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25일 목요일

[펌]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한글)

글쓴이 허락을 받고 퍼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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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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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의 글, 노래,.. | 2005/07/15 (금)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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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유서(Das Heiligenstädter Testament)

어렸을 때 들은 베토벤의 이야기 중에 눈 먼 소녀와 월광소나타의 이야기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서툴게 피아노를 치는 가련한 소녀를 위해 월광을 쳐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만년에 귀가 들리지 않아, 합창교향곡 초연 때는 지휘를 마치자 터져나온 청중들의 박수와 함성을 못들어, 악장이 그를 청중 쪽으로 돌려세워 주자 그제서야 눈으로 보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는 전문적 자료를 통해서 확인하지 못했으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동적 이야기들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으리라.

비엔나에서 전차를 타고 하일리겐쉬타트를 찾아가며, 과연 "유서의 집"이란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큰 자산가도 아니고 자식도 없는 그가 유언을 미리 준비해서 사후의 재산분배에 대비했을 것 같지는 않으므로, 혹시 자살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되는데,...

베토벤이 자살을 생각했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만일 정말이었다면? 그렇다면, 왜? ...혹시, 실연으로?

옛날에 듣기를 그의 생김새가 매력적이질 않아서 사랑했던 여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그가 한 때 반년 정도 살았다는 하일리겐쉬타트의 작은 집 이층 두칸 방에 그의 데드 마스크와 피아노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쓴 친필 유서가 복사되어 있었다.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끝에 "하일리겐쉬타트에서, 1802년 10월 6일" 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기심을 뒤로 미뤄둘 수 없어, 그의 방 창가에 앉아 바로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읽고 나서 빙긋 웃을 수도 있을....

그러나 나는 첫줄에서부터 깜짝 놀라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정말 "유서"였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결연한 의지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편지의 내용(전문)을 옮겨 놓는다.

내 자신이 후에 다시 읽고 싶을 때 쉽게 읽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베토벤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꼭 한 번씩 읽어 주시기 바란다.

* *

내 형제 Carl과 (Johann) 베토벤에게.

오, 내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나를 정말 잘못 알고 있나니, 내가 고집불통에다가 사람을 싫어하고 적대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보이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다정한 호의로 가득한 마음을 가져 왔고, 아주 훌륭한 일들을 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네.

그러나, 생각해 보게. 지난 6년간 나는 난치병에 시달렸고, 의사들은 오히려 내 증세를 악화시키기만 했다네.

해가 갈수록 내 희망은 부서져갔고, 마침내는 (장기적 치료를 요하거나 아니면 아예 치료가 불가능한) "영구 질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되었네.

원래는 열정적이고 발랄한 성격을 갖고 태어나 심지어 주변과의 갈등마저도 좋게 받아들였던 나였지만, 결국은 은둔과 고립에 빠질 수 밖에 없었네.

아아. 내가 만일 병을 무시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 이 난청의 슬픔에 얼마나 잔혹하게 짓밟혔을 것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귀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지.

아아, 남들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기능해야만 할 이 감각기관, 한 때는 정말 말 그대로 완벽했던, 이 (음악) 분야에서조차 일찌기 누구도 가져 본 적이 없었을 만큼이나 완벽했던 이 감각기관의 장애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 오, 그렇게는 못한다네. 그러니 내가 전과 달리 그대들을 멀리 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용서해 주게.

나의 이 불행으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잘못 인식하게 된다는 것 때문에 두 배로 더 마음이 아프다네. 나는 이 사회에서 마음의 평화도 얻지 못하고, 세련된 대화도 못하고, 서로 믿는 관계도 맺지 못하네. 나는 오직 혼자서만 살아야 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사람들 틈으로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다네. 추방된 사람처럼 말이네.

사람들 앞에 서면, 그들이 내 상태를 알게 될까봐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야 한다네. 그것이 지난 6개월간 이곳에서 살며 경험한 것이라네.

의사는 날더러 가급적 소리 듣기를 삼가라고 제안하면서 나의 자연적인 청력저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 있지만, 나는 때때로 인간사회에 들어가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발동할 때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네.

그러나, 예컨대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먼 곳의 플루트 소리를 듣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들릴 때, 또는 어느 목동의 노래소리를 나 혼자만 못 들을 때, 내가 받는 수치심이 어떻겠는가. 그런 경험을 할 때면 나는 심한 절망으로 오직 죽고만 싶은 심경에 빠진다네.

죽지 못하는 것은 오직 '예술' 때문이라네. 내가 꼭 작곡하고싶은 작품들을 모두 다 끝내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간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이렇게 비참한 생존을 질질 끌고 있는 것이라네.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최고에서 최악으로 떨어져버린 이 예민한 육신을 보건대 참으로 비참한 생존이지.

인내, 이제는 그것을 내 인생의 안내자로 삼아야만 한다고 하는군. 나는 이제 그걸 가지고 있다네.

이제 나는 끝까지 참아 내겠다는 각오를 굳게 지킬 수 있기만 바라고 있네. 마침내 무정한 운명의 신이 감동하여 (생명의) 줄을 끊어줄 때까지 말이네.

어쩌면 좀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영 그렇게 안될지도 모르지. 나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비웠다네.

28세라는 어린 나이 때 벌써 철학가가 될 수 밖에 없었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예술가인 나에게는 정말 더욱 어려운 일이었지.

오, 절대권자이신 신이여, 내 마음 속을 속속들이 굽어보시는 분이시니, 내 마음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음을 아시리.

오, 내 형제들이여, 언젠가 이 글을 읽을 때, 그대들이 나를 잘못 알았었음을 기억하라. 불쌍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똑같이 불행했던 이 사람이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기울여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고귀한 존재로 일어섰음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라.

그대들, 카알과 요한이여, 내가 죽거든, 나 대신 쉬미트 교수에게 (그가 아직 살아 있으면) 내 병에 대해 설명서를 써 달라고 해서, 이 문서를 첨부해 놓도록 하게.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내가 서로 가능한 범위에서 화해를 할 수 있으리라.

동시에 나는 이 편지를 통해 그대들 둘을 내 작은 재산(그렇게 부를 것이 있으랴마는)의 상속자로 지명하노니, 공평하게 나누어 갖고 사이 좋게 살며 서로 돕거라. 나는 일찌기 오래 전에 그대들이 내게 상처 준 것을 용서했음을 알라.

특히 내 동생 카알에게는, 근년에 내게 보여준 애정에 대해 감사를 표하네. 나는 그대가 나보다 훨씬 더 나은 훌륭한 생을 살았으면 하네. 아이들에게 덕을 강조하도록 하게. 덕은 사람을 진실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네. 돈으로는 그렇게 못하지. 내 경험에서 하는 얘기라네. 나를 불행 속에서 붙잡아준 것이 바로 덕이었다네. 덕과 예술 두 가지 덕분에 나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있었네.

잘들 있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모든 친구들과, 특히 Lichnowsky 공, 쉬미트 교수에게 감사 드리네. L공의 악기들은 그대들 중 누가 좀 보존해 주면 좋겠네. 이 문제로 둘이 서로 다툴 일만 없다면. 그러나 후에 더 좋은 용도가 생기면 그 악기들을 팔도록 하게.

무덤 속에 있으면서도 그대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나.

이게 전부라네. 기쁘게 죽음을 만나러 가네.

만일 내가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갖기 전에 죽음이 오게 된다면, 그것은 이 모진 운명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빨리 오는 것으로서, 가능하다면 늦추고 싶은 것이 내 심경이라네.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감수해야만 하겠지. 계속되는 고통의 멍에를 벗어날 길은 달리 없었을 테니까.

오거라,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는 용기를 가지고 너를 만나리니.

잘들 있게. 내가 죽어도 나를 완전히 잊지는 말게. 기억될 자격은 있는 사람이라네. 생전에 가끔씩 그대들을 생각했고, 그대들을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했었으니 말일세. 행복하게들 지내시게.

-루드비히 반 베토벤

-하일리겐쉬타트에서, 1802년 10월 6일.

(추신에 해당하는 글이 추가되었다.)

-하일리겐쉬타트에서, 1802년 10월 10일.

이리하여 나는 그대들을 떠나네 -- 오히려 슬프게 -- 그래, 소중히 품어 왔던 희망을 - 어떤 정도로든, 어떤 속도로든, 치료가 되리라고 기대했었던 - 그 희망을 이제 완전히 버려야만 한다네.

가을날 낙엽이 떨어져 흩어지듯이, 그처럼, 그 희망이 사라져버렸다네.

나는 이곳을 떠나네 - 이곳에 오던 때와 거의 똑같은 상태로 -- 그 높은 용기조차도 - 맑은 여름날이면 내게 영감을 가져다주곤 했던 - 사라져버렸네 -- 오, 프로비던스여 -- 꼭 하루만 온전한 기쁨을 허락하라 -- 오 언제 -- 오 언제 -- 오 하느님 -- 당신이 만든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어울리며 다시 한번 그것을 느낄 수는 없을까요 -- 안된다구요? -- 아니라구요? -- 오, 너무나 힘듭니다.

-내 동생 카알과 (요한) 베토벤이 내 사후에 읽고 집행하도록.-

* *

이 편지는 베토벤 사후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원본은 함부르크의 국립 대학도서관에 있다고 한다.

이보다 1년 앞서서 두세명의 친구들에게 난청의 고통을 호소하고 극비에 붙여주기를 부탁했다고 하며, 이 편지에 나오는 쉬미트 박사의 제안으로 따뜻한 하일리겐쉬타트로 치료의 희망을 안고 왔었다고 한다.

유서의 수신인을 항상 "Carl und Beethoven"으로 (Johann의 이름을 공란으로) 표시한 것에 무슨 듯이 있을지 생각해 본다. 요한의 이름을 잊었거나 쓰기가 싫었거나, 아니면 아직 이름이 없는 출생 전후의 아기이거나... 더 두고 알아보아야겠다. 설마 요한만이 동생이고 카알은 베토벤이 아닌 다른 성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

<<유서의 집 관련 사진 --> 윈터벨의 블로그 여행기 중 "비엔나 - 3. 베토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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