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8일 화요일

2005.12.15.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창단 20주년 기념연주회 (제149회 정기연주회)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
2005년 12월 15일 (목)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이대욱
트리스탄 : 리차드 데커(Richard Decker)
이졸데 : 프란세스 진저(Frances Ginzer)
브랑게네 : 김여경
마르케 왕 : 양희준
멜롯 : 전태상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이 국내 초연된 것이 1961년이다(KBS 교향악단, 데이비드 샤피로 지휘). 그리고 44년 만에 2막이 초연되었다. 불과 석 달 전에 <니벨룽의 반지> 국내 초연이 있었는데다 6개월 전에는 <탄호이저>가 1979년 국내 초연 이후 처음으로 전 막 공연되기도 한 터라 이번 공연이 상대적으로 빛바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바그네리안 입장에서는 어쨌든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한편, 코리안심포니는 여러모로 바그너와 인연이 많은 악단이다. 초대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였던 고(故) 홍연택 선생은 국내 최초로 바그너 오페라 전 막 공연을 지휘한 분이시기도 하다(1974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국립오페라단).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바그네리안이신 김민 선생이 코심의 이사장을 거쳐 현재 음악감독을 맡고 계시기도 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작품이다. 처음으로 진지한 태도로 대본을 따라가며 전 막을 감상한 바그너 작품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바그너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이 파헤친 작품이기도 하기에 이번 공연에 감회가 남달랐다.

마침내 시작된 공연에서는 우선 무대가 어두워진 다음 박수 칠 기회를 주지 않고 지휘자가 조용히 등장하는 바이로이트적(?) 연출이 아주 좋았다. 불이 켜지는 동시에 '낮'의 모티프가 터져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1막 전주곡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조명의 총체예술적 효과는 반감되었으나 예정에 없던 부분을 덤으로 감상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이대욱의 해석은 특별히 모나지 않은 대신 참신함도 없이 무던했다. 이것은 현이 음표를 따라가기에 바빴던 탓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역량을 고려하면 현악기 주자들이 사력을 다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연습을 게을리했다고 할 수도 없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아니던가? 이런 작품은 국내 오케스트라가 연주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될 만하다. 현의 음량이 전체적으로 부족한 편이었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서는 꽤 힘을 내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웠던 부분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자면, 우선 저 유명한 '오 사랑의 밤이여 우리를 덮어다오 O sink hernieder, Nacht der Liebe' 대목에서 현에 의한 몽환적인 리듬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리듬 처리 자체가 충분히 또렷하지 못했고 보잉이 일치되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피아니시모에 약음기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모든 현이 같은 리듬을 사용하는 것치고는 음량이 너무 작았다. 결과는 꿈결처럼 붕 뜬 느낌의 리듬 대신에 안개 낀 듯 흐릿한 소리였다.

음악해석학(musical hermeneutics)에 기대어 말하자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바그너 이전의 전통적인 '불'의 심상이 아닌 '물'의 심상을 통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크래머(Lawrence Kramer)가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한 바 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 다시 말해 사랑이야말로 (실질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인간을 창조하는 무엇이다. (...)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있게 한 사랑의 행위를 초월할 수 없으며, 단지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통해 사랑은 파도가 밀물과 썰물에 따라 변하고 사라졌다 되살아나는 것을 닮은 특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135쪽)

리비도는 요컨대 다름 아닌 액체이며, 실로 프로이트가 즐겨 사용한 비유는 액체, 곧 사람들의 내면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흐름의 속성을 가진다. 전통적인 욕망의 불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끊임없이 율동 하는 매개체, 즉 물로 교체되었다. (141쪽)

욕망의 액체화로부터의 이상하지만 또한 지속적인 지류(支流)는 이 등장인물[Kate Chopin의 소설 The Awakening (1899)에 나오는 인물]의 성별에 따라 구분된 요구들 사이의 권력투쟁이다. 여자다움에 있어서, 욕망은 무엇보다도 바다, 파도의 밀물과 썰물, 이졸데의 'wogender Schwall'로 표현된다. 이러한 용례는 남녀 예술가 모두에게 일반적이다. (142쪽)

콘서트 버전의 전주곡에 바그너 자신이 붙인 프로그램 노트를 우선 살펴보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끊임없이 갈망하고 동경하며 자신을 스스로 갱신하는 밀물과 썰물로서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줄곧 이해되었다. (147쪽),

- Lawrence Kramer., Musical Form and Fin-de-Siecle Sexuality. In Music as Cultural Practice 1800-190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2막 2장, 'O sink hernieder, Nacht der Liebe,' mm. 1111-1122.
Ⓟ New York : Broude Brothers, [1900?] 출처: http://www.dlib.indiana.edu


이러한 물의 심상은 '끝없이 영원히, 하나 됨을 자각하리라 endlos ewig, ein-bewusst'에 이르면 거대한 파도로 변한다(마디 1598). 강력하게 몰아치던 음악은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höchste Liebeslust!'에서 갑자기 여리게 변한 다음 다시 크레셴도를 부르는데(마디 1619), 이렇게 갑작스러운 음량 변화는 진정한 폭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며 감상자의 주의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장치가 된다. ('지고한 사랑의 쾌락이여! höchste Liebeslust!'는 사랑의 2중창 마지막 대사이며, 마르케 왕의 등장과 함께 좌절된 사랑의 완성, 즉 쇼펜하우어적 해탈이 바그너에 의해 변용된 "열광적인 기쁨과 황홀"의 상태이다. 좌절된 사랑이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은 작품의 끝 부분이며, 작품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이졸데의 '지고한 쾌락이여! höchste Lust!'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날 연주에서는 이 부분이 정신없는 동형진행(sequence) 속에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다.

1막 전주곡에서 때때로 호른 소리가 거칠 게 돌출되곤 했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어쩌면 호른 주자의 실수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일단 지휘자의 해석으로 간주하기로 하자. 도버 판 총보 첫머리에 있는 지시문에 따르면(펠릭스 모틀이 쓴 것으로 추정됨) 바그너는 부드러운 음색을 만들기 위해 내추럴 호른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고 하는데, 연주자가 충분히 뛰어나다면 밸브 호른을 써도 무방하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현대의 호른도 이 점에서 당시의 밸브 호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호른이 지나치게 돌출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해석이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며, 실제 음악적 맥락으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다. 감정의 기복을 살리려는 의도였다면 이른바 '트리스탄 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의 동형진행에서 다이내믹의 변화를 크게 하며 특히 마디 10과 마디 16의 스포르찬도를 강조하는 것 등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2막 전주곡에서는 베이스 클라리넷에 의한 이른바 '☞ 조급한 이졸데의 모티프' 부분에서 악기군 사이의 리듬 충돌에 묘한 매력이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 이졸데 리듬'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음반에서는 이것을 살리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리듬 충돌을 피해간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현 소리를 아주 작게 함으로써 리듬 충돌의 핵심 원인이 되는 현의 싱코페이션 리듬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베이스 클라리넷 소리는 내가 알던 악기의 음색에 비해 너무 부드러워서 바순으로 대체한 것으로 오해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연주가 끝난 뒤 지휘자가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를 일으켜 세웠을 때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마르케 왕의 '어떤 불행으로도 씻을 수 없는 이 불명예를 왜 내게 주는가? Die kein Elend sühnt, warum mir diese Schmach?' 직후 베이스 클라리넷 소리를 들을 때면, 지난 2003년 9월 8일에 있었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지휘: 로버트 쾨니히, 베이스: 전승현)에서 받았던 강렬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날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는 크레셴도 폭을 최대로 늘림으로써 비탄에 빠진 마르케 왕의 심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이 대목을 마르케왕의 모놀로그 전체의 절정으로 부각시켰다. 지휘자 로버트 쾨니히는 코심과 연주회를 통해 상당한 친분을 쌓고 있기 때문에 이번 연주회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지휘자의 해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내심 기대했는데 웬걸, 여느 음반과 비슷하게 폭 좁은 크레셴도로 밋밋하게 넘어가 버렸다.

트리스탄 역의 리차드 데커(Richard Decker)는 음색이 배역에 나름대로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바그너 가수로서의 힘은 부족해 보였다. 이성이 마비될 만큼 강렬한 파토스를 표현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으며, 성량 자체도 충분히 크지 못해서 오케스트라 소리에 묻힐 때가 더러 있었다. 연주회장의 음향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예전에 같은 장소에서 들었던 귀네스 존스나 사무엘 윤 등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리차드 데커는 바그너 가수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공연을 만만히 보고 목소리를 아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연 내내 크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만약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우리에게도 바그네리안 테너가 있다며 기뻐했겠지만, 많은 돈을 들여 모셔왔을 외국인 가수가 이 정도라면 그 돈이 좀 아깝다. 트리스탄, 에릭(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등의 역할을 맡은 바 있으며 내년에 지크문트 역을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 지크문트 역이 매우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졸데 역의 프란세스 진저(Frances Ginzer)는 리차드 데커보다 훨씬 더 실망스러웠다. 목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때가 많았으며, 강세를 받지 못한 음을 속으로 먹어 버린 탓에(독일어 무성음 처리는 열심히 하더라) 레가토나 칸타빌레에 대한 개념이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선율 윤곽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고음 처리를 곧잘 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작품의 악명 높은 고음 처리를 위해 목을 지나치게 아낀 덕이 아닐까 싶다. 노래를 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고음 자랑을 하러 나온 것인지? 브륀힐데, 이졸데, 엘자, 젠타 등 바그너 경력은 상당하며 음색이 바그너에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이날 공연을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의혹은 더욱 짙다. 평론가로부터 "거대한 성량과 따스함을 가진 최고의 소프라노"라는 극찬을 받은 적이 있단다.

브랑게네 역의 김여경은 성량만 본다면 프란세스 진저와 역할을 바꿨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이졸데 역의 살인적인 고음을 감당할 만한 성역이 아니었겠지만.) 2막 1장 동안 줄곧 이졸데를 압도했으며, 2장에 두 차례 등장하는 아리오소도 매우 뛰어났다. 타게리트(Tagelied)의 전통을 잇는 2막 2장의 아리오소에서 도입 부분의 크레셴도는 마치 영화의 페이드인(fade-in)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 부분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가수는 음반으로도 흔치 않다. 김여경의 '페이드인' 처리는 꽤 양호했다. 무엇보다 바그너를 이만큼 훌륭히 소화해내는 한국인 여자 가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반갑다. 마르케 왕의 등장을 알리는 브랑게네의 비명 소리가 없어서 잠깐 놀랐는데, 이어지는 쿠르베날의 대사가 2막에서는 단 한 마디 뿐이라(위험합니다, 트리스탄님! Rette dich, Tristan!) 캐스팅에서 빠졌다는 점을 생각하니 정황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비명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목소리를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면 바그너 가수가 될 자격은 없다 하겠다. 비명 소리가 빠진 대신 금관이라도 좀 더 크고 거친 소리를 내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마르케 왕 역의 양희준은 저음의 깊이만으로도 탄복할 만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저음은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성악이라는 것이 원래 타고난 목소리가 중요하겠지만, 특히 저음은 노력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 해석상의 특이한 점은 없었고 기존 대가들의 장점을 이어받아 정교하게 다듬은 모범적인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가 출연한 <니벨룽의 반지> 전곡 CD가 있다는데, 아마도 귄터 노이홀트의 바덴 가극장 녹음(Brilliant, 1993-95)에 나오는 파졸트(라인의 황금)와 파프너(지크프리트) 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음반에는 'Simon Y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새로운 바그너 가수 발견!

멜롯 역의 전태상은 배역의 존재감이 워낙 작아서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목소리가 빛을 머금은 듯 밝고 단단하다고 느꼈으나 바그너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 공연을 끝으로 위대한 바그너의 해는 갔다. 앞으로는 무슨 재미로 사나?

2005년 12월 17일 씀.
2006년 2월 9일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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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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