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James Judd
협연자 : Martin Fröst, Cl
Vaughan Williams: 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15')
Copland: Clarinet Concerto (18')
Zemlinsky: Die Seejungfrau (45')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둘째 아내 Ursula가 쓴 전기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Rayf"로 읽는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의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교회선법을 따르는 정선율(cantus firmus)과 16세기식 대위법, 아멘 종지(plagal cadence) 등의 고음악 양식에 영화 <반지의 제왕>에 배경음악으로 써도 어울릴 듯한 영국풍 선율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었으며, 이 모든 것이 현대적인 음악 어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본 윌리엄스만의 남다른 음악이 되었다. 화성과 조성 구조는 후기 낭만주의의 반음계적 어법과 통했고, 불균등하고 불규칙한 프레이즈 구조는 영국 음악의 전통에서 유래했으면서도 20세기 초의 음악사적 흐름과도 맞닿았다.
그런가 하면 작곡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만큼 16-17세기 영국 오르간 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현악 사중주단과 현악 오케스트라, 그리고 2-2-2-2-1명으로 이루어진 제2 오케스트라로 편성되어 있으며, 음악학자 Edwin Evans에 따르면 이것은 영국 오르간을 이루는 서로 다른 건반들(Solo, Great, Choir)에 각각 해당한다. 본 윌리엄스는 제2 오케스트라를 제1 오케스트라와 되도록 떨어트려 놓으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서울시향을 지휘한 제임스 저드(James Judd)는 제2 오케스트라를 객석 기준으로 무대 왼쪽 연주자 대기실에 들어가도록 했다. 덕분에 합창 반주 오르간(Choir organ)의 느낌이 꽤 잘 살아났으며 서울시향의 연주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오르간의 음향 자체를 그럴싸하게 흉내 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브루크너처럼 관악기로 실제 오르간의 파이프와 비슷한 소리를 내도록 한 것도 아니고, <진은숙의 아르스노바> 시리즈에서 소개한 바 있는 조지 벤자민처럼 음향학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오르간의 배음(harmonics) 구조를 흉내 낸 것도 아니라 미리 알고 듣지 않는다면 오르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주회장이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명동 성당이었다면 혹시 진짜 오르간 같았을까?
20세기 서양음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민속 음악을 끌어들여 새로운 음 소재로 쓰는 동시에 기존 서양음악에서 굳어진 화성과 리듬 등을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작곡가들은 미국적인 음 소재로 무엇보다 재즈를 열심히 활용했다. 원래 흑인 음악이었던 재즈를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제도권 음악계에 끌어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조지 거슈윈이라 할 수 있겠는데, 정작 거슈윈은 본래 '대중음악'을 하던 사람으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영감에 따라 작곡을 한 사람이다.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는 나디아 불랑제 등에게 정통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고 나서 재즈나 미국 민요 등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흑인 음악의 어둡고 끈적끈적한 느낌 대신에 이른바 '스윙(swing)' 등 재즈적인 요소를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흐름 속에 녹여 내었다 해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코플랜드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협연한 마틴 프뢰스트(Martin Fröst)는 클라리넷치고는 꽤 특이한 음색으로 무척 돋보였다. 일반적인 클라리넷의 맑고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다듬고 또 다듬어 진주 빛깔을 머금은 소리로, 어찌 들으면 오보에 소리와도 닮아서 단단하게 막힌 듯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고음에서 소토 보체(sotto voce)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여린 음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하는 신기한 능력은 프뢰스트의 심상치 않은 기량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미세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곧고 매끄럽고 빈틈 없는 소리는 몸서리칠 만큼 놀라웠다. 세련된 소리는 서울시향이 차츰 만들어가는 음색과도 잘 맞았으며, 몸매를 드러내는 정장 차림에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귀공자의 오라가 더욱 잘 어울렸다.
이날 연주된 곡들의 공통점은 20세기 초 작품이면서도 쇤베르크로 대표되는 무조 음악의 중력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 1871-1942)는 말러, 쇤베르크 등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벨에포크(belle époque)를 살았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으며, 쇤베르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지만 끝까지 조성음악을 포기하지는 않아서 그의 작품은 반음계적 화성과 화려한 관현악법 등 후기 낭만주의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인어공주 Die Seejungfrau>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같은 명랑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고 원작의 느낌에 좀 더 가까워 보였다. 널리 알려진 동화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와는 거리가 먼 잔인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특히 안데르센의 동화는 살인과 근친상간과 저주와 공개 처형 등 온갖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불행한 삶과 시대의 어두운 면이 투영된 결과이며, 또 어쩌면 쳄린스키가 사랑했던 여인 알마 쉰틀러를 구스타프 말러에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쳄린스키의 경우 원작과는 성 역할이 반대다.)
이 작품은 1905년에 초연되었는데도 아직도 개인에게 악보를 팔지 않는 모양이라 리뷰를 쓰기에 곤란한 점이 많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음반과 견주어 간략한 인상을 말하자면 악기 사이에 응집력이 꽤 훌륭했고 밸런스도 좋은 편이었다. 바다의 거대한 흐름도 잘 살렸다. 금관의 박력도 양호했으나 트롬본이 웬일인지 평소답지 않게 소극적이었던 점은 조금은 아쉬웠다. 이를테면 2악장에서 F-C-F-G 모티프로 트럼펫과 트롬본 등이 서로 다른 음가로 연주하는 부분에서, 트롬본의 무게중심이 부족한 상태에서 트럼펫 등이 상대적으로 너무 두드러진 탓에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휘자 제임스 저드는 KBS 교향악단을 자주 지휘해서 국내에 꽤 알려진 지휘자인데, 원래 실력이 좋은 지휘자이겠지만 국내 악단과 특히 잘 맞는 지휘자가 아닐까 싶다. 서울시향도 제임스 저드와 잘 맞는다는 사실을 이번 연주회로 알 수 있었으니 이쯤 되면 그가 지휘를 맡는 연주회는 큰 믿음을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