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트 반주한다는 얘기 듣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인터뷰:
런던에서 샌드위치 사먹으면서 아이폰 들여다 보다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도둑맞아 유명해졌던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 바이올린을 되찾고 경매로 팔아운 사연을 책으로 출판 http://slippedisc.com/…/gone-the-enigmatic-end-of-a-stolen…/
「윤이상과 한국 전통」 (볼프강 슈파러)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입니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글이 좀 빡빡합니다만…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입니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글이 좀 빡빡합니다만…
낚시성 기사 시대 비평의 운명
- '뉴요커'의 클래식 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지난 3월 13일 쓴 것이다. 미국 신문사 안에서 공연리뷰 기사의 위상에 대한 글이라 한국의 공연기자로서 흥미롭게 읽은 후 페북에 공유해 놓았다. 공연계를 거쳐 현재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홍보팀장인 최여정 씨가 글을 재밌게 읽었다며 번역한 것을 보내왔다. 내가 번역본을 좀더 매끄럽게 고쳤다. 원문과 비교해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번역이 아니라 내 윤문 탓이다.
- '뉴요커'의 클래식 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지난 3월 13일 쓴 것이다. 미국 신문사 안에서 공연리뷰 기사의 위상에 대한 글이라 한국의 공연기자로서 흥미롭게 읽은 후 페북에 공유해 놓았다. 공연계를 거쳐 현재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홍보팀장인 최여정 씨가 글을 재밌게 읽었다며 번역한 것을 보내왔다. 내가 번역본을 좀더 매끄럽게 고쳤다. 원문과 비교해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번역이 아니라 내 윤문 탓이다.
<기사 전문>
1992년, 뉴욕에 오면서 클래식음악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요 신문사마다 적어도 장르별로 한명 이상의 평론가를 두던 시절이었다. 나는 초연 공연과 관련 간담회 등에 참여하며 비평의 매듭들을 보곤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클래식 평론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미국의 신문사는 열 개 미만으로 줄었고 평론가의 위상도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오랜 동료들이 사라졌다. 지난해, 18년 동안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신문’에서 일하던 티모시 맨건은 2주 안에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극도로 재미없는 버전의 이야기 같았다.
아무래도 클래식 평론이 멸종될 위기에 빠졌다고 논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클래식이 문화의 주류에서 설 곳을 잃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지휘자 사라 콜드웰(여성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휘)이 <Time>지의 커버를 장식하던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평론이 자유로운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하우스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찾는다. 이것는 지방 문화경제에서 중요하다. 지난 시즌, 나는 댈러스에서 제이크 히기의 오페라 <위대한 스콧(Great Scott)> 초연이 매진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휴스턴에서는 바그너의 <발퀴레>가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아마도 이들 관객중 대부분은 ‘댈러스 모닝뉴스’와 ‘휴스턴 크로니클’의 애독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신문사 모두 더 이상 정규직으로 클래식 평론가를 고용하고 있지 않다.
평론의 마지막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한명씩 사라져가는 현재의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것은 비단 클래식음악만이 아니다. 무용, 연극, 미술, 책(출판), 심지어 영화와 대중음악 분야의 동료 평론가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 몇십년 동안 수많은 평론가들이 그들의 일을 잃었고 프리랜서 신세에 처해졌다. 잔인하고도 영리하게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저널리즘 업계의 생태계에서 존 올리버(TV쇼 진행자)는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가짜 트레일러를 만들어냈다. 트레일러를 보면 취재력 있는 기자 한 명이 인터넷 낚시성 기사 담당으로 발령받는다. 트레일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미국 조지아주의 유력지)은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 사실, 우리는 이미 9년 전에 영화평론가를 해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꼴을 못보고 있다." 이 멘트는 사실에 근거를 둔 뼈있는 농담이다. 2007년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은 예술 분야 평론가들을 해고해버렸다. 클래식평론가로 일했던 피에르 뤼흐는 그후 언론계를 떠나 지금은 앨러바마 심포니에서 일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신문에서 어떤 종류의 비평이든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작년 캐나다에서 불붙은 논쟁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몬트리올 가제트(캐나다 유력지)에서 수년간 평론가로 일해 왔고 최근 내셔널 포스트(캐나다 유력지)에 프리랜서로 기고하고 있는 아서 캡타이니스는 캐나다 오페라 컴퍼니가 제작한 로시니의 <마호메트 2세> 리뷰를 썼다. 캐나다 오페라 컴퍼니는 리뷰기사중 상당 부분의 수정을 요청했고 내셔널 퍼스트는 회사의 웹사이트에서 해당 기사를 아예 삭제했다. 그 소동 속에서 내셔널 포스트의 에디터는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연예술 리뷰가 정말 싫다. 그런 글들은 온라인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한다. 디지털 콘텐츠 가운데 최악의 기사는 공연예술에 관한 글이다.” 미국 전역의 신문 문화섹션에서 같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공연리뷰는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한다. 바늘 하나 옮길 정도의 영향력도 없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반박할 수 없을 지경이다. 왜 아무도 리뷰기사를 원하지 않을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단호한 일반화 아래 불확실한 가정이 숨어 있다. 첫째, 클릭수가 집계되는 디지털 데이터는 신문사 독자들에 대한 불확실한 그림을 제공한다. 종이신문 구독자들의 숫자는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데, 그들중 대부분이 장년층이고 공연예술 기사를 관심있게 보는 사람들이다. 한 동료가 나에게 이런 글을 썼다. “너의 평론을 읽고 있는 4천명의 사람들이 신문사의 인쇄기를 돌리게 하는 충성도 있는 구독자들일 거야.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인터넷기사 클릭수의 노예로 기록될 뿐이지. 이 모든게 광고 때문이야."
데이터가 자세한 수치라고 할지라도 그런 정보가 편집자의 선택을 제어할 수 있을까? 국제뉴스도 역시 문화뉴스와 마찬가지로 점점더 소수 독자들의 관심을 끌 뿐이다. 그러나 메이저 신문들은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뉴스를 쓴다. 야구와 축구의 기사도 상대적으로 클릭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스포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문화 분야에서 에디터는 온라인 트래픽(클릭)에 영향을 미치는 기사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당신이 이런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론가라면 리뷰기사를 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시의성이 있어야 하며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인기가 곧 가치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공연예술 평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제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지 못하는 클래식음악, 재즈, 무용 그리고 다른 예술활동에 여지를 줄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다. 단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만 살아남는 문화진화론자들의 세계에서 예술은 수퍼히어로영화 리뷰와 TV 가이드, 그리고 팝스타들에 대한 쪼가리 기사들만 남을 뿐이다. 소위 세계 1% 부자들의 탈세와 지적으로 아주 유사한 방법이다.
신문 문화면 개조의 움직임이 뉴욕타임즈를 포함한 주요 신문사들을 덮친 가운데 최근 대중들이 신문사의 전통적인 뉴스의 미덕을 재발견하는 것은 주목해야한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난무했던 가짜뉴스와 낚시뉴스에 대한 반작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전통적인 종이신문에 대한 구독열이 다시 불어닥쳤다. 이런 구독자들이 유행기사로 뒤덮인 문화면을 원할까? 아니면 신문이 스스로 가치있는 기사를 쓰길 기대할까?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에서 배운 한가지 교훈은 비록 미디어가 ‘바늘 하나 움직이지 못할지라도’ 구독자들을 어리석게 놔둬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문화 비평은 저널리즘의 하나다. 다소 이상하더라도 저널리즘이다. 타임스의 영화평론가 A.O.스코트는 최근 발간한 그의 책 <비평과 더나은 삶>에서 생동감있는 관점을 드러냈다. “문화 소비자들처럼 우리 평론가들은 수동적인 태도로 표면적이고 얕은 절충주의를 만들라는 부추김을 받는다. 하지만 비평의 역할은 만들어진 동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칭찬하기 위해, 모호함과 난해함을 논쟁하기 위해 말이다. 버질 톰슨은 비평을 ‘유료 홍보(광고)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라는 불멸의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비평은 에세이, 기사, 오피니언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리뷰는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의 기초이고, 비평이 가지는 권위의 원천이다. 리뷰의 영향력이란 얼마나 많은 클릭을 받았는지로 매겨지는 가치가 아니다. 신문사 편집국에서 특히 불만의 대상인 리뷰는 콘서트처럼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나는 경우다. 그 리뷰를 읽고 영화나 음식 비평을 읽고 영화를 골라보거나 레스토랑을 방문하듯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에서 리뷰는 구두의 가죽같은 존재다. 평론가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있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담기 때문이다. 신문사에서 정치 담당 기자에게 논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라거나 논쟁의 장에서 후보자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해서 글을 쓰라고 요청하지는 않는다. 비판하지 않는 비평이 이뤄지는 셈이다.
비평은 이상한 분야라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때는 사악할 지경이다. 천국의 콘서트홀에서 연주되는 바흐에 대해서도 꼬투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비판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다. 어떤 글은 불멸의 사랑을 받는다. 로저 에버트(유명 영화평론가)가 죽었을 때 나는 그의 리뷰들을 읽고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게 됐는지 떠올렸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처럼 감동적인 비평과 조우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비평가라는 직업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더라도 우리는 비평이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이고, 때로는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되뇌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외쳐야 한다. “침묵하지 말 것!”
대환영!!
세계적 베이스 연광철, 서울대 교수직 사임 “연주활동 전념”
- 연광철(52) 씨가 서울대 음대 교수직을 사직했다. 그동안 수 차례 사의를 표명했지만 학교의 만류로 유지해왔으나 지난해 강력 요구, 최근 사직서가 수리됐다.
- 음악계에서는 그가 지난 몇 년간 서울대 성악과의 파벌싸움에 불편함을 느껴온데다 해외 연주를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던 성악가들이 미래를 생각하고 국내 교수로 자리잡지만 이후엔 교수직과 커리어를 동시에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 측에서 다른 교수와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해외 연주 횟수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 연광철(52) 씨가 서울대 음대 교수직을 사직했다. 그동안 수 차례 사의를 표명했지만 학교의 만류로 유지해왔으나 지난해 강력 요구, 최근 사직서가 수리됐다.
- 음악계에서는 그가 지난 몇 년간 서울대 성악과의 파벌싸움에 불편함을 느껴온데다 해외 연주를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던 성악가들이 미래를 생각하고 국내 교수로 자리잡지만 이후엔 교수직과 커리어를 동시에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 측에서 다른 교수와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해외 연주 횟수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 같다.
국민대 음대 교수, 학생 골프채로 상습 폭행 및 업적평가 조작 (세계일보)
…아직 혐의가 입증된 건 아니고 경찰 수사중이라네요. 기사 내용에 따르면 대학측에서 김모 교수를 직위해제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양.
「피아니스트 조성진 인터뷰」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윤이상의 '라' - 음악적 해탈을 향하여」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도 실렸습니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발간하는 『Grand Wing』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