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동요 선율은 단순하다. 왜 그럴까? 〈학교 종〉을 계명창으로 불러보자. 솔솔라라솔솔미 솔솔미미레 솔솔라라솔솔미 솔미레미도. 선율을 이루는 음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 도레미솔라. 다섯 음으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섯 음은 모두 피아노 흰 건반에 들어맞는다. '솔'이 열한 번 나오고 '미'가 여섯 번, '라'가 네 번, '레'가 두 번 나온다. '도'는 딱 한 번 나오지만 맨 마지막에 나와서 곡을 끝맺으므로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하다.
이 곡은 C 장조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C 음, 즉 '도'를 '으뜸음'으로 하는 음계인 '도레미파솔라시'로 선율이 이루어져 있다. 이 곡에 가장 자주 나온 '솔'은 C 장조에서 '딸림음'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도미넌트(dominant)이다. 말 그대로 선율을 다스리는 음이다. 으뜸음이 주인공이라면 딸림음은 악당이다. 원래 주인공보다 악당이 더 멋있는 법이지만 끝내는 주인공이 이긴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고 오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만 하고 넘어가자.
이처럼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맺는 관계는 평등하지 않으며, '조성(調性; tonality)'이라 부르는 위계질서를 따른다. 그리고 위계질서가 잘 잡힌 선율일수록 듣기에 편안하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단순한 선율은 그만큼 흥미를 잃기 쉬우며 적절한 일탈은 선율을 더욱 넉넉하고 재미있게 만든다. 서양음악에 오늘날과 같은 조성이 생겨난 것은 17세기 즈음인데(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조성'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와서 생겼고 그전에는 C 장조, a 단조 하는 '조(調; key)' 개념이 있었다.) 그 뒤로 점차 '일탈'이 잦아져 조성 구조는 복잡해지고 화음도 그만큼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는 '일탈'이 넘쳐나다 못해 '위계질서' 자체가 무너지고 선율을 이루는 음들이 평등해졌다. 바로 조성이 없는 음악, 무조음악이다. (조성이 생겨나기 전에도 음악이 있었지만 '선법'이라는 비슷한 위계질서가 있었으므로 '무조음악'이라는 용어를 쓸 때 헷갈리지 말자.) 서양음악사에 처음 나타난 무조음악은 1908년 세계초연된 쇤베르크 현악사중주 2번 3, 4악장이며, 4악장에 나오는 '나는 다른 행성의 공기를 느낀다.'라는 의미심장한 노랫말로 이름 높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손쉽게 작곡하려고 1921년에 이른바 '12음 기법'을 만들어냈다. (12음 기법이 나오기 전에도 무조음악이 있었으며, 쇤베르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에 홀린 피에로》는 1912년 작품으로 무조음악이되 12음 기법으로 쓴 작품이 아니다.) 12음 기법은 한 옥타브를 이루는 음 열두 개를 수열처럼 음렬(音列)로 만들어 쓴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며 그 때문에 '음렬주의(Serialism)'라는 말도 생겨났다. 더 나중에는 리듬과 셈여림 따위를 마찬가지로 잘게 나누어 음렬처럼 쓰는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도 나타났는데, 유럽에서는 영미권과는 언어 관습이 달라서 '음렬주의'라 하면 보통 '총열주의'를 가리킨다.
현대음악이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은 현대음악은 곧 12음 음악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12음 음악은 현대음악의 한 갈래일 뿐이며, 어찌 보면 12음 음악이 20세기 서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12음 음악을 들을 생각은 버려도 좋다. 베베른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Op.10》은 베베른이 1911년부터 1913년에 걸쳐 작곡했으며, 12음 기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그러나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에서 이런 음악을 소개하는 일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익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악보를 보고 직접 분석해 보는 것이다. 5악장 작품인데 4악장은 길이가 고작 여섯 마디밖에 안 될 만큼 작품 길이가 터무니없이 짧으므로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려도 좋다. 짧다는 것은 어쩌면 베베른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선율을 들으려 하지 말고 음색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알고 보면 오디오 테스트용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프와 약음기 낀 트롬본, 하프와 첼레스타, 하프와 플루트가 차례로 한 음씩 연주하며 음악이 시작되는데 이때 음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들어보라. 이때 플루트는 혀나 목젖을 떨어 '아르르' 하는 소리를 내는 이른바 '플러터 텅잉(flutter-tonguing)' 주법을 쓴다. 이처럼 선율이 흐를 때 음색이 계속 바뀌게 하는 작곡 기법을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라고 하며, 베베른은 음색과 함께 길이, 셈여림, 그리고 음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까지 12음 기법 속에서 짜임새 있게 사용하여 훗날 총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선율이 흐르면서 음색이 바뀌니 악기 또한 계속 바뀌고 그때마다 소리가 나는 위치도 바뀐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때 음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잘 들어보라. 소리가 나는 곳이 앞뒤, 왼쪽 오른쪽,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는데 마치 요정이 빛을 뿌리며 무대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2채널 스피커로 음상이 아래위로도 맺히게 할 수 있는가? 특수 녹음을 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제껏 들어본 음반 가운데 그런 녹음은 없었으며 연주회장에서 실제 연주를 들어보고서야 나는 이제까지 음반으로 들은 것은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베베른 음반을 내놓은 레코딩 엔지니어들은 반성하시라.
3악장에서는 큰북과 차임벨(Tubular bell)이 낮고 여린 소리로 '우르릉'하는데 오디오 저음 재생 능력을 시험하기에 좋다. 악보에는 '들릴 듯 말 듯하게 kaum hörbar'라고 써놨는데 아예 안 들리면 곤란하다. 글쓴이 오디오는 소리는 다 나는데 음색이 진짜 악기 소리와는 좀 다르다. 그런데 최고급 오디오로 들어보니 진짜 악기 소리가 나더라.
20세기 서양음악의 중요한 특징으로 음색을 꼽는다면, 무조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쇤베르크는 그저 낭만주의자였을 뿐 현대음악 작곡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불레즈는 "쇤베르크는 죽었다"라는 악명 높은 글에서 이처럼 쇤베르크를 헐뜯으며 베베른에게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음악에서 음색은 이토록 중요하다. 다음 시간에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을 소개하겠다.
음반을 살 때 주의할 점.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Op.10이며 다른 하나는 작품 번호가 없다. 둘은 다른 작품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참고할 점. '베베른'은 'Webern'을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쓴 것인데 실제 발음은 '베번'에 가깝다.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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