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무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심학규가 눈을 뜨면, 그를 치유한 연꽃이 다시 기적을 일으켜 궁으로 몰려온 수많은 병자, 장님, 절름발이와 헐벗은 자를 치유한다. 무대 뒷벽이 열리고 ‘하늘의 어머니’ 옥진에게서 후광이 빛난다.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고, 심학규가 옥진을 향해 천천히 올라간다. 함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합창단과 함께 노래한다.
은혜로 구원되었네. 은혜로 해방되었네.
보아라 구원된 이를. 보아라 해방된 이를.
은혜로. 보아라.
Segen erlöst. Segen befreit.
Sehen erlöst. Sehen befreit.
Segen. Sehen.
지난 11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윤이상 오페라 ’심청’이 공연되었다. ’심청’은 윤이상 오페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수에게나 오케스트라에나 기술적 어려움이 있는 까닭에 실연으로 접하기 쉽지 않다. 대구에서 있었던 공연이 매우 기쁘고 반가웠던 건 그래서다. 그리고 내가 본 첫날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이 앞서 말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특히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대목에서 오케스트라가 쏟아낸 무시무시한 ’빛’이 놀라웠다. 서양 조성음악 작곡가들은 흔히 찬란하게 빛나는 으뜸화음으로 빛을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윤이상의 ’빛’은 으뜸화음과는 다른 음향복합체(클러스터)였고, 찬란하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와 닿아 있는 듯했다.
이때 나는 윤이상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자 윤이상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기도 했던 작품 ‘에필로그’를 떠올렸다. ’화염 속의 천사’(1994)와 쌍을 이루는 ’에필로그’에 관해 윤이상은 “우주적 음향세계”(kosmische Klangwelt)라는 표현을 쓴 일이 있다. 내가 경험한 오페라 ’심청’에서 천상의 소리는 언제나 ’우주적 음향세계’와 닿아 있었고, 특히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었다.
“’에필로그’는 완전히 다른 음향세계로, 감정으로 가득했던 앞선 관현악곡과 달리 완전히 무기질적입니다. 죽은 이의 넋이 다른 세계에 간다면 아마도 ’에필로그’에서와 같은 우주적 음향세계의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의 압도적인 음향효과를 살려낸 것은 확 넓어진 오케스트라 피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최근에 음향 개선 공사를 했다는데, 결과적으로 오케스트라 피트 확장이 그 핵심이었던 것 같다.
외국 유명 오페라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사람과 악기를 욱여넣으면 그럭저럭 ‘풀 편성’ 오케스트라가 들어가는 것과 달리, 국내 오페라 극장에서는 바그너 같은 대편성 곡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오케스트라 피트가 좁다. 그러나 이제 대구오페라하우스는 국내에서는 예외적으로 넓은 오케스트라 피트를 갖춘 극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지난달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되었다는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보지 못한 것에 뒤늦게 배 아파하는 중이다.)
난곡을 연주한 디오오케스트라(Daegu International Opera Orchestra)와 최승한 지휘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살인적인 고음을 잘 소화해 냈던 심청 역 소프라노 김정아를 비롯한 출연진 또한 훌륭했다. 연출가 정갑균의 “한 편의 수묵화처럼” 표현된 무대 또한 아름다웠다. 다만, 심학규 개인의 구원이 사회 전체의 구원으로 확산되는 것을 연출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듯해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랄트 쿤츠가 대본을 쓴 오페라 ’심청’에서 심청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아 지상에 파견된 선녀다. 심청의 임무는 눈멀고 정체된 곳에 젊은 기운을 채우는 것,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하랄트 쿤츠는 이것을 다른 말로 의식을 일깨우고(Bewußtseinswandel herbeiführt) 사회환경을 변화시키는(Änderung der Verhältnisse) 것이라고도 했다.
구원과 해방을 말한다는 점에서 오페라 ‘심청’은 괴테 희곡 ’파우스트’ 또는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과 통한다. ’하늘의 어머니’(옥진)와 ‘영광의 성모’(Mater Gloriosa)가 비슷하고, ’심청’의 마지막 가사와 ’파르지팔’의 마지막 가사 “구세주께 구원을!”(Erlösung dem Erlöser!) 또한 닮았으며, 심학규가 지식으로 눈이 먼(blind durch Wissen) 사실과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깨달음을 얻는(Durch Mitleid wissend, der reine Tor) 것이 일맥상통한다.
공연이 끝나고 통영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오페라 ’심청’의 로마자 제목은 ’Sim Tjong’이다. 그리고 윤이상의 딸 윤정의 로마자 이름 표기는 ’Yun Djong’이다. 어쩌면 윤이상은 ’심청’을 작곡하는 동안 딸을 생각하고, 자신을 심학규에 투영하며 구원을 바라지 않았을까. “Segen erlöst. Segen befreit.”