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17일 (화)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P.D.Q. 바흐/ P. 시켈레, <음악 감상의 새로운 지평>
J. 티엔슈, ‘오보(또는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샘플러/테이프를 위한 <베토벤의 무덤>’
홍성지, 7개의 악기를 위한 <베토벤 프리즈>
브레트 딘, <전원 교향곡>
M. 카헬, <루드비히 반> (영상물 상연)
뤼디거 본(Rüdiger Bohn) 지휘
베토벤은 흔히 고전주의 양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경전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음악학자 달하우스(Karl Dahlhaus)는 특히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의 역사는 "단계적인 진화의 과정이 아니라" "각각의 주요 작품들이 베토벤이라는 단 하나의 중심축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질 뿐"이라 했다. 이 주장은 물론 20세기 이후의 음악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色다른 베토벤>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베토벤을 단지 하나의 소재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발칙하게' 다루었다.
시켈레(Peter Schickele), 또는 그가 내세운 P.D.Q. 바흐라는 가공의 인물의 작품 <음악 감상의 새로운 지평 New Horizons in Music Appreciation>은 베토벤 교향곡 제5번 C단조에 TV 개그 프로에나 어울릴 법한 해설을 덧붙인, 음악이라기보다는 행위예술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그맨 강성범이 나와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연주회 실황 영상이 나오는 동안 스포츠 중계를 하듯 코믹한 해설을 덧붙였다. 만약 시켈레의 의도가 베토벤의 음악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대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웃는 것이었다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이런 식의 '스포츠 중계 음악 해설'이 TV 쇼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음악을 학구적으로 대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클래식 음악이 어렵고 따분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당의정 효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학술적인 내용마저도 쇼 프로그램의 외형을 가지는 것이 요즘의 세태가 아니던가!
티엔슈(Jukka Tiensuu)의 <베토벤의 무덤 Tombeau de Beethoven>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깝다는 점에서 시켈레의 작품과 통했다. 베토벤이라는 소재를 다소 코믹하게 다루었다는 점도 비슷했다. 피아노 주자는 무대에 불이 들어오기 전에 입장하여 세 번의 발구름 소리를 냈고, 이어서 스피커를 통해 베토벤의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첼로 주자가 연습 시간에 지각한 오케스트라 단원, 또는 수업에 늦은 학생처럼 헐레벌떡 첼로를 들고 입장했다. 그리고 오보에 주자는 공주병 환자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그리고 스피커와 세 명의 연주자가 교대로 또는 엉성한 앙상블을 이루어 베토벤의 여러 작품을 단편적으로 연주했다. 연주자들은 음악으로 만담을 나누는 듯했으며, 첼로 주자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의 피날레 부분을 뽐내며 연주하는 동안 나머지 연주자가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질하며 웃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과는 달리 티엔슈의 <베토벤의 무덤>은 추모하는 방식이 너무 가볍다. 거인 베토벤이 아닌 인간 베토벤을 추모하려는 뜻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베토벤을 소비하는 방식이라고?
홍성지의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는 클림트의 그림에서 제목과 아이디어를 가져온 작품이다.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고, 홍성지는 클림트의 그림을 소재로 작곡을 했다. 그래서 이 곡의 내적 구조는 베토벤을 닮았지만, 외적 음향은 클림트를 닮았다. 하프의 투명한 울림이 현악기 및 목관악기의 길게 여운을 주는 소리와 어우러져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으며, 클림트의 그림 가운데 '적대적인 힘' 부분에 대응하는 악곡의 중간 부분에서도 베이스 클라리넷의 저음이 텍스처의 무게중심을 차지하여 전체 악곡에 일관된 '식물성 음향'을 유지했다. 클림트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세기말적 퇴폐성을 담았다면, 홍성지는 클림트의 그림에 마치 요정의 마을에 온 듯한 신비감을 담았다. 예술가의 시선에 따라 결과는 이렇게 달라지는 것인가 보다.
브레트 딘(Brett Dean)의 <전원 교향곡 Pastoral Symphony>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과는 달리 파괴되어가는 현대의 전원을 표현하고 있다. 프로그램에 나타난 작곡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찬란한 새 소리, 그것이 직면한 위협, 손실, 모두가 사라진 뒤에 우리에게 남겨진 영혼 없는 소음을 다룬 것이다." 몸살을 앓는 자연을 새가 겪는 위협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와 닮았다. 샘플링된 새 소리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가" 애처로운 울음이 되고,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울음은 점점 절규로 변한다. 성북동 비둘기는 그나마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는 여유라도 가지지만, 브레트 딘의 새들은 총포처럼 쏟아지는 각종 타악기 소리에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사람들은 문명에 익숙해져 새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단지 일그러진 재즈 리듬에 흥이 날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인간의 목숨마저도 위협하는 법. 타악기 소리가 다른 악기들을 압도해 나가다가 곡이 끝날 무렵에는 새 소리 대신 심판의 날에 나타날 법한 양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마침내 거대한 폭발이 곡을 마무리한다. 이런 식의 경종이 회색빛 빌딩과 회색빛 하늘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서울 시민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2006년의 서울에는 1968년의 서울이나 2000년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을 새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공원에서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닭둘기'들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무거운 메시지를 떨쳐버리고 나면 타악기와 약음기를 낀 트럼펫 등을 앞세운 자극적인 음색이 독특한 매력을 준다.
카헬(Mauricio Kagel)의 <루드비히 반 Ludwig van>은 현대에 살아서 나타난 베토벤의 시선을 담은 1970년 작 영화다. 배경에 깔린 음악들은 엽기적인 편곡으로 유명한 유리 케인(Uri Caine) 앙상블의 연주 같았는데, 잔뜩 뒤틀린 베토벤의 음악이 냉소적인 영상과 어울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신발 속의 돌과 같은" 불편함은 베토벤의 집을 복원한 설치 작품에서는 보고 있기 끔찍한 것이 되었고(이때부터 관객들은 하나둘씩 연주회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절정은 욕조에 가득한 베토벤의 석고 두상을 하나씩 꺼내는 장면이었다. 물에 부풀어 나병 환자처럼 문드러진 석고상을 하나씩 꺼내는 장면이 끔찍하도록 지겹게 이어지는 동안 흘러나온 음악은 역설적이게도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이었다.
연주자의 몸에 여러 가지 기록장치를 달아 실험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기록장치 대신에 조악하고 우스꽝스러운 모형을 사용하여 예술에 과학의 메스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음악학도인 나로서는 이에 대해 반론을 펴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개똥철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음악을 이루는 여러 부분이 나누어 생각될 수 있으며 다른 부분과 비교될 수도 있다. 시켈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저 유명한 모티프를 작품 자체로부터 "떼어내어" 기업이 마케팅에 사용하는 오디오-로고와 "비교"했으며, 전체 교향곡이 그 모티프로부터 나왔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시켈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분석"한 것이다. 음악학자 김연은 "음악분석은 하나의 완성된 음악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보다 단순한 부분들을 나누어보고 그 관계들을 연구하는 일"이라 했다. 또 그로브 음악 사전에 따르면, "음악분석의 대상은 그것이 악보인지, 또는 악보가 지시하는 소리의 심상인지, 작곡가가 떠올렸던 소리의 심상인지, 해석을 바탕으로 한 연주인지, 또는 청취자가 연주를 들으면서 가지는 일시적 경험인지 결정되어야 한다. 이 모든 범주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은 분석될 수 있으며, 분석된 결과를 음악 자체와 혼동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음악을 더욱 다채롭게 이해하고 즐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오프사이드'가 무엇인지 몰라도 축구 경기를 즐겁게 볼 수는 있지만, 각종 축구 용어와 규칙, 경기에 참가한 선수와 감독의 면면을 이해하는 사람은 축구의 묘미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섯 명의 작곡가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고, 나도 여기에 글로써 내 목소리를 보탰다. 다른 관점은 대상의 색다른 면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을 보기 위해 기존의 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열린 자세다. 당신은 색다른 경험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2006년 10월 28일 씀.
2006년 10월 30일 고침.
김원철. 2006.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