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 프로그램 해설입니다. 이런 건 미리 좀 공개해도 되지 싶네요. ^^
▶ 현대적 관현악법과 복고적 민족주의가 만났을 때
레스피기 《로마의 분수》가 초연된 1916년은 쇤베르크가 현악사중주 2번으로 무조음악 시대를 열어젖히고도 8년이 지난 때였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다다이즘 운동이 이해에 처음 나타났다. 《로마의 소나무》가 초연된 1924년은 쇤베르크가 초기 무조음악 시대를 지나 12음 기법을 본격적으로 실험하던 때였다. 《로마의 축제》가 초연된 1928년에는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에 데뷔했고, 컬러텔레비전이 나왔으며, 일본에서 히로히토가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보면 레스피기는 매우 보수적인 작곡가였다고 할 수 있다. 1932년에는 모더니즘 음악을 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레스피기 음악에서 현대적인 특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관현악법 덕분이다. 레스피기는 관현악법 대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을 연구하며 관현악법을 익혔고, 림스키-코르사코프한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관현악법으로 라벨과 맞수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레스피기는 《로마의 소나무》에서 녹음된 나이팅게일 소리를 음악에 쓰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레스피기가 최초라 할 수 있으며, 피에르 셰퍼의 이른바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 개념보다 24년 앞섰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 1945~)은 (그때 기준으로) '첨단 기술'에 기대는 일과 극단적인 리얼리즘을 좇는 일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파시스트들한테서 찾아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라 했다.
레스피기가 파시스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음악에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로마 시대를 기리는 태도 등은 파시즘이 힘을 얻던 그 무렵 상황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레스피기는 무솔리니 등과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있고, 무엇보다 레스피기가 파시스트 권력자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썼음은 틀림없다. (다만, 파쇼 정권은 나치 독일과 달리 아방가르드 음악을 탄압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스피기가 모더니즘 음악을 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무솔리니는 모더니스트를 편들었다.)
▶ 《로마의 축제》 (Feste Romane)
'로마 3부작' 가운데 가장 나중에 나온 작품으로 복조성(polytonality)과 폴리리듬(polyrhythm) 등 제법 현대적인 작곡 기법이 쓰였다.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 작품이 스트라빈스키 발레 음악에서 영향받았다고 보았다.
① 키르켄세스(Circenses)
키르켄세스는 라틴어로 키르켄시스(circensis)의 복수형이며,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을 뜻하는 키르쿠스(circus)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뜻한다. 영어 '서커스'(circus)가 이 말에서 비롯했다. 레스피기는 《로마의 축제》 제1곡 '키르켄세스'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위로 보이는 하늘이 사납다. 그러나 오늘은 시민의 휴일 '아베 네로'(Ave Nero)이다. 쇠문이 열리고 찬송가와 더불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군중은 흥분했다. 순교자들이 부르는 노래가 차분히 흐르고, 커지고, 치솟고, 소란과 함께 사라진다."
▲ 타원형 경기장이 키르쿠스 막시무스, 맨 위에 보이는 원형 경기장이 콜로세움. ©CCL by Carptrash. (Wikipedia)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키르쿠스였다. 타원형 경기장으로 전차 경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며, 영화 《벤허》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레스피기가 전차 경주 등이 아니라 기독교인 순교를 묘사한 까닭은 파시스트 권력자들이 반기독교 성향을 보였기 때문인 듯하다. 음악은 기독교인에게 닥친 고난보다 가학적인 스펙터클(Spectacle)을 더 생생하게 그린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결말'을 앞두고 나오는 음형이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가운데 '단두대로 행진'을 여는 화음에서 따온 것이라 보았다.
이 곡에는 '부키나'(Buccina)라는 로마 시대 관악기가 나온다. (현대 이탈리아어 발음은 '부치나'에 가깝지만, 이 글에서는 로마식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부키나는 레스피기가 악보에 써놓은 복잡한 음형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며, 따라서 실제로는 플뤼겔호른(Flügelhorn) 또는 삭스호른(saxhorn) 등 트럼펫 계통 악기로 연주한다. 〈키르켄세스〉 악장에는 소프라노 음역 부키나 세 대와 트럼펫 네 대가 따로 필요하다. 이번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는 아마도 객원 연주자가 플뤼겔호른을 연주하리라 예상되는데, 국내에 플뤼겔호른 전문 연주자가 있는지, 또는 플뤼겔호른을 구할 수 있는지 글쓴이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트럼펫 일곱 대를 쓰더라도 관객이 구분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② 주빌리(Il Giubileo; The Jubilee)
주빌리는 50년마다 돌아오는 특별한 해로 모세오경 가운데 레위기 25장을 근거로 한다.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
레스피기는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아오는 모습을 그렸으며, 〈키르켄세스〉 악장과 곧바로 이어지게끔 하여 마치 순교자를 추모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레스피기는 독실한 기독교인도 아니었고, 파시즘에 어울리는 정치적 신념을 드러낸 일도 없다. 1악장과 2악장 사이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까닭은 아마도 여러 가지 사정을 헤아려 타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음악이 절정에 이르면 C조 트럼펫 4대가 이끄는 금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순례자들이 기쁨에 차서 "로마! 로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12세기 그리스 정교회 찬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Christ ist erstanden) 선율을 따왔다.
▲ C조 트럼펫 찬가 음형. ©Public Domain
③ 10월제(L'Ottobrata)
포도 수확기인 10월에 열리는 축제이다. 오늘날 로마에서 열리는 와인 페스티벌 가운데 마리노 와인 페스티벌(Sagra dell'uva di Marino)이 유명한데, 이 행사는 《로마의 축제》가 초연되기 3년 앞선 1925년에 생겼다.
레스피기는 사냥 나팔이 울려 퍼지고 종소리가 딸랑거리며 만돌린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 호른이 연주하는 사냥 나팔 소리
▲ 종소리가 딸랑거리는 듯한 음형. 피콜로, 플루트, 피아노, 바이올린 등.
▲ 만돌린 세레나데
④ 주현절(La Befana; Epiphany)
예수 탄신을 축하하는 교회력 절기로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 뒤인 1월 6일이다. 레스피기는 이 곡에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그렸다. 살타렐로(Saltarello), 스토르넬로(Stornello) 등 다양한 춤곡 음형이 정신없이 쏟아진다.
▲ D조 클라리넷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음악이 시작된다. D조 클라리넷은 요즘은 사라진 악기이므로 보통 E♭조 클라리넷으로 조옮김 해 연주한다.
▲ 트럼펫이 엇박자 리듬을 연주하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 살타렐로(Saltarello) 음형. 비올라, 베이스클라리넷.
▲ 스토르넬로(Stornello) 음형. 바이올린.
▶ 《로마의 분수》 (Fontane di Roma)
이 작품은 실제로 있는 분수를 바탕으로 쓴 곡인 만큼 말로 늘어놓는 설명보다 사진이 낫다.
① 동틀 무렵 줄리아 계곡 분수 (La fontana di Valle Giulia all'Alba)
로마 국립현대미술관(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에 있는 쌍둥이 분수. 《로마의 분수》가 발표되기 5년 앞선 1911년에 지어졌다.
▲ 줄리아 계곡 분수. ©Robert Ruckman (http://music-i-love.com)
② 아침 트리톤 분수 (La fontana del Tritone al mattino)
바르베리니 광장(Piazza Barberini)에 있으며 17세기에 지어졌다. 포세이돈 아들인 트리톤 모습을 하고 있다.
▲ 트리톤 분수. ©rometour.org
③ 한낮 트레비 분수 (La fontana di Trevi al meriggio)
트레비(Rioni Trevi)에 있는 초대형 분수. 1629년에 착공해서 1762년에 완공됐다. 잠실 등 국내에도 이것을 흉내 내고 이름을 그대로 베낀 '트레비 분수'가 있다.
▲ 트레비 분수. ©CCL by Andrew Chen (Wikipedia)
④ 해질녘 메디치 빌라 분수 (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
핀초(Pincio) 언덕 가까이에 있는 메디치 빌라 앞뜰에 있다. 1589년에 설계됐다.
▲ 메디치 빌라 분수. ©CCL by Peter J.St B.Green (Wikipedia)
▶ 《로마의 소나무》 (Pini di Roma)
이 작품은 소나무 모습을 묘사했다기보다 로마 시대를 상상하며 쓴 곡이다. 따라서 소나무 사진을 늘어놓아 봐야 작품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① 보르게세 빌라 소나무 (I pini di Villa Borghese)
아이들이 뛰놀고 병사들이 행진하는 시끌벅적한 모습을 그렸다.
▲ 바순 및 호른 팡파르 (마디 10~13)
'짠~!' 하는 듯한 도입부에 이어 군대 팡파르 음형이 나온다. 바순이 주선율을 맡고 호른이 악센트를 넣는다. 문제는 바순 소리는 작고 호른 소리는 크다는 것이다. 두 악기가 날카로운 음형을 맞추는 일도 문제다. 호른이 주선율을 맡도록 고쳐 연주하는 안전한 방법이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작곡가가 뜻한 바와는 멀어진다. 이번 연주회에서 경기필이 이 대목을 어찌 연주할지 살피는 일이 감상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 마디 144~9 오보에 및 잉글리시호른
마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듯한 음형이 뒤따른다. 이런 선율 사이로 트럼펫이 요란한 소리를 더해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든다.
② 카타콤 가까이 있는 소나무 (Pini presso una catacomba)
카타콤은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에 앞서 교인들이 몰래 예배를 올리던 지하 예배당이자 무덤이다.
▲ 약음기 낀 첼로, 베이스, 호른. 첼로와 호른은 둘로 나눠 다른 선율을 연주한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어둡고 으스스하게 흐른다. 뒤이어 트럼펫이 연주하는 찬가풍 선율이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온다. 트럼펫 찬가가 끝나면 첼로, 베이스, 호른, 클라리넷, 베이스클라리넷이 마치 기도 소리처럼 웅성웅성한다. 바이올린과 오보에, 피아노 등이 뒤따르면서 차츰 '통성 기도'로 바뀐다.
▲ 무대 밖에서 연주하는 C조 트럼펫
▲ 호른이 연주하는 '기도' 음형과 트롬본이 연주하는 그레고리오 성가 음형
③ 자니콜로 언덕 소나무 (I pini del Gianicolo)
달밤에 자니콜로 언덕에서 나이팅게일이 지저귀는 모습을 그렸다. 녹음된 나이팅게일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진다.
▲ 클라리넷 선율. '꿈결처럼'(come ig sogno)이라는 나타냄말이 붙어 있다.
▲ 오보에가 선율을 이어받는다.
▲ 클라리넷이 선율이 다시 나오고 나이팅게일(Usignolo) 소리가 들린다. "Grf."는 축음기(Gramophone)를 뜻한다.
④ 아피아 길 소나무 (I pini della Via Appia)
로마 병사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다. 발걸음 소리와 나팔 소리가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한 짜임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2000》에서는 고래떼가 하늘을 나는 모습이 이 곡과 어우러진다. 글쓴이는 그보다 우주선 군단이 이동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불편한 진실 하나. 이 작품이 초연되기 두 해 앞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전위대 '검은셔츠단'(Squadristi)을 이끌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을 '로마 진군'(Marcia su Roma)이라 부른다. 아피아 길은 로마 시대 진군로였고 레스피기는 그 얘기를 했지만, 참말 그뿐일까.
▲ 클라리넷과 베이스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팡파르 음형. 음악이 흐르면서 호른, 트럼펫 등으로 바뀌어 나온다. 말러 교향곡 5번에서 나타나는 음색 원근법이다.
▲ 부키나(Buccina) 팡파르. 실제로는 플뤼겔호른으로 연주한다.
이 곡에는 《로마의 축제》에서 쓰인 로마 시대 관악기 '부키나'가 소프라노·테너·베이스 음역으로 각 2대씩 모두 6대가 쓰였으며, 실제로는 플뤼겔호른 또는 삭스호른으로 연주한다. 트럼펫 3대 등 일반적인 금관이 따로 편성된다.
음악이 절정을 앞두면 제1 바이올린이 B♭ 음에서 한 음씩 한 옥타브를 꾸준히 오른다.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비슷한 음형으로 화음을 이룬다. 트럼펫과 플뤼겔호른(부키나) 등이 팡파르 음형을 곁들인다. 이때 주선율은 틀림없이 제1 바이올린에 있지만, 트럼펫과 플뤼겔호른 등 금관 소리가 너무 커서 자칫 그 소리에 바이올린이 파묻힐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금관 소리를 줄이면 음악에 힘이 없어진다.
▲ 바이올린 상행음형(맨 아래 두 단), 부키나(바이올린 바로 위 두 단), 트럼펫과 트롬본(맨 위 세 단).
레스피기 '로마 3부작'에서는 금관악기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아피아 길 소나무〉 악장에서는 부키나 6대, 트럼펫 3대, 트롬본 3대, 베이스트롬본 1대, 호른 4대, 모두 17대가 총주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금관악기가 눈부시게 빛나는 소리를 뽐낼 때에도 현악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목이 있어서, 이때 균형을 맞추는 일이 지휘자에게 중요하다. 바로 위와 같은 대목이 좋은 예다. 음반을 들어 보면 금관악기가 '물량 공세'로 밀어붙이는 연주도 있고, 녹음 엔지니어가 현 소리를 일부러 키우지 않았나 의심스러운 연주도 있다.
위 악보를 보면 실제로 연주할 때 크게 두 가지 변수가 문제 된다.
첫째,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얼마나 힘을 내주느냐다. 연주자들이 음고(pitch)를 정확하게 맞추면 그 소리가 물리적으로 증폭되는데, 훌륭한 악단일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유럽 일류 악단과 국내 악단을 견주면 그 차이는 매우 크지만, 바로 위 예에서는 2분음표가 천천히 이어지는 단순한 음형이므로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수를 늘리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도 있다.
둘째, 지휘자가 금관악기 소리를 얼마나 줄이느냐다. 금관악기가 주선율을 맡는 '진짜 클라이맥스'가 따로 있으므로 금관 소리를 어느 정도는 아낄 필요도 있다. 문제는 얼마만큼이 적당하냐다. 연주회장 사정을 헤아리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고양 아람음악당처럼 그리 크지 않은 연주회장에서 금관악기 17대가 (위 예에서는 14대가) 한꺼번에 뿜빰거린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따라서 지휘자가 판단하기에 따라 악기 수가 좀 줄어들 수도 있겠다. 이번 경기필 연주회에서 지휘자 구자범은 이 대목을 어찌 다스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