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 일요일

[스포주의] 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 - 명화를 옹호하는 이유

예전에 다른 곳에 썼던 글을 이곳에 옮겨 둡니다.

이 글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명화라는 인물이 이른바 '고구마' 캐릭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런 분들 보시라고 써보는 반론입니다.

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최초 감상은 본진에 올린 일이 있는데요: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파시즘의 전복된 색깔

https://wagnerianwk.blogspot.com/2023/08/blog-post_11.html


링크한 글은 애초에 제가 페이스북에 올리려고 쓴 것이었고, 제 페친이라면 한나 아렌트에 관해 알 거라 생각해서 불필요한 내용을 생략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해볼게요.

그리고 링크한 글에서는 글 중간중간에 '스포일러 방지를 위한 자체검열'이라는 문구와 함께 핵심 문구들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그런 거 없습니다. 스포일러는 알아서 주의하세요.


1. 명화는 하는 일도 없이 말로만 떠든다?

간단한 비유를 해드릴게요. 게임에서 몬스터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파티가 100개쯤 되는데 힐러가 5명밖에 없습니다. 그 다섯명뿐인 힐러의 콧대와 몸값이 얼마나 높겠습니까? 심지어 반쪽짜리 힐러라도 별로 다르지 않겠죠. 콘유에서 명화가 바로 그 위치입니다. '하는 일 있는' 사람들이 식량 구하느라 부상의 위험을 달고 사는데, 실제로 부상을 입었을 때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전문 의료지식을 가진 사람은 주민 중에 명화 한 사람뿐이잖아요.

영화 중간에 민성이 영탁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장면이 나오죠. 제 생각에는 사실 민성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었습니다. 다름 아닌 명화의 존재 때문에, 뭘 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어쩌라고' 식으로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다는 말이죠. 만약 민성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을 때 유일한 위험 요인은 영탁이 (또는 주민들의 여론에 의해) 주민이 아닌 외부인을 배제한다는 원칙에 예외를 두고 다른 의료전문인을 주민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2. 외부인을 배제하는 것은 과연 현실적인가

주민회의 때 외부인을 그냥 받아들이자는 의견은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외부인을 배제한다는 선택지는 과연 현실적인가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영화에서 증명되기도 하지만 굳이 조금 더 따져 봅시다.

외부인 나가라는데 사람들이 곱게 나가주지 않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죠. 당연히 외부인과의 전투를 가정하고 군사학적인 분석을 해봐야 합니다.

주민들에게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습니다. 나중에 가서 소총인지 엽총인지, 아무튼 총 한 자루가 생기는 정도이죠. 정말로 효과적으로 적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 이를테면 미사일, 클레이모어, 화학무기, 하다 못해 수류탄 하나도 없습니다. 탁월한 작전을 세울 '제갈량'은커녕 기본적인 전투력 분석을 할 만한 사람도 주민들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전투에서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인 요인은 단 하나, '쪽수'입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쪽수는 어떤가요?

만약 제가 영화 속 아파트 주민이었다면, 외부인을 배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를 차분히 설명한 다음 대충 이런 대안을 제시하겠습니다.

- 노약자 위주로 외부인을 받아들인다

- 아이는 받아주지만 부모는 받아주지 않는다

- 생존에 도움이 되는 능력자(의사, 기술자 등)는 받아준다

- 식량을 가져오는 사람은 그 식량의 양과 질을 따져서 합당한 기간만큼만 '임시주민' 자격을 부여한다

여기서 마지막 아이디어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제외하고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면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사악한 생각이고, 비슷한 사악함을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즉 재난 상황에서 생산능력이 없는 이상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약탈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데, 이때 힘을 가진 집단은 '약탈'을 '착취'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착취'야말로 재난 상황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죠.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착취는 나쁜 것입니다. 명화가 '하는 일도 없이' 어쩌고 하는 생각도 결국 명화가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할 법한 생각 아닌가요.)


3. 멜서스와 타노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

잠깐 '어벤저스' 얘기를 해봅시다. 어벤저스 최강의 빌런인 '타노스'는 우주에 생명이 너무 많아서 그 가운데 절반을 죽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죠.

현실에서 타노스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사람이 18세기 말 영국에 있었습니다. '인구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토머스 로버트 멜서스입니다. 식량의 생산성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머지 않아 전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발생할 거라고요.

멜서스의 가설은 훗날 질소비료의 발명에 따른 생산성 혁신으로 기각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유럽의 지배계급은 '그렇다면 사람들이 좀 죽어 없어져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사상적 배경에는 멜서스의 인구론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이유도 있었죠.)

그리고 히틀러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죠. 이왕 그럴 거라면 좀 죽어도 될 것 같은 사람, 이를테면 유대인, 장애인,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등을 죽이고 '유전적으로 우수한'(?) 아리아 인종은 죽지 않게 해야겠다...

그 모든 끔찍한 일이 일어난 뒤, 독일인이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정권에 관해 연구한 끝에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그 사람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콘유 마지막에 명화가 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이를테면 나치 돌격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4. 영탁의 냉장고를 가지고 내려온 사람들

영화를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명화가 영탁을 고발하기 위해 냉장고를 가지고 왔을 때, 실제로 그 냉장고를 들고 온 사람들은 '잘못했습니다'를 200번 외쳤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영탁은 9층에 삽니다. 엘리베이터가 정상 작동할 리가 없지요. 9층에서 지상까지 사람의 힘으로 냉장고를 운반해야 합니다. 얼마나 무거웠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면 사람이 얼마나 악에 받쳐야 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악에 받쳤던 까닭은 민주주의가 아닌 다수결주의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는 폭력에 의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토론과 설득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일일이 다 챙기는 일은 재난상황에서 비효율적일 수 있지요. 민주주의는 원래 비효율적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비효율을 비판하면서 폭력이라는 효율을 선택하겠다는 생각을 쉬운 말로 '파시즘'이라고 합니다. 즉 파시즘은 혁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현실에 나타납니다. 영화에서는 주민이 아닌 외부인을 배제한다는 선택지를 상징하는것이 바둑알의 '하얀색'입니다. 검은색이 아니라 하얀색.


5. '검은색'을 선택할 용기

나치 시대 독일 사람들, 사실은 그냥 평범했던 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얀색'이 옳다는 믿음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콘유에서 명화는 '하얀색'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하얀색이 옳다고 말할 때 검은색이 옳지 않냐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즉 파시즘을 이겨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지요.

영화평론가 '듀나' 님은 명화라는 인물이 오해받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연출의 잘못이라고 평하셨죠.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다른 글에서 링크하기도 했던 글 다시 링크합니다:

http://www.djuna.kr/xe/review/14247542

참고로 듀나님의 영화 평점은 별 넷이 만점입니다. 콘유는 셋 반이고, '기생충'이나 '헤어질 결심' 같은 걸작들도 셋 반입니다. 본문에서 듀나 님은 엄태화 감독님이 '포스트 봉준호' '포스트 박찬욱'이라는 투로 극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술술 읽히는 글은 아니지만 이런 분석도 참고하세요:

http://www.djuna.kr/xe/board/14249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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