 엔지니어도 다르지 않으리라. 오케스트라 전문 음향 엔지니어가 있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연봉이 얼마나 될지는 뻔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나보다는 음향 엔지니어들한테 직접 물어보라. 다만, 서울시향처럼 돈 많은 오케스트라는 당장 편법을 쓸 수 있다. 솜씨 좋은 음향 엔지니어를 외국에서라도 서울시향 전속으로 모셔오면 된다. 공연 기획을 마이클 파인에게 맡길 만큼 눈 높은 곳이니 음향 엔지니어 또한 그리 못할 까닭이 없다.

나중에 붙임.

다른 곳에 링크를 걸었더니 방송국은 연주회장으로부터 2채널 신호를 그냥 받아올 뿐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따라서,

(1) 방송국 탓이 아니라 연주회장 탓이다.

(2) 내가 KBS 1FM 라디오와 MBC TV가 다르다고 느낀 일은 착각이라는 얘기가 된다. (글 쓰면서 그럴 가능성을 어렴풋이 생각해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어쩌면 단순 볼륨 차이를 그렇게 느꼈을지도..;;)

(3) 또 생중계가 아닌 녹화를 하더라도 '원본'이 2채널이므로 마스터링을 해 봐야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른바 '원판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리고 댓글 가운데 믹싱이 아니라도 변수가 매우 많다는 말씀도 있었으나 자세한 설명은 없더라. 전문가 눈으로 깊이 파고들면 당연히 변수가 많을 게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오케스트라 전문 음향 엔지니어를 키워야 한다는 논지는 그대로다. 키워야 할 주체가 방송국이 아니라 연주회장으로 바뀌었을 뿐.

또 붙임. 댓글은 이곳에 달아주심 안 될까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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