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5일 화요일

2007.07.13. 아르보 패르트 '라멘타테' / 브루크너 교향곡 4번 - 루비모프 / 보레이코 / 서울시향

2007년 7월 13일(금)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Andrey Boreyko
협연자 : Alexeï Lubimov, pf.

Arvo Pärt: Lamentate (37')
Bruckner: Symphony No.4 in E flat Major, “Romantic”(70')



서양음악사에서 1945년 이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움에 대한 요구가 강하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전횡 등은 서양 중심의 인류 문명 자체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반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이전 시대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 진보적인 작곡가들의 모토가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총열주의(Total Serialism)'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음악은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과의 괴리가 심했던 측면도 있으며, 음악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의 말처럼 "특허청으로 달려가는" 음악은 그 자체가 단절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한 대립적 경향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며, 그 가운데 미니멀리즘과 '새로운 단순성(Neue Einfachheit)'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단순성' 그룹의 작곡가들은 조성이 해체된 음악에 반대하며 과감히 조성을 다시 사용하여 청중에게 다가가고자 하였으며, 무조 음악의 모토인 '불협화음의 해방'과 대비되는 '협화음의 해방'이라는 말로 역사적 의의를 찾기도 한다.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는 '새로운 단순성' 그룹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면서도 전통 지향적인 음악 양식과 미학관 등을 근거로 림(Wolfgang Rihm)과 함께 이 그룹의 대표적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단순성(Neue Einfachheit)'은 영어 표현인 "New Simplicity"와 혼동할 여지가 있는데 후자는 바로 미니멀리즘 음악을 가리키며, 조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독일어 표현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패르트의 음악을 후기 미니멀리즘 양식의 일종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최소한으로 절제된 음 소재를 변형, 반복하는 특징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패르트 자신의 용어로는 "종소리 양식(Tintinnabuli-Stil)"이라고도 하며, 단순한 화음과 중세 음악의 선법 구조, 종교적 내면성과 '침묵'의 적극적 활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라멘타테 Lamentate>는 2002년 작품으로 패르트 음악의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현대음악치고는 상당히 듣기 쉽다. 또한 이 작품은 러시아 정교의 기도문이 음악의 흐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진노의 날'이나 '사후심판' 부분에서는 금관 악기와 타악기가 난무하여 너무 오래 이어지는 종교적 고요함이 관객의 수면을 유발하지 않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쉬워도 현대음악이라 낯설었던지 관객의 반응은 산만한 편이었다. 패르트의 작품에 담긴 것과 같은 '여백의 미'는 원래 한국이 원조라 하겠으나 삶의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는 빛바랜 감이 있는 듯싶다.

패르트의 '종소리'에는 교회의 풍부한 울림이 제격이겠지만 예술의 전당의 음향은 이날따라 건조하게 느껴졌다. 서울시향의 연주가 다소 뻣뻣하게 들렸던 것은 합주력 부족도 원인이겠으나 연주회장의 음향 특성이 작품과 맞지 않았던 탓이 컸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알렉세이 루비모프(Alexeï Lubimov)의 피아노 연주는 오케스트라의 안개에 묻히지 않고 투명하면서도 몽환적인 울림으로 무대를 감싸며 악곡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랜드 피아노의 악기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루비모프의 섬세한 터치가 마법의 힘을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르보 패르트와 안톤 브루크너를 관통하는 이날 연주회의 키워드는 '종교'다. 그러나 <라멘타테>가 우주 속에 홀로 던져진 패르트의 처절한 고독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면, 교향곡 4번의 브루크너는 번뇌 끝에 신의 광휘를 찾아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

브루크너의 신앙의 언어는 파이프 오르간이다. 그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그가 작곡한 관현악곡에도 오르간의 특성이 묻어나온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연주자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오르간의 긴 울림을 표현하느라 관악기 주자들은 하늘 대신 무대가 노래지고, 현악기 주자들은 거대한 울림 속에서 끊임없이 물결치는 파도를 만들어내느라 팔이 빠진다. 그 와중에서도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을 재현하느라 엄정한 악기 간 밸런스를 유지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휘자 안드레이 보레이코(Andrey Boreyko)는 그래서인지 독창적인 표현에 매달리기보다는 무난한 해석으로 '오르간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 듯하다. 결과는 매우 훌륭했다. 앙상블이 종종 흐트러지는 가운데서도 두터운 화성에 의한 '오르간 사운드'만큼은 내가 이제껏 들어본 국내악단의 브루크너 중 단연 최고였다. 이날따라 금관 악기의 활약이 유난히 돋보였으며, 특히 호른과 트롬본이 몇몇 티 나는 실수를 했음에도 전체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현악기 또한 국내 악단에 기대할 수 있는 브루크너로는 최상급의 연주였으며, 금관의 강력한 소리에 지지 않고 당당하게 어우러지곤 했다. 그러나 외국 유수 악단과 비교하자면 특히 현이 좀 더 분발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전체적으로 현의 음량이 금관에 약간은 밀리는 듯했으며, 가끔은 금관 소리에 묻혀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를테면 2악장 마디 107에서 제1 바이올린의 스타카토 음형이 호른과 트롬본 소리에 가려서 주선율의 역할을 잃어버린 것이 옥에 티였다.

4악장 마디 358에서는 바이올린이 활 끝으로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늘고 날렵한 데타셰(détaché) 주법을 의도한 것으로 판단되며 실제로 대부분 음반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레가토 위주로 부드럽게 넘어가 버렸으며, 보잉을 미처 눈여겨보지는 못했으나 활 끝으로 연주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 결과 마치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듯 산만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은 전혀 살지 않았고 단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선율이 되었다.

이날 연주는 꽤 훌륭했지만 연주회장 주변에 소문난 마니아들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다. 정명훈 없는 서울시향은 별 볼 일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그들에게 생긴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러나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는 생각보다 수준이 높으며 또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다. 직접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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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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