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피리’ (1971)
윤이상의 ’피리’는 본디 오보에 독주를 위한 작품으로, 한국 전통악기인 피리를 연상시키는 연주법이 작품에 쓰인다. 그러나 ’피리’는 서양 악기로 한국 전통악기를 흉내 내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의 상호작용과 상호침투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윤이상류 오보에(클라리넷) 산조 또는 회상(會相; 영산회상)이라 할 수 있다.
음악학자 볼프강 슈파러, 윤이상을 인터뷰한 작가 루이제 린저 등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피리는 지하 감옥에 갇힌 자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그 목소리는 감옥 속에서 정신적인 자유를 얻고자 투쟁한다. “여러 차례에 걸쳐, 언제나 새롭게 시도하는 상승은 수감자가 스스로를 영적으로 고양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마치 대기 중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새의 몸짓처럼 말이다(루이제 린저).”
이 작품은 기-승-전-결 네 부분이 아치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의 셈여림이 극적으로 변화한다(f–p / p–ff / fff–ppp / p–ppp). ‘솔♯’에서 시작하는 음은 옥타브를 넘어 ’라’에 도달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다. ’라’ 음은 윤이상 작품세계에서 흔히 도(道)의 세계, 해탈을 거쳐 다다를 수 있는 이상적 세계를 상징한다. 윤이상은 자신의 작품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악기는 ’라’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클라리넷을 위한 ‘작은 어릿광대’ (1975)
슈톡하우젠의 ‘작은 어릿광대’는 클라리넷을 위한 약 45분짜리 독주곡 ’어릿광대’(1975)의 축약판이다. 연주자는 어릿광대 복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되는데, 이때 연주자의 발소리가 타악기적 역할을 한다. 연주자가 춤과 연주를 동시에 하기가 여의치 않다면 전문 무용수가 춤을 맡거나 또는 타악기 연주자가 발소리를 대신하는 타악기 연주를 할 수도 있다.
어릿광대는 전통적인 의미의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을 하게 된다. 음악 또한 ’춤’과 더불어 돈다. 즉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음형에서 곡 전체가 파생한다. 나선운동에 관한 아이디어는 슈톡하우젠의 1968년 작품 ’나선’(Spiral)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고, 한 음형에서 곡 전체와 세부 요소가 파생하는 짜임새는 만트라(1970), 이노리(1973-4) 등에서 발전한 것으로 동양 사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점에서 윤이상 음악 어법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슈톡하우젠은 미국의 클라리네티스트이자 슈톡하우젠의 연인이었던 수전 스티븐스를 위해 이 작품을 썼다.
올리비에 메시앙: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1940-41)
메시앙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후방의 군병원에서 지원병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수용소의 장교는 메시앙에게 종이와 연필을 제공해 작곡을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이 시기에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가 탄생했다.
수용소에서 고통받던 작곡가는 어느 날 천사들의 무지개와 화려한 색채의 소용돌이를 환각으로 보고 요한계시록을 떠올렸다. 작품 제목에 쓰인 ’시간의 종말’은 요한계시록 제10장에서 온 것으로, 예수 재림의 때에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계시를 일컫는다.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시간이 다시 없으리니[…].”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피아노로 된 악기 편성은 수용소에서 구할 수 있는 악기를 사용하고자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곳에 있던 첼로에는 줄이 세 개뿐이었고, 클라리넷은 일부 구멍이 녹아 없어졌고, 피아노는 건반 몇 개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41년 1월 15일 괴를리츠 포로수용소의 5,000여 명의 포로와 장병 앞에서 메시앙 자신의 피아노와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이날 연주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음악학자 이희경은 이것을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에 울려 퍼진 모차르트 오페라 아리아와 견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