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에 사용할 글입니다.
서양음악에서 개별음은 고정되어 있어 다른 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음악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아시아 음악에서는 개별음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음악을 이룬다. 윤이상은 이 차이를 붓글씨와 펜글씨의 차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서양음악에서 여러 선율이 '대위법'이라 불리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을 폴리포니(polyphony)라 한다면, 동아시아 음악에서 '살아있는 음'들이 모여 관계 맺는 것을 헤테로포니(heterophony)라 부른다.
1960년대 유럽에서는 전통적인 화음 개념을 확장한 이른바 음 덩어리(cluster)로 선율 · 리듬 · 화성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음색 또는 '음향'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나타난다. 윤이상은 이것을 받아들이되 음 덩어리를 이루는 개별음을 '살아있는 음'으로 바꿈으로써 헤테로포니를 폴리포니의 틀 속에 담아냈다. 살아있는 음이 모여 살아있는 화음, 살아있는 음향층을 이루는 것이 윤이상 음악 어법의 핵심이다.
3악장으로 된 1962년 작품 《낙양》은 당나라에서 유래해 한국화한 궁중음악 《낙양춘》(洛陽春)에서 제목을 따온 곡으로, 서양인에게 더 익숙한 중국식 발음 '로양'을 로마자 표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낙양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며, 작곡가는 당시 유럽에서 주목받던 최신 작곡기법이 동아시아 전통음악과 통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이런 제목을 사용한 듯하다. 윤이상은 이후 몇 년간 가사(歌辭), 가락, 예악(禮樂) 등을 작품 제목으로 썼다.
이 곡에는 전통악기 박(拍)이 쓰였고, 살아있는 화음은 한국적인 울림을 품고 있으며, 서양악기로 한국 전통악기를 흉내내는 듯한 음형이 특히 3악장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낙양》은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에 속하며, 따라서 한국인이 이 곡을 듣고 한국 전통음악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윤이상 작곡 시기 중 초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에 그는 유럽 주류 현대음악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음악 어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윤이상은 동아시아 음악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 작품에서 첨단 현대음악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을 유럽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도(道), 정중동(靜中動), 음양오행 등을 애써 설명해야 했지만, 한국인은 윤이상 음악, 특히 초기작을 이해하기 위해 거꾸로 20세기 유럽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하면, 《영산회상》이나 《수제천》 같은 수백 년 전 한국 궁중음악을 들을 때에도 현대 한국인에게 이미 익숙지 않은 감상 태도가 필요하다. 윤이상 음악을 듣는 일도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