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8일 화요일

윤이상과 한국 전통 (볼프강 슈파러)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입니다.


아시아 출신 작곡가로서 서양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공연장의 여러 여건과 맞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되도록 명확하게 보여 주어야만 한다.

한편, 소리에 대한 인식과 음악적 사고가 서양과는 반대인 전통문화권 출신 작곡가가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질문은 제 나라의 문화적 전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음악 색깔과 내용을 살찌울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한 담론을 무시할 것인가이다.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심지어 아시아 작곡가 연맹(ACL) 같은 모임에서도 아시아 사람의 정체성을 음악에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서구적'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아시아적'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끝없이 제기되곤 했다. '아시아 음악'에 관한 주장은 아직도 여전히 논쟁거리이며, 적지 않은 작곡가가 그러한 어법을 되도록 피하곤 한다.

일본에서부터, 또한 다케미쓰 도루의 영향으로, 1960년대 중반 이후 작곡가들이 현대적이고 서구지향적이면서도 제 나라 전통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민족적이거나 아시아적인 작품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전통음악적 요소나 '민족적' 또는 '아시아적' 색채를 수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1958년생인 구본우는 가야금과 현악삼중주를 위한 '원근'(1998)에서 결과적으로 미니멀리즘적인 음향 패턴을 사용했다.

윤이상은 1960년대 독일에서 아시아 작곡가 최초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전통악기를 위한 곡을 쓰지 않고 서양악기만으로 작곡했다.¹⁾ 그런데도 그가 유럽에서 작곡한 곡들은 명백히 한국적이다. 윤이상 작곡 기법에서 다른 작곡가, 특히 아시아 작곡가의 영향을 찾을 수 있는지를 이 글에서 묻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또 한국 전통음악이 어떻게 윤이상 음악 양식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도 적절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 대신 한국 전통음악과 윤이상 작품과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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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타악기는 예외이며, 이를테면 '예악'(1966) 등의 관현악곡에서 나무 채의 일종인 박(拍)이 사용되었고, '나모'(1971)에서 좌고가 사용되었다.

한국 전통음악과 동아시아/한국 문화가 윤이상 작품에 끼친 영향은 다양한 수준에서 나타난다:

  1. 길게 이어지는 주요음(Hauptton). 붓글씨를 닮은 기보법 자체가 이미 동아시아 미학을 표현한 것이며, 서양 기보법으로 표현한 주요음은 양(陽)의 획(劃)과 맞아떨어진다.

  2. 장식음, 이웃음, 즉 음(陰), 또 상행과 하행, 멜리스마, 용 모양과 다른 꼬리 모양 등이 주요음, 즉 양(陽)과 더불어 형성되는 음악적 제스처. 윤이상이 마치 화수분에서 무한히 뽑아 쓰듯 했던 장식음은 한국 전통음악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윤이상의 기보법과 음향적 상상력에 따라 고유한 변화와 개성, 특징적 억양을 갖게 된다.

  3. 윤이상은 특정 악기의 개성을 재창조한다. 이때 그는 한국 전통 악기를 대신하는 서양 오케스트라 악기를 찾았다(대금-플루트, 피리-오보에, 해금-바이올린, 가야금-첼로 등).

  4. 윤이상은 화성과 선율을 만들 때 (특히 후기에 남긴 교향곡들에서) 한국의 온음으로 된 5음음계를 분명히 의식했다

  5. 윤이상 작품에서 한국적/동아시아적 연관성은 음양의 대비로 뚜렷이 나타난다. 윤이상 미학의 바탕은 그의 도교적 · 불교적 태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를테면 '정중동'이라는 도교적 원리와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적 원리가 그것이다.

  6. 윤이상은 때로 특정 음악 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예로는 가사(歌詞)나 무악(舞樂) 등 한국 고전 예술형식과 현악사중주, 협주곡, 교향곡 등 유럽 음악 장르가 두루 있다.

  7. 윤이상의 많은 작품에서 한국적 요소가 겉으로 드러나지만,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다. 한국적 요소는 한국적 제목, 한국적 주제, 표제, 작품에 드러나는 휴머니즘적 견해 등에서 찾을 수 있다.

  8. 윤이상의 삶은 한국 근대사와 밀접한 관계이며, 이것이 또한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윤이상의 많은 작품이 한국 및 한국 정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특히 윤이상이 서울의 감옥에서 쓴 두 곡은 그의 결백을 드러낸다.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1968)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1968)이 그것이다. 윤이상에 따르면, '율'(律)은 법률을 뜻하기도 하고 음률을 뜻하기도 한다. '영상'은 윤이상이 1963년 북한에서 보았던 '도교적인' 벽화(강서고분벽화 중 사신도 - 옮긴이 주)를 참고해 쓴 작품이다. (이때 북한에 갔던 일이 한국 정부로서는 윤이상을 법정에 세울 이유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가 기소 및 수감됨으로써 생긴 트라우마가 몇몇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었는데, 이를테면 자전적 작품인 첼로 협주곡(1975/76)과 솔로 칸타타 '밤이여 나뉘어라'가 있다.

한국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윤이상은 '광주여 영원히'(1981)를 썼으며, 이것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일에 대한 작곡가의 반응이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에서 윤이상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호소한다. 이 오라토리오는 남한의 시인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의 글을 가사로 하지만, 평양에서 초연되었고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연주가 금지되었다. 소프라노, 여성합창과 다섯 악기를 위한 '화염 속의 천사 - 에필로그'는 1991년 사회적 고통과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며 분신했던 남한의 젊은이들을 위한 레퀴엠이다. 윤이상이 '에필로그'를 자신을 위한 레퀴엠으로도 썼던 일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서양음악을 배우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실 동양에서 태어났음을 나는 되새겨야 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동양인의 자아를 서양음악 어법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인으로서 윤이상은 먼저 외국 문화를 꿰고 유럽에서 또는 독일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 이후 윤이상은 동서양 음악 양식을 '현대음악' 또는 '아방가르드'의 일부로 의미 있게 녹여낼 수 있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윤이상의 삶이 이룬 화합의 성과이다.


이 글은 다음 글에서 발췌한 내용을 포함한다: Walter-Wolfgang Sparrer: Isang Yun und koreanische Tradition, Ssi-ol. Almanach 1998/99, published by the Intl. Isang Yun Society, Berlin (1999).

글: 발터-볼프강 슈파러 (Walter-Wolfgang Sparrer)
옮김: 김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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