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2018년을 끝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뒤부터 누가 후임자가 될 것인지가 음악계에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대통령 선거에 빗대어 '차기 베권'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것이 많은 공감을 얻어 요즘에는 주요 언론에서도 '베권'과 '베통령'이라는 말을 쓰더군요. 그리고 이 '떡밥'은 언제나 댓글을 생선 낚듯 줄줄이 낚아서 '만선'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5월 1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차기 수장을 뽑는 단원 투표가 있었습니다. 영국과 인연이 많은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가 선출되었음을 트위터로 암시한 내부인이 있었고, 곧바로 영국 모 언론이 마치 확정인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오보였습니다. 12시간 토론을 하고도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지요. 단원들이 투표로 결정한 뒤에야 뽑힌 지휘자에게 의향을 물어보는 독특한 절차 때문에, 넬손스 본인이 그 자리를 거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암스테르담)와 더불어 세계 3대 특급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는,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으로 이어지며 만들어진 상징성 때문에 지휘자 경력의 정점이라 할 만합니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타계했을 때 각각 '왕이 죽었다' '황제가 죽었다' 같은 표현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한 일은 유명하지요. 그러니 단원 투표로 저런 소동이 일어날 만도 합니다.
이번 '베권 구도'는 '틸레만 대 야권 연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은 독일 레퍼토리에 강점을 보이며 '거장 지휘자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해석으로 유명한 지휘자이지요. 그러나 네오나치 관련설이 떠돌 만큼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파' 이미지가 뚜렷한 사람이라, 베를린필 안팎에서 '틸레만만 아니면 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하네요. 정황을 보면 '야권 연합'이 확실히 우세했던 듯하지만, 틸레만이 끌어올 막대한 후원금을 포기할 것이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2015년 6월 21일 2차 투표 결과, 유력 후보군에서 떨어져 있었던 키릴 페트렌코가 낙점되었습니다. '야권 연합'에서 가장 큰 지지를 모았던 안드리스 넬손스가 탈락한 뒤 대안으로 급부상한 후보였지요. 그런데 키릴 페트렌코는 주로 독일어권에서 활동한 사람이라,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였습니다.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와 혼동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연합뉴스 임화섭 기자는 구글 트렌드 검색으로 키릴 페트렌코보다 바실리 페트렌코가 인터넷상에서 더 유명한 이름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키릴 페트렌코가 독일어권 밖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사람이 내놓은 음반이 몇 장 안 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음반이 음악가의 유명세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사실이 이번 일로 새삼 드러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은 공연 실황 음원과 영상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세상이고, 또 저는 독일에서 이 사람이 지휘한 오페라를 직접 본 일도 있어서 키릴 페트렌코라는 이름이 익숙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반응이 신기해요.
키릴 페트렌코는 현재 독일 정상급 오페라 극장인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입니다. 베를린 코미셰오퍼 음악감독, 남 튀링엔 국립 오페라 극장(현 마이닝엔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 등을 지낸 바 있고, 1972년생으로 아직 젊은 나이에 지휘 경력이 놀랄 만큼 껑충껑충 뛰어오른 사람이지요. 1995년에 지휘자로 데뷔한 지 2년 만에 빈 폴크스 오퍼 상임지휘자(카펠마이스터) 자리를 거머쥔 이력도 대단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한 해에 300회 정도, 그러니까 사실상 거의 매일 공연을 하는 까닭에 '카펠마이스터' 지위가 만만치 않거든요.
그런데 키릴 페트렌코와 사실혼 관계로 알려진 소프라노 아냐 캄페가 틸레만이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공연 출연을 취소하는 등 틸레만이 키릴 페트렌코를 적대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소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틸레만은 베를린필 탈락 직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직제에 없던 '음악감독'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지요. 틸레만과 페트렌코 모두 올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 주요 오페라를 지휘할 예정이라, 이것이 클래식 음악계의 가십거리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