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James Judd
협연자 : Valentina Lisitsa
Kodaly, Dances of Galanta
Grieg, Piano Concerto in a, Op. 16
Rachmaninoff, Symphonic Dances, Op. 45
악기는 보통 온도와 습도 변화에 민감하며 옛날 악기일수록 더하다. 이번 연주회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다 미리 무대에 나와서 연습하는 관악기 연주자들이 평소보다 많아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코다이 <갈란타 춤곡>에서 호른이 일찌감치 큼지막한 실수를 하더니 플루트가 실수를 이어받고 다른 악기들도 영 제소리를 못 낸다. 지휘자의 해석은 나쁘지 않은 듯했고 뒤로 갈수록 차근차근 긴장감을 쌓아나가는 모습이 멋졌으나 실수가 너무 잦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 함께 헤매는 가운데 클라리넷 수석 연주자 혼자서 평소처럼 야무지게 연주해서 눈에 확 띄었으며 이 곡에서 가장 비중이 큰 악기가 클라리넷이라 더욱 돋보였다. 언젠가 밝힌 바 있듯이 글쓴이는 클라리넷 수석 채재일 씨 팬이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발렌티나 리시차는 늘씬한 몸매를 보아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힘과 테크닉을 자랑했다. 무시무시한 트릴과 글리산도를 듣고 있자니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이 이렇게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며, 글쓴이는 음악을 듣기보다는 테크닉을 듣고 있음을 여러 차례 깨닫곤 했다. 이것이야말로 리시차가 가진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까. 리시차가 들려준 '음악'은 눈부신 테크닉만한 깊이는 없고 그저 평범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그나마 테크닉에 가려버리곤 했다. 이렇게 음악이 아닌 '서커스'를 들려주어서야 듣는이가 받을 수 있는 감동이 얼마나 깊을지는 뻔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듣는 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테크닉이야말로 참된 고급 테크닉이 아닐까.
그러나 앙코르에서는 맘먹고 테크닉을 뽐내는 모습이 그것대로 좋았으며 '라 캄파넬라'를 아찔한 빠르기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관객이 좋다꾸나 손뼉을 쳐주니 빼지도 않고 커튼콜 한 번에 한 곡씩 네 곡이나 연주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 키신이냐!'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춤곡> 연주는 악기나 사람이나 이제 몸이 다 풀린 듯 다부졌다. 특히 1악장 중간에 나오는 그윽한 색소폰 선율과 그에 딸린 목관 앙상블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이 곡에서 은근히 멋지게 나오는 베이스클라리넷도 작품 곳곳에서 돋보였다. 3악장 마디 235 이후 또는 1악장 마디 154 이후부터 긴 호흡으로 긴장감을 쌓아가는 대목이 매우 좋았고 때때로 알맞게 터트려주는 타악기 소리도 멋졌다.
금관도 제법 잘했으나 2악장 처음을 비롯해 금관끼리 화음을 만들어내는 대목에서 데크레셴도-크레셴도가 깔끔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2악장 마디 19에서 독주 바이올린이 루바토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연주를 글쓴이는 싫어하는데, 이날 악장을 맡은 웨인 린(?)은 악보에 있는 음가 그대로 재빠르게 연주해서 썩 마음에 들었다. 다만, 음색이 좀 더 날카로웠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지휘자 제임스 저드는 국내 악단이 데려올 수 있는 객원 지휘자 가운데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날 <교향적 춤곡> 해석도 매우 훌륭했으며, 그 가운데 2악장에 해석이 흥미로운 곳이 많았다. 군데군데 루바토를 쓰면서도 느슨해지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 콘트라베이스가 저음을 단단하게 찍어주어 슬프면서도 퇴폐적인 '슬라브 왈츠' 느낌을 잘 살렸다. 프레이즈를 새로 시작하는 곳에서 템포를 크게 떨어트렸다가 아첼레란도를 쓰곤 했던 대목도 참신했다.
2악장 마디 119와 이어지는 대목에서 테누토와 헤어핀(hairpin; <>)을 겹쳐놓은 곳은 보통 리테누토를 써서 템포를 조였다 풀었다 한다. 그러나 제임스 저드는 갑자기 템포를 너무 떨어트린 탓에 이곳에서 템포가 바뀌는 듯 마는 듯했다. '처음 빠르기로 돌아가 조금 덜 빠르게 A tempo poco meno mosso'라는 지시가 있기는 하지만 갑자기 너무 느려지니 지루한 느낌이 들었으며, 마디 47에서 악보에 없는 리테누토를 맛깔스럽게 쓴 일과 어울리지 않아 갸우뚱했다. 아마도 프레이즈를 새로 시작할 때 템포를 떨어뜨린 다음 아첼레란도 쓰는 일에 일관성을 두려고 그러지 않았나 싶었으나 이곳에서만큼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마디 169에서 템포를 떨어뜨렸다가 마디 171에서 다시 조이라는 지시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아첼레란도를 썼는데, 조금 느슨한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법 그럴싸했다.
3악장 마디 162에는 이상한 지시가 붙어 있다. '템포 바꾸지 말고, 그러나 서두르듯이 L'istesso tempo, ma agitato'라니, 템포를 바꾸란 말인가 말란 말인가. 음반을 들어보면 이 대목에서 갑자기 빨라지기도 하고 지루하게 늘어지기도 해서 제임스 저드는 어떻게 할지 관심 있게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살짝 빨라지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이게 정답이 아닐까.
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